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반드시' 살아야 할 믿음과 복종의 삶>
어제 복음에서는 궁중들과 헤로데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았습니다(루카 9,7-9).
오늘 복음은 군중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단지 ‘예언자’ 차원에서
이해했을 뿐 메시아로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루카 9,20)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습니다(루카 9,21).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선언은
이미 천사들과(2,11) 예언자 시메온과(2,26) 마귀들에게서(4,41)
선언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지만,
잘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을 민족적이고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그리스도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를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루카 9,22)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당혹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9,23-29).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Dei)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표현에 ‘아버지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맞게 될 일을 네 개의 동사,
곧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되살아난다' 로 표현하십니다.
‘고난을 겪는 일’이란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많은 고난을 여러 차례 겪는 일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겪는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그 고난은 여타의 다른 것이 아니라 ‘배척을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벌어지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겪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죽기까지 믿고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믿음과 복종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는 “믿음은 행위 속에서만 믿음일 수 있다.
”(본회퍼)는 말을 떠올려 줍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믿음의 복종은 결코 시들지 않는 생명으로 되살아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반드시' 살아야 할 믿음과 복종의 삶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복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루카 9,22)
주님!
오늘도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으렵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렵니다.
당신과 함께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