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선비 박 석홍의 꿈
임 경 자
어째 이렇게 글씨가 안보일까? 돋보기를 빼보았다. 입김을 호오 불어서 닦아 다시 안경을 꼈다. 어라? 마찬가지네, 그렇다면 이것은 내 눈의 문제가 아니다. 박석홍 관장님이 준 자료의 글씨가 너무너무너무(!) 한 거다. 돋보기 3.5의 나를 위안하기 위해 이렇게 결론을 짓고 묵직한 노란 봉투에서 나온 자료들을 읽기 시작했다. 선비정신과 소수 서원, 소수 박물관에 대한 것을 이곳 미국에 있는 한국학이 있는 대학과 교수님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받아온 것이었다.
본 내용을 읽어 들어가니 나는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 뒷뜰을 걷고 있었다. 선비촌의 풍경이 눈에 선하게 앞에 다가와 앉아 있다. 함께 갔었던 미국시장 메럴 프랭크, 브라이언 텍스먼, 그리고 김병석 김석주 회장 일행들의 들뜬 얼굴들도 어느새 그리운 추억에 가까워 졌다.
소수 박물관 자료 속 박물관 전경사진에 박석홍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 몇 년 전에 받은 자료의 페이지 마다 자그마한 체구에 멈추지 않는 설명을 힘들이지 않고서도 정성을 다하는 그의 말소리와 표정까지 내 눈이 페이지를 넘겨감에 따라 그대로 옮겨 온다.
"소수 박물관은......예...... 유교와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체계화해서 최초의 사액사원으로 우리나라 유교의 가치와 이상을 전달함으로써 민족정신의 뿌리를 키우는 곳 입니다"
"이곳 제1전시실은 예...우리 영주가 옛날 선사 시대 때부터 선인들이 살기에 무척 좋은 여건의 지역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위 그림이라던지 고인돌 선돌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조상들의 생활을 대변해주며 또한 3국 시대와 조선시대의 문화 유적 등이 다양합니다."
순흥읍내리 벽화고분에 대한 설명을 듣던 서양인인 메럴 프랭크 시장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내게 깜빡깜빡 거리며 놀라움을 전한다. 한국인의 조그마한 동네에 이렇게 신비한 돌무덤이 벽화까지 보존하고 있다는 것부터 내부의 구조가 참으로 특별하다고 그녀는 흥분된 어조로 질문의 연속이다. 동쪽에 있는 주검받침, 서북쪽에 있는 부장품 대를 보고 난 후에 벽화를 보는 그녀의 태도는 자못 심각하다. 뱀, 물고기, 사람, 버드나무, 산등성이 구름등 식물, 동물, 생물, 무생물까지 모두 그려져 있으니 신기할 수 밖에 없다.
제2전시실에서 동양 사상과 유교의 근본 사상과 한국의 전통 철학사상이 준 영향과 가치에 대해서 설명을 들을 때 브라이언 텍스먼은 엄지 손가락을 위로 쑥쑥 올리며 미소지었다. 역시 유교는 서양 남자에게도 맘에 드는 학문/사상이라는 걸까? 제 3전시실 향교에 전시된 명현, 효자 충절들의 인품과 사상이 지금 듣고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한국에서 자라는 우리 자녀들에게도 유교 자체를 그대로 주입하기가 용이할까? 현대 문화와 대립되는 사상과 생활 전개를 어떻게 하여야 할까 절충하여야 할까 아니면 원칙 그대로를 원할까? 의문이다. 제 4전시실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는 미국인 두 친구들에게는 영주의 전체 자연 축제 특산물 등의 이야기가 쉽게 이해되는 것 같았다.
미국에 영주의 문화를 심기 위한 시작이었던 만큼 미국인과 우리 방문자들에게 영주를 중심으로 한 한국 전통 문화에 대한 특별히 마련된 박석홍 관장의 그야말로 <대 특강>이 있었다. 이 자리를 외길로 지켜온 박석홍 관장의 꿈은 소수 서원과 박물관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차세대 대대로 우리 역사 교육과 인성 수련을 강화하고 싶다고 했다. 서구의 올바른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남미나 필리핀 같은 불법 데모가 난동하는 일이 없이 참다운 법치국가로서 지조 있고 고유품성을 가진 민족으로서 선비의 얼을 전승하게 되기를 염원한다고 했다.
미국인 두 친구가 이구일언으로 질문한 것은 <무형문화재>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의 전통 예술과 공예와 음악과 소리, 춤,민속 유산등이 무형 문화재와 인간문화재로 보호 보존되어 내려온다는 설명 끝에 메럴 프랭크와 브라이언 텍스먼은 조용해졌다. 나중에 미국에 돌아와서 그들은 그것은 충격적인 배움이었다고 하였다.
언젠가 시청의 임직원들과 함께 봉사자 시상식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럿커스 대학에 다니던 학생들과 조금 늦게 도착한 나에게 시장인 메럴 프랭크는 연단 위에서 걸어 내려와서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오...?>하고 인사를 했다. 참석한 일반인들이 모두들 몸을 돌려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았고 그날 시장님의 스피취 중에 "한국에는 무형 문화재와 인간 문화재가 있었다, 그 놀라운 메세지가 자신에게 감동인 동시에 우리 지역 사회에서도 배워야할 가치이다. 임 원장은 이 지역 사회 안에 한국 의 무형 문화 유산을 남길 것이다" 라고 했다. 시장의 그 연설이 자랑스럽고 고마운 만큼 은근히 부담도 느꼈다.
1982년 도미한 이래 뉴욕에 살다가 2003년부터 이 새로운 곳에 옮겨왔다. 제2의 이민이라 마음먹고 새로이 한미 문화센터를 열어 내 인생의 일부를 바치기로 다짐했다. 한국 문화의 밤 이라는 예술 공연과 그림 전시와 한국 무용, 북, 장고 교실을 열었고, 동양화, 도자기, 다도 등도 소개하여 그들에게 아름다운 한국 문화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였다. 럿커스 대학에서 열린 32회 세계 민속 축제에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아낌없이 과시하기도 했었다. 힘든 만큼 재미있고 보람을 느꼈다.
어느 날 시청에는 비녀 꽂고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나의 전신사진이 포스터 크기 액자로 걸려 있었다. 미국인 사진작가의 작품이라고 적혀있는 그 사진은 나를 놀래켰다. 미국 땅 새로운 곳에 한국 문화를 심은 내게 부여한 최고의 선물이었다. "인물이 조그만 더 예뻤더라면 국위 선양을 더 했을 터인데 "했더니만 남편은 <아니야, 당신이 최고 이뻐!> 라고하니 아이들이 배를 쥐고 웃었다.
학생들에게 학부모들에게 강연이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자신의 긍지와 가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지키고 나누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웃고 말하고 먹고 입고 하는 일상 생활 중에서 우리를 나타내고 나누고 남겨주어야 한다. 내가 미국인들의 행사에 거의 한복과 두루마기를 입고 비녀를 꽂고 나가는 것은 <나는 한국의 딸이다>는 외적인 웅변이다. 내가 <내 자신과 내 가족과 내 나라를 대표해서 너희 미국인들 앞에 섰노라>는 선언인 것이다.
그 사진 앞에 설 때 마다 독백을 한다. 나의 아들 딸들아 너희는 무형 문화재와 인간 문화재, 선비의 후예이다. 선비는 물질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도덕과 예의를 지키며 책임과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경건한 마음을 지니고 인격과 학문을 쌓아 항상 바른 길을 택하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선비는 물질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도덕과 예의를 지키며 책임과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인생 절반을 이 이국 땅에서 선비의 딸로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위해 내 가슴 속에 우리 외할아버지가 쓰시던 붓글씨의 한 획 같은 길이 있었다. 내 의지와 감정이 나약해질 때 그 먹 글씨의 명암 속을 헤매곤 했었다. 서양인들 속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동등하게 사는 일이 쉽지 않았음 이라. 미국 땅에서 아이들에게 이 선비 정신을 가르치고 길들여가는 일이 어떤 길인지 느낄 때면 눈이 젖어온다. 간절함에서 오는 눈물, 힘겨워서 짓는 눈물, 아이들과 이곳 한인 지역 사회에 조금씩 나타나는 소중한 의미를 볼 때 감격의 눈물, 미국인들에게 받은 억울함, 그들에게서 격려를 받는 고마움의 반응... 마음이 아릴 때도 기쁠 때도 이렇게 눈물이 난다.
박석홍 관장님께서 준비해주신 자료 속에서 그의 꿈에 푹 빠져있다. 내 돋보기 3.5로도 보기 힘든 깨알 같은 글씨 모두가 선비 박석홍의 꿈을 피울 씨앗이다. 나는 주변의 공기를 다 들이쉬어 내 가슴을 풍선처럼 만들고 세차게 내쉬었다. 까만 씨앗마다 마다에서 확산되어 오는 빛줄기에 피어 오르는 꽃을 보아라.... "선비 박석홍의 꿈이 미국으로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