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 아침 조선일보를 보니 "'영웅', '독재자' 어떻게 불리든 대한민국을 바꾼 지도자였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제가 금년 8월 16일에 썼든 글을 카페에 올립니다. 이글은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에서 발행하는 '박정희 정신' 11/12월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Social media에서 제글을 우연히 본 기념재단 좌승희 원장이 친구를 통해 만나자고 하여 만났더니 이 글을 기념재단 발행 '박정희 정신'격월간지에 싣겠다고 하여 제가 쾌히 응하였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에 일어난 5.16 혁명이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가진 기억과 소회를 이 글에 담았습니다.
아! 박정희! - 내가 기억하는 박정희 - 김원율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교리연구소장, 자유기고가 근대화를 이끈 일본의 사무라이들 우정사업부는 7월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취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8월 9일에는 문대통령 취임 100일 기념우표를 8월 17일 발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 무슨 망녕된 짓인가? 조국 근대화를 치열한 투혼으로 외롭게 이끌었던 영웅의 기념우표를 취소하면서, 한편으로는 문대통령 취임 기념우표를 발행하며 쓰레기언론들은 얼마나 문비어천가를 불러댈 것인가? 아 사실이 공표된 8월 10일자 조선일보에는 ‘책 읽는 사무라이, 일(日) 근대화를 이끌다’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에도 시대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250년간 평화시대가 지속되면서 전쟁에서 무공을 세워 출세할 수 있는 길이 막혔다. 이러한 처지에서 수만명의 사무라이들이 책을 읽어 지식과 경륜을 쌓음으로써 일본 근대화의 계기가 된 메이지 유신을 열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험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수만명의 사무라이들이 나섰지만, 한국의 근대화는 거의 한 사람이 끌고 갔으며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이 칼럼의 필자 남정욱 씨는 밝히고 있다. 외로운 지도자의 고뇌와 투혼
대한민국의 기적적인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외로운 한 지도자의 엄청난 고뇌와 투혼이 스며있다. 1960년 4.19 학생의거가 성공하여 민주당 장면정권이 들어서고 사회는 계속되는 데모로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당시 중학교 1년생이던 필자도 선배에게 이끌려 거리를 행진하면서 뜻도 모르는 구호를 그들의 선창에 따라 외치곤 하였다. 중2였던 1961년 5월 16일 아침 조회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엄숙한 표정으로 “지금 서울에서는 군인들이 한강다리를 건너서 서울로 진입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무슨 이유로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한강 다리를 건넜는지 필자는 알지 못하였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기에 중학교 2학년생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5.16 군사혁명 이후 군사정부와 민정이양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였으며 그는 곧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포함하여 의욕적인 경제성장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는 후일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경제성장 추진과정에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진정 박대통령을 뒷받침하고 따랐던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필자는 고교와 대학시절 동아, 조선 등 유력일간지들을 많이 읽었었다. 당시 이른 바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 언론은 예외 없이 열정적이며 고독했던 이 지도자를 폄훼하거나 빈정대는 논조를 펼치기 일쑤였다. 조선조 500년 동안 반자본주의적인 유교적 대의명분에 젖은 이 땅의 지식인들은 무식한 군인이 정권을 잡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최하층민인 상공인들과 (지금 ‘재벌’이라고 불리는 대기업집단)과 힘을 합쳐 경제성장에 매진한다고 하였을 때, 끊임없이 ‘정경유착’문제를 제기하였다. 잘 살아본 적이 없고, 청빈(淸貧)이라는 위선적인 관념 속에서 개인의 부(富)를 부정적인 것으로만 교육받아온 먹물들은 박대통령이 ‘잘살아보세’, ‘80년대 중진국 진입’을 외쳤을 때 사사건건 냉소와 비난으로 맞섰고 실현 불가능한 슬로건을 내세워 정권유지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당시 언론과 지식인들의 비난에 시달리던 그는 오죽 답답했으면 ‘사람이 일하다 보면 잘하는 것도 있는데 잘하는 것은 왜 잘한다고 칭찬하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하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성장에 온힘을 기울여도 힘겨운 싸움인데 이들과 맞서 설득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북한의 위협에 맞서 ‘싸우며 건설하자!’고 국민들을 독려하였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후진국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거의 유일한 국가이다. 이 과정에서 시대를 앞서간 두 명의 선각자가 있었다. 지금 좌익들이 그토록 폄훼하고 난도질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다. 조선조에서 임금과 사대부 양반들의 착취에 시달리며 가난과 복종을 천명처럼 여기고 살아온 이 땅의 백성들은 민주공화국이 어떤 것인지 자유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이미 상해임시정부의 헌법에서 채택한 강령, 삼균주의(三均主義)에서 이 땅에 공산주의의 싹이 만연하였고 당시 배웠다는 사람들 머리에는 사회주의의 망령만이 가득하였다. 공산주의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으며 바다건너 미국이라는 보화(寶貨)를 일찍이 간파한 이승만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박정희 대통령의 불굴의 의지 1965년 당시 한일국교 정상화 무렵 언론과 정치권은 모질고 끈질기게도 대일청구권 자금 협상을 위한 국교정상화를 ‘굴욕외교’라고 비난하였다. 대학생들도 서울의 거리를 투쟁의 현장으로 삼아 하루도 쉼 없이 데모대가 휩쓸다시피 하였다. 필자가 기억하기로 평화선에 대한 일본과의 협상에 대하여 ‘분노의 바다’, ‘현해탄의 바다는 말이 없다’는 등 사람피를 들끓게 하는 논조의 기사를 쓰면서까지 언론은 한일협정에 대하여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불굴의 의지가 아니었더라면 한일 국교정상화협정은 체결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당시 청구권 자금 (한국은 일본과의 전쟁 당사국이 아니므로 배상금 명목으로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무상 3억, 유상 2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1965년 한국의 총수출액이 건국이후 처음으로 1억불에 달하였다고 기뻐하던 때였다. 세계 7대 무역대국인 대한민국의 오늘날의 계산으로 본다면 수출액 5천억불의 다섯배가 되는 2조5천억 불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물론 경제후진국인 당시와 세계적인 무역대국인 오늘의 한국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비교가 적절한가하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한국 경제에 끼친 효과에서 생각한다면 한해 총 수출액의 다섯 배에 해당되는 돈을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아냄으로써 이 자금이 경제성장의 엄청난 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명백하다. 이 돈이 포항제철 등 중화학공업 건설의 기초가 되었고 고속도로와 댐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에 투자됨으로써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고속도로를 건설하고자 할 때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은 ‘부자들 주말에 자가용타고 놀러 다니라고 고속도로 닦느냐?’고 하면서 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드러눕기도 하였다. 당시 야당의 발목잡기에 지친 박대통령은 ‘야당이 국회에서 찬성한 것은 국회의원 월급(세비)올리는 것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0월 유신과 한국의 중화학 공업화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지금도 ‘독재정치의 화신’으로 그를 매도하게 만든 ‘10월 유신’을 단행한다. 그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말이 뜻하듯 그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국가, 민족을 위한다는 그 분의 신념이 어찌 보면 무모한, 이러한 정치적 결단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1972년 필자가 군에 복무할 때 유신에 대한 국민투표가 행해졌다. 당시 필자는 부대 내에서 압박을 이겨내고 유일하게 유신에 대하여 반대표를 던졌다. 필자 생각으로는 ‘경제 성장은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루어 낼 수 있는데 무리하게 이승만 박사처럼 장기독재의 길을 꼭 걸어야 되는가?’라는 생각을 가졌다. 필자 또한 대학재학 시절 당시 많은 대학생들이 그러했듯 천지를 모르고 데모대에 휩쓸려 거리를 누빈 적도 있었다. 당시 선친께서 “박정희 대통령은 애국자다.”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지금의 젊은 사람들처럼 선친의 훈계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다. 참새가 대붕의 뜻을 알 수 없다. 필자의 생각은 틀렸고 그분이 옳았다. 1970년 경 대한민국의 신발수출액은 전 세계에서 1위였다. 신발수출 분량을 지상에 쌓으면 남산의 높이와 부피에 해당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돈으로 겨우 미국의 신예 전투기 한 대 반을 살 수 있었다. 이처럼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와 중화학 공업의 격차는 엄청난 것이다. 산업구조의 고도화는 ‘조국 근대화’와 풍요로운 미래를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1973년 필자는 대학원생 신분으로 일본의 산업견학단에 포함되어 미쯔비시 조선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4만톤 규모 배의 거대한 스크루 프로펠러를 보면서 입이 벌어지는 경험을 했는데 당시 필자의 생각으로 ‘내가 살아생전에 우리나라가 이러한 배를 만드는 것은 못보고 죽겠구나.’고 생각하였다. 흔히 왕회장으로 호칭되는 정주영 회장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경영스타일로 일본 경제계의 연구대상이 된 적이 있다고 한다. 돌다리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건너는 일본의 경영스타일로 보면 현대는 사실 망해야 하는데 하는 사업마다 승승장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회장도 박대통령이 조선업 진출을 권하였을 때 ‘각하, 못하겠습니다.’고 발을 뺐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누구인가? 그가 강권하다시피 하여 왕회장이 조선업에 진출하자 당시 이름 석자만 대어도 사람들이 아는 경제관료가 ‘만약 현대의 조선업이 성공한다면 내가 열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오르겠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현대는 성공하였고 지금도 그 경제관료는 하늘로 오르지 아니하고 지상에 머무르고 있다. (정주영 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그 후 현대를 위시하여 대우, 삼성도 조선업에 진출하였고 필자가 1973년 살아생전에 우리나라는 제조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거대선박은 불과 10여년 후 대한민국의 조선업이 기술과 규모 면에서 세계 1위에 오름으로써 그보다 더 큰 배도 만들게 되었다. 이런 업적이 과연 일요일에 그림이나 그리러 다니던 유약한 정치인이나 고속도로 위에서 드러눕던 정치인이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가? 이병철 회장이 정부의 중화학 공업화에 호응하여 반도체 진출을 결정하였을 때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삼성이 이제 무덤을 파고 있구나 생각하였다. 반도체가 엄청난 장비산업이고 설비하나에 지금 돈으로 몇 조를 쏟아 부어야 할 뿐 아니라 후발주자로 반도체를 생산해서 일본, 미국을 따라 잡는다고 누가 생각했다면 아마 정상이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대하여는 필자가 굳이 증언 부언할 필요는 없다. 필자는 단언한다. IMF를 일으켜 수많은 가정을 파탄으로 내몰았던 YS같은 경제문외한이 만약 70년대 집권하여 외자도입을 중단하고 정경유착을 끊는다는 미명으로 재벌 갈구기에 나섰다면 이 나라는 지금도 섬유, 가발이나 팔려 다니는 산업후진국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한국이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한 것은 늘어나는 해외로부터의 빚과 무역적자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다만 지도자의 불굴의 신념과 불퇴전의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었다. 한국이 경제성장계획을 세웠을 때 이 나라는 돈도 없고 기술도 없었다. 그러니 부품과 소재를 가까운 이웃, 주로 일본에서 수입하여 싼 임금으로 조립하여 인건비를 따먹고 미국 같은 선진국에 수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더하여 조립을 위한 기계도 저수준의 기계공업으로 인하여 거의 해외에서 도입하였기 때문에 무역수지는 언제나 마이너스였다. 필자가 산업은행 조사부에 근무하던 1980년대 초반 한국산업의 고도화를 위하여 노래를 부른 것이 ‘부품 • 소재산업 발전’이었다. 그러나 부품과 소재가 맨입에 되는 게 아니다. 막대한 연구 • 개발 투자, 과감한 설비투자, 기계공업의 발전이 필수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후대에 욕먹을 각오를 하고 비판세력을 긴급조치로 잠재우고 과감한 결단으로 밀어붙인 것이 바로 중화학공업화를 가능하게 한 ‘10월 유신’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부품 • 소재산업의 강국이다. 중국이 사드배치를 트집 잡아 소비재 수입을 비토하고 있어도 중국도 어쩔 수 없이 수입해야 하는 것이 부품(반도체 등)과 소재(석유화학 공업의 생산물)이므로 대 중국 무역흑자는 별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또한 세계1위의 원자력 발전기술이 나타내듯이 한국의 기계공업도 이미 세계 정상급의 수준을 지닌다. 지금 한국이 유일하게 뒤처지고 있는 부분이 설계 및 소프트웨어 기술이다. 이 모든 것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져서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한국이 중화학 공업의 선진국이 되었는가? 절대 아니다. 이 험난한 과정에는 한 지도자의 결단과 고뇌, 땀과 눈물이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외 순채권국이 되었으며 계속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이어지고 외화가 남아돌아 휴가철에는 국제공항이 출국하는 여행객으로 장사진을 이룬다. 이 외화는 누구의 피와 땀인가? 누가 박정희 대통령을 따랐던가? 박정희 대통령이 ‘잘 살아보세!’를 외쳤을 때 이 나라의 정치인, 지식인들은 끝없이 뒷다리를 잡고 늘어지거나 비아냥거림과 조롱, 정경유착비난 등으로 날밤을 지새웠다. 다만 배운 것 없고 배고픈 공원들, 여공들,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등이 박대통령의 열정에 순수하게 따랐다. 열사의 건설 현장에서 땀 흘린 노동자들, 샘플가방을 들고 5대양 6대주를 누볐던 수출의 역군들이 가난의 대물림을 막고 풍요로운 조국을 위하여 혼을 불살랐다. 시골의 촌부와 아낙네들은 박대통령의 지도력을 믿고 ‘새마을 운동’에 적극 호응하였다. 한국의 기업들은 1960년대와 70년대 섬유산업에 매달리면서 선진국에 와이셔츠를 한 타스에 10불 정도의 저가에 팔아가며 인건비를 아껴 자본을 축적하였다. 당시 공원들은 구로공단에서 교대 근무하면서 벌집으로 불리는 좁은 공간에서 다리가 열십자로 포개질 정도로 새우잠을 자면서 삼시 세끼를 라면으로 때웠다. 비록 말할 수 없이 고생하였지만 그들은 회고할 때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원자재와 기계를 수입하여 인건비나 따먹는 산업구조에서 이익이 나면 다시 투자하여 산업구조를 한단계 한단계 높여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희생이 나라를 일군 것이다. 그때 산업현장에서 그토록 고생한 사람들이 아무 소리를 하지 않는데 그 과실을 향유하면서 고생이 무언지도 모르고 배고픈 것도 경험하지 못한 인간들이 ‘임금착취’, ‘노동착취’ 운운하면서 지도자를 폄훼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논리가 먹혀들어 이 위대한 지도자를 아직도 독재자로 비난하고 매도하는 것이 바로 이 나라의 국민 수준이다. 아! 박정희! 이제 다시 첫머리에 언급하였던 우표문제로 돌아가 보자. 다른 대통령도 언젠가는 탄신 백주년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 그들은 무슨 명목으로 기념우표를 발행한다고 할 것인가? 박대통령 탄신 백주년 기념우표는 발행되건 발행되지 않건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분의 업적을 알고 그분의 고뇌를 아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박정희 대통령은 불멸의 존재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역사 이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을 맞고 있다. 다만 이에는 단서가 붙는다, ‘원래 대한민국의 국민수준에 가장 잘 들어맞는’ 지도자로서 말이다. 이승만 박사나 박정희 대통령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분노하고 가슴 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국민의 수준이 원래 그것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분들은 대한민국의 국민보다 훨씬 앞서 갔던 선각자들이었다. 이승만 박사와 박정희 대통령이 위대한 것은 국민이 무어라고 하건 신념과 결단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산업화의 기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국민소득 60불의 적빈(赤貧), 전쟁으로 전파(全破)된 산업시설, 돈과 기술이 전무한 상황, 패배주의에 빠져 끝없이 뒷다리를 잡는 언론과 정치인,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정상(頂上)의 중화학 공업화라는 5천년 한반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아니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이 어마어마한 기적을 박정희 대통령은 이루어 내었다. 이러한 엄청난 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어찌 무리수가 없었겠는가? 그런데 공은 모두 깔아뭉개고 과실만 부각시켜 대통령 탄신 100주년 기념우표마저 취소하는 이런 국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지금 대한민국의 미래는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 5천만 인구, 10만 평방키로의 좁은 국토에 산지가 7할이며 나머지 3할의 평지에 공장짓고 집짓고 농사짓고 살아야 한다. 이태리나 스페인처럼 관광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기름 한방울 나지 않으며 다른 광물자원도 거의 없다. 지금 죽자 살자 미래 먹거리에 모든 힘과 역량을 모두 쏟아 부어도 모자라는 지경에 문재인대통령은 미래의 먹거리 산업인 원자력 산업을 이상한 방식으로 말아먹고 있다. ‘판도라’ 인지 ‘핑돌아’ 인지 이상한 영화한편 보면서 눈물을 질질 짜다가 나와서는 (대통령께서는 전에도 ‘왕이 된 남자 광해’라는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감성을 지닌 분이라고 생각된다.) 세계에서 안전성 1위라는 고리 원자력 발전소 5, 6호기 건설을 중단시켰다. 그런가 하면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 무상시리즈로 한번에 10조, 30조씩 돈을 뿌려대고 있다. (대선 공약 자금 178조와는 별도로) 빈대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촛불난동, 그리고 대통령이 말 한마디 할 때마다 30조씩 날아가는 이 나라의 곳간... 요즈음 베네수엘라를 보면 중산층이 식료품 살 돈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고 80%국민의 체중이 평균 7.8킬로가 줄었다고 한다. 그나마 석유매장량 세계 1위인 나라가 이 지경인데 기름 한방울 없고 평지 3만평방 킬로에서 5천만이 복닥거리며 사는 이 나라에서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이 그토록 노심초사해서 중화학공업화를 일으키면서 쌓아놓은 나라살림을 장롱에서 곶감 빼먹듯 전부 빼먹고 나면 이제 남은 것은 베네수엘라처럼 국민들이 쓰레기 통 뒤지는 일만 남아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는 기름매장량 세계 1위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돈 떨어지면 해외에서 식료품 사다먹을 돈도 떨어지고 그때 우리의 딸들이 필리핀처럼 해외에 나가서 식모노릇하면서 외화 벌어 송금해야 하는가? 어쩔 도리가 없다. 전국을 누비며 클로버 형의 고속도로 진입로를 자신이 스케치하면서까지 현장에서 지시하고 확인하였던 지도자, 청렴과 검소함으로 나라를 번영으로 이끈 지도자에 대하여 그 은공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국민. 민중혁명을 논하며 무능력자가 창의와 열정으로 부를 일구는 능력자를 착취하는 계급투쟁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얼빠진 지도자에게 열광하는 국민에게는 쓰레기통 뒤지는 것이 바로 국민 수준에 가장 합당한 미래의 결말이 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국민에 의해서는 제대로 평가될 수 없는 너무나 위대한 지도자였다. 지금 문대통령의 지지율이 80%이고 어떤 지역에서는 99%라고 한다. 아마 김일성도 이런 지지율을 누려보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겠다고 다시 오셔도 99% 사람들이 지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조금도 이상할 것 없다. 바로 그것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비록 국민이 고달팠지만 근면과 자조의 정신을 불어넣었던 지도자의 100주년 탄생기념우표는 깔아뭉개고 대중인기영합에만 올인하는 이런 지도자에게 80%가 열광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우리 같은 70노인이야 조금 살다가 세상뜨면 그만이지만 젊은 세대들이 김정은의 핵무기 공갈과 비어가는 곳간이라는 이 엄청난 현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우선 헬리콥터에서 떨어지는 돈 줍는 재미로 이 비극을 잊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는가? 대한민국의 어리석은 국민이여! 앞으로 이 난국을 진정 어떻게 헤쳐 나갈지 생각이나 하고 있는가? (2017.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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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젊은 시절 유신반대 데모도 남 못지 않게 했습니다만,
나이 먹은 지금에는 그분이 이 못난 놈보다 백배 천배 나았다는 생각.
짝! 짝! 짝! 전적으로 같은 생각이고,
지금 이 나라를 내 나라라고 말하기 싫고 니네나라라고 한다.
그리고 "나 세상떠난 다음의 나라까지 내가 왜 걱정 해야하나?" 하며
외면하면서 때론 생각을 접어버리곤 한다.
한민족 역사에 지금처럼 한민족이 자긍심 갖고 살수 있도록 만든 공로, 역사가
말할 것 입니다. 만약 그시기에 다른 길로 갔었더라면 지금쯤 한국과 한국민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