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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도솔삼관(兜率三關)
- 도솔의 세 관문
자비,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하는 유일한 방법
갓등과 연료 인연다하면 등불이 그냥 사라지듯이
육신이 사대로 흩어지면 우리 또한 그냥 사라질 뿐
자비의 수고로움을 감당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도솔(兜率) 종열(從悅) 화상은 세 가지 관문을 설치해서 배우려는 사람에게 물었다.
(첫번재 관문) “깨달은 사람을 찾아 수행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불성을 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대의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두번째 관문) 자신의 불성을 알았다면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그대는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겠는가?
(세번쩨 관문)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면 바로 가는 곳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육신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가 흩어질 때, 그대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무문관(無門關) 47칙 / 도솔삼관(兜率三關)
*(첫번째 관문) 자신에게도 있다고 해도 되고, 세상에 있다고 해도 됩니다. 등불이 켜지는 순간, 그 불은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도 모두 환하게 밝히니까 말입니다.
*(두번째 관문) 자신을 비추고 남을 비추는 자비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국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안식(安息)으로 다가오는 법이지요. 그러니 정말로 죽음에 이르렀을 때, 깨달은 사람은 희미한 미소를 보이거나 박장대소하게 되는 겁니다.
*(세번째 관문) 어디로도 가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꺼질 뿐입니다. 갓등이나 연료 사이의 인연이 다하는 순간, 등불도 사라집니다
1. 스승 권위 안주하면 깨달음은 없어
한번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주인공으로 당당히 살아가려는 노력은 싯다르타라는 원류로부터 시작되어 지금 산사에서 치열하게 구도하고 있는 스님들에까지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역사가 변하는 만큼 그 역사 속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모양은 그만큼 다르겠지만, 주인공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는 불교에서는 항상 동일한 가치로 남아 있습니다. 등갓의 모양과 연료의 차이가 있지만, 어두운 세상을 해매지 않도록 하는 불꽃은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불교의 역사를 전등(傳燈)으로 비유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렇지만 등갓이 파손되고 연료가 떨어지면, 그 깨달음의 불도 완전히 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깨달은 사람은 조바심을 내기 쉽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없습니다.
태양이 있을 때, 등불을 켤 준비를 해야 합니다. 태양이 사라져 어둠이 몰려오는 순간, 등갓도 연료도 보일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태양이 중천에 떠 있어서인지, 등불을 켤 준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태양이 영원히 자신들을 밝혀줄 거라고 믿고 게으른 상태에 있는 겁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스승이 비추는 불빛에 의지해서 살고 있는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스스로 불을 밝혀야만 한다는 것을 알 겁니다. 그러나 스승의 불에 의지한 것도 모른 채, 항상 밝음이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겁니다. 지금 그래서 스승은 간혹 자신과 제자들을 동시에 비추고 있는 자신의 불을 ‘훅’ 불어서 꺼버리곤 합니다. 그래야 제자들은 지금까지 스승의 불에 의지해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 테니까 말입니다.
제자들이 스승을 죽이지 않고 그 권위에 의존한다면, 스승은 몸소 자신을 죽여야만 합니다. 자신이 들고 있던 등불을 ‘훅’ 불어 끌 때, 스승은 기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어쨌든 어둠 속에서 등갓을 찾고 연료를 찾아 불을 밝히기를 말입니다. 그렇지만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속출할 수도 있습니다. 어둠 속을 뒤지며 불을 밝힐 무언가를 찾다가 날카로운 칼에 손을 베일 수도 있고,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질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면 계단에 굴러 떨어져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일입니다. 선종에서 스승이 던지는 화두(話頭)란 ‘한 순간에 훅 불어 끈 불’과 같은 겁니다. 스스로 불을 찾아 밝힌 제자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안 될 겁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이미 자신이 불을 밝혔는데 스승의 꺼진 불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반면 스스로 불을 찾는 데 실패한 제자들에게는 암흑과도 같은 절망만이 남을 겁니다. 그리고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스승은 우리를 미워한다고, 스승은 우리를 버렸다고 말입니다.
2. 스스로 불 켜면 세상도 함께 밝아져
‘무문관(無門關)’의 전체 마흔여덟 개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선사(禪師)들은 가혹하게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을 꺼버리면서 스스로 불을 켜기를 촉구합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관문에 등불을 켜고 인도한 것이 바로 그 선사들 아닌가요. 그럼 잠시 관문을 더듬을 시간이나 줄 일이지, 제자들로서는 너무 야속하기만 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스님.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챙길 시간은 좀 주세요.” 이런 간절한 제자들의 소망마저 선사들은 여지없이 밟아버립니다. 마치 새끼들을 절벽에 던지는 호랑이와 같습니다. 그냥 아무런 준비도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천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로 제자들을 무자비하게 밀어붙이니까요. 그러나 그나마 잔정이 많은 선사가 한 분 계십니다. 마흔일곱 번째 관문을 지키고 있는 종열(從悅, 1044~1091) 화상이 바로 그 선사지요.
자신이 지키는 관문도 다른 관문처럼 뚫기 버거워할 제자들이 애처로웠는지, 종열 화상은 그 관문을 지날 수 있는 계단을 세 가지나 만들어 놓습니다. 정말 친절한 스승 아닙니까. 그렇지만 종열 화상이 만들어 놓은 세 가지 계단을 걷다보면, 우리는 종열 화상이 그냥 부드러운 스님이어서 그런 친절한 계단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됩니다. 정말로 뚫기 힘든 관문이었기에 종열 화상은 계단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종열 화상이 지키고 있는 마흔일곱 번째 관문은 죽음의 공포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마흔일곱 번째 관문은 생사관(生死關)이나 사생관(死生關)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니 친절하게 이끌어야 했던 겁니다. 죽음에 대한 헛된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삶을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종열 화상은 지옥에 떨어진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푼다는 지장보살(Kṣitigarbha Bodhisattva, 地藏菩薩)의 화신과도 같은 스님이었던 겁니다.
종열 스님이 만들어 놓은 첫 번째 계단을 오르려면, 우리는 다음 물음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깨달은 사람을 찾아 수행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불성을 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대의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등불을 켜 들고 있는 사람을 찾아간 것은 그가 들고 있는 불로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몸이 등갓이자 원료라는 사실을, 그리고 마음이 그것들로 켜지는 등불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불성을 본 겁니다. 한 마디로 견성(見性)한 것이지요. 이럴 때 자신의 불성에 불을 밝히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스승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세상을 비추는 당당한 등불이 됩니다. 마침내 우리는 부처가 된 거죠. 정말 부처가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종열 스님은 물어봅니다. “그대의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에게도 있다고 해도 되고, 세상에 있다고 해도 됩니다. 등불이 켜지는 순간, 그 불은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도 모두 환하게 밝히니까 말입니다.
3. 자비 실천한 사람에게 죽음은 안식
이제 종열 스님이 지키고 있는 생사관을 넘기 위한 두 번째 계단으로 올라가보죠. 물론 이 두 번째 계단에 오르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종열 스님의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만 합니다. “자신의 불성을 알았다면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그대는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겠는가?” 등불은 세상을 비추는 도구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힘든 삶인가요. 자신을 모두 소진해서 세상을 밝히는 일이니까요. 자신을 비추고 남을 비추는 자비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비의 삶이 얼마나 수고스러운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것, 제자를 깨달음에 이끄는 것, 어느 하나 힘들지 않은 일은 없으니까요. 결국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안식(安息)으로 다가오는 법이지요. 그러니 정말로 죽음에 이르렀을 때, 깨달은 사람은 희미한 미소를 보이거나 박장대소하게 되는 겁니다.
불교에서 열반(涅槃, Nirvāṇa)이 깨달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의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 이제 드디어 우리는 ‘무문관(無門關)’의 마흔일곱 번째 생사관을 넘기 위한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려고 합니다. 종열 스님은 이 마지막 세 번째 계단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마지막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면 바로 가는 곳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육신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가 흩어질 때, 그대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세상을 비추던 등불이 꺼지는 순간, 등불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어디로도 가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꺼질 뿐입니다. 갓등이 헤어져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견디지 못하고 꺼진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연료가 다 떨어져 꺼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환하게 비추던 그 등불은 어디에도 가지 않습니다. 그냥 꺼질 뿐입니다.
갓등이나 연료 사이의 인연이 다하는 순간, 등불도 사라집니다. 이런 연기(緣起)의 법칙을 모르는 사람들은 종열 스님의 마지막 질문에 우물쭈물하게 될 겁니다. “육신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가 흩어질 때, 그대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여기서 육신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는 즉 땅, 물, 불, 그리고 바람, 즉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사대(四大, Catvāri mahābhūtāni)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 네 가지 요소가 인연에 의해 결합되어 지속할 때, 우리의 삶도 그리고 우리의 정신도 있는 겁니다.
반면 이 네 가지 요소들이 인연이 다해 흩어질 때, 우리의 삶도 그리고 정신도 사라지는 겁니다. 마치 겨울 내내 꽁꽁 얼어있던 얼음도 날씨가 풀리면 녹아서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고 얼음이 어디론가 갔다고 슬퍼하지는 마세요. 천국으로 간 것도 아니고 지옥으로 간 것도 아닙니다. 그저 풀려서 사라진 거니까요. 자, 이제 마흔일곱 번째 관문을 통과하셨습니까? 삶에 대한 갈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자유로워지셨습니까?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오랜 세월 모든 것을 비추는 자비의 수고로움을 감당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