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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agazine.stack.com/TheIssue/ArticleDraw/4081
당신은 팀 던컨에 대해 잘 모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가 스퍼스와 함께한 10년이란 황홀했던 시즌들 (다수의 MVP 수상과 세개의 리그 챔피언쉽을 합친) 외에, 그에 대해 과연 아는게 있을까요? 만약 당신이 그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단순히 그가 리그 역사상 몇 안되는 최고의 선수들 중 하나라는 사실에만 근거한 것이라면, 아마도 ‘당신이 생각하는 팀 던컨’ 이라는 사람은 사실과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그는 당신이 추측하고 가정했을 성격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요.
Tim 을 다른 리그 선수들 (또 당신이 그에 대해 가정을 내렸을 만한 것들 ) 과 많이 다르게 하는 그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Tim 이 그 십대의 중반에 접어들때까지 농구공 한번 만지지 않고, 그냥 평범한 미장이와 직업적 조산모의 아들로서 살았던 세인트 크로와(St. Croix섬- 버진 아일랜드령의 하나의 섬 이름)에서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세인트 크로와의 이 어린 소년은 길다랗고 마른데다가 뛰어난 운동신경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보통 이런 운동능력과 신체조건을 가진 경우 당연하게 전통이나 관습처럼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농구코트로 즉시 직행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는 수영을 합니다.
Tim 의 길다란 팔다리, 또 커다란 손과 발은 처음부터 그에게 물에서 하는 운동에 관해선 커다란 이점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엘리트 수영선수라는 클래스에 도달하게 한건 그의 집중력과 수영을 누구보다도 잘해야겠다는 강한 의지와 결단력이었습니다. 물에서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분석하여서 그가 더 잘할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하는것 – 특히 그의 주종목인 400 미터 자유형 – 은 그에게 있어서 일상적인 생활의 한부분이었습니다. 92 년도 바르셀로나 올림픽 게임을 3년 앞두고, Tim은 버진 아일랜드의 올림픽 수영대표팀의 50미터, 100미터, 그리고 400 미터 대표선수로 확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력으로는 어쩔수 없는 일로 인하여(자연재해인 휴고폭풍) Tim 은 본래 그가 원했던 길을 가지 못하게 되고 말죠.
1989년, 허리케인(폭풍) 휴고는 세인트 크로와를 박살내고 맙니다. 섬의 거의 대부분은 폐허가 되었죠- 빌딩들은 무너져내렸고 도로들은 막혔고요. 참 기적적으로 안정적인 기초를 가졌던 Tim 의 집은 허리케인인의 강한 바람과 폭풍을 이겨냅니다. 미장이였던 Tim의 아버지 윌리엄은 이런 심한 폭풍이 닥칠것을 미리 예상하고, 석조건축에 관한 그의 지식을 백분 활용하여 절대 넘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집을 지었던거죠. 하지만 Tim 이 곧잘 연습을 하곤 했던 그 지역 수영장은 Tim 의 집처럼 운이 좋지 않았습니다. 폭풍의 잔해로 가득차 엄청난 수리를 필요로 했던 그 수영장은 그 모든 기능을 다 상실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올림픽 게임들을 대비한 수영연습들은 바다로 그 장소를 옮겨 행해지게 되었죠. 하지만 수영 대표팀이 다시 올림픽까지의 일정을 시작했을때 쯤에는 팀은 또다른 가슴아픈 일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팀이 수영선수로서 커리어를 지속하는데에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 Ione (바로 Tim의 모든 수영대회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그를 응원해 주었던 ) 가 Tim의 14번째 생일 하루 전날에 오랫동안 싸워오던 유방암과의 싸움에서 지고 만것이죠. 완벽히 무너져내린 Tim은 이후, 수영선수로서의 커리어는 접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몇달 후, Tim 은 그의 뛰어난 운동신경과 넘치는 경쟁심리를 표출하는 동시에 그의 슬픔 또 아픔을 달래줄 새로운 무언가를 찾게 됩니다. 어머니의 죽음 바로 전, 오하이오에 살고 있던 Tim 의 누나 셰릴은 Tim 이 농구를 자주 하며 실력을 기를수 있도록 세인트 크로와에 있는 그녀의 친정으로 농구 골대를 보냈던 것이죠. Tim 의 아버지는 그의 석조건축 관련 지식을 다시 한번 활용, 시멘트 바닥에 농구 골대를 설치하여 어떤 강풍이 와도 쓰러지지 않도록 합니다. 물론, Tim 의 수영 커리어가 끝나기전에는 그 익숙하지 않은 농구 골대를 가지고 Tim 이 한것이라곤 고작 몇개의 장난스러운 슛을 날려본것 뿐이었죠. 그 나날들이 나중에 그의 화려한 커리어를 준비하는 초석이었다고는 자신도 전혀 몰랐었을겁니다.
Tim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때, 셰릴과 캐피탈 대학에서 주전 포인트 가드로 뛰었던 셰릴의 남편 리키 로워리는 다른 던컨가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세인트 크로와로 돌아옵니다. 리키는 Tim과 함께 코트에서 뛰며 그에게 농구라는 게임을 가르쳐 주게 되죠. 6피트 정도의 키를 가졌던 Tim 은 그 나이또래의 애들과 비교해서 큰 편이었고, 리키는 Tim 이 적어도 4-5인치는 더 자랄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예측을 염두에 둔 리키는 Tim이 스윙맨으로써 성장할수 있도록 페퍼리미터 스킬(외곽에서 플레이 할수 있는 기술) 을 Tim 에게 전수하게 됩니다. Tim은 금방 농구에 재미를 붙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농구라는걸 제대로 할줄 아는 선수로 거듭나게 됩니다 – 드리블과 패스에 능숙하고, 속공찬스를 골로 연결시키는 능력과 외곽포, 특히 드리블후 뱅크슛은 그의 전매특허가 되었죠.
그 다음 가을, 그가 만 14살짜리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때, Tim 은 세인트 던스탄 주교 고등학교의 시니어 대표팀의 트라이아웃에 참여, 선정되어 팀에 합류하게 됩니다. 처음 농구를 시작했을때는 Tim의 게임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무관심했었죠 – 그냥 재미로, 또 어머니의 죽음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서만 생각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태도는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그 가을부터 다음 세 시즌동안, Tim 은 무려 9인치나 자랐고 곧 캐리비안(Caribbean) 학군 전체를 지배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선수가 되었죠. 리키가 가르쳐준 페리미터 스킬과 그의 큰 키는 Tim 을 막기 불가능한 위협적인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버진 아일랜드 역사상 그런 고등학교 선수는 없었죠.
그가 만 16살이 되었을 무렵, Tim 이 그 작은 섬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흔치않은 재능을 가졌다는걸 증명하는 일이 생깁니다. 몇명의 NBA 리그 스타들이 세인트 크로와섬에서 휴식및 휴양차 위해 미국 본토로 부터 내려왔던 것이죠. 어느날 이 NBA 선수들은 그 지방사람들과 함께 농구를 좀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갓 드래프트된 신인이었던 알론조 모닝이 Tim 과 매치업을 하게됩니다. 여럿의 구경꾼들을 앞에 두고 이 두 포스트플레이어들은 열심히 뛰었죠. 연습 경기가 끝났을때 나온 결과는, 놀랍게도 이 십대 소년이 리그 스타와 동급수준의 경기를 펼쳤던겁니다. 이 섬 소년의 놀라운 실력은 곧 본토사람들의 귀에 들어갔고, 대학 스카웃들이 Tim 에게 전화를 해대기 시작했죠. 하지만, 다른 7피트 고등학교 선수들 – 리그선수와 겨뤄서 뒤질게 없는 실력을 갖춘 – 과는 달리, Tim 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전화가 오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의 다른 고등학교 선수들이 AAU 리그 게임과 섬머리그와 캠프등을 통해 대학 농구팀 코치들에게 자신들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고 있을때에, Tim 은 그저 코치들이 자신을 찾아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트포드 대학, 델라웨어 대학, 또 프로비던스 칼리지의 코치들은 버진 아일랜드까지 손수 내려와 Tim을 스카웃하려 했고, 만약 그 대학들에 간다면 재학내내 돈 한푼 안낼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Tim 에게 관심있는 대학들중 그나마 제일 메이져급이었던 대학, 웨이크 포레스트는 감독인 데이브 오돔을 내려보냈죠. 그 감독은, Tim 이 체육관안에서 정식경기를 하는걸 보는것 대신, 야외 코트에서 Tim 이 연습경기를 하는걸 보게됩니다. 오돔은 물론 이 비공식적인 트라이아웃에 약간 당황했지만, Tim 의 경기는 오돔이 “아, 이 선수는 장학금을 줘서라도 데려와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데 충분했습니다.
Tim 이 25점 15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했던 고등학교 마지막 시즌을 끝낸후, Tim 은 오돔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여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으로 진학하기로 결정합니다. 대학 1학년 바로전의 여름, 아직 농구팀 연습이 시작되기전, Tim 은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으로 갑니다. 어느날, 혼자서 슛을 쏘며 코트에서 놀던 그는 선배 Demon Deacons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팀의 마스코트/팀 이름- 여기서는 대학 농구팀 선수들 가리킴)이 하고있던 연습경기(pick-up game)에 참여하게 됩니다. Tim 이 그저 이제 막 대학 농구팀에 합류하게 될 1학년이었다는걸 몰랐던 선수 한명은 Tim 의 실력을 본후 바로 오돔 감독의 사무실로 올라가 “감독님! 어떤 애가 지금 우리팀의 주전선수들에게 망신살을 주고있는데요!”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정도로 Tim 은 대학농구의 실력을 테스트해볼 준비가 이미 되어있었습니다.
Tim 의 첫번째 게임은 앵커리지 소재의 알래스카 대학과의 시합이었습니다. 스피드가 더욱 빠르고, 시스템등이 더욱 복잡한 대학농구는 긴장한 Tim을 경기내내 망설이며 플레이하게 만들었고, Tim 은 무득점에 그치고 맙니다. 시즌의 전반 내내 Tim 은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강한 기초를 가진 그의 실력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시즌 전반의 무력함을 딛고서 재기한 Tim 은 곧 시즌 후반의 경기들에서는 현재 그가 리그에서 선보이고 있는 것과 같은 득점력을 보여줍니다.
페인트 존에서의 공격루트를 마스터한 Tim 의 2학년 시즌은 정말 굉장했습니다. 시즌이 끝났을때에,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 농구팀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고, Tim 은 전국구 최우수 수비선수상을 수상했죠. 95년 드래프트의 넘버원 픽이 될거라고 모두들 예상했지만, Tim 은 학교를 떠나는 일은 아직 없을거라고 그의 코치와 팀동료들을 안심시킵니다. 교육을 받는다는건 Tim 에게 언제나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때 한 학년을 건너뛰었죠- 그때문에 고등학교와 대학 내내 동기들보다 한살 어렸었고요.
모두들 Tim 이 97년도 드래프트의 1 순위 픽이 될것이라는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팀이 그를 데려갈지는 미지수였죠. 셀틱스와 그리즐리스 두팀 모두 엉망진창인 96-97 시즌을 보냈고, 그래서 그 두팀인 셀틱스와 그리즐리팀이 (드래프트에서 넘버원 선수를 선정할 수 있는 – Top pick 을 가져갈) 복권 당첨될 확률은 매우 높았습니다. 하지만, 탑 픽을 가져간 팀은 다름 아닌 스퍼스였죠. 스퍼스 역시 로빈슨제독을 6게임 이후 시즌 내내 잃고서 62패나 당하는 시즌을 경험한 후였습니다. 어쨌든, 부상에서 회복한 로빈슨과 꾸준한 롤 플레이어들로 가득찬 스퍼스의 팀구성은, 언제나 배우는 자세를 겸비한 새내기 센터에게 이상적인 첫 프로에서의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Tim 의 루키 시즌에 스퍼스는 전년도 대비 32승이나 더 거두는 수확을 올렸습니다 - 리그 역사상 가장 커다란 turnaround (전년도 시즌에 비해 다음 시즌에 엄청나게 기록이 급상승)였죠. 루키로써 경기당 평균 21.1점과 11.9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리그를 더블더블횟수에서 이끈 - 57개나 됐죠! - Tim 은 올해의 신인상 수상과 함께 All-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 이후의 리그에서의 Tim 의 커리어는 매우 잘 기록되어있고, 또 팀 던컨이라는 선수는 앞으로도 계속 리그의 역사상 가장 돋보이는 선수중 하나 일것입니다. 그가 살아가는 방식과 게임에 관한 든든한 기초는 그가 문자적으로 또 은유적으로 어떤 폭풍을 만나도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을수 있게하는 기본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돌아가심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Tim 은 슬픔을 잘 견뎌냄과 동시에 새로운 삶의 목적을 찾았습니다. 새로운 문화와 더 자세한 게임운영을 필요로 하는 미국의 농구와 부딪혔을때, Tim 은 그 앞에 놓여진 도전을 받아들이고 언제나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10 시즌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지금, 이 흔들리지 않는 베테랑은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죠. 그의 경험과 포스트에서의 안정적이고 일관된 플레이는 스퍼스라는 클럽을 리그 챔피언쉽에 매년 도전하는 강한 컨텐더가 되게 합니다.
이제 팀 던컨이 게임의 엘리트중 하나로 올라서는 과정을 알게된 당신은, 그가 지금껏 살아온 길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것들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또 평가할수 있을것입니다.
첫댓글 올타임 넘버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태풍이 없었다면 위대한 레전드를 못봤었을수도 있었네요
팀 던컨이 대학시절때 USA 대표팀 빅맨들 (샤킬, 하킴, 로빈슨, 말론, 바클리)을 상대하는 경기를 편집중인데 내일모레 안으로 멀티미디어 게시판에 올리겠습니다. 그가 초창기부터 얼마나 대기조성(大器早成)의 선수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으실겁니다. 던컨은 nba 들어오기도 전부터 nba 역대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빅맨들과 붙어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혹시 1996 USA Select vs Dream Team 경기인가요?
네
97년이 팀던컨 드래프트라고 불릴만큼 독보적 1번픽으로 평가받던건 저 경기에서 NBA최고의 빅맨들과도 밀리지 않던 모습이 상당히 컸죠. 중반 이후에는 파울트러블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지만 그 이전에 오닐을 상대로 턴어라운드 훅샷을 날리는등 기량면에서 거의 대등한 면모를 보여줬다는게 큰 임팩트를 줬습니다.
귀한 글 잘읽었습니다 역시 우리 던컨 레젼드라할만한 멋진 선수죠 거기다가 겸손하며 조용하고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멋진 모습을 갖고있죠
가넷의 팬이라 던컨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몰랐는데 잘읽었습니다
제가 볼때는 진짜 뭔가 운명이 이끌었다고 생각되요. 항상 던컨을 보면 말이죠. 허리케인은 왜 던컨의 수영장을 부셨으며 왜 스퍼스는 전 시즌에 그 튼튼하던 로빈슨이 시즌아웃된걸까요?? 진짜 뭔가 모를 운명이 스퍼스로 던컨을 이끌었을듯 ㅋㅋ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