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화 무덤-1
(*이 글은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내용이라서 조금 길게 하겠습니다.)
후한 말이 되면, 사당을 짓고, 화상석으로 장식하는 등, 무덤이 무척 호화로워진다.
후한 환제(제위 147-167) 때 산동성 태산 인근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진압군을 출병하면서, 산동 지역의 하급 관리인 안국이라는 사람도 출병하였다. 병이 들어 고향(태산 남뽁 60km 쯤인 지역)으로 돌아왔으나 34세에 죽는다.
그의 가족(부모와 두 동생, 부인 그리고 아들(아들도 일찍 죽는다.))은 봉분을 만들어 주변에 상록수를 심고, 사당을 만들고, 비석도 세웠다. 장례의 비용이 어마어마 해서 그들의 재산 정도로는 무리를 하였다.
여기서는 안국사(安國祠)의 비명을 살펴보겠다.(위나라의 조비가 호화무덤 철거령으로 사당은 폐기됨) 비문의 1/5정도만 무덤의 주인인 안국의 경력 등의 이야기이고, 3/5정도는 이 무덤을 만든 동생 2명을 칭찬하는 내용이다. 안국의 장례를 치룬 동생은 孝심이 극진하고, 평소의 행동이 훌륭하면 샹활이 독실하여 군자라는 말을 들을만한 인물이다. 유명한 건축가, 돌 다듬는 기술자 등을 불러서 무덤 축조를 함으로 그의 모든 재산을 소진했다. 그리고 아랫 사람에게도 잘 대해주었다.
등등의 이런 내용이 망자인 안국을 기리는 글이 아니고, 무덤을 조성한 두 동생을 ᅟᅡ칭찬하는 내용이 비운의 중심이었다.
이 비문을 새긴 지는 2000년이 지났다. 감동적으로 표현햔 명문장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짧게 기술하였다. 이 비문은 무덤을 만드는데 중심 역할을 한 동생들이 비문을 읽는 사람에게 죽은 형보다 무덤을 만든 동생에게 더 깊은 연민을 느끼도록 쓰여져 있다. 비 자체가 솔직히 말해서 죽은 자보다 살아있는 자신들에게 더 많은 연민을 느끼도록 쓰여있다.
한나라의 정치 이념은 유가 사상이었다. 孝가 유가사상의 중심이다. 국가는 효행을 강조했다. 호행을 보인 사람은 지방 행정 기관이나 중앙의 관리로 채용되는 길이 있었고, 상도 받았다.일반인들이 자신의 효행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화려한 장레식을 치루면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았다. 무리해서 장례를 치룬 이유였다. 장례식이 자기들을 효자로 알리는 좋은 기회였다.
후한 사람이 환관이 호화 무덤을 비판한 글도 보자.
“요즈음, 부모가 살아 있을 때에는 사랑과 공경을 보이지 않다가, 죽으면 자식들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돈을 써가며 부모를 높이고 있다. 진실로 슬퍼하는 마음이 없으면서도 부모를 후장하고 많은 돈을 써면 효자라고 불러준다. (생략) 이 때문에 일반인들도 많은 돈을 써가며 이런 장레식을 보방하느라 집과 재산을 팔고 있다.”
환관은 기념비 뒤에 숨어 있는 위선을 고발하고 있다.
첫댓글 오늘날과 비슷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