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코 바로치의 1598년 작 ‘아이네이아스의 트로이 탈출’. 아이네이아스(가운데 투구 쓴 사람)가 아버지 안키세스를 둘러업고 탈출하는 장면을 담았다. 트로이의 왕족 안키세스와 여신 비너스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난 아이네이아스는 오디세우스의 공격에 트로이가 함락되자 배를 타고 탈출, 지금의 이탈리아 땅에 나라를 세웠다. 이 이야기는 로마 건국 신화로 이어진다.
낡은 목선에 의지해 지중해를 건너려던 아프리카 난민들이 지난 2일 리비아 북쪽 약 180㎞ 해상에서 표류하다 손을 흔들어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 ‘아이네이스’ 다시 읽기
일리아스·오디세이아 참조해 만든 ‘아이네이스’… 승자 아닌 패자가 로마·유럽의 창시자 되는 이야기
문명·국가는 순수한 혈통이 아닌 이질적인 것들의 마주침… ‘타자에 대한 개방’의 중요성 알려줘
‘아이네이스’는 로마의 창세기다. 이 서사시를 쓴 베르길리우스는 죽기 직전 작품을 태워버리길 원했으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작품은 살아남았다. 프란츠 카프카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저자들은 걸핏하면 자기 작품을 태워버리라고 했지만, 운명은 위대한 작품의 생존 여부를 그 저자가 감히 결정할 수 없다며 살아남도록 만들었다. 살아남은 이 작품은 이후 라틴어로 쓰인 예술작품 가운데서 절대적인 자리를 갖게 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호메로스라는 그리스 거인의 그림자를 뒤에 두고 읽는다면 ‘아이네이스’는 좀 김빠지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장면이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대한 기시감을 일으키며 반복된다. ‘아이네이스’는 이 두 편의 서사시를 옆에 스승으로 모셔두고 참조하며 쓴 작품인 것이다. ‘오디세이아’의 칼립소 이야기는 디도 이야기로 변형되며, ‘일리아스’의 파트로클로스를 위한 장례 경기는 안키세스의 장례 경기로 변형되고 오디세우스가 저승으로 갔듯 아이네이아스도 저승으로 내려간다. 대장장이 신이 만들어준 아킬레우스와 아이네이아스의 방패에는 모두 멋진 이야기가 숨어 있다.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네에 해당하는 인물도 있는데, 라비니아다.
그러니 ‘아이네이스’는 호메로스의 완성된 퍼즐을 엎었다가 어색하게 다시 맞추어 놓은 듯한 인상을 숨길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고전끼리 키재기를 시키는 독법이 무슨 소용인가? 고전에 대해선 진열장의 상품처럼 가격을 정하는 게 관건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일깨우는지 깨닫는 것이 관건이다.
‘아이네이스’ 후반부는 정복 전쟁에 관한 이야기고, 전반부는 보트 피플의 방황 이야기다. 그래서 후반부는 전쟁의 서사시인 ‘일리아스’를 모범으로 삼고, 전반부는 바다에서의 방황 이야기인 ‘오디세이아’를 모범으로 삼는다.
작품의 골격은, 트로이 멸망 후 트로이 왕족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 유민들과 함께 온갖 방황을 거쳐 이탈리아에 상륙해 로마의 선조가 되는 이야기다.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인들의 미래를 짊어지게 되리라는 예언은 이미 ‘일리아스’에 나오는데, 그 예언에 착안해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아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계획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아이네이아스의 힘과 앞으로 태어날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트로이아인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오.”(천병희 역) 이 통치는 바로 훗날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다.
‘아이네이스’는 패배한 트로이 유민의 건국 이야기라는 점에서, 역사는 승리자 편의 기록이라는 정식을 깨트린다. 아이네이아스뿐 아니라, 트로이 유민들은 (물론 전설상으로) 유럽 국가들의 창시자들이 됐는데 유럽인들은 이 사실에 매혹되고 또 자랑스러워했다. 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의 ‘가장 위험한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또 다른 트로이인 프랑쿠스는 7세기 ‘프레데가르의 연대기’에서 나타나듯이, 프랑스 귀족들이 자신들의 선조라고 주장한 프랑크족에게 그 이름을 부여한 창시자였다. 특히 프랑스 왕은 트로이인의 직계 후손이란 점에서 자부심을 느꼈고, 여기에 역시 비슷한 혈통을 자랑스러워하던 브리튼인과 노르만인이 합세했다.”(이시은 역) 왜 유럽인은 승리한 국가보다 이 패배한 국가에 매혹됐을까? 불타오르는 트로이의 비극은 유럽인의 기억에 수시로 개입하는 트라우마와도 같다.
지배자가 옹호하는 국가의 창건 신화들이 그렇듯 이 작품은 로마의 주류적 인물들에 대한 찬양을 담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이민족을 정복하는 이야기도 담고 있다. 아주 흥미로운 인물들도 등장한다. 예를 들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희생당하는 소녀 전사 카밀라가 있다. 구국을 위해 희생한 이 영웅은 ‘아이네이스’를 읽어온 서구인의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카밀라가 남긴 그 인상 깊은 자리는 서구인들의 미래에 등장할 잔 다르크를 준비할 자리다.
‘아이네이스’를 ‘또 다른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을까? 영웅들의 눈부신 전쟁을 통한 국가 창건 신화가 아니라, 지리멸렬한 보트 피플의 이야기로 말이다. 그야말로 ‘아이네이스’는 나라가 망하자 바다에 배를 띄우고 탈출한 보트 피플의 수난사다. “어디쯤에서 우리에게 정착이 허용될지 알지 못한 채 애써 함선들을 건조하고 대원들을 점검했습니다. … 나는 눈물을 흘리며 내 조국의 해안들과 포구들과, 한때 트로이아가 서 있던 들판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요? 어디에 정착해야 옳은가요?”(천병희 역) 마치 21세기의 텔레비전 속에서 기자의 카메라와 마이크가 시리아 유민들의 절규를 따라가고 있는 장면 같다.
트로이가 멸망한 후 두 사람의 항해자가 출현한다. 한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다 길을 잃은 인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받아줄 정착지를 찾아 방황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서로 적이었다. 한 사람은 침략자 오디세우스, 다른 한 사람은 패배한 아이네이아스. 트로이의 침입자도 트로이의 주인도 트로이를 떠났다면 대체 트로이에는 누가 남았단 말인가? 파괴만 있었을 뿐 침입자도 거주자도 떠난 도시. 전쟁은 이런 어리석음으로 가득하다.
트로이 전쟁에서 서로 맞섰던 두 사람은 정말 기이하게도 똑같은 바다 방랑자가 되는 운명에 빠진다. 이들의 운명은 교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네이아스는 오디세우스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나 수년째 가지 못하고 있는 고향 이타카의 해안을 지나간다. “이타카의 바위 옆을 지나가며 잔혹한 울릭세스(오디세우스)를 길러준 그 나라를 저주했습니다.” 누군가는 그토록 가고 싶어 하지만 가지 못하는 곳을 다른 이는 손쉽게 지나치는 것이다. 또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의 거처에 도달해 낙오한 이타카인으로부터 키클롭스의 거대한 눈을 찌른 오디세우스의 무용담을 듣기도 한다. 거의 이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쫓는 연인들과도 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여러 나라를 고달프게 떠도는 이들 이방인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바로 ‘환대받는 자’라는 것이다. 환대가 이들의 가느다란 목숨을 근근이 살려놓는다. 디도의 땅에 왔을 때 아이네이아스는 이렇게 환대받는다. “나는 그대들을 안전하게 호송케 하고 필요한 식량을 지원할 것이오. 아니면 여기 이 나라에 동등한 자격으로 나와 함께 정착하기를 원하시오?” 디도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불행을 모르지 않기에 불쌍한 이들을 돕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또 다른 정박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환대가 아이네이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골의 풍성함으로 그들을 환영했으며, 지칠 대로 지친 그들에게 우정 어린 도움을 베풀었다.” 고대 세계의 이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환대였고, 그것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피해 바다에 배를 띄운 여행자들이 저 막막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런 환대는 아이네이아스와 스치듯이 지나치는 그의 적수 오디세우스의 방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오디세이아’에서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는 나그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그네여! 그대보다 못한 사람이 온다 해도 나그네를 업신여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모든 나그네와 걸인은 제우스에게서 온다니까요.” 이런 환대가 없었다면, 오디세우스도 아이네이아스도 영원히 보트 피플로 떠돌며 육지에 발을 디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육지에 발을 디뎠을 때 하나의 새로운 문명이, 로마가 이탈리아에 잉태된 것이다. 아이네이아스가 처음 이탈리아 반도에 도착했을 당시 그 땅의 왕이 받은 신탁은 이방인 아이네이아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방인들이 와서 네 사위가 될 것인즉, 그들은 자신들의 혈통으로 우리의 이름이 별들에 이르게 할 것이다.” 토착민의 이름과 이방인의 피가 한데 섞여 새로운 세계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바로 ‘로마’ 말이다.
아시아의 해안(트로이)과 유럽의 해안(이탈리아)은 각자 순수한 정체성을 고집한 채 서로를 외면하고 있지 않다. 아이네이아스라는 보트 피플의 항해와 정착이 알려주듯, 이질적인 자들에 대한 환대가 있고, 이 환대 속에 새로운 문명과 국가의 탄생이 준비된다.
문명 자체의 성격이 그렇다. 한 문명이란, 또는 문명의 울타리가 되곤 하는 국가란, 순수한 혈통도 순수한 전통도 담고 있지 않으며 이질적인 것들의 마주침만을 담고 있다. 예컨대 니체는 ‘독일인’이란 그저 그것이 무슨 뜻인지 고민해본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독일인의 순수한 정체성, 단일한 역사적 기원 같은 것이 없는 까닭이다. 마틴 버널이 쓴 흥미로운 고대 역사서 ‘블랙 아테나’가 있다. 이 책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 역시 유럽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럽의 탯줄인 찬란한 그리스는 그리스 땅에서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타자의 도래, 즉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도래를 통해 가능해졌다. 아테나는 대리석처럼 하얗지 않고, 검은 피부의 유전자를 혈액에 간직한 여신인 것이다.
해안에서 해안으로의 이동, 곶에서 곶으로의 이동은 아이네이아스의 보트를 따라가는 베르길리우스의 사념 속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대 사상의 중요한 관심거리이기도 하다. 자크 데리다의 ‘다른 곶’은 제목 그대로, 해안에 대한 사유, ‘곶’에 대한 성찰이다. 이 작품은 유럽과 다른 곶, 즉 한번도 유럽이었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절대 유럽이 되지 않을, 바로 유럽의 타자가 어떻게 비로소 개방된 유럽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보트를 타고 온 아이네이아스가 환대받았듯, 그리고 그 환대가 결국 로마라는 결실로 이어졌듯, 타자에 대한 개방성 속에서 한 공동체는 새 길을 찾고,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아이네이스 :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는 라틴어로 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쓰인 이 작품은 여신 비너스의 아들이자 트로이 왕족인 아이네이아스가 예언에 따라 온갖 어려움 끝에 이탈리아에 와서 로마인의 선조가 되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작품 중간중간 아이네이아스와 그 후손인 미래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의 연관성을 제시함으로써 로마인은 누구인가란 물음에 답을 해주는 로마의 민족 서사시다. 이후 다른 작품들의 탄생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이 서사시의 사랑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든 헨리 퍼셀의 ‘디도와 아이네이아스’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