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일 나해] 요한 6,60ㄴ-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감탄고토’(甘呑苦吐)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입니다. 사리의 옳고 그름에는 관계 없이 자기 비위에 맞으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하는 인간의 이중적 태도를 꼬집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통해 빵을 배부르게 먹고, 치유의 은총을 입으며, 심지어 죽었던 사람까지 되살아났을 때에는, 자신도 그분의 놀라운 능력을 이용하여 원하는걸 이룰 수 있겠다고 기대하여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추앙하던 군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의 바람대로 물질적 번영과 정치 사회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왕’이 되시기를 거부하자 크게 실망합니다. 게다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며, 자기들이 지닌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니 실망을 넘어 반감까지 지니게 되지요. 심지어 예수님께서 ‘먹는다’라는 의미를 표현하시기 위해 ‘받아들이다’라는 의미로 적당히 순화할 수 있는 동사를 쓰시지 않고, ‘씹어먹다’라는 과격한 뜻을 지닌 동사를 쓰셨으니 그들이 느끼는 거북함과 불편함이 꽤나 컸을 겁니다.
그런 모습이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아님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진정한 스승으로 여기는 그분의 진짜 제자였다면, 그분의 가르침이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배척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달을 때까지 묻고 또 물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기들 잇속만 채우려고 했을 뿐 그분 말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그 안에 담긴 의도와 뜻을 알고자 하는 열망도 의지도 없었기에, 그 말씀이 자기들 마음을 불편하게 하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분께 등을 돌립니다. 그렇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려는’ 마음가짐으로는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그것이 몸과 마음에 가져다주는 유익함을 제대로 누릴 수도 없지요.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여기서 ‘거슬리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알아듣기 어려운 말, 의미가 모호한 말을 하셔서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신 게 아니지요. ‘좋고 나쁨’을 자기 기준으로 따지는 교만함 때문에, 입맛에 맞는 말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편협함 때문에, 그들 스스로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예수님 때문에 ‘걸려 넘어졌다’는 핑계를 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편식이 심한 아이가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지 못한 건 엄마가 제대로 된 음식을 차려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입에 맞는 것만 골라먹은 그 아이의 고집 탓이기 때문입니다.
앞선 몇 주 동안의 가르침에서 세속적인 물질로서의 ‘빵’이 아니라 당신의 ‘살’이 세상에 생명을 준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오늘 빵에 대한 가르침을 마무리하시면서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명에 따라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음식을 꼭꼭 씹어 삼키면 내 몸에 피가 되고 살이 되듯이, 우리가 그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곱씹으며 깨달은 바를 삶 속에서 실천한다면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 온전히 일치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이 말씀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인간의 육신을 적대시하고 천시하는 ‘영지주의’ 같은 이단이 생기기도 했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쓸 모 없다고 하신 건 ‘몸’(body)’이 아니라 ‘살’(flesh)에 해당합니다. ‘몸’은 머리 가슴 팔 다리 같은 우리의 ‘지체’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세상 종말의 날에 이 지체들을 온전히 간직한 채로 부활하여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반면 ‘살’은 우리가 다이어트를 할 때 빼는 바로 그 살을 가리킵니다. 음식에 대한 과한 욕심 때문에, 먹을 것을 절제하지 못한 나태함 때문에, 몸을 필요한 만큼 움직이지 않은 게으름 때문에 내 몸과 영혼에 달라붙어 나를 비대하게 만드는 살은 구원에 아무 쓸모 없을 뿐 아니라 영육간의 건강에도 해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몸과 마음에 그런 살들이 달라붙지 않도록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비우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영혼의 다이어트’는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억지로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나 스스로가 강한 의지와 결단을 가지고 죽기살기로 열심히 노력해야만 이룰 수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너희도 저 사람들처럼 나를 통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을 얻고 싶으냐? 그러다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원망하며 나를 떠날 것이냐? 실제로 그런 이유 때문에 주님을, 신앙을 떠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믿음은 본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니 아무리 하느님이라도 그들에게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한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아무나 당신 사랑에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분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사랑받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 하느님의 부르심에 스스로의 의지로, 철저한 순명으로 응답하며 따른다면, 그분께서 풍성하게 베푸시는 은총과 복을 받아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런 예수님의 의도를 깊이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리 떼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양떼인 자신은 참된 목자이신 주님 곁에 딱 붙어 있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서운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이신 예수님께 더 간절히 매달리며 그분께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금새 실망하여 떨어져 나가는 ‘어중이떠중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예수님 곁에, 그분 안에 머무르는 참된 ‘제자’가 될 것인가는 베드로처럼 참된 믿음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요. 군중들은 먼저 예수님이 표징을 통해 ‘알려주시면 믿겠다’는 태도로 임했기에 그분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먼저 믿음으로 받아들인 후, 그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따랐기에 그 안에서 구원의 진리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신앙생활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섭리는 알아야 믿어지는게 아니라 믿는 만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는 바를 실천에 옮기는 만큼 내 안에서 실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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