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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착한 목자는 자화자찬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께서 살아생전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씀들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들이 지금은 불멸의 어록이 되어, 전 세계 살레시오 가족들 사이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돈보스코의 어록입니다.
“저는 청소년들을 위해 공부하고,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고, 청소년들을 위해 저의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까지 사랑하십시오.”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지 항상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언제나 여러분 한가운데 현존해 계십니다.”
돈보스코가 만년에 이르렀을 때, 수시로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돈보스코, 당신이 이룬 업적을 보니 정말 놀랍습니다. 살레시오회와 수녀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수도원 담 밖의 살레시오회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도 창립했습니다. 수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양성시켜 해외로 파견했습니다. 그 와중에 그 많은 책을 저술하고 출판사까지 설립해서 양서들을 보급하였습니다. 지금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청소년들의 아버지로서 매일 영적, 육적으로 그들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이게 대체 가능한 일입니까?”
묵묵히 질문을 듣고 있던 돈보스코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섭리하시고 보살펴주셨으며, 특히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보잘것없는 종일 따름입니다.”
보십시오. 돈보스코의 내면 안에는 지극히 겸손한 신원의식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적인 사도직을 수행했지만, 단 한 번도 교만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고백 역시 비슷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주님 손에 쥐어진 몽땅 연필 한 자루입니다!”
사이비나 이단인지 구별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바라봐야 할 대상은 단체를 이끄는 지도자나 목자입니다. 한 지도자가 겸손한 봉사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제왕이나 스타로서의 삶을 추구하고, 군림하고 있다면 그 단체는 이미 사이비입니다.
혹시라도 한 목자에 있어 겸손의 덕이 심각히 부족하다면 사이비로 보면 틀림없습니다. 틈만 나면 “내가 누군지 알아?” 하고 자화자찬을 늘어놓는다면, 그는 백 퍼센트 사이비입니다. “내가 말끔하게 치유해줄 테니, 거금을 가져오라.”고 외치면 그는 백 퍼센트 이단입니다. 스스로를 향해 “내가 메시아요, 재림 예수!”라고 외치면 분명 과대망상증 환자입니다. 교도권의 지도나 동반을 무시하고, 따로 나가서 천막을 치고, 동산을 꾸민다면, 백 퍼센트 이단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겸손하고 온유한 참 목자들을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참 목자는 스승 예수님을 닮아 언제나 겸손의 덕을 잃지 않습니다. 결코 자화자찬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주님 나라 확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헌신하지만, 모든 영광은 스스로에게가 아니라, 하느님께로 돌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언제나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루카 17,5-10
믿음만이 줄 수 있는 해답: 나는 누구인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정한 성공을 좇아 죽도록 열심히 살았는데도, 막상 정상에 서 보면 '이게 전부인가?' 하는 공허함에 휩싸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과 명예, 명성을 다 거머쥐었지만 결국 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해답 없이는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해도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삶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전 세계인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며 아카데미상까지 받은 명배우였습니다.
누구보다 밝고 유쾌해 보였지만, 내면에는 극심한 우울증과 존재론적인 고뇌가 있었습니다.
그는 2014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로빈 윌리엄스는 코미디에 대해 "나는 웃음으로 자신을 숨긴다.
웃음은 때로 당신의 유일한 방어선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고백은 "나는 항상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해했다" 는 말이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모든 것을 얻었음에도 그가 찾지 못한 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이 해답 없이는 우리의 존재가 흔들리고, 모든 행위는 결국 허무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사춘기 시절, 거울 속의 저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며,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를 수없이 물었습니다.
이 해답 없이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해답은,
어렸을 때 부모님을 통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밭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오신 어머니가 주신 '단팥빵과 흰 우유', 아버지의 투박한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을 보며, 저는 의심 없이 확신했습니다.
'아, 저분들이 내 부모님이 맞구나.
나를 위해 저렇게 애쓰시는 분들이구나.' 그 양식을 먹고 굳은살을 묵상하며, 저는 제가 부모님 없이는 존재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믿음은 저의 모든 행위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곧, 나의 창조자가 누구이시고,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의 시작이자 완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5) 하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비유와 '쓸모없는 종'의 비유를 통해 믿음의 본질을 설명하십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을 다 하고도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루카 17,10)라고 고백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깊은 본질을 드러냅니다. 믿음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주인)이 누구이신지 알고, 나(종)는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이 앎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양식'과 그 양식에 대한 우리의 '묵상'을 통해 자라납니다.
우리가 그 양식을 먹고 묵상하며 그분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깨달을 때,
비로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금송아지'처럼, 즉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은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세상의 왕이자 주님이라고 착각하며, 그 끝에는 허무만이 남을 뿐입니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실제 모델인 프랭크 애버그네일 주니어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과 뛰어난 통찰력(하느님께서 주신 양식)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부모의 이혼과 불행한 가정 환경 속에서 그 재능을 타인을 속이고 자신을 보호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부터 조종사, 의사, 변호사 등으로 위장하여 엄청난 사기 행각을 벌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주인으로 착각했고, 자신의 재능을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하기보다 욕망과 생존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는 "나는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살 때 가장 자유로웠다"고 말했습니다.
성공과 쾌락을 경험했지만, 그의 내면은 늘 깊은 공허함에 시달렸고, 결국 FBI에 체포됩니다.
그는 체포된 후에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자신이 받은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양식'을 먹었지만, 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세상의 왕이자 주인으로 착각했기에,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얻지 못하고 허무의 굴레에 갇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와 정반대의 삶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사랑(양식)을 알고, 자신을 ‘쓸모없는 종’으로 여기며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주인의 더 큰 사랑과 행복을 얻어냅니다.
이들은 믿음의 본질을 깨달은 이들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에 등장하는 늙은 소를 보십시오.
최노인과 함께 40년을 넘게 일한 이 소는, 늙고 병들었지만 주인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귀한 존재임을 압니다.
주인이 주는 양식을 먹으며 주인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합니다.
이 소에게 최노인은 무엇이든 주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이 늙은 소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인과의 관계 속에서 찾았기에, 그 존재 자체가 행복했고, 주인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예는 우리에게 '그분을 알고 나를 아는 믿음'이 가져오는 행복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다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같은 아버지의 양식을 먹고 자란 두 아들, 하지만
그들은 확연히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양식(유산)을 가지고 떠나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처지를 깊이 묵상했고,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돌아옵니다.
그는 자신을 ‘쓸모없는 종’이라 여기며 아버지의 자비에 매달렸고, 아버지는 그를 위해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송아지를 잡는 잔치를 베풉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아버지가 누구이신지를 깨달음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그에게 양식은 묵상을 통해 믿음의 완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양식을 매일 먹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동생을 미워하며,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대가만을 바랐습니다.
그는 양식에 대한 묵상이 없었기에, 자신을 주인으로 착각했고, 아버지를 자신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에게 양식은 묵상이 없었기에 믿음의 성장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분노와 시기심 속에서 허무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이렇듯 믿음은 저절로 증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그분을 더 알려고 노력하고, 그분이 주는 양식에 우리의 깊은 묵상이 더해질 때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그분을 알아가면, 그분은 더 커지시고 나는 더 작아집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는 하느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막연히 구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더 알게 하소서. 이를 위해 매일의 양식을 주소서. 이 양식에 대한 저의 깊은 묵상을 더하게 하소서. 이를 통해 당신의 위대함을 매일 더 알아가게 하소서.
그래서 제가 누구인지, 저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라고 기도합시다.
매일매일 그 양식에 대한 우리의 깊은 묵상을 더할 때, 우리는 '쓸모없는 종'이라 고백하며 겸손하게 그분께 의탁할 수 있게 되고, 우리의 믿음은 겨자씨 한 알처럼 작더라도 산을 옮기고 바다에 나무를 심을 수 있는 기적을 이루는 위대한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찾고,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7,5-10: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1.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사도들은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라고 청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믿음이 양적으로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질과 순수성에 달려 있음을 가르치신다. 겨자씨는 지극히 작지만, 그 안에 강력한 생명력을 품고 있어 큰 나무로 자라난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작은 믿음이라도 진실하다면, 뿌리 깊은 뽕나무조차 바다에 심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란 단순히 어떤 것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행위이다.”(Homiliae in Matthaeum 58) 즉, 믿음은 우리의 계산과 확실성 너머에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태도이다.
2. 하느님 나라와 무상성
예수님은 종의 비유를 통해 믿음을 설명하신다. 종은 주인 앞에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봉사는 당연한 의무일 뿐이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10절) 이 말은 우리의 봉사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고 무상으로 받은 선물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인간이 아무리 수고한다 해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은총이 없이는 공로도 없다.”(De Natura et Gratia 36,42)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뿐이다. 그렇기에 믿음은 겸손을 낳는다.
3. 믿음의 힘: 일상 속의 기적
믿음은 거창한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서 드러난다. 믿음은 단순하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운데, 우리의 모든 작은 행위를 비범하게 만든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행하는 힘이다. 그것이 작아 보여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다.”(Commentarium in Matthaeum 13,2) 따라서 믿음은 매일의 삶 속에서 조금씩 자라나며, 두려움과 자만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4. 믿음과 무상적 봉사
예수님은 종의 비유로, 믿음이란 단순히 기다림이 아니라 활동적인 봉사임을 가르치신다. 믿음은 무력한 체념이 아니라, 은총 안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행하려는 적극적 실천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말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신앙으로 살아가며, 사랑으로 봉사하고, 희망 안에서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교회 41) 즉, 믿음은 하느님께 무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며, 동시에 이웃을 위한 봉사로 구체화한다.
5. 결론: 믿음은 시작이다.
믿음은 우리가 주님께 내딛는 첫걸음이다. 그것은 양적인 크기가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질적인 태도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적 같은 큰 사건보다도 오히려 작은 일상 속의 충실함이 믿음을 키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시작할 수 없고, 희망이 없이는 계속할 수 없으며, 사랑이 없이는 완성할 수 없다.”(Enchiridion 8)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도 사도들과 함께 고백합시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삶의 마지막 순간에 과연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1) 아~~ 내 인생은 참 의미 있었어. 2) 아~~ 내 인생은 참 허무했어.
첫 번째의 대답은 새로운 삶으로 넘어감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답은 후회, 걱정,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삶을 점수로 매긴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그 점수에 따라 자기 마지막 순간의 말도 결정될 것입니다.
100점 만점에 90점(약간 부족하지만, 그럭저럭 만족), 50점(허무), 20점(매우 허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100점짜리 삶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알아야 잘 살았는지 또 반대로 부족한지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100점 삶은 과연 무엇일까요? 답하기 좋게 객관식으로 제시하겠습니다.
1) 돈 많이 버는 것. 2)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
3) 무조건 건강한 삶. 4) 보람과 의미 있는 삶.
100점 삶이 우선 무엇인지 알아야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순간의 만족만을 추구합니다. 100점짜리 삶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생각하려 하지 않고, 순간의 만족이 마치 100점 삶이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겨자씨의 비유로 그 믿음이 얼마나 커다란 힘을 가졌는지를, 그리고 종의 비유를 통해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겸손한 섬김의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이로써 참된 믿음 즉,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걸맞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남을 죄짓게 하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함께, 형제가 죄를 짓더라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어려운 요구를 하십니다. 여기에 제자들은 자기들 믿음의 부족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믿음의 양보다 질이 중요함을 겨자씨의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장 작은 씨앗이 겨자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거대할 필요가 없고,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더라도 살아 있고 참된 믿음이라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종의 비유에서 나오는 종처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고백하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삶이 하느님 나라에서 보람과 의미 있는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참 기쁨과 행복이 있는 삶입니다.
오늘의 명언: 들어가기 망설여지는 그 동굴에 당신이 찾는 보물이 있다(조셉 캠벨)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10.05.연중 제27주일.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작은 기쁨과
소중한 만남을
느끼는
믿음의
새날입니다.
믿음의
출발점은
분명
기도입니다.
믿음은
기도와 함께
자라납니다.
믿음은 불확실성을
견디는 용기입니다.
하느님께
우리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용기가
믿음입니다.
우리가 살아내는
행위가 믿음입니다.
가장 좋은
것만을 주시며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은총이 바로
믿음입니다.
끝내 이해되지
않는 삶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진실한 믿음이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삶의 매 순간이
믿음의 여정입니다.
믿음은
삶을 지탱하는
근원적인 힘이며
사랑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며
고통을 의미로
바꾸는 힘입니다.
믿음은
성숙을 낳고,
성숙은 믿음을
깊게 합니다.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 안에서
성장해 가는
영혼의 여정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더하는
내어맡김의
주일 되십시오.
믿음은 기도로
살아나고
자라납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오늘 복음으로 듣는
성실한 종의 이야기에 마음이 뜨끔해지는 건
옳은 말을 강하게 하는 것이
정의인 줄 알았던
어린 사제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실하게 맡겨진 일에 충실했던,
한없이 온유한 말과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종의 자세가
바로 사제가 살아내야 할 모습임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때문에 오늘은 저를 위한 기도가 간절했습니다.
언제나 인자한 말을 사용하도록
자신을 세상과 구별 짓도록
칭찬하고 축복하는 언어를 ‘남용’하도록…
그리하여 만나는 모든 이를
감동시키고 감화시킬 수 있기를 청했습니다.
이야말로 “쓸모없는 종”이
성실히 행해야 할,
사명임을 새기고 또 새겼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굿뉴스
하바1,2-3;2.2-4 2티모1,6-8.13-14 루카17,5-10
믿음의 여정
“믿어라, 기다리라, 은사를 불태우라, 섬겨라”
새벽 바티칸 교황님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영문 글짜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신선한 충격에 영감을 받았습니다. “To Hope is to Choose”, “희망하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교황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정의냐 불의냐, 하느님이냐 돈이냐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을 거부하는 자들은 절망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희망뿐 아니라 잘 선택해야 할 것은 끝이 없습니다. 믿음도 선택이고 사랑도 선택이고 감사도 선택이고 평화도 선택입니다. 삶에서 선택해야 할 것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선택에 이어 반드시 훈련과 습관화가 이뤄져야 합니다. 여기 수도자들은 믿음을 선택하여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공동전례를 통해 믿음을 훈련하고 습관화합니다.
오늘 수도원 미사에 참석하신 분들은 참 좋은, 기막힌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선택이 믿음입니다. 불신불립,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인간품위의 우선순위로 첫째는 하느님 믿음, 둘째는 건강, 셋째는 돈’이라 강조해왔습니다. 절대로 우선순위가 바뀌어서도 안되고 첫째 번 하느님 믿음이 빠져선 더욱더 안됩니다.
참으로 인간품위의 첫째가 하느님 믿음입니다. 사람마다 믿음의 능력은, 깊이는 다 다르겠지만 나름대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갑니다. 과연 내 믿음의 수준은 어느 정도이겠는지요. 정말 노화와 더불어 체력은 쇠퇴해도 반대로 믿음의 힘, 신력은 날로 좋아지는 믿음의 여정이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여정,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믿음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과연 날로 둥글둥글 원숙하게 익어가는 믿음의 열매들인지요? 성공적 믿음의 여정을 위한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믿어라!”입니다.
믿음도 훈련입니다. 진짜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의 힘입니다. 오늘 사도들은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음은 선택이자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청할바 믿음을 더하야 달라는 청원 하나뿐이겠습니다.
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고통의 시련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더불어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 믿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은 우리의 노력인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믿음의 위력을 강조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믿음의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하느님께서 감동하여 응답하실 때 믿음의 기적입니다. 이런 믿음의 삶보다 이웃에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눈만 열리면 믿음의 스승들입니다. 부모의 믿음을, 수도선배들이나 이웃 형제자매들의 믿음을 보고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기다려라!”입니다.
기다림도 훈련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 인내의 믿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의 닻을 내리고 있을 때, 하느님을 믿을 때 기다릴수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 설레임이 끝없는 기다림을 가능하게 합니다. 결코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이들은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변절, 변심, 변덕이 없습니다. 조용히 하느님 중심에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요지부동 흔들리지도 않고 부평초처럼 방황하거나 표류하지 않습니다. 하바꾹 예언자의 진솔한 고백 기도에 공감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어찌하여, 어찌하여” 탄식과 원망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이 또한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입니다. 믿음 부족의 반영을 뜻하는 기도이지만 애당초 타고난 좋은 믿음은 없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기도를 바치면 됩니다. 주님의 응답에 깊어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 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보라, 뻔뻔한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우리가 목표할바 이런 의인의 한결같은 믿음의 기다림이자 성실함입니다. 의인은 진실하고 성실하고 절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바로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의 믿음이, 인내의 믿음이 목표하는 바 이런 의인의 삶입니다.
셋째, “불태우라!”입니다.
무엇을 불태웁니까? 하느님께 저마다 받은 은사를 불태우는 믿음입니다. 받은 은사와 책임을 다하며 불태우는 삶은 그대로 은총으로 빛나는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한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바로 주님의 미사은총의 선물이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입니다. 바로 이런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이 비겁하지 않고 용기있게 삶을 직면하게 합니다. 주님을 위해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게 합니다. 우리 안에 머무르는 성령의 도움이 우리가 맡은 훌륭한 것을 지켜내며 내 지닌 은사를 불태우며 살게 합니다.
넷째, “섬겨라!”입니다.
섬김도 훈련입니다. 오늘 복음의 종의 처지 비유가 참 기막히게 좋습니다. 우리 영성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무한한 사랑을 빚지고 살아가는 주님의 종입니다. 배수확에서 보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햇빛과 공기, 물, 땅을 공짜로 주셨기에 이렇게 좋은 농사를 질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런 사랑의 빚을 까맣게 잊고 지냅니다. 깨끗이 잘 관리하고 돌보아야 할 공동의 집인 지구를 너무 함부로 막 대합니다.
정말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은혜에 빚지고 사는 종의 처지를 안다면 감사의 표현인 겸손한 섬김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입니다. 우리가 평생 화두로 삼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영성의 절정이자 겸손한 믿음의 절정입니다. 살아 있음 자체가 찬미와 감사요 행복과 기쁨이요 사랑의 구원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라면 절망도 원망도 실망도 있을 수 없고 감사와 감동, 감탄만이 있을 뿐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마음 깊이까지 도달했기에 쓸모없는 종이라는 자의식입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참으로 자유롭고 자연스런 주님의 종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과 섬김의 영성>뿐이요, 이런 쓸모없는 종이라는 자의식의 감사와 겸손의 삶이라면 공동체의 평화는 저절로 이뤄질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믿음의 훈련에 항구하게 하시고, 감사와 겸손의 섬김의 종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
'믿음의 힘으로'
오늘 복음(루카17,5-10)은 '믿음의 힘'과 '겸손하게 섬겨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믿음의 힘으로 하느님의 일(봉사)을 성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6)
'믿음의 힘(기적)'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힘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성소에 충실한 종, 겸손한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17,10)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따라 하는 '하느님의 종들'입니다.
하느님의 종들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바쳐가시면서 일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봉사하려고, 그렇게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일(봉사)을 기쁘게 그리고 겸손하게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 한 작은 믿음'이면 된다고 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
믿음을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믿음은 크고 작고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있고 없고의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쁘게 그리고 겸손하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묵묵히 성실하게 그리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믿음의 힘으로 화이팅 합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 하바쿡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2-3; 2,2-4
2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
3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제 앞에는 억압과 폭력뿐
이느니 시비요 생기느니 싸움뿐입니다.
2,2 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환시를 기록하여라.
누구나 막힘없이 읽어 갈 수 있도록 판에다 분명하게 써라.”
3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4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1,6-8.13-14
사랑하는 그대여, 6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13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과 사랑으로,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14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대가 맡은 그 훌륭한 것을 지키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가 믿음이 있으면!>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5-10
그때에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