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들도 이런 외로움에 대해 즐겨 이야기하는 걸 보면. 정말 처절한 외로움인 것
같다. 나도 V양 사건 이후로 그런 외로움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녀와 그녀의 동생의 이야기는 정말 흥미롭다.
이야기는 두 사람에 대한 것이지만, 이름은 하나만 써도 충분할 것 같다.
사실 이런 여자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이런 이야기는 오직 런던에서만 있을 수 있
는 이야기이다.
시골에는 푸주한이나 우편 집배원이나 목사 부인 등이 아직 있을 수 있지만, 고도로
문명화된 도회지에서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다.
푸주한은 고기를 지하실 입구에 내던지고, 우편 집배원은 편지를 우편함에 집어넣으
며, 목사 부인도 우편함에다 목사의 교서를 집어넣고 가 버린다.
다들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고기가 지하실 입구에 그대로 남아 있어도, 편지가 우편함에 그대로 남아 있
어도, 목사의 교서대로 하지 않아도 아무도 모른다.
이것들을 배달하는 사람들이 어느 날 16호, 또는 23호에는 더 이상 배달할 필요가
없다는 결정을 내릴 때까지는. 그리하여 불쌍한 J양, 또는V양은 그물처럼 촘촘하게
짜여진 인간의 삶의 조직망에서 탈락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영원히 버림받는다.
누구에게나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운명이 닥칠 수 있다.
그러므로, 낙오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존재를 부지런히 알려야 한다. 생각해 보라.
만일 푸주한과 우편 집배원과 경찰관이 당신을 무시하기로 결심하면 어떻게 소생할
수 있겠는가. 정말 무시무시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나도 지금 의자를 넘어뜨려야겠다.
그래야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내가 살아 있음을 알 테니까.
이쯤 하고 이제 V양의 수수께끼 같은 사건으로 돌아가자.
재닛 V양도 그냥 V양이라고 쓰겠다. 이해해 주기 바란다. 한글자를 둘로 나눌 수는
없으니까.
이들은 15년쯤 런던을 돌아다녔다.
야회장이나 미술관에 가면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누가 평생 동안 날마다 만난 사람처럼,
- "오, V양,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면, 이들은
- "날씨가 정말 좋죠?" 하고 대답한다.
그러고는 어떤 안락의자나 서랍장 앞에 서서 한없이 바라보곤 한다.
사람들은 곧 이들을 잊어 버렸다.
그러다가 이들이 마침내 그런 가구에서 눈을 떼고 돌아서면 똑같은 인사를 주고 받
았다.
내가 다른 누구보다 V양과 자주 마주친 것은 혈연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그녀를 우연히 만나는 것은 거의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야회나 음악회나
미술관에 갔을 때, 눈에 익숙한 그 잿빛 그림자가 눈에 띄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갑자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V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
았다. 그래서 나는 뭔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구나 커튼에 뭔가 빠져 있었다. 아니면 벽보가 없어져서일까?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새벽에 잠이 깨어 큰 소리로 외쳤다.
메리 V양, 메리 V양!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자신 있게 외친 사람은 아마 내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문장을 완성하는데 쓰이는 무의미한 호칭에 지나지 않는 것 같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자신 있게 그녀의 이름을 외쳤건만 V양이 나타나기는커녕 그 생
김새도 생각나지 않았다.
방은 여전히 침침했다. 하루 종일 머리 속에서 그녀의 이름이 메아리쳤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여느 때처럼 그녀와 마주치고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보아야 답답
한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답답했다.
결국 나는 밤에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메리 V양을 찾아가 직접 만나 보
야겠다는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생각은 처음에는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점점 진지해졌다.
지금 돌이켜보자니, 정말 엉뚱하고 재미있는 생각이었다.
그 그림자를 찾아가서 그녀가 어디에 살고 있으며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마치 그녀
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 것처럼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니!
해가 반쯤 기울어 있을 때 블루벨(종처럼 생긴 푸른꽃의 야생화)의 그림자를 보러
승합마차를 타고 큐 국립 식물원(런던 서부 교외 큐에 있는 식물원)에 간다고 생각
해 보라!
한밤중에 서리 주(영국 남동부에 있는 주)의 초원에 날아다니는 민들레의 솜털을 잡
으러 간다고 생각해 보라!
V양을 만나러 간다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황당무계한 생각이었다.
나가려고 옷을 입는데, 이런 황당무계한 일을 위해 이렇게 옷을 차려 입어야 한다는
것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메리 V양을 만나기 위해 부츠를 신고 모자를 쓰다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나는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안내판에는 그녀가 "부재중"이자 "재중"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문도 두드리고 초인종도 누른 다음 인기척이 들리는지 살폈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림자도 죽을 수 있을까? 그림자가 죽으면 어떻게 묻지?
그때 하녀가 문을 살며시 열었다.
메리 V양은 두 달 전에 앓아 누워 바로 어제 아침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외친 바로 그 시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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