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문학관, 그곳에 시인이 살고 있다
브라보마이라이프 기사입력일 : 2017-11-29
[문학관 답사기]
목적지는 충청남도 부여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묻힌 시인 신동엽을 만나기 위해서다. 서울남부터미널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여행의 설렘을 더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알록달록한 단풍잎은 가을을 보내기 싫다는 듯 나뭇가지 끝에 겨우 매달려 몸을 흔든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호젓한 부여에 도착했다.
부여시외터미널에서 신동엽문학관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다. 5분 정도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면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한 구절을 써놓은 게스트하우스 담벼락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문학관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의미다. 100m도 채 지나지 않아 신동엽문학관과 신동엽 생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2013년 개관한 문학관과 복원된 생가는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지만, 함께 어울려 신동엽 시인에 관해 이야기한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껍데기는 가라’는 1967년에 발표됐다. 이후 ‘참여시의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비로소 문단의 조명을 받았다. 같은 해에는 4800행에 달하는 장편서사시 ‘금강’을 팬클럽의 작가기금을 받아 발표한다. 깔끔한 외모의 젊은 국어선생님이었던 신동엽은 평소에도 인기가 높아 여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많이 받았다. 그런 그를 보고 아내인 인병선 여사가 화를 많이 냈다고 한다. 신동엽은 자신의 작품인 오페레타 ‘석가탑’을 무대에 올리고 다음 해인 1969년, 국민방위군(1951) 때 감염된 간디스토마가 간암으로 악화되어 만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신동엽문학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이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낡아가는 자연스러운 문학관의 모습이 신동엽의 시를 닮았다. 마치 종이를 바른 듯한 느낌의 외벽에는 여백이 넘치고 내부는 외부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진보적인 시인이었던 신동엽. 이곳을 순례하는 자들의 발길은 여전히 잦다.
전시관에서는 시인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인병선 시인과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 즐겨 읽던 책, 교무수첩, 신분증 등 다양한 유품을 관람할 수 있다. 그와 관련한 자료들은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족의 노력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전시관을 다 둘러봤다면 옥상정원으로 올라가봐야 한다. 푸른색 기와의 신동엽 생가를 한눈에 넣을 수 있다.
신동엽이 자라고 신혼생활을 했던 생가의 앞마당 웅덩이는 지금은 풍성하게 자란 잔디가 그 자리를 메꿨고 초가지붕은 기와로 바뀌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시인이 살던 집은 조금씩 모습을 바꿨지만, 생가 안의 물품은 그 시절 그대로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흰 고무신과 책상 위의 잘 익은 감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시인이 살아 돌아올 것만 같다. 방문 위에 걸려 있는 목판에는 인병선 시인의 작품 ‘생가’가 새겨져 있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란 구절에서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느껴진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인병선, ‘생가’
신동엽 문학관 관람정보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길 12
전화 041-833-2725
관람시간 09:00~18:00 (11월~3월은 17:00까지)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입장료 : 무료
신동엽(申東曄, 1930~1969)
평산, 平山, 석림, 石林
출생 1930. 8. 18, 충남 부여
사망 1969. 4. 7, 서울
국적 한국
요약 : 시인. 민중의 저항의식을 시로 표현했다. 대표작으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껍데기는 가라> 등이 있다.
서구지향의 모더니즘과 전통지향의 보수주의가 양립하는 1950~60년대의 한국의 시단에서 역사와 현실에 대한 자각과 그것의 시화를 통해 근원적인 민중시를 정착시키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아버지 연순과 어머니 김영희(金英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8년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머물면서 차츰 한국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949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다. 6·25전쟁 때 전시연합대학에 재학중 '국민방위군사건'으로 수용되어 낙향하던 중 훗날 요절의 원인이 된 간디스토마와 폐디스토마에 감염되었다. 1953년 대학 졸업 후 충청남도 주산농업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으며, 1960년에는 교육평론사에 근무했다. 1961년 명성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해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1964년 건국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을 수료했으며, 1966년 국립극장에서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을 상연했다.
문학세계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석림'이라는 필명으로 입선해 문단에 나왔다. 이어 〈진달래 산천〉(조선일보, 1959. 3. 24)·〈싱싱한 동자를 위하여〉(교육평론, 1960. 1)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초기작인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는 대지에 뿌리박은 원초적인 생명에의 귀의를 쟁기꾼을 통한 대지와의 대화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원초적 생명복원에 대한 희구와 진정한 인간성에 대한 강렬한 집착은 시집 〈아사녀〉(1963)에 와서 소박한 토속성 속에 지나간 역사에 대한 향수로 형상화되었고, 4·19혁명 이후 좀더 현실화되어 나타났다. 즉 대지는 한반도로, 원초적 생명력에 대한 그리움은 민족주체성에 대한 그리움으로 구체화됨으로써 막연했던 과거역사에 대한 관심이 현실과 밀착되고 있다. 그의 시에 나오는 아사달·아사녀는 밝음·원초·희망·주체성·생명을 나타내는데, 이들은 외세에 물들지 않는 순수한 한국인의 전형으로 상징화된다.
이와 같은 민족주체성의 외침은 "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라는 시 〈껍데기는 가라〉에서 그 절정을 보여준다. 올바른 역사와 현실에의 관심은 갑오농민전쟁을 주제로 한 장편서사시 〈금강〉에서 과거와 현재, 서정과 서사적 요소가 적절히 혼합된 구성을 통해 구체화된다. 〈금강〉은 봉건권력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과 부정정신을 보여줌으로써, 갑오농민전쟁과 4·19혁명을 민중의식의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통합시키고 있다. 그의 현실에 대한 지속적 관심은 유작인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창작과 비평, 1968. 여름호)에서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시 외에도 1961년 〈자유문학〉 2월호에 평론 〈시인정신론〉을 발표했다. 시집으로는 〈신동엽전집〉(1975)·〈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80)·〈금강〉(1989) 등이 있다. 1982년 그의 유족과 창작과비평사가 중심이 되어 신동엽창작기금을 제정해 매년 그의 기일에 시상하고 있다
신동엽 문학관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