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심문을 받을 때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당신의 모든 발언
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수사관들은 피의자를 체포할 때 위와 같이 피의자의 권리를 고지해준다. 이를 ‘미란다 원칙’이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법률로 채택하고 있다. ‘미란다 원칙’은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죄 없는 사람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사법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미란다 원
칙’을 고지하지 않으면 정당한 법절차를 거쳐 체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백이 증거 능력을 인정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피의자가 무죄로 석방될 수도 있다.
1963년 3월 2일 밤 11시, 미국 애리조나州 피닉스市에서 18세 소녀 A양이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A양은 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극장 매점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
는데, 그날따라 일이 늦게 끝나서 한밤중에 귀가하는 중이었다. 그때 멕시코系 미국인 에르네스토 미
란다가 다가와 A양의 입을 틀어막고 강제로 자신의 자동차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한 미란다는 수형시설을 들락거리다가 18세 때인 1959년 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러나 훈련을 견
디지 못하고 6개월 만에 탈영했다. 불명예제대 후 떠돌이생활을 하던 중, 1962년 남매를 둔 이혼녀를
만나 동거에 들어갔다. 미란다는 친딸을 얻은 뒤 농산물 집하장에 취직하여 야간에 짐 나르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란다는 20분쯤 달려가 사막 한가운데 차를 세운 뒤 A양을 강간하고 4달러를 빼앗았다. 범행 후 미
란다는 A양을 집 근처까지 태워다 내려주었다. A양의 얘기를 들은 가족들은 즉각 경찰에 신고했다.
담당 경찰관 쿨리는 끈질긴 조사 끝에 3월 13일 미란다를 체포하여 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었다. 쿨리
는 오전 10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변호인 없이 미란다를 심문했다. 미란다는 범행을 강력하게 부인
했다. 그러자 쿨리는 ‘범인식별절차’를 실시했으며, 특수유리를 통해 4명의 혐의자를 살펴본 A양은 1
번이 비슷한 것 같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미란다는 조사실로 돌아온 쿨리에게 A양이 자신을 알아봤느냐고 물었고, 쿨리는 A양이 범인을 분명
하게 식별하지 못했다고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봤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미란다는 범행
일체를 자세하게 자백한 뒤 쿨리가 작성한 진술서에 서명했다. 진술서에는 ‘내 의사에 따라 협박이나
강요, 이익의 약속 없이 임의로 진술했음을 선서한다. 나의 권리를 모두 알고, 진술이 나에게 불리하
게 쓰일 수 있음을 알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쿨리가 이러한 내용을 미란다에게
고지해준 것은 자백 이후였다. 쿨리는 진술을 거부하고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권리도 알려
주지 않았다.
1963년 7월, 미란다에 대한 형사재판이 시작되었다. 법정에 선 미란다는 태도가 돌변했다. 조사실에
서 고문이나 가혹행위는 없었지만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자백하지 않으면 최근에 일어난 유사한 범죄혐의를 다 뒤집어씌워 처벌하겠다고 했습니다. 성폭행
사실만 자백하면 강도 혐의는 불문에 부치겠다, 처벌 대신 성폭행에 대한 정신과 치료만 받도록 해주
겠다고 회유했습니다.”
이에 대해 쿨리는 미란다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사에 임해 순순히 자백했다고 증언했다.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된 앨빈 무어의 공세도 만만찮았다. 70세가 넘은 무어는 그 동안 강간범 35명을
변호하여 그 중 34명을 무죄로 풀려나게 한 유능한 변호사였다. 무어는 경찰관이 조사받기 전에 변호
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미란다가 조사실에서 한 진술이 법정에서 불리
하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도 미리 고지해주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미란다가 자신의 권리
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뤄진 자백은 형사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배심원
들은 만장일치로 유죄로 결정했고, 판사는 7일 후 미란다에게 납치‧강간죄를 적용해서 단기 20년, 장
기 30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무어는 즉각 주 대법원에 항소했지만 대법원은 미란다의 자백이 고문
이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뤄진 게 아니므로 유효하다며 항소를 기각했다.
국선변호인으로서 할 만큼 했으니 그만둘 만도 하련만, 앨빈 무어는 기어이 연방대법원에 상고했다.
1966년 6월 13일, 연방대법원은 5 : 4의 판결로 무어 변호사의 상고를 받아들여 무죄 취지로 애리조
나州 대법원으로 환송했다. 연방대법원의 파기‧환송 이유는 ‘외부와 단절된 조사실 분위기는 본질적
으로 공포심을 일으키고 위협적이기 때문에 피의자가 자유롭게 진술하도록 하자면 사전에 필요한 조
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피닉스市 경찰은 그러한 절차를 어기고 자백을 얻어냈기 때문에 그 자백은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취지였다.
미란다 재판은 당시의 수사관행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피의자의 권리를 획기적으로 넓히는 결정적 계
기가 되었다. 보수적인 미국인들은 연방대법원의 파기‧환송은 수사의 손발을 묶는 판결일 뿐만 아니
라 피해자의 권리보다 범인의 권리를 더 존중한다며 거세게 비난했다. 연방의회도 이러한 여론에 부
응하여 1968년 피의자의 자백이 임의로 이뤄진 것이라면 피의자의 권리를 미리 고지해주지 않았더라
도 증거 능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법률을 제정했다. 같은 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도 의회의 견해에 동조했다. 오랜 세월 법학자들과 각급 수사기관의 열띤 논쟁 끝
에, 연방대법원은 2000년이 되어서야 <‘미란다 원칙’은 미국 문화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연방의회도
폐기할 수 없다.>는 최종결론을 내렸다. 경찰은 즉각 ‘미란다 고지 카드’를 만들어 전국의 모든 경찰
관들에게 배포했다.
- 박형남 지음 「재판으로 본 세계사」 소개 끝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방송 매체를 통하여 늘 듣고 있는 우한 폐렴 소식이지만 어제 래원한 순천한 병원의 다른 분위기로 심각한 전염병 이구나를 실감케 하였습니다. 입구 1층 위급환자 이송 주차장에 간이 검역소를 설치해놓고 우선 발열 검사를 통과 했다는 딱지를 붙여야 들어갈수 있고 나오는 출구역시 한곳 뿐으로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하물며 음.양성 검진을 받기 위하여 1~2주 격리되고 있는 환자의 불편과 심충이 짐작되나 보니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방역과 위생철처에 동참 하여야 겠다는 가짐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