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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고라 토론방 원문보기 글쓴이: 색즉시공공즉시색
독재정권과의 유착으로 형성된 재벌, 민주주의의 지체
'재벌'이라는 단어는 과거 일본의 '자이바쯔'에서 나온 말로, 자이바쯔의 기원은 단어 그대로 정경유착을 통해 이권을 얻은 상인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재벌들은 서구의 기업처럼 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정권과의 긴밀한 유착을 통해 대기업으로 발전했다.
이승만정부 시기에 재벌들의 대다수가 정경유착을 통해 적산불하를 통해 기업을 세우고, 미국 원조금을 분배받아 공장을 증축하거나 새로운 공장을 지어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수입무역에 종사했다. 이 모두가 엄청나 특혜로 독재정권에 협력한 대가였다. 적산이란 일본 패망 후 일본인들이 팽개치고 간 재산을 말한다. 미군정청은 적산의 총가치가 약 3,053억 원(현재 시세로 하면 약 1,600억 달러로 추정)이며, 약 2,700개 기업에 달했다.
이승만정부는 적산기업을 불하하면서 불하받은 사람은 처음 총 비용의 10%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이후 15년 안에 지불하도록 했으니 당시 600%에 달하는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적산 기업을 불하받기 위해 줄을 섰고, 주로 자유당 관련자들, 정권 실세, 미군정청과 연줄 있는 기업인, 불하 비용 및 뇌물을 마련할 수 있을만한 금전적 여유가 있는 적산 기업의 전 고용인들이 주를 이뤘다.
이때 적산기업을 불하받아 지금의 대기업으로 키운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특이한 사항은 과거 일제 강점기 때 유명한 기업가들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해방전 이름을 날린 기업가로 경성방직의 김연수, 화신백화점의 박홍식, 태창그룹의 백낙승, 광산 재벌인 이종만, 금광왕 최창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백낙승은 이승만의 귀국 초기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대고 엄청난 특권을 얻어, 태창은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한국최초의 재벌 기업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기업인들은 이승만과 정치적 경쟁자들과 연줄이 닿아 있는 경우가 많아 이들을 억제할 필요가 있어 이승만은 젊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기업인들에게 특혜를 주어 재계를 주름잡도록 했다.
적산불하를 통해 기업을 세운 젊은 기업인들 중 이승만과 자유당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인물들은 미국 원조금의 분배라는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당시 한국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금 총액은 30억 달러 이상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전체 나라들이 받은 원조금 총액보다 많았다. 친정부적 기업인들에게 장기 저리로 빌려주어 수입 원자재의 국내 가공을 목적으로 수입 대채 소비재산업을 육성하고자 했고, 1955년을 전후하여 그 돈으로 제분, 제당, 방직, 봉제, 시멘트, 섬유, 유리 등의 공장을 건설하여 수입이 억제된 상황에서 해당 분야의 독과점체제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해방 후 극심한 물자부족 상황에서 필수품 수입은 계속 늘어났고, 정부로부터 독점 수입권을 얻게 된 기업들은 큰 돈을 벌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한국 통화가 과대 평가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리한 환율로 수입업체들은 추가적인 이윤도 얻을 수 있었다. 재벌로 성장한 기업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정부의 인가를 얻어 수입 무역에 종사하면서 급속한 자본 축적을 해나갔다.
이승만은 기업인들에게 특혜를 베풀어주는 대신 정치자금을 노골적으로 요구하여, 당시 많은 기업인들이 자유당 운영비의 30% 이상을 부담했고 자유당에 참여하면서 이승만을 지지했다. 정치자금은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경찰 수뇌부와 어용 깡패들의 호주머니에도 들어가 독재의 지속 및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쓰여졌다.
이승만의 독재 행각은 대표적인 것만 해도, 1949년 안두희를 교사해 김구를 암살한 사건( 안두희는 이후 풀려나 대위로 전역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대전, 부산, 대구 등의 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 3천여 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 비슷한 시기에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는 이유로 전국 각지에서 최소 20만여 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 1952년 간선제 대통령 선거에 이길 자신이 없자 버스를 타고 국회에 가는 야당의원들을 공산당 프락치라는 이름으로 구속하고 경찰, 민족자결단, '백골단' '땃벌떼" 등의 깡패집단을 동원하여 국회를 포위한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킨 사건, 1954년 헌법의 삼선금지 조항으로 영구 집권의 길이 막히자 사사오입의 논리를 적용시켜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킨 사건, 1959년 당시 대통령 유력 후보였던 죽산 조봉암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하고 곧바로 사형시킨 사건, 1960년 3.15 부정선거 등이다.
당시 기업인들과 이승만 독재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사례로 1952년 '중석불 사건'이 있다. 정부여당이 1952년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을 재선시키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자 중석(텅스텐)을 팔아 획득한 달러를 친정부기업인들에게 불하하여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하게 한 뒤, 이를 농민에게 최대 열 배에 달하는 이윤으로 비싸게 팔아 농민에게 심각한 경제 피해를 입혔다. 취득한 부정이득의 총액이 무려 200억 환이 넘었다. 이를 야당이 국회에서 추궁하자 이 사건과 무관한 농림부 장관만 해임되고, 일을 꾸민 백두진 재무장관은 이승만 재선 후 총리로 임명되었다.
이승만 정부 시기에 정권과 유착한 대가로 많은 재벌 기업들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기업이 이병철의 삼성이다. 과거 이병철의 아버지는 이승만이 미국가기 전 서로 교류했고, 이병철 역시 1946년 이승만이 처음으로 대구를 방문했을 때 30여 명 환영단의 일원으로 왜관까지 마중나가 만났고, 이병철의 자서전에는 이승만이야말로 존경할 만한 인물로 나라를 이끌 유일한 인물이라고 회상한다. 이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이병철의 사업은 그야말로 승승장구를 거듭하여 적산불하, 미국의 원조금 분배, 수입무역 등에서 다른 기업인들보다 훨씬 큰 특혜를 받았다.
이병철은 1957년 정부가 은행을 민간에 매각할 때 4대 시중은행 중 흥업( 한일은행 전신), 상업, 조흥은행 3개 은행을 장악하면서, 전체 은행 주식의 거의 절반을 소유하게 되어 은행들의 관리하에 있던 부실 기업들 중 시장성이 양호한 기업들을 차례로 인수하면서 1959년대 후반에는 계열사를 열여섯 곳이나 거느린 재벌로 성장하면서 일거에 재계 정상에 올라, 답례로 이승만에게 막대한 정치 자금을 제공했다. 1960년 4.19혁명이 터지자 성난 민중은 '부정축재자'의 맨 앞에 이병철이름을 거론하며 그를 처단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독재정권과의 유착으로 부정한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린 기업인들에 대한 단죄 요구는 1961년 5.16 쿠데타 이후에 많은 기업인들을 투옥했으나 당시 일본에 머물던 이병철은 "모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6월 26일 귀국하여 박정희에게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를 감옥에 가두면 어떻게 하느냐"며 기업인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박정희는 기업인을 활용하는 쪽이 더 유익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기업인들의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발표를 하게 한 후 기업인들에게 경제 재건에 협력하도록 명령하여 탄생한 것이 경제재건촉진회이며 이후 한국경제인협회로 명칭을 바꿨다가 다시 전국경제인협회로 명칭이 바뀌며 초대 회장은 이병철이 맡았고 모든 기업인들은 부정축재자에서 경제개발의 주역으로 모습을 바뀌고 군사정권의 열렬한 협조자가 되었다.
군사정부는 국민들의 부정축재자 처리에 대한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부정축재처리법'을 만들어 조사해보니 부정축재 총액은 726억 환에 달했으나, 실제 기업인들이 부정축재의 대가로 내놓는 돈은 39억 9,400만 환에 불과했고, 1963년 재벌들은 정부와 협력하여 설탕, 밀가루, 시멘트의 가격을 올려 정부에 내놓은 돈의 세 배 이상을 벌어 이윤의 대부분을 군사정부의 선거자금으로 활용하여 박정희 시대 정경유착의 서막을 연 것이다.
박정희시대 재벌들은 다음의 네가지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했다.
첫째, 낮은 금리의 은행 대출로, 서너 배나 높은 사채 이자율과 높은 물가상승률 하에서 낮은 금리의 은행 대출은 노다지를 의미했다. 시중 은행의 일반 대출은 거의 대부분 재벌들의 몫이었고, 중소기업과 서민은 급전이 필요한 경우 대부분 사채에 의존했다.
둘째, 외자도입의 인.허가권을 재벌에 몰아주어, 당시 국제 금리는 국내 금라의 1/3~1/2수준이었기에 거액의 외국자본을 도입한 재벌들은 단기간에 엄청난 부를 쌓았다.
셋째, 수출촉진과 중화학 공업화의 지원책의 일환으로 정부는 재벌 기업에 세금을 감면하거나 적은 세금을 납부하도록 했기에 재벌들은 막대한 부를 쌓았다.
넷째, 정부는 자본효율 제거 및 과열경쟁에 따른 집단도산 방지의 명목으로 투자인가를 제한했기에 재벌들은 독점적 가격 설정을 통해 초과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다.
재벌이 박정희 정부와 협력하여 큰 이득만 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삼성의'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밀수를 지휘했다고 밝힌 이맹희 회고록에 삼성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비료 공장을 지으려 일본 미쓰이와 계약을 맺었으나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기로 하고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주고자 했다. 이병철은 그 돈을 박정희와 둘이 나누기로 했는데, 현찰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아 밀수를 하면 가치를 부풀릴 수 있다고 생각하여 힘든 공작기계, 건설용 기계와 함께 돈이 되는 사카린 원료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오기로 했다. 부산 세관은 밀수를 적발했지만 검찰에 고발하지 않고 단지 2천여만 원의 벌과금 추징만 했는데, 삼성이 사카린 원료를 밀수했다고 한 신문이 특종 보도를 내보내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어 결국 이병철은 비료 공장을 국가에 헌납하고 56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사상계>의 사장이던 장준하는 대구에서 열린 '재벌기업 삼성밀수 규탄대회'에서 "박정희야말로 밀수 왕초"라고 했다가 대통령 명예훼손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맹희에 따르면 처음 밀수를 제안한 것도 박정희였고 밀수 진행 상황도 뻔히 알고 있는 상태인데 정부에서 일이 터지자 모른 체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병철은 "우리가 설탕 공장을 하고 있는데 우리 회사의 판매량에 결정적 타격을 줄 사카린 재료를 우리가 왜 밀수했겠는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유신 전에는 청와대, 중앙정보부, 공화당 등 여러 통로를 통해 정치자금을 모집하다가, 유신 후에는 직접 재벌들로부터 정치자금을 거뒀고, 뒤를 이어 전두환, 노태우 역시 재벌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 집권당을 통해 정치인들과 선거 후보자들에게 선거 자금으로 배분했고 박정희 정부 시기와 유사한 방식으로 다양한 혜택을 재벌들에게 제공하여 1990년을 기준으로 30대 재벌들이 가져다 쓴 정책금융자금은 25조 원으로 전체 금융대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당시 정부의 재벌 특혜의 구체적인 예로 1987년 한진그룹이 대항선주라는 해운사를 인수할 때 당시 대항선주의 은행 빚이 7,938억 원 있지만 정부는 한진그룹이 대항선주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전체 빚의 53%인 4,207억 원을 탕감해 주고 나머지 3,731억 원의 빚도 이자없이 20년간 원금만 분할상환할 수 있도록 했다. 박세길은 <한국경제의 뿌리와 열매>에서 한진그룹이 대항선주 인수로 인해 얻은 부당이익을 2조 4,600억 원으호 추산하고 있다.
1996년 1월 검찰 발표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은 1989년~1988년 3월까지 재벌들로부터 총 9,500억 원 정도를 받았고, 이중 2,159억 원이 전두환이 직접 받은 정치자금이다. 삼성과 현대그룹이 각각 220억 원을 주었고, 동아그룹이 180억 원, 대우그룹이 150억 원 순이다.
1995년 12월 검찰 발표에 따르면 노태우는 재임 중 재벌들로부터 받은 약 2,840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것으로 다른 기업보다 유리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선처하여 달라는 취지로 전달된 것이다. 불법 정치자금을 준 어떤 재벌 총수도 집행유예만을 선고받았을 뿐 실형을 살지는 않았다.
정부가 발주하는 대규모 공사는 지명경쟁입찰의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정치 실세와의 연줄과 뇌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이승만 정부 때부터 하나의 관례였다. 당시 '자유당 5인조'라 불린 대동산업, 극동건설, 현대건설, 삼부토건, 조흥토건 등은 정부 발주 공사 전부를 독차지하면서 업자끼리의 단합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얻었다.
당시 정치자금을 잘 냐지 않은 재벌은 미운 털이 박혀 해체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1980년대 초 21개 계열사를 둔 재계 서열 7위인 국제그룹이 하루아침에 해체된 사건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무리한 기업 확장과 해외공사 부실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자금을 충분히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수인 양정모는 새세대육영회와 새마음심장재단이 2천 5백억 원을 걷는 동안 한 푼도 내지 않았고, 청와대 비서실의 전화를 받고 새마을 성금 10억 원을 3개월짜리 어음으로 냈다고 한다. 결국 1995년 국제그룹은 정치자금을 잘 낸 여러 회사들이 우량 계열사들을 나누어 가졌다.
이후 김영삼 정부는 재벌의 정치자금을 더이상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지만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연루된 '한보게이트', 김대중 정부 시기 대통령의 차남 김흥업의 불법자금 수수,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삼성그룹이 정치권에 385억 4천만 원을 전달한 것 등 한국에서 정치와 경제의 불법적인 유착관계는 여전히 끊이질 않고 있다.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는 이승만 정부시기 산업부 장관직을 제안받았지만 썩어 빠진 곳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박정희 정부 시기에 정치자금을 한 푼도 내지 않자, 박정휘가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곳 없다'면서 전면적인 세무조사를 실시했고, 과학기술처에서 유한양행의 약품성분 조사까지 했지만 어떤 잘못도 발견하지 못했다.
한국의 재벌은 정경유착으로 성장했기에 기업 경쟁력이 떨어져 여전히 정부의 지원이 없으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2012년 3월 말 기준 공식적인 1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 총액이 183조 원에 달하며 이중 현금 자산이 52조 1,461억 원이라고 한다. 정부의 지원 및 묵인 하에 비정규직 확대, 하청업체 착취, 법인세 인하 등으로 현금으로만 수십 조 원을 은행에 쌓아두고도 역량 부족으로 마땅한 투자처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겨우 찾은 것이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기존 중소업체들을 몰아내거나, 골목상권 침해를 통해 자영업자들의 문을 닫게 하는 정도이다.
반면 재벌이 아닌 중소기업이 입고 있는 피해는 너무나 심각하다. 납품단가 몰아치기 등의 하청업체 착취뿐만 아니라, 금융이 소수 재벌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에,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얻어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거나 낮은 이자율로 현재의 자금 사정을 개선할 수 없다. 재벌들이 올려 놓은 부동산가격 역시 신규 창업자의 사업 장소를 찾기 어렵게 하며 중소기업이 사업을 확장하고자 해도 추가 용지 구입을 어렵게 한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중소기업에 적합한 영역까지 진출함으로써 중소기업이 자생력을 갖고 성장하는 것을 억제하고 있다.
고용시장에서도 구조적으로 높은 임금을 주지 못하는 중소기업의 우수인력조차 높은 임금이라는 당근으로 거리낌없이 빼내가고 있다.
과거 미국 경제학자들은 1950년 경의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세대들이 취업하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산업계가 일자리를 제공하기 불가능 할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현실은 늘어난 인구보다 두 배의 일자리와 신규 일자리 창출 속도도 1950년대에 비해 약 일곱 배에 달했다. 피터 드러커의 <이노베이션과 기업가정신>에 따르면 경제학자들의 이런 착오는 과거 성장분야에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이고 실제 미국의 새로운 일자리는 과거의 대규모 조직체가 아닌 소규모 조직체로 옮겨 갔으며 과거 일자리 창출분야는 취업감소 역할을 했다.
한국도 현재 재벌들의 신규채용 규모는 정체되거나 감소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와는 달리 소규모 조직체 즉 중소기업의 성장은 지체되고 있는 상황이다. 재벌 기업들이 금융, 부동산, 우수인력 등을 독점하면서 중소기업은 설 자리를 잃고 있으며, 돈벌이가 되는 영역이라면 닥치는 대로 진입하여 중소기업들을 몰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벌은 독재정권과의 유착을 통해 탄생되고 성장했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 재벌은 독재정권을 경제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것을 건접적으로 지체시켰다.
둘째, 재벌은 정경유착으로 키워졌기에 기업 경쟁력이 떨어져 정부의 지원이 없으면 외국 경쟁업체와 제대로 맞설 수 없다. 현재의 한국은 민주정권이 들어서 있지만 정경유착의 고리는 여전히 끊어지지 않고 있다. 과거와 같이 정치적 목적이 아닌 순전히 경제 살리기만을 위하여 재벌을 돕는다 하여도 그 효과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재벌의 독과점만을 도와주어 국민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뿐이다.
[출처] 독재정권과의 유착으로 형성된 재벌, 민주주의의 지체|작성자 날개님의 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