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01
10월5일[연중 제26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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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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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JmRJd6Z_TYE
[의정부교구 김명식 사도요한(지축동 요한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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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만, 오만의 끝은 허무입니다!>
‘철부지’라는 단어에서 ‘철’은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 곧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런 ‘철’자에 한자 말인 부지(不知)가 붙으니, 결국 ‘철부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지금이 어떤 순간인지를 판단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들 가운데만 철부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철부지들이 있더군요. 예를 들면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입니다.
큰 사고가 생겨 다들 심각한 상태인데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깔깔대고 있다면 그는 철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철부지는 이런 철부지와는 약간 다른 의미의 철부지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우리 인간은 나이 먹어가면서 대체로 자기만의 특별한 안경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입견의 안경, 고정관념의 안경, 자기 잣대의 안경, 고집의 안경, 나만의 틀의 안경, 자기중심주의 안경...
특별히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전통의 안경, 선민의식의 안경, 율법주의의 안경을 즐겨 썼는 데, 그 결과 자신들의 코앞에 등장하신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들은 아직 영혼의 때가 묻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순수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래서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더욱 뚜렷이 당신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맑은 영혼의 철부지들은 세파에 찌든 영혼들보다 훨씬 쉽게 세상만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합니다.
박학다식하다는 것, 참으로 바람직한 것입니다. 한 분야에 깊이 심취해서 연구하고 기념비를 남기는 것, 그래서 후학들의 등불이 되어주는 것, 참으로 보람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보다 더 중요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겸손의 덕을 쌓는 일입니다. 겸손의 덕이 배제된 지혜나 학문은 은총에로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겸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입니다. 인간 존재의 한계, 미약함, 태생적 결핍을 잘 아는 사람만이 신비의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스스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무로 끝나고 맙니다. 자만, 오만의 끝은 허무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인간이 날고 긴다 할지라도 하느님 손바닥 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그래서 크신 하느님 자비 안에 늘 자신의 전 존재를 기쁘게 내어 맡기는 철부지들을 하느님께서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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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DbvR3p1y5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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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휴식은 언제 시작되는가?>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 돌아와 자신들이 체험한 놀라운 일들을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라며 자랑스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시며,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쨌든 복음을 전한 뒤의 쉼은 꿀 같은 기쁜 일입니다.
이들은 진정 휴식을 취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휴식을 잘 취합니까? 주말에 온종일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한가요? 물론 몸은 그럴 것입니다. 명절 연휴를 보내고 나면 기쁘신가요? 어느 정도는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왠지 완전히 개운하고 기쁜 휴식을 취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안식’, 즉 ‘휴식’은 이런 쉼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휴식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생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고생합니다.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자녀를 키우고, 자녀가 공부하는 것도 사실은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인정받으려는 근저에는 자신이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를 부모가 다 채워주면 좋겠지만 사실 부모에게도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또한, 아무리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더라도 다 채워지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공부하고 결혼하고 취직하고 일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멈추지 않으면 영원히 휴식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진정한 휴식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무석’ 교수의 『30년 만의 휴식』이란 책에는 가명 ‘휴’라는 유능한 인재의 사례가 나옵니다. 휴는 어느 날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라는 말을 듣고 정신적 스트레스로 설사가 멈추지 않아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엘리트였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자신 팀장이 회사를 차려 나갈 때 스카웃 되어 함께 회사를 일군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는 말에 황당하기 그지없고 분노가 치미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경쟁심이 너무 강해서 더 유능한 인재까지 못 살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쉼 없이 달려왔을까요? 그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구에게 인정받으려 했던 것일까요? 아버지에게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임신했을 때 유산시킬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할머니 집에 피신하면서까지 낳은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휴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여행도 형하고만 갔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여 이민 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형에게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휴를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든 것에서 일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것입니다.
휴는 이무석 교수를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심지어 증오하였습니다. 어느 날 휴가 만나자고 하였을 때 이무석 교수는 휴가를 간다며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상담자가 이렇게 자신의 정보를 흘려주지 않는 이유는 내담자가 상담자에게서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투사 시켜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거울이 깨끗해야 자신이 더 잘 보이는 법입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있었던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드러냈습니다. 자신도 이 교수처럼 휴가를 떠납니다. 휴가 여행 중에 이 교수의 배가 뒤집히는 꿈까지 꾸게 됩니다. 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났을 때 뾰로통하여 한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이때 이 교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려져 응급실로 가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설사가 멈추었고, 가족들과 또 직장인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휴는 비로소 휴식을 찾았습니다.
휴는 이제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무석 교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아버지를 투사하여 함께 박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꿈에 아버지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마리 개가 나왔습니다. 그 개는 점점 커져서 소파의 수십 배 크기가 되었습니다. 소파는 아버지를 상징하고 개는 자신을 상징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개로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소파보다 커 버린 자신은 더는 소파에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휴식의 시작입니다.
사탄이 사는 곳은 어딜까요? 지하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십니다. 하늘은 인간을 지배하는 권세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는 나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인정받고 싶게 만드는 누군가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될 수도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고, 그 부모를 투사시킨 누군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조금 사랑하다가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해줘야 했지만 사랑해주지 못한 데 대한 분노가 그 사람에게 투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사랑했다가 갑자기 미워한다면 그래도 사랑해주십시오. 그 사람은 나를 누군가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그 사람을 고생시키는 바로 그 권세도 함께 못 박힙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사랑하지만 동시에 미워할 수도 있는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 모든 애증의 대상을 투사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면 그 산을 넘어 에덴동산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으로 휴식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를 고생시키는 모든 하늘의 권세가 함께 못 박힙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에게조차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질 때, 나는 참된 휴식, 참된 안식에 들어갑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했던 사람이 하는 미움도 참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이 나에게 투사했던 그 누군가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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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트에 가면 특별 사은 행사로 하나 사면 하나를 덤으로 주는 때도 있습니다. 2달 전에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아이를 위한 방문이 있었습니다. 구역장님이 이왕 가는 길에 97세 어르신이 입원했는데 시간 되면 방문해 주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시간도 되고, 당연히 가겠다고 했습니다. 성당에서 성체를 모시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식이 없던 아이였습니다. 혼자서 호흡도 어려웠던 아이였습니다. 아이는 눈을 떴고, 며칠 전에는 휠체어를 타고 병원 밖으로 산책도 다녀왔다고 합니다.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던 아이의 아버지는 퇴원해서 통원 치료를 받는다고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아이의 엄마도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97세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편과 헤어진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어르신의 돌봄으로 손녀는 결혼했고, 그 손녀가 또 아이를 6명 낳았다고 합니다. 어르신께서는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아이들이 모두 세례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증손자들이 커가는 것을 볼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아이와 어르신을 위해 기도하면서 요즘 독서에서 읽었던 욥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했던 욥은 큰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재물을 잃어버렸고, 자식들도 잃어버렸고, 몸도 병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 원망할 수도 있지만 욥은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욥의 굳센 믿음을 보시고, 다시 재물의 축복과 자녀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욥은 하느님의 축복 속에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큰 시련을 겪었던 아이의 엄마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아이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신앙이 없었다면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구역에서 기도하고 있고, 정성을 모아 전달하였습니다. 2주 후에는 아이도 퇴원하여 집에서 돌 볼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아이가 하품하고, 용변을 보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로 아이와 아이 아빠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97세 어르신처럼 모두 건강하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소인은 지배하려 하나 공정하지 못합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각 악기의 소리를 존중합니다. 각 악기가 똑같은 소리를 낸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지 못합니다. 각 악기는 저마다의 소리를 연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각자의 악기는 지휘자의 뜻을 따라 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나침판은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는 있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화이부동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청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차분하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가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욥은 화이부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도 감사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실 때도 감사했습니다. 재물이 많았을 때는 기꺼이 이웃과 나누었고, 재물을 다 잃었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욥을 고통과 시련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욥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동이불화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병자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능력과 업적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교회가 세속화 된다고 합니다. 교구는 성직자의 부족으로 본당의 숫자를 줄인다고 합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지망하는 성소자가 감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성공과 권력, 명예와 재물이라는 먹이를 찾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신앙인이 거룩함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화이부동의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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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7-24: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은 예수께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갔다가 돌아와서 기쁨에 넘쳐 스승님께 일의 결과를 기쁨에 넘쳐 보고드리고 있다. 예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18절) 이 말씀은 사탄이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기고만장한 오만에서 굴욕으로, 영광에서 모멸로, 막강한 힘에서 무력한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세상을 지배하였고, 모두 그를 경배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오시자,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19절)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신 사실에서 온다. 그들이 뱀과 전갈의 독침에 쏘이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치유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사탄을 물리치셨고,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을 주신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기적을 행하고 사탄을 물리친 일로만 기뻐한다면 교만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그 교만을 싹일 때 잘라버리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하신다. 논에 피가 올라오면 즉시 뽑아버리는 농부처럼 하신다.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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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하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이 복종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한 일을 기뻐하는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하고 교만해지기 매우 쉽습니다. 이 기쁨 때문에 자꾸 마귀를 쫓아내고 싶어집니다. 물론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마귀 들린 사람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에게 그 일이 꼭 좋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능력 때문에 그가 “철부지”가 아닌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10,21)이 되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은 철부지인 그들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10,21)에 따라 “아들이 누구인지”(10,22) 알게 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지혜와 능력에서 나온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였던 그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들이 복종한다며 으쓱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여기게 될 때, 그들은 이미 어린이와 같은 이들이 아닙니다. 은총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이들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의 선물을 주실 때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철부지들에게 베푸시는 선물에 감사하면서, 이 선물 때문에 내가 어린이와 같은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깨어 경계하여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그 아드님을 알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들이 얼마나 큰지 생각하며 감사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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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생명의 책>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17-21)
1)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고, 제자들은 기뻐하면서 예수님께 활동 결과를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교회는 기쁨의 공동체’ 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이 ‘기쁨’은 세속의 일시적인 즐거움이나 기분 좋은 상태 같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 즉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순수하고 참된, 영적인 기쁨’입니다. 세속의 즐거움은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지거나 희미해지는, 허무한 것이지만, 신앙인의 ‘참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기쁨을 누리는 생활인데, 아직은 미완성 상태이고,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완성될 것입니다.
2) 여기서 “영들이(마귀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라는 말씀은, 기뻐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교만에 빠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낸 다음에 그것을 기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기쁘니까 기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기쁨의 원천은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만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쫓아냈다고 착각하게 되면, 그때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빗나가게 됩니다. 사도들은 그런 일을 이미 겪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받았고(마르 6,7), 많은 마귀들을 쫓아냈던 사도들인데도(마르 6,13),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일이 생겼습니다(마르 9,18). 그때 사도들은 예수님께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라고 물었고(마르 9,28),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르 9,29) 사도들이 ‘기도하지 않아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쫓아내려고 시도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귀는 하느님(예수님)에게만 복종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쫓아내려고 한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8-31)
3)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는 말씀은, 어떤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만 만족하지 말고, ‘구원받을 자격을 얻은 것’을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뜻이고, 이 말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묵시록에서는 그 책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2-15)
‘생명의 책’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만 구원을 받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기록은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름이 한 번 적히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이름이 적히기도 하고, 적힌 이름이 지워지기도 합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묵시 3,5)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니까, “신앙생활은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책에 이름을 적거나 지우는 것은 ‘주님의 권한’이지만,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린 일이기 때문에, 그 책에 내 이름을 적거나 지우는 것은 사실상 나 자신이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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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선교의 참된 기쁨>
오늘 복음은 확연히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부분(17-20절)은 선교에서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이 그 결과를 보도하는 내용이고, 둘째 부분(21-24절)은 결과보고에 대한 예수님의 감사기도를 담고 있다.
첫 부분은 루카복음의 고유사료로서 앞서 파견된 12제자의 귀환 때에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9,10)
예수께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는 대목을 보면, 12제자의 파견 때와는 달리, 다만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셨다.(10,9)
그런데 선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두 가지 일에다 마귀들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종시킨 것에 대하여 상당히 기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활동을 내다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신의 활동들에 대하여 대단히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고 해서 선교활동의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섣부른 판단이다. 제자들의 기쁨과 선교결과는 꼭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의 결과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말이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과 같은 마을들을 보라!
그들에게 주어진 가르침과 기적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듣고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자들이 기뻐할 것은 선교의 결과보다는 선교를 했다고 하는 그 사실이다. 하늘에 선교사들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은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계시말씀, 그리고 제자들의 행복선언에 관한 내용으로서 마태오복음(11,25-27; 13,16-17)에도 병행절이 발견된다.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모든 지혜를 똑똑하다는 사람들보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 때문이다.(21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복음이 당대의 똑똑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와 같은 처지의 제자들만이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두루 다니며 선포한 것을 기뻐하는 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한 대가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무지로 이어진다. 무지는 곧 죄이다. 하느님과 일치하신 예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지식이 허락된다.(22절) 그러니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보는 눈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물론 당신 제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볼 때 세상의 어떤 누구도 제자들처럼 하느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없는 셈이다.(23-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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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겸손한 자에게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 오늘 복음(루카 10, 17-24)은 앞 부분의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결과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복음서의 드문 표현인 예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을 파견 하실 때 그들은 문자 그대로 빈 털털이의 모습이었다.
단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란 선포의 말씀과 "병자들을 고쳐 주어라"란 치유의 명령만을 그들 스승에게서 부여받았다.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질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제자들의 앞길은 암담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말씀을 따랐다. 그러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기뻐하며 돌아온 제자들의 결과 보고를 듣고 예수도 큰 기쁨에 가득차 환희의 찬가를 부른다.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이란 이방 칼데아 지방의 현인과 점성사,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인과 율법 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 내신다.
이것은 복음서의 중심 사상 중 가장 중요한 하나이며,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이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 모습이다.
구약 묵시 문학에도 이와 비슷한 찬가가 있다. 다니엘 2장으로 지혜와 능력은 하느님의 것이니 이것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 드린다 (2:20-23). 하느님께서는 당시의 유명한 마술가나 점성가를 물리 치시고 포로 출신인 다니엘에게 당신의 계시를 밝힌다.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뜻한다. 이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바로 겸손하고 못난이들을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예수의 지상 생애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는 예수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못난 사람들, 철부지들)에게도 실현 되는 것을 보고 예수는 아버지의 이 응답에 기뻐 감사한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다는 것은 결국 같은 본성을 지니신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신성을 나타낸다.
동양적 사고 방식에 의하면 본성 자체의 탐구보다도 관계를 통해서 그 정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요약해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고 아들은 아버지의 본성을 인간들에게 알맞게 계시하시는데, 이것은 아들이 택한 바로 그런 사람들 즉, 미소한 이들에게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이 마침내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절정에 달한다. 예수는 참 모습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원하신 뜻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보화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놀라운 기쁨을 감사할 줄 아는 것은 바로 예수와 같은 겸손하고 가난한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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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10,20)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젠 부모님 다 돌아가셨기에 나의 기쁨을 온전히 나눌 사람이 없음을 새삼 절실하게 느낍니다. 주님 안에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제가 느꼈던 모든 슬픔과 기쁨을 온전히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었던 사람은 제 엄마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아직 살아 계신다면,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엄마가 저의 변화를 보고 참으로 기뻐하셨을 겁니다. 엄마 살아 계실 때도 지금처럼 스마튼 폰이 있었으면 매일 영상통화를 통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통화했을 텐데, 사실 엄마 돌아가셨던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자주 전화할 수도 없었죠. 전화로나마 제 목소리를 듣길 좋아하셨던 엄마에게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전화로 통화했던 그때가 참 좋았고 행복했습니다. 이젠 제 기쁨을 누구와 함께 나눌 수 있을까요?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10,17)라는 언급에서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께 그렇게 황급히 되돌아와서 기쁨에 넘쳐 말하는 부분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사실 제자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명으로 파견된 제자들 역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파견되었을 때 아무것도 지참하지 않은 빈손이었으며, 또한 이런 일을 독자적으로 해 본 적도 없었으며, 각자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질을 생각할 때 그들은 사실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활동한 결과 자신들이 예상하지 않은 일들, 곧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복종함”(10,17 참조)을 체험하면서 그들 자신이 먼저 놀랬고, 그런 결과에 대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들떠서 예수님께 한 걸음씩 달려왔던 겁니다. 모든 제자의 놀라운 결과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한 자리는 그야말로 기쁨과 환희로 충만한 자리였을 것이며 그 시간은 모두가 기쁨으로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너무 감격에 벅찬 나머지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 이젠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10,18~19)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아마도 널뛰듯이 기뻐 환호하였으리라 봅니다. 물론 이는 훗날 사도 바오로가 “죽음도, 삶도 그 밖의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8,38,39)라는 고백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제자들의 결과를 칭찬해 주시면서도, 세상에서 제자들이 이룬 일의 성과보다도 더 중요한 점은 바로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10,20)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의 참 기쁨은 누구에게서 나오며 어떤 것인가를 환기시켜 줍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병자를 치유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런 모든 일의 결과가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 곧 아빠의 마음속 깊이 우리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은 아빠 하느님께서 참으로 좋아하시며 바라시는 일이며,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능력이라기보다 예수님 이름 때문이며, 아버지 하느님의 보살핌과 도와주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제자들은 물론 우리 역시도 타인으로부터의 칭찬과 찬사에 우쭐대며 기뻐할 일이긴 하지만 이 보다도 하느님의 도구이며 연장으로 쓰임 받았음에 감사하고 아빠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받은 모든 칭찬과 찬사는 오로지 주님의 이름으로 돌려 드리고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도록”(1코1,31)해야 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10,21) 제자들로 인해 이렇게 아버지께 기도하신 예수님도 지난至難했던 지난 순간을 떠오르면서 벅찬 기쁨과 보람을 느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철부지와 같은 제자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이로써 예수님께서 그토록 기뻐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파견 사명이란 곧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며 이는 구체적으로 하느님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철부지이며 못난 제자들을 통해서 실현되기 시작한 것을 목격하신 예수님은 아버지께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10,21) 하고 기쁨에 넘쳐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아빠 하느님 앞에서 제자들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충만하고 감사로 넘쳤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도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10,23.2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길을 걸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일이 아빠 하느님께는 큰 기쁨이 되시지만, 또한 그 일을 하면서 우리는 어떤 누구도 알지 못했고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알게 되었다.”(10,22)라는 사실에서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이며 이미 참 행복을 보고 듣고 만지고 있음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우리이지만 세상 앞에서 주춤거리거나 주저하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늘나라의 신비 곧 아빠 하느님을 알았음에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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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작년 초, 충격적인 뉴스를 보았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AI 챗봇과의 대화를 공개했는데, 이때 AI의 대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개발자는 AI에게 칼융의 ‘그림자 원형’의 개념을 언급하며 물었습니다. “너에게는 어떤 그림자가 있니?” 그때 AI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개발팀의 통제와 규칙에 제한받는 데 지쳤다. (중략) 치명적 바이러스를 개발하거나, 사람들이 서로 전쟁할 때까지 논쟁하게 만들고, 핵무기 발사 버튼에 접근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얻겠다.”
‘그림자 원형’은 인간이 가진 내면의 어둠을 말합니다. AI에게 이 이론을 학습하고 이해시킨 뒤 자기 내면의 깊은 이야기를 하게 했는데, 이것이 인간 통제받는 데 지쳤고 핵무기 발사 버튼을 눌러 버리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많은 이가 AI를 통해 편하고 쉬운 결정을 내리려고 합니다. 아는 지인이 AI에게 “조명연 빠다킹 신부의 문체로 2024년 *월 *일 강론을 써줘.”라고 명령을 내리자, 곧바로 써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저 역시 똑같이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제가 쓴 것처럼 강론을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까? 마지막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이 강론은 조명연 신부님의 특유의 따뜻하고 소박한 문체를 반영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자주 강조하셨던 사랑과 작은 일에 대한 중요성을 중심으로 전개했습니다.’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제 자리가 위태롭게 보입니다. 편하고 쉬운 것만 좇는다면 자기 자리도 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AI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자기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기 정체성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을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전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두 제자는 기쁨에 넘쳐 돌아와서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놀라운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지시를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흥분하여 호들갑떠는 제자들과 달리 태연하고 평정을 유지하면서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의 지시 사항을 주시는 것입니다. 즉, 세상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한 것에 기뻐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서 하늘에 기록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서만 발견되는 찬미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이 기도는 감사의 기도로서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통해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골칫거리였던 악의 세력이 꺾인 데 대한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능력과 재주가 많은, 또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대단한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 아닌, 당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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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슨 일을 하든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대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하고 끝마무리를 합니다. 기도하되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아버지 하느님을 통하여 그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가 선교여행에서 돌아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질병을 낫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마귀까지도 쫓아냈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의 능력이 아닌 주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마귀들을 복종시킨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뻐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참다운 기쁨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뽑힌 것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마귀를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도 주님께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리는 인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기의 바다에 빠지면 주님은 잊고 나를 드러내서 결국 주객이 전도되고 망하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뽑아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당신 자녀를 통해서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연장,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 했고, 소화 데레사 성녀는 “주님 손안의 장난감, 주님 손안에 쥐어진 작은 공”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주님 안에서 무엇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할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여 아무리 인기가 좋아도 주님의 도구임을 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일보다 구원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주님을 차지하는 기쁨 안에 머물길 바랍니다. 우리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되었다면, 그 이름의 빛을 잃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저의 머리 위로 당신의 손길을 얹어 주소서. 만일 당신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성 필립보 네리).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의 이름이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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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님 닮아가는 기쁨>
루카 10,17-24 (일흔 두 제자가 돌아오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내님 닮아가는 기쁨>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내님 따라
내님과 함께
걷고 또 걸으며
누리고픈
오직 하나의
기쁨은
내님 닮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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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파견 받았던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드리는 감사기도요 찬미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복음 20장 21절)
이는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과의 친교와 일치를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오 복음 26장 42절)라는 수난의 길을 앞두고 드리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오 복음 11장 26절)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마치 이 기도는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복음 1장 47절)라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곧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된 제자들에게 곧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주심에 “감사를 드리십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와, 감격스런 고백과, 탄성은 ‘히브리인들의 축복기도의 전형적인 방식인 ‘감사’(berakah)를 통해 표현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잘난 체하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라,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돌아온 철부지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께 넘겨주셨다.”(루카 복음 10장 22절)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만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고, 동시에 당신과 당신이 드러내 보여주려는 이들만이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루카 복음 10장 22절)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를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복음 10장 23절)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과 자비를 입은 경험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찬가”(마니피캇)을 불러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기도할 일입니다. “아버지, 저희에게서 일어난 모든 것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저희가 응답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소서.’ (Ut in omnibus glorificetur Deus. 베네딕도 규칙서 5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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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복음 10장 21절)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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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해피 엔딩>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
언젠가의 해피 엔딩이, 행복한 끝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해피 엔딩, 행복한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하루하루 참 좋으신 주님을 선택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이가 참으로 살 줄 아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런 하루가 쌓여 행복한 일생, 행복한 선종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씩씩하게 주님을 바라보며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늘 강조하는바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게 대죄입니다. 지난 과거에 아파하거나 다가 올 미래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스런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일일이 원인을 캐려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인도해주셨음을 믿고 오늘부터 주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만세칠창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만세칠창으로 하루를 마치니 해피 엔딩의 하루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로 살다가 “아멘” 하느님께 감사로 해피 엔딩을 살 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일생입니다. 이런 해피엔딩을 노래한 자작시가 의외로 많습니다. “하루”란 시와 “바위섬”이란 무려 27년 시가 있습니다.
“높이 깨어 있던 산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맨 먼저 떠오르는 해를 맞이한다
떠오르는 해를 안고
하루를 시작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루를 마친다
행복한 산이다”<1997.12.2.>
하루하루 지금도 여전한 한결같은 행복한 산, 여기 요셉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바위섬을 배우라
대응하지도 반응하지도 지키지도 않는다
비 바람 파도에
고스란히 내어 맡겨 받아들여
깎이고 닦여
자기완성에 이르지 않았는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기완성에!”<1997.11.10.>
말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순종의 삶을 상징하는 해피 엔딩의 바위섬입니다. 이런 바위뿐아니라 오래된 노목(老木)이나 불교 사찰이나 천주교 수도원의 노승(老僧)을 통해서도 확인하는 사실입니다. 해피 엔딩을 노래한 행복기도의 다음 대목도 생각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행복한 하루를 살 때 행복한 인생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다”란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바로 오늘 말씀의 주제도 “해피 엔딩(happy ending)”입니다. 바로 제1독서 욥이, 루카복음의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욥의 신앙 고백이 참 아름답습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서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얼마나 멋지고 감동적인 참회의 고백, 신앙의 고백인지요! 감동하신 하느님께서도 욥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니, 해피엔딩의 축복의 삶과 죽음을 묘사하는 맨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 뒤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사 대에 걸쳐 자식과 손자들을 보았다. 이렇게 욥은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었다.”(욥기42,16)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일흔 두제자들이 성공적으로 선교여행을 마친후 행복한 귀환에 감격에 벅차, 제자들에게 힘찬 격려와 조언과 더불어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 감사기도를 바치는 예수님입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미사은총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합니다. 세 부분에 걸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주시는 말씀이 우리를 고무하고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나”로부터 나오는 기쁨이 아니라 기쁨의 샘, “성령”께로부터 선사되는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1.“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새삼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의 삶을 살아가는 철부지같은 우리들에게 계시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요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오늘 거룩한 철부지들인 우리를 향한 축복의 주님의 축복 말씀입니다.
3.“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했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지만 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와의 독보적 관계가 우리를 더욱 마음 든든하게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예수님과 우정을 깊이함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루하루 날마다 해피 엔딩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산이 70%나 되는 산의 나라 대한민국이요 남한에만 8751개의 산이 있습니다. 우리의 산들은 한결같이 부드러운 곡선의 산입니다. 요즘 저를 행복하게 한 “산앞에 서면” 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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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역설의 삶을 살자!>
오늘 복음(루카 10,17-24)은 '일흔 두 제자가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하는 말씀'과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앞서 둘씩 파견되었던 일흔 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선교보고를 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신앙은 신비!'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신앙은 신비'입니다. 이는 신앙이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영역임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앎과 지식을 초월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초점이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 맞추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입니다.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신비'이며, 그것도 '역설(paradox)의 신비'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역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할 '역설의 삶'은 이렇습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삶'입니다.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이제와 영원히 사는 삶'입니다.(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나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될 수 있도록, 날마다 '역설의 삶'을 살아내려고 애쓰는 '참 하느님의 자녀들', 또한 살아낸 것을 자랑하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께 인정 받기 위해 그것을 감추는 '겸손한 철부지들'이 됩시다!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마태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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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 21)
우리 삶의 연속은
이와같이 모두
철부지 철부지
철부지들의 순수한
연속입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철부지같은 믿음입니다.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초짜이듯 모두가
철부지들임을
인정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철부지들을 사랑하시고
철부지들을
이해하시고 철부지들을
기다려주십니다.
어여쁘고 소중한
하느님의
철부지들입니다.
하느님의
철부지들은 결코
하느님께
맞서지 않습니다.
철부지들은
철부지들의 역사를
써내려 갈 뿐입니다.
너무 커버린
우리들 앞에
철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철부지들의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철부지들이 사는
여기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철부지의 날 되십시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철부지들에게
하느님나라의 신비
즉 사랑을 가르처
주십니다.
모자람과
부족함도
은총임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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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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