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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어린이(아동)문학가나 글쓰기 교육자, 우리말 연구가, 국어운동가로 기억하는 이오덕 선생이 평생을 두고 참교육 운동을 펼쳤던 실천적 교육운동가였으며 오늘날 전교조를 상징하는 참교육 역시 이오덕 선생이 최초로 사용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한국의 페스탈로치로서의 선생을 기리는 하성환 선생의 기고 글이다. 다소 긴 글이지만 관심을 부탁드린다. 온라인매체 <한겨레온>에도 실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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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다시 이오덕인가
이오덕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산골 초등교육자, 어린이 문학가, 어린이 문학평론가, 우리말 연구가, 우리말 운동가들이다. 그런가하면 글짓기가 아니라 글쓰기 교육이어야 한다며 글쓰기 교육을 최초로 부르짖은 선구자이다. 그리고 거꾸로 살다간 참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노동교육을 강조한 교육자로 기억한다.
나아가 한국 문단 내 리얼리즘 어린이(아동) 문학의 정초를 놓은 이원수 문학의 실천적 계승자이다. 당시 문단 내 주류였던 동심천사주의를 일거에 뛰어넘어 리얼리즘 어린이 문학의 계보를 확고히 구축한 인물로 회자되기도 한다.
특히 분단 현실 민족문학으로서 어린이 문학의 정초를 닦은 이원수 문학의 실질적 후계자로 평가받는다. 『몽실언니』를 쓴 동화작가 권정생을 70년대 초 직접 찾아가 발굴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다. 그리고 70년대 한국 문단 내 주류 동심천사주의와 교훈주의를 통렬히 비판하는 비평에 적극 참여한다. 한 때 창작보다 비평에 몰두하면서 70년대 동시, 동화 어린이 문학계에 충격을 안겨준 인물이 바로 이오덕이다.
『우리글 바로쓰기 1, 2, 3』와 『우리 문장 쓰기』가 출간돼 크나큰 반향을 불러 온 90년대에는 국어운동가로서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 『우리글 바로쓰기 1, 2, 3』와 『우리 문장 쓰기』는 문단 내 젊은 작가와 국어교사, 심지어 방송국 아나운서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어떤 측면에선 국어학계 주류인 서울대 관학 아카데미즘에 밀려 주변부화한 한글전용론자들의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다. 주시경-최현배를 잇는 언어민족주의 흐름이 쇠퇴한 현실에서 이오덕의 우리말 연구와 우리말 운동은 혼탁한 언어생활에 청량제 구실을 하였다. 나아가 언어민족주의자들이 다시 웅비할 수 있는 기운을 넣어주었다.
물론 언어생활의 미시적인 부분에선 주시경-최현배-허웅으로 이어지는 언어민족주의와 결을 약간 달리한다. 비행기(→날틀), 학교(→배움집)를 고집하는 언어민족주의보다 이오덕은 언어민중주의에 가깝다. 이오덕은 한자말이라도 부르기 좋고 듣기 좋고 잘 구분할 수 있으면 문제없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일반 서민들이 쓰는 쉬운 우리 입말을 글로 표현하고 그렇게 말글살이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수천 년 동안 영향을 미친 중국글자(한자), 일제식민지 시절 널리 유포된 일본글자, 그리고 해방 후 막 쏟아져 들어온 서양글자 따위가 우리말을 오염시켰다고 개탄했다.
그리하여 어른들의 언어생활뿐 아니라 학문을 한다는 지식인들의 언어생활이 우리말글살이를 병들게 했다고 역설했다. 어린이들조차 아름다운 우리말을 멀리하고 어른들 흉내를 내는 '병신말'이 되어간다며 안타까워했다. 90년대 「우리말 살리기 겨레모임」을 만들어 공동대표를 하거나 문화관광부 국어심의회 국어순화분과위원으로 참여한 것도 그런 안타까움의 발로였다. 나아가 한글학회 한글전용추진위원회 추진위원으로 활동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이오덕의 삶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고 범주가 넓다.
오늘날 이오덕 선생을 다시 불러보는 것은 이오덕의 다양한 삶의 영역 가운데 참교육 운동을 주도한 교육운동가로서 이오덕의 고뇌와 번민 그리고 실천적 노력을 되살려 보고 싶기 때문이다.
글쓰기 교육이든 어린이 문학가든 비평가든 나아가 우리말 연구와 우리말 운동가든 그 모든 밑바탕엔 낡은 질서를 깨트리고자 노력한 이오덕의 치열한 운동성이 스며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육계 안에 건강한 질서를 새롭게 세워보고자 노력했던 이오덕의 참교육 운동이 42년 동안 교직에 있을 때나 86년 퇴직 이후나 그 정신이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오덕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16년이 되었다. 그동안 「이오덕 학교」(2003)를 세우고 관 주도가 아니라 청송군 현서면 주민 중심의 축제로 「이오덕 문학 축제」(2016)도 4년째를 맞는다. 「이오덕 문학관」(2018)이 건립되고 「이오덕 문학 테마길」 조성도 논의되며 '이오덕 정신'을 기리기 위한 실천적 노력과 이오덕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 왔다. 그럼에도 참교육 운동의 실천적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 교육운동가로서 이오덕에 대한 연구물은 단편 조각으로만 존재해 왔다.
따라서 이 글은 이오덕 선생이 한국사회 낡은 교육질서와 맞서 싸웠던 한국의 페스탈로치였음을 밝히고자 한다. 나아가 한국사회 교육모순과 민족・사회모순을 깨트리려는 실천적 교육운동가였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시대의 교사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 교사들에게 '교사의 길'이 무엇인지 어둠 속 작은 빛이 되고 등불이 되고자 한다.
2. 모순에 저항한 실천적 교육운동가, 이오덕
이오덕의 삶은 글쓰기 교육 운동에서 시작하여 어린이(아동)문학 운동, 그리고 우리말 연구와 학술운동, 겨레말 살리기 국어운동으로 일관했다. 42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을 섬기고 아이들 삶을 가꾸는 교육을 했다. 그래야 아이들 착한 심성과 고운 마음이 자라나서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오덕에게 교육은 곧, 운동이고 삶 자체였다. 어린 시절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표현할 줄 모르고 억압당한 채, 어른들 시키는 대로 어른 흉내만 내면서 자신을 겉으로 꾸미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 아이들은 남을 제쳐 상을 타고 우뚝 서지만 우쭐거릴 뿐 커서도 남을 속이고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괴물엘리트'로 살아간다고 역설했다.
이오덕은 아이들의 삶을 찾아 주고자 애쓴 인물이다. 비록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이웃의 아픔에 고개 돌리지 않고 공동체의 선을 이루려고 애쓰는 시민을 키우고자 혼신을 다했다. 교육자로서 정치 현실에 관심을 드러냈고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늙은 나이에도 사회 참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중앙정보부에도 끌려가 이틀 동안 고초를 겪었고 군사정권 시절 자신이 쓴 책이 의식화 교재로,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독재 권력으로부터 끊임없이 감시대상 인물로 규정돼 교육청은 이오덕의 동향을 때맞춰 상부에 보고했다. 실제로 경북교육청은 매년 연말 문교부(오늘날 교육부)에 이오덕 동향보고서를 원고지 80매 이상을 기록해 이오덕의 1년 동안 행적을 보고하곤 했다. 80년대 5공 시절에는 '장자 모임'등 지인끼리 만나는 것도 감시 대상이었고 심지어 권력의 방해로 자신의 회갑을 축하해 주는 모임조차 가질 수 없었다.
더구나 같은 교육자들 가운데 권력에 밀착된 교육행정가나 교사들조차 이오덕을 불온한 인물로 대했다. 이오덕이 작사한 교가를 '전교조 우두머리'가 쓴 가사라며 부르지 못하게 했던 교육 관료도 있었다. 문단 내 기득권 세력들은 이오덕을 비평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인격을 비하하는 경우도 많았다. 문단 지면을 통해 비평 아닌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실제로 이오덕은 정년까지 채우질 못한다.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었지만 5공 군사정권은 이오덕을 달달 들볶았다. 꼬투리를 잡고자 자주 학교 감사를 나와 이런저런 이유로 초등학교 교장 이오덕을 압박했다. 이오덕 스스로 고백했듯이 하도 닦달을 하고 난리를 쳐서 정년을 4년 남겨두고 1986년 2월 교직을 떠난다. 군사독재정권이 경찰과 교육청을 동원해 감시행정을 하며 이오덕의 숨통을 조여 왔기 때문이다. 사실상 5공 군부정권이 이오덕을 학교에서 쫓아낸 것이다.
사람들은 오늘날 이오덕을 글쓰기 교육을 강조한 국어운동가, 동화작가 권정생을 발굴한 인물로 대부분 기억한다. 맞는 이야기지만 이오덕의 삶을 평가할 때 이오덕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이오덕의 정신을 놓치는 것 같다. 이오덕은 분명 글쓰기 교육운동가이자 국어운동가, 우리말 연구자, 동시, 동화작가, 어린이(아동)문학 평론가이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게 되면 이오덕의 실체, 바로 이오덕의 삶에서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그것은 이오덕이 평생에 걸쳐 실천해온 운동들이 모두 '참교육운동'으로 자리매김 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오덕은 '한국의 페스탈로치'다. 시대의 낡은 교육질서에 저항했고 아이들을 섬기며 인격적 주체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페스탈로치처럼 '교육을 통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교육사상가이다.
무엇보다 학교현장에서 꾸준히 교육운동을 실천했던 인물이다. 단 한 번도 교육모순을 외면하지 않았고 교육모순을 해결하고자 더욱 깊이 고뇌했던 실천적 교육운동가였다. 아이들을 온갖 낡은 질서로부터 해방시키는 가장 훌륭한 교육 방식이 '글쓰기 교육'임을 발견한 것도 그러한 교육적 고민의 산물이다.
이오덕은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즐겨 쓰고 가르치며 이를 널리 퍼뜨려야 한다고 믿었던 교육자다. 우리가 우리의 아름답고 쉬운 말을 즐겨 씀으로써 글쓰기 혁명을 일으키자고 열변을 토했던 분이 이오덕이다. 평생 이오덕은 그렇게 살았다. 쉬운 말, 강아지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글을 쓰는 글쓰기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선 한국사회가 사람다운 사회,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오덕은 『우리글 바로 쓰기』(1989)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말로 창조하고 우리말로 살아가자.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 남의 글로써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써 창조하고 우리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말과 글에서도 봉건과 일제와 분단의 세 겹이나 되는 무거운 짐을 모두가 운명처럼 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오덕은 다시 『우리글 바로 쓰기 2』(1992)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글에서 우리말이라고 알고 있는 일본말이나 일본말법, 그리고 그지없이 귀한 우리말은 버리고 유식해 보이는 중국글자말(한자어)을 즐겨 쓰고 있는 글 버릇이 죄다 일제시대에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모든 글 가운데서도 더구나 소설이 그릇된 말을 퍼뜨리고 병든 글의 형태를 만드는 데 앞장서는 노릇을 하였다."
페스탈로치가 궁극적으로 교육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듯이 이오덕도 아이들 삶을 가꾸는 교육을 통해 일그러지고 비틀린 세상을 바로 잡고자 평생을 고투했다. 페스탈로치는 인간은 자기가 종사하고 있는 노동 속에서 세계 인식의 기초를 찾아야 하며 머릿속 공허한 이론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손노동 그 자체로부터 자신의 견해를 이끌어 내야 한다 고 강조하였다.
이오덕 역시 노작교육을 통해 아이들 스스로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건강한 인격적 주체로 가꾸고 싶었다. 1978년에 펴낸 아이들 시 모음 『일하는 아이들』은 바로 그것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페스탈로치가 스위스 교원노동조합에 해당하는 '스위스교육협회'(1808)를 조직해 '스위스 교원노조의 아버지'로 추앙받듯이 이오덕은 민족교육, 민주교육, 인간 교육을 부르짖으며 참교육운동을 이끌었던 전국교사협의회(약칭 전교협 1987)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1989)의 산파 노릇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80년대 초반 이오덕이 만든 '한국글쓰기 교육연구회'는 'YMCA중등교사협의회'와 함께 교육운동의 거대한 저수지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80년대 '한국글쓰기 교육연구회'회원으로 참여한 교사만 전국에 걸쳐 10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이오덕은 '한국 교원노조의 아버지'이다. 20세기 한국사회 봉건성과 전근대성, 식민지 잔재, 군사문화의 낡은 질서를 깨트리고자 치열하게 활동했던 인물이다. 낡은 교육체제와 모순을 해체시킴으로써 고통 받던 아이들을 해방시켜 행복한 인간을 만드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두었다.
5공 군사정권 시절 교육민주화를 위해 '민주교육실천협의회'(1986)를 만들어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듬해엔 '전국초등민주교육협의회'(1987)를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자문위원을 맡았다. 교육민주화는 정치·사회민주화와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87년 6월 항쟁 당시 거리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시위대중 속으로 들어가 매운 최루탄 가스에 눈물 흘리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87년 6월 항쟁의 결실인 민주언론,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회 공동 부위원장과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으로 참여했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대정신! 민중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았다.
더욱이 87년 6월 항쟁 이후 우후죽순처럼 성장한 시민운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이사와 '공해추방운동연합' 지도위원, '탁아소연합회' 이사장, '전태일문학상' 심사위원, '사월혁명기념사업회' 지도위원, 『노동해방문학』 자문위원, 『농민』 지도위원, '민족문학 작가회의' 고문, '과천시민의 모임' 공동대표, 월간 교육지 『우리교육』 편집자문위원을 맡아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 '망할 놈의 나라'라며 치열하게 살아온 이오덕의 삶과 달리 이오덕은 투사의 기질이 없었다. 이오덕 일기에는 용감하게 나서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내용도 많다. 심지어 다음 집회 때 자신이 반드시 경찰에 연행될 것이라며 두려워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시기 이오덕은 '전교조 탄압 저지와 참교육 실현을 위한 범국민 공동대책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이오덕의 삶은 평생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 바로 참교육 실현을 위한 삶이기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참교육'이라는 말도 이오덕이 처음 쓴 표현이다. '민주교육실천협의회'(1986)를 이오덕과 함께 만든 성내운(연세대 교육학 교수)이 '참교육'이라는 용어를 처음 썼다고 기술한 책도 있다. 이무완은 『교사, 이오덕에게 길을 묻다』(2018)에서 달리 주장한다. 이오덕이 70년대 말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1977)에서 '참된 교육'이라는 용어를 썼고 『삶과 믿음의 교실』(1978)에선 '참교육'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썼다고 기술하고 있다.
"오직 물질적인 풍요만을 목표로 하는 개인주의, 편리주의가 자연과 인간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을 더욱 촉진하고 있는 학교 교육은 시험 점수 따기와 상호 경쟁을 수단으로 하는 입신출세주의로 타락하여 아이들에게 정직과 진실 대신에 잔꾀와 거짓을 강요하고 서로 해치는 것이 영리한 삶의 길임을 결과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제 정신을 잃고 살아가는 농촌 아이들에게 스스로의 느낌과 생각의 소중함, 생활의 귀중함을 깨우치는 글짓기 교육이야말로 이 나라 아이들을 살리고 지켜가는 참교육이라고 믿는다."
반면에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1988)을 펴낸 이상석은 이오덕이 참교육이란 용어를 1963년 2월 6일자 일기에 처음 썼다고 주장한다. 이오덕에게 참교육이란 '민주교육, 민족교육, 인간교육, 자연사랑 교육'을 모두 담고 있는 교육을 가리킨다.
"지극히 당연한 교육적인 견해가 여지없이 짓밟혀버리는 곳에 아이들의 인권을 지키는 참교육이 이뤄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환하다."- 1963년 2월 6일 <이오덕 일기>
전교조가 민족교육과 민주교육을 표방할 때 인간교육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 인물이 이오덕이다. 전교조의 이념,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다. 이오덕이 추구한 참교육 사상은 아이들 삶을 위한 교육 사상이자 전교조가 지향하는 참교육의 뿌리로서 핵심 교육 사상이 된다. 그리하여 전교조는 합법화되던 1999년 참교육상 수상자로 제일 먼저 이오덕을 선정했다. 이오덕의 참교육은 이후 90년대 대안학교와 2000년대 혁신학교를 싹틔운 교육사상의 뿌리로 작용한다.
이오덕은 참교육 이전 교육을 '거짓교육'으로 규정했다. 아이들의 삶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끊임없이 아이들을 낡은 질곡 속으로 밀어 넣는 '반민주・반민족・반인간 교육'을 '거짓교육'으로 보았다.
'국민 학교', '교감', '유치원' 명칭에서 보듯 이오덕은 일제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교육 현실을 개탄했다. 1993년 '국민학교 이름 고치는 모임'에서 운영위원을 맡았던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다. 국민 학교가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뀐 것은 해방된 지 50년이 지난 1996년도부터였다. 잘못된 명칭과 낡은 교육질서를 해체시키려 분투했던 이오덕의 결실이자 한국교육의 소중한 일보 전진이었다.
이오덕이 글쓰기 교육을 찬미하면서 쓴 시를 보면 이오덕의 민족의식과 우리말을 참으로 사랑했던 교육자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국어운동가를 넘어서서 실천적 교육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남에게 홀리지 말고(일본)/남에게 끌리지 말고(중국)/남에게 기대지 말고(미국)/홀로 서서 가는 사람 훌륭하여라/어려운 말 하는 사람 믿지 말고/유식한 글 쓰는 사람 따르지 말자/우리말은 깨끗해요 우리말은 쉬워요/우리말은 바르고 아름다워요/어린이들도 잘 아는 우리 배달말/할머니도 잘 아는 시골 고향 말/진달래 피고 지는 삼천리강산/배달말로 이어질 한 핏줄 한 겨레" – 이오덕, <쉬운 말 우리말로>
이오덕은 낡은 교육질서가 지배하던 시절 모범교사상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모순과 비리로 얼룩진 당시 교육계의 씁쓸한 풍경이기도 하다.
"모범교사가 되는 조건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돈' 잘 걷어 내는 일이고, 둘째는 '청소' 깨끗이 하는 것, 셋째는 '환경 정리' 잘하는 것이다. 이런 역사에서 무사히 월급쟁이 노릇을 하여 왔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죄를 짓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오덕의 유고시집에는 젊은 교사를 향한 실천적 노력을 주문하는 내용도 있다. 읽을수록 교육자로서 담대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왜냐하면 교사는 교육모순에 끊임없이 맞서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이들 삶을 위한 교육! 바로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을 해야 하는 최전선에 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피를 흘리지 않고 세상을 바꾸는 정교한 예술이자 사회적 무기이다. 교육이 왜 교사에게 운동이며 실천하는 삶인지 깨닫게 해주는 아름다운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교사로서 살아갈 때 힘이 되는 멋진 시가 아닐 수 없다.
"출석부를 들고/어둠침침한 골마루를 걸어가다/잠시 창문을 열어 재끼고/바깥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그 깊은 하늘에 무엇이 있는가/심호흡(深呼吸)을 할 줄 아는/당신은 젊은 교사/그 넓은 가슴의/용적(容積)만큼 가득한 하늘로/방금 사무실에서 마신 잔/뼛속까지 스며들어간 그것을 해독(解毒)하고/온갖 지시(指示)와 명령(命令)과 전달(傳達)을/깨끗이 잊을 수 있는 당신은/이윽고 시작종이 울릴/그 촉박한 시간에/다시 살아나는 초인(超人)의 기술을 익힌/멋을 지닌 젊은 교사/그리하여 어린이의 나라로 통하는/좁은 문을 두드리는/위대한 젊은 교사" – 이오덕, <출석부를 들고(당신은 젊은 교사)>
페스탈로치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교사단체를 만든 인물이다. 또한 스위스 교원노조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스위스 교원노조의 아버지로 부르는 이유가 교육모순과 투쟁한 실천적 교육운동가이기 때문이다. 낡은 교육질서로부터 아이들을 해방시켜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했다. 자신의 교육철학과 충돌하여 학부모와 갈등을 빚고 학교로부터 배척되기도 했다. 그러나 페스탈로치는 꺾이지 않고 대안학교를 세워가며 자신의 신념대로 교육을 실천했다. 그런 의미에서 페스탈로치는 낡은 교육질서를 해체시키려 용기 있게 투쟁했던 실천적 교육운동가였다.
진보주의 교육사상가로 아동 중심의 교육, 『민주주의와 교육』을 논한 듀이(J. Dewey) 역시 교원노조를 만드는 데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 교원노조가 만들어졌을 때 1번으로 노조에 가입했다. 분단이라는 낡은 질서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한국의 현실에선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이다. 페스탈로치와 헬런 켈러, 아이슈타인을 비틀어서 가르쳐 왔듯이 듀이의 진면목을 왜곡시켰다. 미국교원노조에 맨 처음 가입한 인물, 존 듀이! 이런 사실은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장차 교사가 되려는 예비교사들에게도 생소한 이야기이다.
마치 헬런 켈러가 삼중 사중의 신체 결함을 극복한 '의지의 화신'으로만 알려져 왔다.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한국인들 머릿속에 그런 이미지로 고정돼 있다. 정작 헬런 켈러는 미국 사회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위해 열렬히 투쟁했던 열정적인 사회운동가였다. 미국 사회당 당원으로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흠모하며 그들의 저작을 읽었던 사회주의자였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성공하자 헬런 켈러는 열렬히 열광하며 기쁨을 표출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제국주의로 치닫는 미국정치를 비판했으며 파시즘 일체를 경멸했던 인물이다. 나아가 여성의 정치 참여를 위해 분투했던 전투적인 여성 참정권론자였다. 한 마디로 미국이라는 국가권력의 부당한 모함 속에서도 꿋꿋이 사회정의를 위해 불꽃처럼 살다간 인물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 헬런 켈러」의 삶을 기억할 때 헬런 켈러의 진정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도 이 땅의 사람들 뇌리 속엔 정치와 무관한 순수과학자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비판한 진보적인 사회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였다. 핵무기 폐기를 위해 영국 수리철학자 러셀과 러셀-아인슈타인 선언(1955)을 단행했던 사회운동에 열정을 갖고 참여한 평화주의 과학자였다. 히틀러의 전체주의를 혐오했고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한 멋진 과학자였다.
1931년 '국제반전주의자협의회'에 보낸 편지글에서 전 세계 과학도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무기개발에 동참하지 말 것을 촉구한 인도주의 과학자였다. 그러나 인생의 말년까지 미 연방수사국(FBI)의 미행과 감시를 받으며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은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한국사회에선'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잘 담긴 플라톤의 저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이다. 러셀은 후대의 철학자들이 만들어 낸 농간이라고 비평한 적이 있다.
이오덕은 이제껏 교육이 아이들을 병들게 했다고 진단했다. 그 책임의 한 부분을 교사가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사는 아이들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데 아이들 삶을 지키고 가꾸어 나가기보다 아이들을 입신출세주의교육으로, 그리고 점수 따기 경쟁교육으로 내몰아 왔다는 것이다. 물론 병든 교육의 주범은 행정 하는 사람이지만 교육자도 공범이라는 생각이다. 제2 공범은 부모들이라고 주장했다. 참교육, 바로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은 이 뼈아픈 사실을 깊이 반성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교육운동의 본질은 아이들을 참된 인간으로 키워가는 데 방해가 되는 교육 모순과 사회 모순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아이들과 함께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고 그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 일체에 대해 저항하는 데에 힘을 모으는 운동이라고 보았다. 이오덕은 자신이 쓴 일기에 "이 나라 학교교육보다 더 나쁜 교육은 없다"고 일갈한다. 도대체 교육이 아니라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비참한 훈련'이자 '살인교육', '식인교육'이라며 통렬히 비판했다.
이오덕에게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은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이다. 점수를 잘 따서 출세하는 허위의식을 철저히 거부하고 거짓교육을 부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교육운동은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내용으로 전진해야 하고 교사가 교육의 주체로 우뚝 서야 한다고 믿었다. 과거의 오랜 관행대로 지시와 명령을 따르는 수동적 존재에서 벗어나 교사 스스로 자기무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전교조 운동은 사회민주화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어야 하고 교육민주화 없이 사회민주화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했다.
이오덕은 특별히 교육운동에서 촌지거부를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당시 활동가들 사이에 촌지 문제에 대해 인간적인 것이자 한국사회 아름다운 관행으로 보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에 대해 이오덕은 단호하게 교육운동의 출발은 촌지를 거부하겠다는 선언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운동을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그런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고 일기에 다짐하는 내용이 나온다.
전교조 창립(1989) 당시 내건 촌지거부운동은 전국의 부모들에게 크나큰 호응과 지지를 받았다. 교육운동가로서 원칙에 충실했던 이오덕의 엄격함과 한국교육의 모순을 꿰뚫어 보는 면모에 일견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이오덕의 대쪽 같은 단호한 기질과 엄격한 문학은 이육사의 문학 정신과 상통한다. 육사의 문학 정신은 독립! 바로 민족 해방이라는 겨레의 자존을 지키고 글쓰기를 행동의 방편으로 삼았다. 마찬가지로 이오덕 역시 선비의 꼿꼿함과 살아있는 자주적인 민족교육의 자존심, 그리고 이를 위해 실천하고 행동하는 문학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오덕은 이제까지 학교교육은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교육이었다고 성찰한다. 아이들 자발성과 자율성을 억압한 채 두발단속, 복장검사, 입시경쟁 교육 따위로 교육인 체 했다. 아이들을 동등한 인격으로 보지 않고 어른들 고정관념에 따라 지도하는 것을 교육활동인 양 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오덕은 아이들을 삶의 주체로 내세운 최초의 교육자이다. 글쓰기, 말하기, 그리기 표현교육을 중시하여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 되게 가르쳤다. 이오덕에게 표현교육은 생명해방교육이었다. 이오덕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
결국 아이들 생명을 거짓교육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교육은 아이들 삶을 위한 교육이자 민주주의로 가는 교육이라고 보았다. 아이들 삶을 중심에 두지 않고 아이들을 이용해 실적을 쌓고 겉치레에 치중하는 교육은 죽은 교육이라 반대했다. 아이들 삶이 살아 있는 교육, 바로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교육을 참교육이라 단언했다. 이러한 이오덕의 교육사상은 참교육 이념으로 정립되고 전교협(1987) – 전교조(1989)의 기본 정신으로 작용했다.
이오덕은 2003년 8월 25일 새벽에 세상과 작별했다. 이오덕은 죽기 직전까지 글 쓰는 것을 놓지 않았다. 이오덕이 세상을 떠난 날 30년 지음(知音) 권정생은 이오덕 영전에 선생이 좋아하던 진달래꽃 한 다발을 바치면서 이렇게 다짐했다.
"아직 이승에 남아 있는 우리들은 선생님이 남기신 골치 아픈 책들을 알뜰히 살피며 눈물 나는 세상 힘겹게 견디며 견디며 살 것입니다…(중략)… 이담에 우리도 때가 되면 차례차례 선생님이 걸어가신 그 산길 모퉁이로 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부디 큰 눈을 더 부릅뜨셔서 이승에 남아 있는 우리들을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살아생전처럼 호되게 꾸지람하시고요."
권정생도 4년 뒤 이오덕을 따라 어머니 사시는 먼 나라로 떠났다. 「강아지 똥」(1969), 「몽실언니」(1984)를 비롯해 자신의 동화 작품 인세는 어린이에게 돌려주는 게 마땅하다며 한겨레신문사에서 하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겼다. "제발 이 아름다운 세상!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이오덕은 교사가 건강한 교육 철학을 갖지 못하면 아이들을 교육의 이름으로 비인간으로 몰아간다고 강조했다. 교사는 아이들과 관계 맺기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되지만 아이들을 둘러싼 교육모순, 사회모순에도 깊이 천착하여 교육의 주요모순과 근본 모순을 해체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할 때 험난한 가시밭길 속에서 교사의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오덕은 교사의 길을 신사숙녀로 점잖음을 뽐내며 태평스럽게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고 했다. 교사의 길은 모순으로 가득한 가시밭길을 헤쳐가면서 땀과 고뇌로 점철된 길이라 생각했다. 교사는 먼저 아이들에게 다가가 "불행한 아이들을 찾아 그들의 손을 잡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교육자의 모습"이라 했다. "불행한 아이를 모른 척 할 때 교육자가 아니라 장사꾼이 되는 것이지만, 불행한 아이를 보는 눈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입신출세식 교육관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 점수 따기 망령에 사로잡힌 사람, 아이들의 순수함과 그 순수함이 짓밟히고 있는 상황을 의식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신사숙녀로 몸을 꾸미고서 교육자로 보이고 싶어 하는 이들"이라고 경계했다. 그리하여 "오직 아이들을 섬기는 사람, 아이들과 함께 멸시받고 때론 박해를 당하기까지 하는 사람만이 참된 교육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신념을 드러냈다.
이오덕은 42년 교직생활 동안 평생 아이들을 걱정했다. 아이들 글을 소중히 생각하고 두고두고 귀하게 여겨 책으로 엮어내기도 하였다. 80년대 '글쓰기교육연구회'를 근간으로 교육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평생 아무 것도 한 게 없고 교육을 한 것 같지가 않다"고 자책했다. 그러면서 "다만 아이들에게 죄를 지었을 뿐"이라고 회고했다.
퇴임할 때 5공권력의 미움으로 그 흔한 석류장, 목련장 훈장조차 받질 못했다. 다른 교장들이 퇴임할 때 평생을 교육계에 헌신했다고 자화자찬할 때 이오덕은 권력에 밀리고 쫓겨나다시피 반강제로 학교를 떠났다. 그럼에도 이오덕은 자신을 따르는 수천수만의 교사들을 이 땅에 만들어 냈다. 모두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과 삶이 상처 받지 않고 "그 순수함이 훼손되는 사태를 막으려는 교육자적 책임감의 실천"이었다.
이 시대 누가 진정한 교육자인지 누가 페스탈로치의 삶을 따라갔는지 우리는 이오덕의 삶을 공부하면서 알 수 있다.
3. 자랑스러운 한국의 페스탈로치, 이오덕
오늘날 전교조의 참교육 이념, 바로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은 이오덕의 참교육을 이어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들 삶을 위한 교육을 추구했던 이오덕의 참교육 정신은 전교조의 뿌리가 된 것이다. 이오덕은 오늘날 한국교육을 '병든 교육', '미친 교육', '살인교육', '식인교육', '거짓교육', 바로 '야만'이라고 규정했다. 아이들을 병들게 하고 비주체적인 가식의 세계로 몰아넣는 입시 경쟁교육을 당장 멈출 것을 갈망했다.
1986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유서가 된 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에 이오덕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교육운동을 하던 이 땅의 교사들에게 H양의 편지는 1970년 전태일이 노동현실을 죽음으로 고발한 것에 버금갈 충격이자 일대 사건이었다.
'과연 내가 교사인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교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따위의 숱한 물음들이 내면에서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 땅의 교육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H양의 편지에는 당시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어른들의 비정한 정신상태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나에게 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라고 하는 분, 항상 나에게 친구와 사귀지 말라고 슬픈 말만 하시는 분, 그분이 날 15년 키워준 사랑스런 엄마…(중략)… 공부만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 이 사회에 봉사,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 그것이 보람 있고 행복한 거잖아, 꼭 돈 벌고 명예가 많은 것이 행복한 게 아니잖아. 나만 그렇게 살면 뭐해? 나만 편하면 뭐해? 매일 경쟁! 경쟁! 공부밖에 모르는 엄마, 그 밑에서 썩어 들어가는 내 심장을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까? 난 로봇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도 없는 물건도 아니다. (이하 생략)"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는 순간 이 땅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점수를 몇 점을 받아오는지, 반에서 몇 등인지에 온 신경이 곤두선다. 그 때부터 아이들 불행은 시작된다고 이오덕은 말한다. 이오덕은 교육이 아니라 '야만의 발작'이라고 했다. 80년대 매년 아이들이 100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상엔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라고 이오덕은 힘주어 강조했다. 이젠 '미친 교육', '거짓 교육', '추악한 교육'을 멈추고 아이들 살리는 교육을 하자고 간절히 호소한다.
이오덕의 유고시 가운데 야만의 시대, 절망의 시대를 살아갔던 아픈 마음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교육자로서 이오덕의 아픔을 느끼게 하는 시인데 제목이 없다.
"시를 가르치면서/시를 믿고/시에 기대어 살아가도록/나는 가르쳤다/그러나 내 가르침을 받은 아이들은/모두가 한 포기 풀같이 한 그루 나무같이/꽃같이/순하고 순한 짐승같이/자라나기를 빌었다/
그들과 헤어진 30년 뒤, 40년 뒤,/들려온 슬픈 소식들…/지금 내가 들어야 하는 소식은 무엇인가/ 내가 알게 된 글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나/
이른 봄 담 밑에 돋아나는 새파란 풀싹 같고/가을날 눈부시게 고운/하늘빛으로 하늘 해 쳐다보던 달개비 꽃 같던/그 고운 마음들 다 짓밟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시도 말도 죽어버린 이 쓸쓸한 땅에/
오늘도 얼어붙은 이 겨울/하늘 아래 모든 것이 잿빛으로 덮인 빙판길을/쫓기는 짐승처럼 엄금엄금 기어가듯 한다./
이제는 우리말 우리 목숨 살펴야 하는/이 기막힌 일을 하자고 가는/나는 멀미가 나는구나./아, 땅이 흔들려 멀미가 난다."
이오덕이 시작한 '아이들 삶을 위한 교육'바로, 참교육은 그렇게 절망 속에서 절망을 딛고 싹을 틔웠다. 이오덕이 전 생애에 걸쳐 온 몸으로 보여준 치열함은 이 땅의 숱한 교사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크나큰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교사들이 이오덕을 '교사의 길을 가르쳐준 시대의 스승'이라 일컫고 따른다.
시대의 낡은 질서에 저항하고 끊임없이 아이들 삶을 보듬으며 사람다운 어른으로 성장하게 하는 데 자신의 전 생애을 바친 이오덕을 우리가 자랑스럽게 '한국의 페스탈로치'라고 이름 부르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