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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묵상글 ( 주님 봉헌 축일. - 우리의 봉헌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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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02 02:54
- 우리의 봉헌은?
주님 봉헌에는 삼중의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 성부께서 주님을 세상에 봉헌하신 것.
우리를 위해 마리아와 요셉이 주님을 성부께 봉헌한 것.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봉헌하신 것.
그렇습니다.
오늘의 전례는 주님 성탄 40일 되는 날에 주님의 부모가
율법 규정에 따라 주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지만
이 봉헌을 앞서는 봉헌이 성부께서 주님을 세상에 봉헌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우리는 성탄이라고 하고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 봉헌은 또한 ‘위로부터 아래로’의 겸손의 봉헌이고,
신성을 포기하고 인성을 취하는 가난의 봉헌이기도 합니다.
필리비서의 그리스도 찬가가 이 의미를 잘 전해줍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런 성부의 주님 봉헌을 보면서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프란치스코처럼 주님의 겸손과 가난에 무한 감동하고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것이고,
클라라처럼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며 겸손과 가난으로 치장하는 겁니다.
성부의 주님 봉헌은 이제 주님의 십자가 위 봉헌으로 완성됩니다.
완성되었다는 것은 불완전했던 것이 완전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강생과 육화로 시작된 주님의 봉헌과 사랑이 끝을 냈다는 뜻이며,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요한복음이 한 말과 같은 뜻입니다.
사실 강생과 육화의 봉헌에 주님의 십자가 위 봉헌은 이미 들어 있었는데
주님께서 강생에서 시작된 사랑을 중단하지 않고 죽기까지 이루신 겁니다
이런 주님의 십자가 위 자기 봉헌을 보면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봉헌하는 겁니다.
마리아처럼 봉헌하는 것이고,
프란치스코처럼 주님의 수난을 닮는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가 주님을 성전에서 봉헌하는데
이 봉헌은 단순히 자기 아들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음을 넘어
아들의 어머니로서 아들의 십자가상 고통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봉헌 때 시므온이 예언한 바이고 마리아가 들은 겁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에 동참(Compassion)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참은 마리아뿐 아니라 성인이라면 예외가 없으며,
프란치스코는 이런 성인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는 죽기 전에 그리스도의 이 수난을
똑같이 경험하고 싶어 기도를 바쳤고 그 결과가 오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선 기도부터 바칠 것입니다.
기도에서 힘을 얻었다면 고통도 바칠 것입니다.
물론 사랑으로 기도와 고통을 봉헌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족하나마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봉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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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2.02 05:32
2000년 초반,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광고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람들은 성공에 집착했습니다. 저 역시 이 책을 읽으며 세속적인 성공은 아니더라도 나의 변화가 필요함을 깨달았고, 특별히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엄격하게 시간 관리를 했습니다.
엄격한 시간 관리 안에서 커다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생활이 경직되는 것입니다. 틀에 갇혀 인생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마음의 여유와 즐거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큰 틀을 짜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 방학 중 하루 일과표를 만들어 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하루를 산 적이 있습니까? 분명히 또 당연히 그렇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실제로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큰 틀을 짜고 저만의 루틴을 만들어 가며 삽니다. 굳이 몇 시간 책을 읽고, 1시간 운동하고, 기도 시간 2시간…. 이런 식으로 배분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세상은 틀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 주님의 뜻을 잃어버리면 목표 없이 살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간직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봉헌을 바라보면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의 탄생 전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듣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은 아기, 파혼해야 마땅할 것 같지만 꿈에서 들은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 일, 예수님의 탄생 후 동방박사의 방문, 헤로데의 학살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한 일 등…. 믿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큰 틀에서 일치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 예언자와 한나 예언자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들 역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큰 틀에서 벗어나, 세상의 틀에서만 바라봤다면 아기 예수님을 알아볼 수도 그래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틀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틀에만 매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의 사랑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철저히 하느님의 뜻이라는 틀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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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결실은 없다(발타자르 그라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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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4-5)
바로 이날, 죽기를 결의하고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노인과 밤낮으로 단식하며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과부가 구세주를 뵈었습니다.
바로 이날을 기념하여, 원래는 성모 취결례축일로 지내오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에 “주님봉헌축일”로 개정하여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날을 1997년(1월 6일)에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축성생활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 교회 축성생활의 해’를 지내고 있는 축성생활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남장협 부설기관인 ‘축성생활 신학회’는 2015년 “봉헌 생활의 해”를 지낸 후 10년이 되는 시점에서 다시금 축성생활의 의미를 상기하고, 수도생활의 쇄신과 수도자의 정체성 확립과 수도 성소 확산을 위해 ‘한국교회 축성생활의 해’를 지낼 것을 건의했고, 이를 남장협과 여장연은 주교회의에 공식 요청했으며, 주교회의는 작년(2024년) 3월 춘계 정기총회에서 「교회헌장」 ‘인류의 빛’ 반포 60주년인 올해 11월 21일부터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 ‘완전한 사랑’ 반포 60주년인 2025년 10월 28일까지 1년여 간 ‘한국 교회 축성생활의 해’를 지내도록 승인했습니다.
“봉헌생활”이란 <교회법> 573조 제1항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
이는 여섯 가지 의미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라는 표현은, 곧 봉헌생활이 성령의 감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인 <봉헌생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봉헌생활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교회에 주신 은혜이다.”(제1항)
<둘째>,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곧 봉헌생활은 복음적 권고인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위의 문헌 <봉헌생활>에서는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된 삶”(제22항)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자기의 집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건설을,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 구원의 삶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셋째>,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라는 표현은, 곧 봉헌생활은 사랑의 완성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전력을 쏟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6세 반포한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인 <완전한 사랑>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복음적 권고의 실천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이신 스승의 가르침과 모범에서 그 기원을 이끌어 온다.”(제1항)
결국, 봉헌생활은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내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의 완성을 이루었듯이, 봉헌의 삶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사랑의 삶임을 말해줍니다.
<넷째>,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라는 표현으로, 봉헌생활의 축성은 세례에 의한 축성에 깊이 근거하며, 이 축성을 더 완전히 표현하는 특별한 축성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인 <복음의 증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특수한 축성으로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고,
세례의 축성으로 이루어진 근본적 봉헌을 더욱 완전히 실현시키고 있다.”(제4항)
<다섯째>,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라는 표현으로, 봉헌생활은 인간의 궁극적인 생활을 예표 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제44항)과 <봉헌생활>(제26항)에서는 봉헌은 “미래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더 잘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봉헌생활은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고, 천상적 영광을 예고해줍니다.
<여섯째>,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모든 것보다 우선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일시적 충동에 따라 사는 임시적인 삶이 아니라, 공적인 선서로 평생토록 지속되는 고정된 생활 형식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봉헌생활>에서는 “가없는 헌신”(104항)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봉헌축일”과 “축성생활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의 삶이 친정한 참 제물로 바쳐지는 삶이 되고, 주님의 축성을 충만하게 채워내는 삶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주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과부의 마음속 말을 들으시듯,
미처 말이 되지 않는 제 마음 헤아려 들어 주소서.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면전에서 기도하게 하소서. 밤낮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에 감싸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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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와 성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당시 모세의 율법은“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봉헌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쓰임 받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삶이 봉헌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봉헌되었듯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축성된 우리도 매 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더 가치 있는 보물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축성 받을 때, 마귀의 모든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우리를 위해 모두를 내어주신 그분처럼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초는 자신을 녹여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내어놓는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더 큰 사랑을 통하여 세상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메온 이라는 사람의 시선을 봅시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였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으며,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으며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끝까지 기다렸습니다!” 끝까지 말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주님인가요? 아니면 나 자신인가요? 은총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시메온은 성령께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고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성령의 이끄심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며 자발적으로 걸어가야 하는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걸어가야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성전으로 나와야 하고, 성령의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
구세주를 알아본 후 시메온은 자신을 ‘당신 종’이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두는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내 삶의 자리를 사랑을 실천하는 자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가난한 예수님을 환대한 시메온처럼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연민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항상 예수님을 주시하고 그분을 찬미하면서 이웃을 직접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죽어도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백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깊이 알아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도 바로 구원입니다.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권력과 부가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걸맞은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축성된 사람이고,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봉헌은 우리의 봉헌을 재촉하고 있으며 그 봉헌은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온 시메온은 성령과 함께 기다림의 삶을 살아왔고 그 안에서 위로와 구원이 이루어졌으니, 지금 내 삶의 자리가 바로 천상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천상을 갈망하는 만큼‘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일 수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구세주가 찾아오는 자리이며, 그 자리를 가꾸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이 순간을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 온 마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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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며, 동시에 교회가 축성 생활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된 순간을 묵상하며,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드리는 의미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저는 봉헌의 순간을 기억합니다.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을 때입니다. 서품 예식 중에 ‘모든 성인 호칭 기도’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 교구장님을 비롯한 서품식에 참석한 모든 분이 무릎을 꿇고 새 사제들이 주님이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사제가 될 수 있기를 청하면 모든 성인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합니다. 서품 대상자들은 바닥에 엎드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기도합니다. 그렇게 엎드려 있는 동안 신학교에서 있었던 시간이 떠오릅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던 분, 은사 신부님, 함께 사제 성소의 꿈을 키웠던 동료, 갈등과 번민의 시간이 떠오릅니다. 모든 성인 호칭 기도가 끝나면 엎드렸던 서품 대상자들은 일어나서 주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합니다. 이는 단순히 유대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헌신의 표현입니다. 봉헌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갈망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위해 살고, 무언가를 위해 헌신하며, 더 큰 가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존재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자신의 책 ‘월든(Walden)’에서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해 숲에서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삶에서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라고 말하며, 헌신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충만함을 찾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러한 단순함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무엇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습니까? 저는 보스턴에 있는 월든 호수를 몇 번 다녀왔습니다. 미국의 위대함은 경제와 문화에 있는 것 같지만, 그 뿌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같은 사상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전은 단순한 물리적 건물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과 한나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며, 평생 기다려온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깊은 만남과 이웃과의 관계를 성화하는 공간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성전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교회일 수도 있지만, 가정과 직장, 우리의 일상 속 관계가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나-너 관계" 이론은 성전을 관계의 공간으로 확장해 줍니다. 우리가 이웃과 진정으로 만나고 사랑할 때, 그곳이 곧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군대에서 군종 신부님은 전방 철책선을 찾아와서 병사를 위해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때는 철책선이 제단이 됩니다. 찬 바람 부는 초소가 성전이 됩니다. 저도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했던 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께 예배드렸던 광야, 그 광야가 제단이고, 바위가 제대였습니다.
오늘은 축성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수도자들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며, 세상에 사랑과 희망의 빛을 비추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축성 생활은 수도자들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자기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 헌신하며 축성 생활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는 사랑의 헌신을 통해, 직장인은 정직과 성실로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습니다. 작은 일상에서 하느님을 기억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축성 생활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작은 길(Little Way)"을 통해 일상의 작은 일들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일상의 작은 일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축성 생활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는 초를 축성합니다. 촛불은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며, 소멸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빛과 온기를 전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모습입니다. 2024년 추운 겨울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촛불을 넘어 응원봉을 들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우리의 작은 빛도 누군가에게는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이 세상에 빛과 희망을 전할 수 있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맞아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우리의 삶을 누구에게 봉헌하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성전으로 부르시며, 우리를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추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사랑과 희망을 실천하며, 우리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는 축성된 삶을 살아갑시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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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가 소유한 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라 우리는 생각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성실함과 근면함이 만들어낸 열매들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하느님의 허락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과 성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봉헌합니다. 두 분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특별한 봉헌 예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과 성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하느님의 법에 따라 예수님을 봉헌 하십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전부인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였는데 성모님께 들려온 말은 가시 같은 말이었습니다. ‘영혼이 칼에 찔리는 듯한….’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겸손히 받아들이십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것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가슴에 새기십니다.
우리가 봉헌함으로써 받는 은총은 기쁨과 기적의 은총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의 성모님처럼 아픔과 좌절의 은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총은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지름길이 되어줍니다.
즐거울 때 하느님을 찾기보다 슬프고 괴로울 때 하느님을 찾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고통 또한 하느님을 만나는 하나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셈법입니다. 그러나 봉헌의 셈법은 다릅니다. 봉헌은 바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바라며 하느님과 협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언제든 주십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시려고 우리에게 기쁨도 주시고 고통도 이용하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즉 모든 것을 봉헌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품에 안길 것입니다.
⭐바람이 빠진다는 뜻은….
자동차 타이어에 바람이 빠졌습니다.
얼마 전 작은 고장으로 정비소에 들어갔었는데
그때 분명 타이어도 확인했습니다.
다시 정비소를 들렀습니다.
펑크를 확인하며 다시 바람을 채웠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또 바람이 빠져 있습니다.
분명 찾기 힘든 작은 구멍이 난 것 같습니다.
분명 미세한 구멍이 난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타이어 같을지 모릅니다.
갑자기 ‘펑’하고 터지는 마음도 있지만
미세한 구멍 때문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람이 빠져나가는 그런 마음도 있습니다.
‘펑’하고 터지는 마음도 조심해야 하지만 미세한 구멍도 조심해야 합니다. 운전할 때마다 바람을 채우고 출발할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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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키엣 대주교님.
빛을 지켜주는 사람
성모님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실 때, 성모님 당신은 아기 예수님에 대한 어떠한 권한도 없음을 고백하십니다. 하느님이 아기 예수님을 당신에게 맡기셨기에 자신의 소명에 따라 그를 보살폈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한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하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심을 의미하는 ‘초 축복과 행렬 예식’을 합니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이 성전으로 들어오자 그 분이 곧 빛이심을 깨달었습니다. 그러나 그 빛은 아직 연약했고 그 빛보다 훨씬 강렬한 어둠이 그 빛을 덮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사탄의 교활한 유혹과 잔인하고 집요한 헤로데 왕,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리들, 두려움과 좌절로 숨어드는 제자들, 예수님을 비판하는 성직자와 율법학자들, 군인들의 무지한 폭력 등 빛을 삼키려는 세상의 어둠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세상의 어둠 속에서 빛을 지키시는 성모님, 어둠을 막고 그 빛을 감싸고 폭풍을 이겨 내신 성모님의 마음은 칼에 찔린 것 보다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오늘 부모님들은 성모님을 따라 교회에 자녀들을 봉헌합니다. 자녀를 바치면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이가 하느님이 주신 선물임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자녀인 우리의 아이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교회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붉은 볼과 하얗고 순수한 손을 보면 마치 땅에서 갓 올라온 새싹을 보는 듯합니다. 반짝이고 순수한 눈을 보면 막 떠오르는 빛을 보는 듯합니다.
그 빛은 바로 ‘신앙의 빛’이며 순수하고 백지와 같은 ‘지혜의 빛’입니다. 그 빛은 바로 죄 없는 영혼에서 나오는 ‘미덕의 빛’입니다.
하지만 그 맑고 빛나는 빛 주변에 맴도는 어두운 빛 또한 우리는 목격합니다. 자녀를 봉헌하는 부모님들은 주님께서 맡기신 귀한 보물을 잘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주신 빛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싸우는 동안 그들 역시 성모님과 같이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나의 아이가 나이가 들어가며 지혜가 더해지고,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주님의 빛을 잃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주님, 저희 자녀들에게 주님 축복의 빛을 내려 주소서. 그 빛이 믿음과 신앙의 빛, 미덕의 빛, 지혜의 빛으로 더 높이 밝게 비출 수 있도록 축복의 은총을 내려 주소서.
성모님, 우리 아이들의 작고 나약한 빛을 용감하게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주는 부모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아이들이 하느님을 맞이하는 그 날까지 그 빛이 계속해서 밝게 빛날 수 있도록 지켜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자녀를 봉헌하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나의 자녀를 봉헌하는 그 순간 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3. 지금 나는 나에게 맡겨 주신 자녀의 작은 불빛을 어떻게 지켜주고 있는 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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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봉헌의 축복, 봉헌의 여정
“영적 승리의 삶”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생활의 날입니다. 예수님 탄생후 40일째 되는 날, 마리아 요셉 부부가 아드님을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친 날입니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 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법에 충실한 마리아, 요셉 부부였는지 깨닫습니다.
또 오늘은 자신을 특별히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축성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2025년 희년과 ‘축성생활의 해’에 맞이하는 축성생활의 날이 참 각별합니다. 한국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주제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유아빠스는 “예수님 곁에 가까이 머무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분에게서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사랑의 에너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예전 수도원을 자주 찾았던 어느 교구 사제의 “저에게 여기 요셉 수도원은 영육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 찾는 영적 주유소와 충전소입니다.”라는 고백도 생각납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은 믿는 이들 모두의 봉헌 축일이기도 합니다. 한두번 봉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살아 있는 그날까지, 봉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봉헌 축일입니다. 세상에 ‘봉헌’이란 말보다 아름다운 말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봉헌의 삶입니다.
봉헌의 삶은 존엄한 품위의 맑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평생 살아내야 할 봉헌 축복의 삶입니다.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생명, 봉헌의 축복, 봉헌의 아름다움등 봉헌은 바로 믿는 이들의 삶의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 봉헌이란 말의 개념조차 이해못할 것입니다. 제대 앞 봉헌된 꽃처럼 우리는 모두 주님께 봉헌된 삶을 살아갑니다. 작년 후반기 많이 나누며 행복해 했던 ‘꽃’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꽃 한송이를 선물하며 미안해 하던, 지금은 타계한 어느 자매에게 드린 덕담의 시도 생각납니다. 수없이 인용했어도 늘 새롭고 좋아 인용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하느님 눈에는 봉헌된 우리 영혼들이 다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봉헌 삶의 빛나는 모범을 여러분 발견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봉헌된 삶의 빛나는 모범이 바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예수님의 부모요, 성령의 인도따라 봉헌의 삶에 항구하다가 주님을 만난 시메온은 아름답고 품위 있는 봉헌 삶의 모범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평생 봉헌 삶의 인도자와 보호자는 성령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어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다가 봉헌되시는 주님을 만난 시메온입니다. 그대로 다음 묘사대로 말라키 예언의 실현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시메온과 함께 이 거룩한 주님 봉헌 축일 미사를 통해 봉헌된 주님을 만나, 정화되고 성화되는 영적 레위의 후손들인 우리들입니다.
“보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니 주님 마음에 들리라.”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을 만나 팔에 안고 감격에 벅차 찬미가를 부르는 시메온입니다. 이 시메온 찬가는 우리 가톨릭교회 모든 신자들이 매일 평생 끝기도 때마다 부르는 아름다운 찬가로, 이 찬가의 은총이 우리 모두 복된 선종을 맞이하게 할 것입니다. 첫절이 특히 아름답습니다.
“주님, 이제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말그대로 시메온의 봉헌생활 축복의 절정 체험입니다. 시메온과 쌍벽을 이루는 봉헌 삶의 대가가 한나 예언자입니다.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거룩하게 살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한나 역시 봉헌 삶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봉헌 삶도 보고 배웁니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친후 귀향한 마리아, 요셉이요,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하고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으니, 그대로 부모의 봉헌 삶을 보고 배운 예수님께 쏟아진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세상에 봉헌의 축복을 능가할 축복은 없습니다. 아니 봉헌자체가 이미 축복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치유제도 봉헌 축복의 삶뿐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유념할 사항이 있습니다. 봉헌의 삶은 늘 순탄대로의 평온한 삶도, 온실속의 따사로운 삶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시메온의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바로 이를 입증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은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봉헌된 삶의 모범인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성인성녀들이 겪었던 무수한 고통과 시련, 고난을 생각하면 힘과 용기가 샘솟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든 봉헌 삶의 현장 중심에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이 자리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피와 살을 나누어 지니시고,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신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우리들 도와 주실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봉헌 삶의 중심에 이런 주님이 늘 살아 계시어 함께 해주시니,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어떠한 처지에서든 봉헌 축복의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를 격려하시는 주님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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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롯한 만남>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22)
당신께서 빚으신
나를 만납니다
나를 빚으신
당신을 만납니다
당신께 받는
나를 만납니다
나에게 주시는
당신을 만납니다
당신께 드릴
나를 만납니다
나를 받으실
당신을 만납니다
당신께 드리는
나를 만납니다
나에게 받으시는
당신을 만납니다
당신께 드린
나를 만납니다
나를 받으신
당신을 만납니다
당신을 만나는
나를 만납니다
나를 만나시는
당신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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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예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냅니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습니다. 6세기에는 시리아에서 이 축일이 거행되었고, 로마는 7세기 후반에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8세기 중반에는 ‘성모 취결례(정화) 축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18세기 프랑스 전례에서 ‘주님 봉헌’으로 바뀌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습니다. 이에 따라 교황청 수도회성은 해마다 맞이하는 이 축성 생활의 날에 모든 신자가 수도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봉헌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합니다.
주님 봉헌 축일을 맞아 봉헌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봉헌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 물건, 특히 자신의 모든 행위, 기도, 단식, 자선 등을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뜻으로 기꺼이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복음에서는 봉헌의 모델로서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봉헌의 삶은 우리 신앙인에게 참된 봉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법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나자렛에서 예루살렘까지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올라와 정해진 주님의 법을 충실히 마치고 다시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갑니다. 바로 주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순종의 삶을 보여줍니다. 둘째는 자신에게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것으로 되돌려 드리는 마음이 가난한 무소유의 삶입니다.
예언자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한 삶을 살았고 무엇보다도 주님을 뵙고 싶은 간절한 바램을 가지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고 사는 신앙의 삶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온전히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모든 삶을 맡깁니다. 예언자 한나의 삶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와 단식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이분들의 삶을 통해서 비록 주님께 온전히 봉헌한 수도자가 아니라도 보통 사람으로서 세상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하느님 때문에 자신의 뜻과 편의대로 하고 싶은 자신의 모든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은 수도자와 같은 봉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자녀, 나의 부모, 나의 고향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내신 자녀, 주님께서 보내신 부모, 주님께서 보내신 주님의 고향으로 바라보고 모든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영적으로 가난한 무소유의 삶은 주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봉헌이 됩니다.
시메온처럼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며 성령께 의탁하는 삶은 복된 관상이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봉헌이 됩니다. 한나처럼 영원하고 변하지 않은 영적인 것을 위해 잠시 지나가는 일시적인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는 영적인 단식과 항구한 기도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살아 있는 봉헌이 됩니다.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일상안에서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있는 봉헌을 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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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아일랜드의 진실한 이야기
뵐러 (P.'Wöhler) 의 다음 시는 1877 년 아일랜드에서 있었던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어린아이의 기도로 그의 아버지가 회개했다는 내용이다.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믿음
성당에는 이미 황혼이 깃들어
모두가 공허한 적막에 잠겼다.
저기 성당 입구에 어린아이 하나가 있었다.
아이야, 이 늦은 밤에 무엇을 기원하고 있는가?
아이는 망설이며 성전으로 다가가서
작은 손을 들어 기도하며
구세주를 동경하는
맑은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를 길렀던 성실한 유모가
언젠가 그에게 일러 준 적이 있었다.
“너의 아버지는 나쁜 길에 빠졌단다.
기도하렴, 아이야,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도록! "
작은 아이는 이 말을 듣고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
아이는 자신의 의무를 생각하여
아무도 모르게 지금 여기에 온 것이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모든 것이 정적에 싸여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작은 아이는 주저하지 않고
조그마한 발에서 신발을 벗고
제단 위로 기어 올라갔다.(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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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며, 특별히 금년은 ‘한국 교회 축성 생활의 해’를 기념하면서 축성된 남녀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강론은 봉헌 축일에 적절한 이야기로 시작하렵니다. 프랑스 파리의 어느 성당에서 봉헌 축일을 맞아 어려운 이웃을 위한 헌금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봉헌 바구니를 돌릴 때 만약 큰돈을 가졌는데 적게 내고 싶으면 봉헌 바구니 안에 큰돈을 놓고 잔돈을 거슬러 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자기 형편대로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 하는 것은 흉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그 봉헌 바구니가 어느 눈먼 사람 앞에 멈추었습니다. 그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도 잘 아는 사람으로 단 1유로도 헌금할 수 없는 형편의 가난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자그마치 27유로를 접시에 세어서 놓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옆 사람이 “당신이 어떻게 그 많은 돈을?” 하고 묻자, 눈먼 사람은 웃으며 이렇게 말하더래요. “저는 눈이 안 보이지요. 그런데 제 친구에게 물어보니 저녁때 불을 켜는 비용이 일 년에 27유로가 든다고 하더군요. 나는 불을 켤 필요가 없으니 일 년이면 이만큼의 돈을 저축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모은 거죠. 그래서 예수님을 몰라 어두운 곳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참 빛이 비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봉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자기에게 쓰고 남은 것만을 봉헌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봉헌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늘 부족하다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고, 축성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기록된 대로 성전에서 봉헌되셨다고 전해 줍니다. 그런데 교회는 주님 봉헌 축일을 2월 2일로 지냅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40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떠돌던 그 40년이고,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그 40일입니다. 이 40은 시련과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기간이고 이 과정을 거쳐 아버지에게서 오신 주님께서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40일의 첫날인 주님의 성탄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세상으로 봉헌되심을 뜻하는 것이라면, 40일의 마지막 날인 주님의 봉헌 축일은 주님께서 십자가 위, 즉 이 세상에서 하늘로 봉헌되심을 뜻하는 것이고, 주님의 성탄이 하늘의 성부께서 아드님을 이 세상에 봉헌하신 것이라면, 주님의 봉헌은 지상의 부모가 아드님을 성부께 봉헌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주님 봉헌은 육화의 봉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봉헌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 가운데로,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 주님 봉헌은 십자가 희생, 수난의 봉헌입니다. 주님께서 성부께 순종하여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 봉헌의 축일에 시메온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아주 섬뜩한 예언을 합니다. 장차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한 마리아는 장차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예리한 칼에 찔릴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주님은 육화와 수난의 두 봉헌을 통해 세상의 빛이며 구원자로 세상을 밝히시겠지만, 그 빛 가장 가까이 서 계신 어머니 마리아는 등잔 밑이 상대적으로 묵직하고 어두운 아픔을 겪게 되실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교회는 모든 남녀 수도자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되길 바라면서 봉헌의 날로 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수도회는 이를 기억하면서 서원식을 통해서 주님의 이 봉헌을 본받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수도 생활을 축성 생활이라 칭함은 아마도 수도 생활의 본질이 바치는 데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바치는 삶, 비우는 삶, 결국 자신은 없어지는 삶이 수도 생활이란 말입니다. 축성 생활의 날을 맞이하면서 수도자인 저는 무엇을, 얼마나 주님께 바쳐드리고 살아왔는지 반성해 봅니다. 저의 서원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과연 내 삶이 바치는 삶이었는가? 끝없이 비우는 삶이었는가? 끝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었는가?
수도 생활에 입문할 무렵, 되돌아보니 그땐 참으로 순수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기세였습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저의 삶인 듯 여겼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흔적 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예전 아홉 분의 수녀님들이 저희 수도회에 오시어 미사를 함께 봉헌하면서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서원 갱신을 하셨습니다. 이 예식을 하고 난 뒤 수녀님들은 자신들의 수도 생활에 대해서 나누는 귀한 시간 가졌습니다. 어느 수녀님은 지난 수도 생활을 되돌아보면 부족하고 부끄러운 삶을 살아온 듯싶어서 하느님 앞에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하더군요. 과거 저 역시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어떤 삶도 잘못된 삶이나 부끄러운 삶은 없다고 느낍니다.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며 다만 얼마큼 충실했는가 충실하지 않았는가를 되묻고 충실히 살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잘 살면 얼마나 잘 살겠습니까? 어떤 누구인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직선이라기보다 곡선이었을 것입니다. 곡선을 직선으로 바꿔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기에 주님 앞에 도달할 때까지 충실히 살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어 드리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또 자기의 생각으론 저 많은 부끄러움이나 후회스러움은 하느님의 눈에는 전혀 후회스럽지 않고 부끄럽지도 않게 보실 것입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항구한 충실성과 기다림이라고 봅니다. 수도자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 노인을 축성 생활의 이정표로, 또 다른 새 출발의 표지로 세워주십니다. 그들이 바로 예루살렘의 시메온과 한나입니다. 그들은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때까지 충실히 기다리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메시아를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고 말았는데, 다들 내 나이에, 내 주제에 메시아는 무슨, 하고 절망의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들만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끝내 구원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하직했는데, 그들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입니다. 시메온은 그런 기다림 끝에, 마침내 부모의 팔에 안겨 성전 안으로 들어오시는 메시아 하느님을 뵙는 일생일대의 행운을 잡게 됩니다. 과분하게도 하느님을 자신의 두 팔에 안아보는 기쁨을 누립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었던지 시므온 예언자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한평생 오로지 주님께만 희망을 두며 주님께만 충실했던 시므온 예언자였기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주님을 직접 눈으로 뵙는 기쁨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한 한나 역시 무려 60년 가까이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봉헌 생활을 해오신 결과, 자기의 눈으로 하느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항구하게 충실히 살아가는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상급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열렬한 기다림을 바탕으로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인내 끝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분 사랑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생활, 수도 생활, 축성 생활의 핵심은 충실성이며 지속성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가 아니라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삶을 통해서 주님처럼, 성모님처럼 우리 역시도 봉헌의 삶을 살아야겠지요. 수도자만 주님의 봉헌을 본받아야 한다면 굳이 교회 전체 축일로 오늘을 지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봉헌해야겠습니까? 주님께서 하신 대로입니다. 봉헌의 참된 의미를 실제로 보여 주신 주님의 빛을 받고 세상 가운데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촛불이 자신을 희생해서 불을 밝히듯이, 세상을 밝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촛불을 함지나 침상 밑에 두지 않고 자기의 삶을 통해서 어두운 주변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닮아서는 아니 됩니다. 마치 연꽃이 흙탕물에 피지만 결코 그 물에 잠기는 법이 없이 세상에 아름다움과 향기를 풍기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고 봉헌된 사람으로 세상을 복음화하되 자기가 세속화되는 일 없이 세상 한 가운데서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연등처럼 어둠을 비추는 작은 촛불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뜻으로 교회는 오늘 1년 동안 쓸 초를 축성하는 것입니다. 축성된 초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 매일 그 초를 켜고 기도를 드림으로써 먼저 자신을 성화하고 또한 자신이 이 초와 같이 세상을 밝히겠다, 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아시는 수사님과 수녀님을 기억하시면서 기도해 주길 바랍니다. 그 옛날 예수님께서 자신을 성전에 봉헌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상의 봉헌으로 봉헌 생활을 완성하셨듯이 모든 수도자도 자신의 서약으로 봉헌한 삶을 통해 끊임없이 비우고 버리고 바쳐드리는 삶을 통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저 또한 이 미사 안에서 해외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모든 수도자를 기억하고 기도드립니다. 더욱더 봉헌의 삶, 아름다운 비움의 삶에 정진하길 바라며 저희에게 빛을 비추어 주길 바랍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성소로 불러 주신 주님께 오늘 하루 질퍽하게 감사를 드리며, 동반하고 있는 모든 신자분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봉헌하신 부모님과 봉헌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토라의 후대 작품인 탈무드에서는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고 하느님의 소유이며 부모에게 잠깐 맡긴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 정신은 구약의 토라에서 비롯되어 맏자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가정의 부모님이신 성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위대하심은 율법 전통에서 아드님 예수를 봉헌하셨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분들은 진정한 본보기는, 하느님의 것을 자기 소유라 취급하지 않고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신앙의 자세에 있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의 뒤에는 자식을 자신들의 소유라 여기지 않고 기꺼이 하느님께 봉헌하신 부모님이 있다, 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라면 여러분들 또한 그런 신앙의 정신으로 자녀들을 봉헌하길 바랍니다. “주님,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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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주님께 완전 봉헌물이 된 저를 /
박윤식 [big-llight] 250201. 18:17 ㅣNo.179740
교회는 성탄 후 40일째, 곧 2월 2일을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봉헌에는 감사가 담겨야만 할 게다. 아픈 상처를 안겼던 이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 힘이 함께한다. 성모님도 아기 예수를 성전에 바쳤다. 단 한 자루의 초도 정성으로 저 어둠 밝히길 빌면서 봉헌하자. 그 초가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 언젠가 나에게 다시 되돌아올지도 모르기에.
율법에 따른 정결례를 치를 때, 성모님은 아기 예수를 안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거기에 성령이 가득 찬 독실한 시메온이라는 이가 있었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을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 미리 일러 주셨다. 그는 아기를 팔에 받아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빛이며, 당신 백성에게는 큰 영광입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시는 요셉과 마리아를 생각해 보자. 성령 계시로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인 요셉의 마음은 먹먹했을 게다. 마리아도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며 얻은 아기 예수가 정녕 인류 구원의 메시아인지 확신 못했을 수도. 그래도 첫 아기를 봉헌하는 두 분이 만난 늙은 예언자 시메온의 고백은 자못 진지하다. “주님, 이제야말로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당신의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 약속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언젠가 이산가족 한 분이 꿈에 그린 가족을 상봉하고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라고 말한 것을 본 적 있다. 자신의 모든 걸 바쳐 꼭 하고픈 일 끝내 이루었을 때 흔히 하는 말이다. 자신 삶에서 꿈꾼 바를 다 이루었다는 거다. 시메온이 바로 그 경우다. 그는 선택된 백성이 암흑의 길로 가지만, 정의로운 하느님께서 죽기 전에 구원의 빛을 보여 주실 것이라 확신했다. 지금 그의 눈은 이렇게 그 긴 어둠에서 밝은 빛을, 그 암울한 절망에서 희망을 본 거다.
삶이 너무 괴로우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라고, 억울하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이라 말하곤 한다. 이는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깨닫는다나. 늙은 예언자 한나도 그랬다. 긴 세월 과부로 산 그녀의 남은 의생의 목표는? 아마도 짓밟힌 예루살렘의 영화를 되찾는 날, 한 많은 그 삶에서 하느님만을 섬기며 이 영광의 날만을 기다렸을 게다.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겪으실 성모님께서도, 당신 고통을 세상을 위한 보속으로 그 한 목숨을 봉헌하셨다.
오늘 수도자들의 봉헌된 삶은 바로 종말론적 희망, 곧 지금 여기서 미리 맛보는 하느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임을 기억하자. 그래서 수도자들의 그 봉헌된 삶이 기쁨이 되게 도와주어야만 할 게다. 그분께 세례 받은 우리 역시 기꺼이 봉헌된 삶을 살자. 기쁘고 즐거우면 봉헌이 쉽지만, 고통스러운 일에는 어쩜 그마저 힘들리라. 가끔 이 억울함을 ‘주님께서 주셨다.’라고 여긴다면, 정녕 신앙으로 극복해야 할 게다. 그래야만 봉헌의 삶이 은총으로 다가오리라.
이 봉헌의 참 의미는? 시메온처럼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주님께 바치는 삶이라 하겠다. 우리도 주님께 일생을 봉헌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구원은 결국 평생 자신을 주님께 얼마나 봉헌했느냐에 달린 것이리라. 그리하여 삶의 마지막 그 순간, 시메온마냥 고백한다면 참 좋겠다. “주님께서는 저를 그 옛날 저 시메온처럼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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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교회는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아기를 주님께 바친 일을 기념합니다.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히브 2,17) 하였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백성의 다른 맏아들들처럼 부모의 손으로 성전에 바쳐지십니다.
아기 스스로 자신을 바친 것이 아니라 부모가 바칩니다.
실제로 그리스 말 원문은 ‘봉헌’과는 조금 다른 ‘나타내 보이다, 출현하다, 소개하다’(present)라는 뜻을 가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늘 복음을, 드디어 오신 구세주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대표하는 두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 백성을 처음 만나는 자리라고 하십니다. 일종의 상견례인 셈이지요.
제1독서에서 구세주께서 “자기 성전으로 오[시]리라.”(3,1)라고 한 말라키 예언자의 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곧 아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 처음으로 성전에서 아버지 앞에, 그리고 백성 앞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축성 생활’(vita consecrata)의 날을 꽤 오랫동안 ‘봉헌 생활’의 날로 불러왔기에 축성 생활자들이 주님께서 성전에 바쳐지신 것과 같은 의미로 봉헌된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5년 전 이를 ‘축성 생활’로 번역하여 쓰기로 한 주교회의의 결정은 이런 혼란을 바로잡고 축성 생활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축성’은 오늘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봉헌’과는 쓰인 낱말과 그 뜻이 다릅니다.
‘축성 생활’은 “서원을 통하여 세 가지 복음적 권고의 의무를 받아들이는” 삶, 곧 “복음적 권고의 서원으로 이루어지는 신분”(교회 헌장, 44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수도자를 포함하여 복음 권고를 서약하는 모든 이가 축성 생활자입니다.
올해 ‘한국 교회 축성 생활의 해’를 지내면서 축성 생활 성소를 위하여 더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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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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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한 날이 되자
예수의 부모는 아기를 주님께 바칩니다.
맏아들을 주님께 봉헌해야한다는 규정과
사내아이를 낳을 경우 40일이 지난 다음
산모의 정결례를 해야한다는 규정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봉헌되십니다.
할례를 통해
율법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예수님께서는
이제 맏아들 봉헌 규정의 영향도 받으십니다.
할례와 맏아들 붕헌 규정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내아이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율법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셨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율법의 영향을 받으십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께서
세상이라는 한계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그 목적은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과 한나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주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한나는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 속으로 들어오신 이유
율법의 영향 아래로 오신 이유는
세상의 구원이며 속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속량이라는 단어는
죄값을 치른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율법에서는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다른 동물을 잡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즉 동물의 살과 피가 필요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되신 것은
당신의 살과 피로
세상의 죄값을 치르기 위한 것이라고
한나는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시메온이 말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루카복음은 육화의 신비를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시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물론 아기이기에 스스로 율법을 지킨 것은 아닙니다.
그마저도 부모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상태를 선택하신 것은
다름 아닌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의 봉헌을 보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도
함께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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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 22)
하느님께
올리고
바치는 것이
봉헌입니다.
좋은 시작과
좋은 열매에는
언제나
봉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기쁨을
봉헌으로
우리와 함께
나누십니다.
정성스럽게
사는 것이
우리의
봉헌입니다.
믿음은
봉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꾸밈이
없는 봉헌이
중요합니다.
솔직한 고백도
하느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봉헌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정성을 다해
마음을
나누는 삶을
사셨습니다.
신앙의 탄생은
봉헌의
탄생입니다.
봉헌은 또한
우리의 신앙을
키웁니다.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봉헌
아닌 것이
없습니다.
봉헌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으뜸되는 마음이
봉헌의 마음입니다.
봉헌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도와주고
서로를 이롭게
하며 선한 일을
하는 것이며
행복으로 가는
가장 아름다운
실천이며
신앙의 올바른
방향이 봉헌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봉헌이 있습니다.
주님 봉헌을
따라
우리의 삶도
하느님과
기쁘게 나누는
봉헌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봉헌이
가리키는
은총의 선물을
뜨겁게 만나는
봉헌 축일
되십시오
삶의 본질은
우리자신의
봉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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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등불인 축성 생활자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인 동시에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마리아와 요셉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시고 올라가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축성 생활자들, 수도자들을 각별히 사랑하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이 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들이 더욱 신원에 맞는 걸맞는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자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들이 각자 부여받은 고귀한 성소와 카리스마를 기쁘고 충만하게 실현하도록 기도하는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축성(祝聖, consecration)되다’ 라는 말의 의미는 성화(聖化)되다, 성(聖)스럽게 변화되다, 거룩하게 되다,
신성하게 되다, 봉헌되다, 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오늘 축성 생활의 날은 맞아 세상의 모든 수도자들이 아기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시간과 미래, 삶 전체를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선별되고 축성된 수도자로서의 신분에 걸맞게 하루하루 모든 순간을 거룩하고 향기롭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한 사도직 활동도 중요하겠습니다만, 그에 앞서 한 작은 수도자로서, 주님의 겸손한 종으로서, 기도 안에 기쁘고 환한 얼굴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을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수도자들이 자신이 발한 삼대 서원이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교회를 위해 얼마나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거룩하고 맑게 살아 존재 자체로
교회와 세상 앞에 큰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존재’ ‘신원’은 마치 날카로운 날이 서 있는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매일 가슴을 치면서 거듭 자신을 갈고닦으며, 주님의 종이라는 수도자로서의 신원에 걸맞게 살고자 발버둥 칠 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위한 멋진 이기(利器)로 변모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도자로서의 신원을 망각한 채, 흥청망청, 빈둥거리며 살아갈 때, 세상의 고통과 절규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 우리끼리만 희희낙락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과 교회 앞에 그 어떤 증거도 되지 않고, 그저 놀림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수도자라는 존재 자체, 신원 자체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해치는 흉기(凶器)로 돌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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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22-4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맏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것이나 큰 기쁨,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율법에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 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의인 시메온은 아직 아기를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지니신 분임을 알아보았다.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는 당신의 평생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시메온의 뒤를 이어 한나가 등장한다. 한나 역시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한나는 일찍이 사별하였지만,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았다.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한나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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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구원에 이르는 봉헌은 오직 하나뿐: 용서를 위한 봉헌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아프지 않으면 봉헌이 아닙니다.
예언자 시메온은 성모님께서 장차 영혼이 칼에 찔리듯 아프실 것이라 예언합니다.
구약에서의 봉헌과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봉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 봉헌의 목적은 첫째, ‘저는 당신 것이고 제가 가진 것도 당신 것입니다.’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바쳤던 제물이 번제와 곡식 제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친교’입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친교를 위해 바치는 화목제가 있었습니다.
이는 오고 가는 것이 없다면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세 번째는 ‘속죄’입니다.
빚을 진 상태로는 친교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탕감해주더라도 그분을 바보로 만들지 않으려면 자신도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속죄제나 보상제가 이것입니다.
만약 이런 봉헌으로 구원이 가능했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신약의 봉헌은 반드시 ‘용서’가 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고타에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봉헌하시며 이렇게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문신을 한 신부님’(2019)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다니엘이라는 청년입니다.
그는 소년원 겸 교정시설에서 생활하던 중, 우연히 본당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를 돕게 되면서 ‘사제의 길’을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살인 및 폭력 전과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없다.”라는 답을 들었고, 결국 다른 직업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출소 후 노동 현장으로 파견되던 중, 다니엘은 시골 작은 마을에 들르게 되고, 우연히 그곳 본당 신부님을 만나야 할 상황이 생깁니다.
다니엘은 내면에 깊은 갈망과 불안, 그리고 죄책감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누군가가 “본당 신부님 맞나요?” 하고 묻자, 그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예, 제가 신부입니다.” 라고 대답해 버립니다.
그리고 빈 사제관에 머무르게 되면서, 그 마을의 임시 ‘신부’ 역할을 시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의외로 진솔한 그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입니다.
알고 보니 이 마을에는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끔찍한 교통사고가 발생해 여러 주민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운전자’ 역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사고 당시 운전자가 술에 취해 있었다는 이야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 운전자를 철저히 미워했습니다.
마을 곳곳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표시가 있지만, 정작 그 ‘가해자’였던 운전자는 묘지에조차 들어오지 못한 채 쫓겨난 상태였습니다.
다니엘은 처음에는 이 사건에 깊게 관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용서받지 못함의 고통”을 잘 아는 그였기에, 점점 그 가족과 죽은 운전자를 묻지 못한 채 애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신경 쓰였습니다.
다니엘은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이 운전자를 위한 장례를 제대로 치러 주자.”
모든 마을 사람이 반대하고, 심지어 다른 사제나 경찰관도 “장난질이 너무 심하다.”라며 그를 몰아세우지만, 다니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장례식 당일, 분노로 가득 찬 마을 주민들은 장례식장에 몰려와 고성을 지릅니다.
이즈음에 그의 신분도 조금씩 들통이 나기 시작합니다.
“가짜 신부가 무슨 장례를 치른단 말이야!”
“이딴 식으로 저 인간까지 구원받게 해 줄 순 없어!” 다니엘은 위축되면서도, 용기를 내어
운전자의 관이 놓인 곳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들어 모두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 저 역시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게 된 건, 하느님께서는 제게 기회를 주셨고, 저도 여러분께 기회를 드리고 싶다는 겁니다.
이 사람에 대한 증오가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죽은 이에 대한 복수나 증오는 우리 모두를 갉아먹을 뿐입니다.”
다니엘은 장례식을 시작하며 조용히 기도문을 읊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묵주기도(또는 해당 지역 미사 의전)를 이어 갑니다.
이 순간, 관 앞에서 울부짖는 운전자의 가족을
보고 몇몇 주민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사제가 아닌 저 사람(다니엘)이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까지 마음 돌리게 하나…” 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미 그의 진심을 느꼈던 사람들은 묵묵히 참여하기 시작하지요. 장례식을 마치고 다니엘은
신자들 앞에서 사제복을 벗고 문신이 새겨진 몸을 드러낸 채 그들을 조용히 떠나갑니다.
그는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그가 먼저 사제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하지 않은 우리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 곧 에덴동산에서의 가죽옷을 선물하시기 위해 아드님을 죽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고 그분의 의로움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제복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위한 봉헌을 의미합니다.
그 용서를 받은 사람에게 합당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도 용서하고 덮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봉헌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봉헌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 자기 자신을 대신 감옥에 갇히도록 내어놓겠다고 말한 장면(창세기 44,33 참조)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모습을 예표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했지만, 되레 그들을 살리기 위해 양식을 베풀었고(창세기 50,19-21 참조),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벌주시는 대신 가죽옷을
입혀 주십니다(창세기 3,21 참조).
누군가의 죄를 덮어 주기 위해 다른 생명이 희생된 것은 최초의 봉헌을 상징합니다. 신약에서는 의로운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깨닫고도, 세상의 조롱 속에서 그녀를 보호해 주려고 몰래 파혼하려 했습니다(마태오 1,19 참조).
구약의 유다와 요셉이 살아 낸 봉헌과 희생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완성해 주신 속죄와 사랑으로 이어지며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의 봉헌은 더 이상 의무적 제사가 아니라 서로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봉헌’이 됩니다.
이 봉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롭고 영원한 봉헌입니다.
나는 이웃의 죄를 덮어주는 봉헌을 하며 미사에 참례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참다운 신약의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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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봉헌’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바치는 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2-32)”
1) ‘주님의 봉헌’을 겉으로만 보면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한 일로, 즉 예수님이 ‘봉헌되신’ 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또는 신앙의 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께 ‘바쳐진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또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서에서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아기 예수님이 자라서 나중에 메시아가 된 것이 아니라, 메시아께서 아기 예수님으로 오셨는데,
그 일은, 또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 사신 것은, 당신이 원해서 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봉헌’도 수동적으로 ‘봉헌되신’ 일이 아니라, 당신이 원해서 능동적으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봉헌’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세례와 마찬가지로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2) ‘봉헌’은 내가 나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남이 나를’ 바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남을’
바치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에 남의 목숨이나 남의 재물을 바친다면,
그것은 봉헌이 될 수 없고,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판관 입타’의 경우에,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간청하면서, 자기를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판관 11,30-31).
자기 목숨이 아니라, 남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 서원은 옳은 것일까?
식구들과 하인들을 모두 자기 재산으로 생각하던 당시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원천적으로 무효인, 잘못된 서원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간 입타를 맞으러 처음 나온 사람은 바로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습니다(판관 11,34).
그때 그는 자기가 잘못된 서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았어야 했는데, 즉 잘못된 서원을 취소하고 올바른 서원으로 바꿨어야 했는데, 그는 한 번 서원한 것은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서 딸을 번제물로 바쳤습니다(판관 11,39).
잘못된 서원으로 인한 잘못된 봉헌이니, 그것은 결코 봉헌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일이고, ‘큰 죄’를 지은 일입니다.
3) ‘봉헌’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바치는 일입니다.
판관 입타의 경우를 다시 생각하면,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사람의 목숨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입타의 서원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한 마디도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입타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예물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해서 ‘남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는 ‘선한 예물’만 바쳐야 합니다.
만일에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해서 마련한 것을
예물로 바치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받으실까?
도둑질이나 강도짓도 큰 죄이지만,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는 더 큰 죄입니다.
4) ‘봉헌’은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것’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나의 목숨과 나의 인생 전부를 봉헌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원래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봉헌을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습니다.
5) ‘봉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뭔가를 많이 바치면 하느님께서 복을 많이 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봉헌이 아니라 하느님과 거래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거래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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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2,22-40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어떤 농부가 기르던 암소가 한 번에 두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보통 잘 일어나지 않는 특별한 일이었기에 농부는 너무나 기뻐했지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그는 그것이 하느님께서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하여 두 송아지 중 한 마리는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소를 하느님께 봉헌할 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두 송아지가 겉모습이나 하는 행동, 성향까지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여보, 두 마리 중 어느 것을 ‘하느님의 소’로 하고, 어느 것을 ‘우리 소’로 하지?” 그러나 아내도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먼저 눈길이 가는 소를 ‘하느님의 소’로 결정해서 봉헌하자고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농부가 마당으로 나가보니 한 송아지가 기운이 넘치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송아지가 보이지 않아서 찾아보니 간밤에 맹수의 공격을 받았는지 집 뒷 뜰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농부는 어두운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보, 이 일을 어쩌면 좋지? 글쎄 ‘하느님의 소’가 죽고 말았구먼.”
가톨릭 교회는 주님 성탄 대축일 후 사십일 째 되는 날을 “주님 봉헌 축일”로 지냅니다. 소중한 외아들을 하느님께 기꺼이 봉헌하신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모습을 본받아, 내가 가진 것을 하느님을 위해,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봉헌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되새기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앞서 들려드린 예화 속 농부처럼, 욕심과 집착에 쉽게 휘둘리는 우리 마음이 참된 봉헌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참된 봉헌이 어떤 의미이며 왜 중요할까요? 그건 먼저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신앙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휘두르려 하면, 자녀는 그 부모의 품 안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독립할 때가 지나도 어미의 주머니 속에 사는 새끼 캥거루처럼, 제 힘으로는 제대로 걷지도 먹이를 구하지도 못하는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점점 퇴화되다가 캥거루로써의 삶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죽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스승은 제자를, 친구는 다른 친구를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내 고집과 집착 속에 가두려 들지 말고, 하느님의 커다란 섭리 안에서 맘껏 뛰놀며 제 행복을 온전히 누리도록 이해와 포용, 존중과 배려, 사랑의 힘으로 그를 응원하고 격려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봉헌’만큼 중요한 것이 ‘사물의 봉헌’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보다는 ‘내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물을 대할 때 더 강한 집착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손에 있다고 그것을 ‘내 것’이라 여기며 집착하지 말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잘 쓰일 수 있도록, 그렇게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도록, 나눔과 봉헌을 통해 내 손에 쥔 것들을 하느님 섭리 속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런 마음으로 외아들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율법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여겼기에 기꺼이 따른 것이지요.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전부’를 하느님께 내어드렸으니, 그 대가로 더 큰 것을 달라고 욕심낼 일도, 세상 일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으로 마음이 갈라질 일도 없었을 겁니다.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며 그분께서 이끄시는대로,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다른 모든 것들도 기꺼이 하느님께 내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봉헌은 내 것을 하느님께 억지로 빼앗기는게 아니라, 내가 가장 아끼는 소중한 사람 혹은 사물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실현하도록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일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겪어도 억울하지 않았고, 시련이 닥쳐와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운 손길로 나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니, 그분을 굳게 믿고 그분의 선한 뜻을 신뢰하며 따르기로 결정하신 겁니다. 그 결정이 아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지요.
마리아와 요셉의 그런 모습은 우리에게도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봉헌은 성당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시메온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듯이 우리도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느님 보시기 좋은 일들을 충실히 행하며 그분과 깊은 친교를 맺어야 합니다. 한나가 하느님만 오롯이 바라보며 밤낮으로 그분을 섬겼듯이, 우리도 세상의 유혹에 휘둘리지 말고 하느님만 바라보며 그분 뜻에 맞는 일들을 충실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는 참된 봉헌이며, 그런 참된 봉헌을 행할 때 우리가 희망하는 구원이,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고된 세상살이를 이겨낼 힘을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각 본당에서는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성합니다. 봉헌 축일에 초를 축성하는 것은 초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특성을 예수님의 모습에 연관지어 묵상하며, 나 자신을 하느님께 어떻게 봉헌해야 할 지 그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첫째, 초는 밝은 빛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눈 먼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어 구원의 빛을 보여주셨습니다. 둘째, 초는 따뜻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따듯하게 맞이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셋째, 초는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 세상을 밝게 비춥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심으로써 죄악의 어두움을 몰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가 이 말씀처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며 살면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은총과 복을 충만하게 베푸시어 우리 각자가 ‘존재의 의미’를 완전히 실현하게 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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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
사실 구약에서도 하느님께 맏아들을 바치는 것은 생명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구약과 우리나라의 고전과 시대적으로나 내용으로 맞지는 않지만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우리의 표현으로는 부처님에게 바친다는 뜻으로 보면
산 사람의 봉헌의 의미로는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심청전의 줄거리가 된 효녀 설화는 황해도 황주에 거주하던 맹인 심씨의 이야기에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작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줄거리를 외울 정도의 친근한 이야기입니다.
효녀 심청은 가난한 심봉사의 딸로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눈먼 아버지의 보살핌으로
자라나서 아버지를 지성으로 모셨지요. 그러던 어느 날 공양미 300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아버지 눈을 뜰 수 있다는 소리에 인당수 깊은 물에 항해의 안전을 위해 산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심청의 효성에 감동한 용왕님은 심청을 연꽃에 태우는데 그곳을 지난던 뱃사람이 이 귀한
연꽃을 나라님께 바쳤고 연꽃에서 나온 심청은 왕비가 되어 아버지가 보고 싶은 마음에
맹인잔치를 열어 아버지를 만났는데 딸을 보자 반가움에서 아버지 심봉사가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효성에 하늘이 감복을 해서 보답했다는
주제입니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에 형성된 작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고 우리 민족예술인
판소리로도 여러 모양으로 전수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날 이기적이고 어른들에 대한
효의 사상이 줄어드는 요즈음 세상에도 심청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이니다.
교회의 전례용어로는 봉헌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 물건, 특히 자신의
모든 행위, 기도 등을 하느님께 기꺼이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모세의 법에
따라 모태를 열고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탈출, 13,1; 22,28-29)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주께서 사람이나 동물의 주인이심을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법에 따라 예수님의 부모도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바친 사실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는 예식으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 성전에
봉헌한 것입니다.
교회는 이 축일에 성당에서 쓸 초를 축성하여 성당의 전례와 가정에서 기도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성탄 후 40일째 되는 2월2일로 성전에서 봉헌되는 것을
기념 하하며 초를 축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봉헌의 의미로 각 수도회에서는 이 봉헌축일에 첫 서원 아니면 성대성원인
종신서원을 하여 수도자의 한 삶을 주님께 봉헌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교황님께서 오늘을 ‘봉헌 생활의 날’로 봉헌된 수도자 성직자, 그리고
예비 성소자들을 위해서도 교우들이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생명을 바쳐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초가 빛을 내는 것은 자신을 태워서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희생제사를 바치며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것입니다.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당신 자신이 대 사제이시며 동시에 십자가에서 속죄제물이 되심을
이렇게 고백하며 주님께서는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7-18)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양처럼 주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스스로 약한 사람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유혹받고 넘어지기 쉬운 사람의 사정을 누구보다 아시고 보살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봉헌축일을 맞으면서 우리 자신을 또한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우리 가정도 우리의 신앙의 공동체도 새해를 맞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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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봉헌된 축성의 삶♣
오늘은 나자렛에 머물던 아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또한 오늘은 1997년부터 교회가 ‘축성(봉헌)생활의 날’로 정하여 주님께 삶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부모는 당시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였다. 주님께서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봉헌되신 이 날 다 함께 우리의 봉헌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주님께 삶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도록 하자.
라틴어 ‘콘세크라씨오’(consecratio)는 우리말로 봉헌과 축성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핵심적인 말이다. ‘봉헌’이란 인간 편에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과 선을 주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배타적으로 유보시키고, 감사와 찬미의 응답으로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다.
‘축성’은 인간의 자발적인 사랑과 희생과 헌신에 대해 하느님 편에서 축복해주시고 당신의 거룩함에 참여시켜주는 것이다. 우리네 삶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라면 ‘봉헌된 축성’ 또는 ‘축성된 봉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축일에 듣는 말씀들의 주제는 봉헌이다. 봉헌이란 거룩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봉헌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께만 유보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힘으로 노력으로 거룩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봉헌이 참될 때 그분은 우리를 축성하여 주신다. 희생 없는 봉헌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희생은 자신의 어떤 것을 포기하고 참아 받는 그 이상의 훨씬 더 깊은 뜻이 있다. 시메온의 고백처럼, 예수님께서는‘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인데(2,34), 그분과 함께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성모님의 고통은 십자가 밑에 이르러 극에 도달한다.
신앙인의 희생은, 곧 자신을 온전히 희생한 예수님의 구원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봉헌은 나의 일부를 일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때에만 바치는 희생이 아니라, 전인격적이며 항구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봉헌은 ‘남김없이 건네줌’이며 ‘되돌려드림’의 삶이다. 정결예식은 히브리인들이 에집트에서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될 때 그들의 맏아들들이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맏아들 예수는 생명을 내놓고 피를 흘림으로써 궁극적인 해방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임을 깨달아 머뭇거림 없이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하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깨끗하고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라는 말라키의 말씀처럼 우리의 봉헌은 늘 대가나 인정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하리라!
우리의 봉헌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가르침을 재현하는 삶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 증거가 되어야 하며 이는 곧 예언자적인 소명을 일깨워 준다. 축성된 삶이란 그저 자신의 내적 생활만을 추구하거나 순수영성주의에 빠져 안일하게, 그리고 초월적인 신비나 자신의 내적인 만족만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하여 참된 사랑과, 하느님의 진리, 복음적 가치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할 중대한 사명을 받았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살아있는 복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봉헌생활은 교회생활의 ‘필수 부분’이며,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잠에서 깨어나 주 예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기 위한 철저한 자기 봉헌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적 가치의 풍성한 표현이 되어야 하리라.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고, 구원의 희생에 자신을 일치시키며,
모든 것을 기꺼이 되돌려드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야말로 인류 성화에 대한 더 완전한 표현이 될 것이며, 이 세상에 복음적 가치를 일깨워 주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예언자적인 소명인 것이다.
우리 모두 ‘주님 봉헌 축일’과 ‘축성생활의 날’을 맞아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의 원점을 확인하면서 나날의 삶이 그분께 드리는 더욱 철저한 사랑의 봉헌이 되어 세례의 축성을 꽃피울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모으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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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봉헌된 이들의 전형이 보입니다.
"주님의 율법에 ...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루카 2,23).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루카 2,24).
"주님의 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루카 2,39).
먼저 예수님의 부모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두 분은 자신들을 통해 이루시는 하느님의 계획에 기꺼이 순종하며 율법에 따라 아기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선한 유다인입니다. 이처럼 봉헌된 이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5).
특히 마리아는 자신의 영혼을 고통에 내맡깁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 없이 구원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봉헌된 이는 타인의 선익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고, 그 모습은 사람들 안에 잠든 선성(善性)을 일깨웁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 기다리는 이"(루카 2,25).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루카 2,25).
시메온은 기다리는 이입니다. 그는 주님의 그리스도가 오시리라 믿었고 그 만남에 전 생애를 걸었지요. 긴 세월을 기다리면서 실망한 순간도 많았을 겁니다. 내노라 하는 학자나 임금들, 정복자들이 성전에 들를 때마다 '혹시 저 사람이 아닐까' 기대했다가 이내 꿈이 거품처럼 스러지는 체험을 수도 없이 했을 터입니다.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의로움과 독실함, 성령의 현존 안에 머무름"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다림이 어느 한 순간에 뚝딱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의 여정 동안 이어지는 믿음의 수행이고 고요한 투쟁이기에 그렇습니다. 봉헌된 이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의 등불을 꺼버리지 않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7).
한나 예언자의 온 생애가 봉헌의 삶을 보여 줍니다. 그녀는 성전에 머무르며 기도와 단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은총을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세상 욕망과 재물, 관계에 초연하기 위해 많은 좋은 것들을 내려놓고 가장 좋은 몫을 택한 지혜로운 여인이지요.
"아기에 대해 이야기하였다"(루카 2,38).
한나는 자기가 만난 구원자를 제 안에 가두어두지 않고 나눕니다. 하느님을 홀로 독점하지 않고 구원을 갈망하고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내어줍니다. 봉헌된 이의 체험과 이야기는 증언인 동시에 희망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오늘 봉헌되신 우리 예수님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까요?
"깨끗하게 하고 ... 정련하여"(말라 3,3).
제1독서에서 말라키 예언자는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실 주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불순하게 때묻어 뒤섞이고 오염된 우리의 영육을 정화하고 정결히 해주십니다. 이로써 깨끗하게 된 우리가 주님께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도우십니다. 봉헌된 이는 그 존재와 행위를 통해 세상에 순수함을 일깨웁니다.
"자비, 하느님을 섬기는 충실한 대사제, 백성의 죄를 속죄, 고난 겪으심, 유혹 받으심"(히브 2,17-18).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의 사명이 보다 구체적으로 낱낱이 언급됩니다. 그분은 자비를 베풀고 아버지를 섬기는 동시에 백성의 죄를 없애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고난과 유혹을 겪으십니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봉헌의 길을 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을 내어놓는 봉헌은 제 영혼을 거룩히 하는 동시에, 세상의 구원을 위해 미약하나마 기도와 보속, 희생을 그치지 않고 바칩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봉헌된 이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총애를 받은 사람입니다. 진정한 봉헌은 제도나 단체를 대상으로 하기 이전에 하느님께 드리는 전인적인 헌신이기에 그분을 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다 내어드리는 이를 특별히 사랑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부족하지만 제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의 그 사랑이 하느님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곧 총애의 열매이고 증거입니다.
세상 한가운데서, 제도를 넘어서 영으로 주님께 봉헌하는 삶을 사시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 전하는 사람, 순결과 순수를 일깨우는 사람, 속죄와 희생의 사람, 그리고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가난하고 미소한 채로 봉헌의 의미를 되새기며 영혼 가득 주님을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행복한 축제일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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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주님 봉헌 축일.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삶
<2025.2.2> 아침을 여는 묵상 (수 22:1~9절)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삶❞
❚ 신앙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날마다 깨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하나님께 순종하고 책임을 다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3절).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하는 일까지 완전히 마무리한 여호수아는 이제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분배받았던 지파들을 돌려보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를 자신이 머물고 있는 실로 성소 앞으로 불렀습니다. 이들은 요단 동편에서 이미 기업을 얻었음에도 형제들의 전투에 힘을 보태기 위해 강을 건너와 함께 싸웠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의 말에 순종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을 다 지켰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 서편 지파들의 가나안 땅 정복과 분배 과정에서 맡은바 책임을 다한 그들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삶의 원리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형제와 자매를 도와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워나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어려운 일을 당하여 힘겹게 살아가는 형제와 자매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계명이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단 동편에서 이미 기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너와 이스라엘 전체의 일에 참여하고, 전쟁에 참여함으로 그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다하여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 자신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맡겨진 일에 책임을 다하므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크는 삶이어야 합니다(4~6절).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요단 동편의 기업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요단 서편 지역에서 기업을 분배받은 그들의 형제들에게 안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4절). 그리고 그들이 이제까지 잘했던 것처럼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명령과 율법을 앞으로도 열심히 지킬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계명을 지켜 그를 가까이함과 아울러,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그를 섬기라고 지시(5절)하고 나서 그들에게 축복하고 보내니, 그들이 자기들 땅으로 돌아갔습니다(6절).
어려움과 환난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에는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살아가는데, 그 과정을 견딘 후에 안타깝게도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열한 싸움을 싸울 때는 긴장을 늦추지 않지만 안식을 얻은 후에는 마음이 해이해져 교묘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같이 수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한시라도 영적 긴장감과 경계의 끈을 늦춰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은 어떤 시험도 너끈히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의 비결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잊지 말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을 신뢰하고 은혜를 나누는 삶이어야 합니다(7~9절).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모세가 바산에 있는 땅을 기업으로 주었고, 남은 반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요단 서쪽에서 기업을 주었습니다. 아울러 여호수아는 바산 지역을 기업으로 받은 므낫세 반 지파를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기 전에 그들을 축복합니다(7절). 그리고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채로 요단 동편 지역에 남아 있던 형제들과 많은 전리품을 균등하게 나누라고 당부합니다(8절).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여호수아의 축복을 받은 후,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그들의 기업이 있는 길르앗으로 떠났습니다(9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 언약 공동체로서의 일체감과 동질감을 분명히 되새기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백성의 ‘하나 됨’이라는 주제를 보여줍니다. 내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길 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관심을 갖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곤경에 처했으면 그를 도와주어야 하고, 좋은 것을 얻으면 이웃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얻은 신앙의 전리품을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눔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에 책임을 다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신앙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더욱더 깨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따라야 할 삶의 원리들을 지켜 나아갈 수 있기를(22:1~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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