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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란 머리카락
방미진
언제부터인가 내 방에 기다란 머리카락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긴 머리카락.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지나쳤다. 하지만 긴 머리카락은 점점 더 자주 눈에 띄었고, 그걸 볼 때마다 불쾌한 기분이 더해 갔다. 내 방에 나타나는 그 긴 머리카락은 내 것이 아니다. 내 머리카락은 길어야 한 뼘이 조금 넘는다. 그리고 엄마 아빠 남동생 모두 짧은 머리다. 누군가 내 방에 드나들고 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한 사람이. 나는 거실로 나갔다. 엄마가 텔레비전 앞에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엄마한테 먼저 말을 걸고 싶지는 않다. 엄마와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어제만 해도 그랬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나오자, 엄마는 귀신같다며 험담을 해 댔다. 그 가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것뿐 아니다.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건 무조건 안 좋게 보려 한다.
“엄마.”
엄마는 한참 대답 없이 있다가 나를 힐끗 쳐다봤다. 나는 속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걸 꾹 참고 말했다.
“집에 누구 왔었어?”
“아니.”
엄마는 내가 왜 그러는지는 묻지도 않고, 텔레비전 채널만 돌려 댔다. 나는 내 방문을 소리 나게 닫고 들어와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한 올 남김없이 다 치웠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자 긴 머리카락은 또다시 나타났다. 누군가 왔다 간 게 분명했다. 엄마는 얘기하기 귀찮아서 아무도 안 왔다고 하는 거다. 엄마는 언제나 그런 식이니까.
‘진짜 이해를 못 하겠어.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될 걸, 도대체 왜 숨기는 거야? 그리고 내 방엔 왜 들어온 거야?’
엄마와 긴 머리를 한 누군가가 내 물건들을 함부로 만지는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혹시 내 방 물건들 가운데 없어진 게 있는지 확인했다. 엄마는 전에도 내가 모아 놓은 연예인 사진을 마음대로 버린 적이 있었다. 그때도 모른다고 딱 잡아뗐었다.
‘그런데 정말 누가 왔다 간 거지? 내가 알면 안 되는 사람인가?’
그러고 보면 엄마는 누굴 집에 데려온 적이 없다.
‘엄마 친구일까?’
엄마가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 여자와 수다를 떠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아줌마라고 해서 긴 생머리를 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엄마 친구라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낯설었다.
‘엄마한테도 그런 친구가 있었나?’
학원 갔다 돌아온 동생 가방에 긴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어쩌면 긴 머리를 한 누군가는 엄마가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 왔다 간 거지? 엄마는 하루 종일 집에 있는데……'
동생과 나는 학교에서 바로 학원으로 가고, 아빠도 저녁 늦게 집에 온다. 집에 오면 늘 엄마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엄마가 온종일 집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엄마는 집에만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동생이 텅 빈 집에서 긴 머리를 한 누군가와 놀고 있는 모습을 문득 떠올려 보았다. 이상했다.
‘저런 녀석한테 여자 친구가 있다니.’
내가 아는 동생은 재미도 인기도 없고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 컴퓨터 게임만 하는 아이다. 하지만 동생을 향한 의심은 점점 부풀어 올랐다.
‘학교에선 좀 다른지도 몰라. 정말 학원 빼먹고 여자 친구랑 놀러 다니고 있는 거 아냐? 갈 곳도 없고 돈도 없으니까 몰래 집에 와서 노는 건가? 엄마가 외출하는 시간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내 방에서? 혹시 내 일기장을 훔쳐보며 낄낄 대는 거 아냐? 이 자식이 정말.’
화가 치밀었다. 나는 동생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야!”
동생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
“너 내방에서 뭐 했어?”
동생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동생이 앉아 있는 의자를 내 쪽으로 홱 돌렸다.
“에이, 죽었잖아!”
그제야 동생이 짜증을 내며 나를 쳐다봤다.
“너 요즘 학원 빼먹고 놀러 다니지?”
동생 얼굴에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거짓말해 봤자 소용없어. 다 알고 있으니까. 너 여자 친구도 있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짜증나게.”
동생은 의자를 돌려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야! 너, 사람이 말을 하는데……”
동생은 어느새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정말이지 동생들이란 하나같이 재수 없는 존재다. 누나한테 버릇없이 굴고, 나이도 어리면서 맞먹고 무시한다. 이러니 대화가 안 되는 것이다.
“어쨌든 너,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방에 들어오면 엄마한테 다 이를 거니까 그것만 알아 둬.”
“아빠 왔는데 인사도 안 하냐?”
언제 왔는지 아빠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동생은 게임에 빠져 건성으로 인사를 했다. 아빠가 한숨을 쉬며 돌아서는데, 어깨 위에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기다란 머리카락. 아빠가 긴 머리 여자와 다정하게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말도 안 돼! 우연히 머리카락이 묻은 거겠지. 머리카락은 어디든지 있으니까.’
드라마에서 그런 얘기가 나올 때면 가끔씩 아빠를 의심하곤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해 보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아빠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부자도 미남도 아니니까. 아빠는 엄마한테 쥐꼬리만 한 용돈을 타서 쓰고 배까지 볼록 나왔다. 게다가 항상 피곤에 절어 있다. 일하고 집에 오면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다가 잔다. 다음날에는 다시 일하고, 쉬는 날도 하루 종일 잔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멍하니 흘려듣는다. 아빠는 늘 그렇다.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나는 계속해서 아빠를 의심했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할까?’
아닌 것 같다. 엄마는 뚱뚱하고, 잔소리가 심하고, 말이 안통하고, 전업 주부면서도 언제나 집안을 너저분하게 해 놓으니까. 어쩌다 엄마가 머리 모양을 바꾸거나 화장을 하고 있어도 아빠는 별말이 없다.
“밥 안 먹고 뭐 해?”
아빠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고 말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가족들이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밥을 먹고 있었다.
‘도대체 누굴까? 긴 머리를 한 누군가를 집에 데려온 건.’
나는 식탁에 앉아 가족들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날마다 보는 얼굴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낯설었다. 그러고 보면 날마다 보긴 하지만 서로 눈을 맞추고 얘기를 하거나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않는다.
“하하하하.”
엄마가 텔레비전을 보며 웃었다.
“저 사람, 진짜 웃겨.”
곧이어 동생도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웃어 댔다. 아빠도 킥킥거렸다. 모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텔레비전 화면에 기다란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머리카락을 떼어 내려고 텔레비전 앞으로 갔다.
“안 보여. 비켜.”
“아니, 저기 텔레비전에……”
“잠깐! 시끄러워.”
엄마가 다급하게 내 말을 잘랐다. 손짓까지 하면서 말이다. 텔레비전에서 뭔가 중요한 대사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모두들 텔레비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 식사 풍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자기 이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기다란 머리카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다란 머리카락은 내 방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신경 쓰지 않아 몰랐을 뿐 집 안 곳곳에 기다란 머리카락이 있었다. 전화기, 컴퓨터, 소파 위, 심지어는 냉장고 속에도 있었다. 일요일, 아빠가 회사에 일이 있다며 아침 일찍 나가고, 동생은 친구들과 게임방에 갔다. 엄마도 찜질방에 간다며 나갔다. 나는 혼자 집에 남아 책상까지 들어내고 내 방을 청소했다.
‘한 번만 더 내 방에 들어왔단 봐라.’
엄마와 동생이 돌아오고, 저녁상을 막 차렸을 때 아빠가 돌아왔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별 대화 없이 텔레비전을 보며 밥을 먹었다. 그런데 아빠 어깨 위에 또 기다란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엄마도 그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럼, 역시 아빠가……’
저녁을 먹고 나자, 엄마는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고 동생은 게임을 하러 자기 방에 들어갔다. 아빠는 그대로 거실에 남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나는 머리가 복잡해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머리카락이 보였다. 방바닥에 길게 늘어진 기다란 머리카락 서너 올. 분명 저녁을 먹기 전까지만 해도 내 방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깨끗했다. 나는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내 방에는 나 외에 누구도 들어온 적이 없다.
‘이 머리카락들이 도대체 어디서 온 거지?’
뱀이 기어가는 것 같은 스멀거리는 느낌에 잠이 깼다. 힘겹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바닥에 무엇인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머리카락이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꿈틀거리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소름이 끼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있는 대로 오그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꿈……꿈일 거야.’
하지만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머리카락이 기어 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얼어 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새벽이 되어 머리카락들이 어디론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음날 밤에도, 다음다음날 밤에도 그 기이한 일은 계속되었다. 축축하고 차가운 무엇이 끊임없이 내 방으로 기어드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뜨면, 기다란 머리카락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밤새 벽과 천장에는 기다란 머리카락들이 가득했다. 나는 밤마다 불을 켜놓고 잤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어둠 속에서 기다란 머리카락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툭하면 신경질을 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엄마는 너무 예민해서 말 붙이기도 겁이 났다.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청소를 해 댔다. 머리카락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머리카락에 대해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직도 아빠를 의심하는 걸까? 그까짓 머리카락 한 올 때문에?’
아니, 머리카락은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아빠가 우리한테 관심이 없고, 동생이 컴퓨터만 쳐다보고, 엄마가 우울해하고, 내가 불만과 짜증으로 터질 것 같은 건, 기다란 머리카락이 나타나기 전부터였으니까. 다만 조금 더 심해졌을 뿐이다. 엄마 아빠의 싸움이 잦아졌다. 아니, 엄마와 아빠, 동생과 나 모두 입만 열면 싸움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사소한 일로 화를 내고 비꼬고 잔소리를 했다. 나는 짜증스러워 입을 닫고 모두를 무시해 버렸다. 아빠가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생은 새벽까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게임을 해댔다. 엄마는 하루 종일 거실 한켠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집안은 예전처럼 너저분해졌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데, 동생 방에서 게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너, 잠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소리 줄이지 못해!”
나는 동생 방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동생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게임에만 열중했다. 그때, 기다란 머리카락 한 올이 동생 몸 위를 기어가는 걸 봤다. 나는 눈을 비벼 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머리카락은 그저 축 늘어진 채 붙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동생 몸에서 머리카락을 떼어 내지 않았다. 머리카락에 손을 대는 것이 너무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내 방에 들어와 문을 닫자, 방바닥에 늘어져 있던 기다란 머리카락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데……’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에 기댄 채 머리카락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머리카락들은 나를 놀리는 것처럼 내 몸에 닿을 듯 말 듯 천천히 기어 다녔다. 뿐만 아니라 어디서 나오는지 점점 더 많아졌다.
‘살아 있는 거야. 그래서 계속 생겨나는 거야. 마치 벌레가 끝없이 새끼를 치는 것처럼. 그런데 이 이상한 머리카락이 어떻게 우리 집에 온 거지?’
동생 가방과 아빠 어깨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머리카락은 그런 식으로 우리 집에 처음 들어온 건지도 모른다. 일단 집에 들어온 머리카락은 끊임없이 늘어나고……
‘누가 이 끔찍한 머리카락을 집에 들여놓은 거지? 엄마? 아빠? 동생? 어쩌면 세 명 다인지도 몰라.’
기다란 머리카락을 가져왔을지도 모르는 가족 하나하나가 너무 밉고 싫었다.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그때부터 나는 낮에도 종종 기어 다니는 기다란 머리카락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마치 벌레처럼 온 집 안을 기어 다니다가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우리 집 벽에 금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금은 점점 더 많아졌다. 불안했다. 뭔가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혹시, 다른 집 벽도 그럴까?’
나는 집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 긴 머리카락 한 올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하늘을 가르며 걸려 있었다. 골목 사이사이, 집과 집 사이에도 머리카락이 걸려 있었다. 집 밖도 기다란 머리카락 천지였다.
‘이건 전선일 뿐이야.’
내가 본 건 전선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집마다 연결된 전선은 기이할 정도로 많았다. 모든 집들이 기다란 전선에 칭칭 감겨 있는 꼴이었다. 답답하고 지저분했다. 어지럽게 뒤엉킨 전선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어쨌든 전선은 이 세상을 연결해 주고 있으니까. 전선 때문에 조각난 것처럼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벽에 간 금이 떠올랐다.
‘기다란 머리카락은 사라진 게 아니었어. 벽 속으로 들어간 거야. 그래서 벽에 금이 생기고 있는 거야. 머리카락이 우리 집을 자르고 있어! 우리 집은 결국……’
그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감이었다. 나는 집이 무너지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 무너져 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우리 집이 지겨웠다. 매일 매일 짜증내고 소리 지르고 서로 무시하고……정말 지긋지긋했다. 더 끔찍한 건 내일이라고 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이었다. 이 집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면 모를까.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없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도, 아빠가 한밤중에 술 취해 들어올 때까지 엄마는 집에 오지 않았다. 아빠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거실에 앉아, 홈쇼핑 채널에서 기저귀 파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동생은 여전히 시끄럽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동생 방으로 들어갔다.
“야! 넌 어떻게 엄마가 안 들어왔는데, 게임을 하고 있냐?”
“그래서 뭘 어쩌라고?”
“진짜 뭐 이런 게 다 있어? 만약에 엄마 안 들어오면 다 너 때문이야!”
“그게 왜 나 때문인데?”
동생이 따지고 들었다. 나도 흥분해서 따지기 시작했다.
“너 한번이라도 엄마 기분이 어떤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요즘 엄마가 얼마나 우울해하는지 알기나 해? 엄마가 진짜 우울중이면 어떡할래? 하루 종일 밥하고 빨래하고 그것도 매일 매일. 넌 그렇게 살 수 있어? 너는 엄마가 식모처럼 보이지? 아빠는 돈 벌어 오는 기계고, 안 그래? 정말 너 같은 자식 낳을까 봐 겁난다, 야.”
“웃기고 있네. 그건 바로 누나잖아! 만날 사람 무시하는 게 누군데?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엄마를 식모 취급하고, 아빠를 돈 벌어오는 기계쯤으로 여기는 건 바로 나였다.
“진짜 짜증나! 엄마 아빠는 싸움만 하고. 누나 신경질도 지겨워. 나도 이런 집에서 태어나기 싫었다고. 엄마 안 들어오면 나도 집 나가 버릴 거야!”
엄마는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엄마가 아무 말 없이 방에 들어가자, 아빠는 텔레비전을 켜 놓은 채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동생 방에도 불이 꺼졌다. 나도 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 누웠다. 방바닥에서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런데 기다란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한 뼘 정도 되는 짧은 머리카락. 그건 내 머리카락이었다.
‘왜 내 머리카락이 기어 다니고 있는 거지?’
자세히 보니 내 머리카락은 기어가는 게 아니라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자라고 있었다. 아주 기다란 머리카락으로 자라고 있었다.
‘이럴 수가. 기다란 머리카락은 내 머리카락이었어!’
가족 중 누가 이 불길한 머리카락을 붙여 온 거라고 의심했었는데, 기다란 머리카락을 만들어 낸 건 바로 나였다. 바로소 모든 걸 알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는 건, 집이 무너져 버리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었다. 가족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이미 빠져 버린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고 있었다.
‘말해야 해. 모두 비웃는다고 해도,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말해야만 해.’
그때 기다란 머리카락 한 올이 내 침대 위로 기어올라 왔다. 그리고 내 몸 위를 지나, 목을 감아 올라, 입속으로 들어왔다.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곧이어 벽과 천장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들이 나를 향해 기어 왔다. 소름 끼칠 정도로 아주 천천히……모두 내 입속으로 기어들어 왔다. 마치 내 입을 틀어막겠다는 듯이. 나는 미친 듯이 몸을 비틀어 댔다. 그러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온몸이 축축했다. 방바닥에는 언제나처럼 기다란 머리카락 서너 올이 늘어져 있었다. 목 안이 답답했다. 엄마는 머리가 아프다며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엄마는 불행한 걸까?’
한번도 엄마 아빠가 행복한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고 가족들을 원망한 적은 많지만, 가족들이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쩌면 동생이 밤늦도록 게임을 하는 것도 불안한 마음을 잊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왜 우리는 한번도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지 않았을까? 텔레비전 속 연예인들과 드라마 이야기는 숱하게 나누면서 왜 한번도 우리 이야기는 하지 않은 걸까? 저녁 식사를 하는데, 목이 메어 왔다. 머리카락 뭉치가 진짜 목구멍을 막고 있는지, 밥을 제대로 넘길 수가 없었다. 억지로 밥을 삼키다가 한참을 캑캑댔다.
“왜 그래?”
엄마가 물었다. 나는 머리카락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보, 벽에 금 간 거 봤어?”
아빠가 엄마한테 물었다.
“알고 있어.”
“금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
동생이 말했다. 벽에 금이 가는 것을 다른 가족들도 알고 있다니 안심이 되었다.
“알아.”
“지금 아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아빠가 갑자기 화를 냈다.
“그럼, 뭐가 문제야? 피곤해 죽을 지경이야!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다고! 나도 지쳤어!”
엄마도 소리를 질렀다. 엄마 아빠는 싸우기 시작했다.
“목이 졸리고,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집에 와도,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어. 이제 진짜 진저리가 나!”
“나는? 내 인생은? 내 인생은 당신 때문에 엉망이 됐어!”
두 사람은 동생과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이건 싸움이 아니었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상처주는 말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헤어져! 헤어지란 말이야!”
갑자기 동생이 소리를 꽥 질렀다.
“진짜 짜증 나! 숨이 콱콱 막힌다고!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이 자식이!”
아빠가 동생 뺨을 때렸다. 침묵이 흘렀다. 꼭 내가 맞은 것처럼 뺨이 얼얼했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 때문이야! 머리카락 때문에 미칠 것 같아!”
나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모두 다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그래. 나도…… 머리카락 때문에 미칠 것 같아.”
엄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날마다 내 머리카락이 길어지는 환영을 봐. 내 목을 조른다고!”
아빠가 말했다.
“나도 내 머리카락이 자라는 꿈을 꿔!”
엄마가 말했다. 길게 자라는 건 내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그건 꿈이 아니야.”
동생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말이 하고 싶었던 거였다.
“웩!”
구역질이 났다. 나는 주저앉아 올라오는 것을 게워 냈다. 목구멍에 걸려 있던 머리카락 뭉치가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시원했다. 모두들 웩웩거리며 머리카락 뭉치를 뱉어 내고 있었다. 벽에 간 금 사이로 머리카락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머리카락들은 벽, 천장, 바닥, 사방에서 기어 나왔다. 온 집 안이 기다란 머리카락 천지였다. 아빠가 동생 손을 잡았다. 엄마는 내 손을 잡았다. 동생도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내가 먼저 손을 잡지 않은 것이. 기다란 머리카락들이 하나 둘, 벽과 천장에 축 늘어진 채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힘을 잃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떨어져 내린 머리카락들은 이제 기다란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내 머리카락이었다. 아빠, 엄마, 동생 머리카락. 우리 머리카락이었다. 우리는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들을 비처럼 맞으며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냥 그렇게 기다란 머리카락들이 다 기어 나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란 머리카락들은 축 늘어진 채 매달렸다가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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