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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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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중산간 지대에 있는 성읍마을은 제주가 3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 있을 때 정의현이라 불렸던 곳의 도읍지다. 1400년대부터 구한말까지 약 500여 년의 세월 동안 묵혀진 제주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제주를 대표할 만한 민속 유물과 유적들이 모여 있는 곳인 데다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어 생동감을 더한다.
당초 정의현의 도읍지는 성산읍 고성에 있었는데 동쪽으로 너무 치우친 데다 일본과 가깝기 때문에 성읍리가 정의현의 도읍지가 된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 있는 정의현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본래 제주의 동도(東道)였다. 조선 태종 16년에 비로소 현감을 두었다. 사방의 경계는 동북쪽에 제주에 이른다. 동쪽이 26리, 북쪽이 7리다. 서쪽으로 대정현에 이르기까지 37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7리다. 가호 수가 685호, 인구는 2,073명이다. 군정은 마군이 376명이고 보군이 254명이다."
또 『여지도서』에 실린 '풍속'은 이렇다.
"여자가 많고 남자는 적다. 민간에서 일컫기를 '산악에 암봉우리가 많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솜을 생산하지 않는다. 한 자의 적은 옷감도 금처럼 여기기 때문에 백성들이 남자 낳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여자를 낳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성읍마을에서는 한라산이 종주산이자 전체 고을을 진호하는 진산이다. 마을의 주인이 되는 주산은 정의현성 북쪽에 위치한 영주산(해발 326.4미터)이다. 영주산도 오름이지만 제주도의 오름 중 유일하게 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만큼 제주도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름은 큰 화산의 옆쪽에 붙어서 생긴 작은 화산을 말하며 마그마를 지표로 끌어내는 길이 가지를 쳐서 옆쪽으로 다른 분화구를 이루거나 주 화도의 위치가 이동하면서 이루어진다.
성읍마을은 동쪽의 본지오름 방면으로 이어지는 맥이 좌청룡에, 서쪽 모지오름, 따리비오름, 설오름, 갑선이오름으로 이어지는 맥이 우백호에, 남산봉(120미터)이 안산에 해당하며, 천미천이 명당수 역할을 한다. 이들 오름에 의해 성읍은 전란이 일지 않는 명당 중의 명당인 '병화불입지(兵禍不入地)'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후 몇 차례에 걸친 행정적 변화에 의해 성읍은 도읍지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평범한 농촌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민속 마을로서의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제주의 지형적 특성상 육지처럼 전형적인 명당 구조를 갖추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성읍마을을 형국론을 빌려 두 가지로 해석하기도 했다. 첫째는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배의 형국으로 보는 것이고 둘째는 한라산의 맥을 중심으로 장군이 앉아 있는 형국인 '장군대좌형(將軍大座形)'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배의 형국으로 보는 것은 마을의 동쪽으로 천미천이 휘돌아 나가는 지형적 형상에서 비롯되었으며 마을 동남쪽의 남산봉을 키로 간주한다. 마을의 뱃머리는 서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끝은 남산봉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배 모양의 형국으로 인해 어려서 그곳을 떠나면 입신출세한다는 속설도 있다. 장군대좌형의 경우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상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주장이다.
성읍이 정의현의 도읍지였으므로 주민들의 긍지도 대단하다. 예를 들면 성읍에서 표선면사무소가 있는 표선으로 갈 때 '촌에 간다'고 하는데 면사무소가 성읍에서 표선으로 옮겨갈 때 표선이 시골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제주도의 도읍은 지금의 제주시에만 있었는데 조선 왕조가 세워지자 안무사 오식(1370~1426)이 태종에게 제주도를 삼주현으로 나누어 통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에 태종 16년(1416) 현 제주시와 북제주군을 합해 제주목으로, 한라산 남쪽은 서귀포시를 중심으로 동서로 나누어 서쪽은 대정현, 동쪽은 정의현으로 구분해 통치했으며 이런 구분은 1914년까지 약 500년간 지속되었다.
성읍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보존된 읍성 중 하나다. 이처럼 과거의 모습을 잘 간직한 데에는 매우 슬픈 사연이 배어 있다. 다른 마을들도 성읍마을처럼 초가집이 기본이었지만 4·3항쟁 때 대부분 불태워져 사라졌기 때문이다.
군경 토벌대는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을 모두 태웠다. 유격대의 지원 기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명목이었으며 집도 사람도 모두 없애는 초토화 작전으로 일관했다. 그런데도 성읍마을이 불타지 않은 이유는 경찰지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토벌대가 없었다면 성읍마을 못지않은 소중한 민속 자원들이 상당수 남았겠지만 성읍마을만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성읍마을을 답사하기 전에 제주도의 민가에 대해 설명한다.
해양성 기후가 뚜렷한 제주도는 바람이 세기 때문에 겨울에는 몹시 춥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주거는 바람을 기본으로 한다. 즉 대지가 주위의 지형보다 다소 낮으며, 곡선 형태의 올레와 마당을 중심으로 삼고 가옥을 별동으로 배치했다. 상대적으로 외부 노출 표면적이 작은 평면이 정착되었고, 울타리는 높아진 반면 기단과 마루높이는 낮아지게 되었다.
제주도 집의 특색은 뭐니 뭐니 해도 지붕에 있다. 제주도에는 기와집이 드물다. 화산토로 기와를 구워내기도 쉽지 않고 바람에 기왓장 정도는 순식간에 날아가기 때문이다. 김석인의 『탐라기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주도 땅은 점액이 없어 도기와 기와를 만들기 어렵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기와집이 매우 적고 모두 띠로 덮었다."
제주도에는 삼다 중의 하나로 바람이 많다. 거기에다 계절과 해륙에 따라 풍향이 다르므로 평소에도 바람에 대비해야 한다. 주민들이 생각해낸 것은 완만한 지붕 경사각을 통해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반란(半卵) 형태의 길고 둥근 돔 구조를 이루어 내풍에 역점을 둔 우진각 지붕이었다. 송성대 박사는 이를 조개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으로 보아 제주도의 원초적인 지붕을 '조개 집 형태'로 묘사하기도 한다. 지붕은 새로 만들고 새 줄로 단단하게 결박해 날아가지 않도록 대비했다.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골각이 형태가 기본이다. 『제주읍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긴 막대를 가로 방향으로 결박하고 짓누르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원목의 중압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강풍에 대응하기 위해 무거운 나무를 사용했고 단단한 결박 구조까지 갖추어 제주도 고유의 가옥 구조가 되었다. 모음 지붕이 기본으로 지붕 최상부에 용마름이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지붕면의 물매는 10분의 2.5~3, 각도는 15도 안쪽이다. 육지에 있는 한옥의 물매는 4~5, 각도는 25도 정도이므로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건물의 규모는 육지보다 큰 편이나 높이는 오히려 낮다. 외부 창에는 널빤지로 만든 문을 설치해 비바람에 대비했다. 기단은 대개 10~20센티미터 높이의 막돌을 한 단으로 쌓았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고 비바람이 치는 일이 많아 나무기둥을 보호하기 위해 주추를 높게 만들었다.
『삼국유사』에 "북령의 사자암에는 판옥을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제주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러한 가옥을 건설한 것으로 보이며 이런 형태는 울릉도에서도 보인다. 울릉도에서는 방설 벽과 지붕을 만드는데 억새와 횡목을 기본으로 한다.
바람의 영향은 처마 밑에 설치한 풍차로도 알 수 있다. 풍차는 겨울에는 눈바람, 여름에는 비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준다. 제주에서는 눈과 비가 수직으로 내리는 경우가 드물고 수평으로 들이치기 때문에 풍차가 없으면 불편한 일이 많다. 새로 엮던 풍차가 사라지고 양철로 변해도 바람막이 건축술은 계속 이어졌다.
제주도 가옥에서 또 다른 특징은 창문이다. 원래 재료는 목조이며 온돌을 제외한 전체 통용문에 적용하고 있다. 5센티미터 정도의 평판으로 견고하면서도 폐쇄적인 특색을 갖고 있다. 세찬 바람에 대비한 방풍 기능에 그치지 않고 외부를 차단하는 역할도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대청마루의 통용문을 대문이라 부르며 별도의 대문을 두지 않은 것도 특색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빈번한 침략 등에 대한 자위 수단이자 경계 심리까지 가옥 구조에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기능이 무엇이든 두꺼운 판문 구조는 목재 취득이 용이한 환경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원목이 무성하게 자라는 한라산의 환경과도 크게 연계된다고 볼 수 있다.
통시(뒷간)도 빼놓을 수 없다. 전통적인 변소는 좁고 깊은 구덩이를 파고 양 둔덕에 발을 올려놓는 잿간 변소, 해우소라 부르는 절간 변소, 구덩이 대신 발아래 돼지를 키우는 통시 등으로 구분된다. 전통 변소는 열린 구조로 되어 있어 공기가 잘 통하며, 인간이 배출한 유기물을 미생물과 벌레들이 분해해 농사에 필요한 거름으로 재생산하는 기능을 한다.
제주도에서는 배변하는 곳에 돼지우리가 딸려 있다. 이러한 문화는 제주도의 기후, 토양과 관계있다. 돼지는 인분을 처리하고 돼지가 배출하는 유기 폐기물은 퇴비로 재활용해 폐기물을 자원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주도에서는 개를 키우지 않는 집은 있어도 돼지를 키우지 않는 집은 없었다. 돼지를 키우는 이유는 고기를 얻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거름을 얻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제주도 똥돼지'라는 말도 나왔다.
통시는 건물의 한쪽 면을 돌아가서 설치되므로 마당에서 직접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서 2~3계단 위에 두 개의 넓고 긴 돌을 배치하고 시선 차단을 위해 담을 얕게 쌓았으며 지붕 구조물은 없다. 이때 주인들은 돼지우리에 짚을 넣어둔다. 돼지들이 돌아다니며 바닥을 밟으면 짚과 배설물이 섞이면서 썩는데, 냄새가 거의 나지 않고 완전 분해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농작물에 좋은 거름이 되며 씨앗과 흙이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막아준다.
제주 특유의 올레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올레는 마을 길에서부터 집 마당 사이에 있는 골목으로 제주도 민가만이 지닌 특유의 공간이다. 올레는 마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관 변화를 유도하며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해 독립적인 내부 공간을 가지려는 영역 표시와 경계 기능도 갖고 있다.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사적인 공간에 접근하는 과정이 길어져 집주인을 마주할 때까지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올레는 육지에서 고살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나 그보다 좀더 사적인 길이다. 한 집에 딸린 올레도 있지만 대개는 몇몇 집이 하나의 올레를 함께 사용한다.
올레는 폭 1.8~3미터, 담 높이는 1.2~2.1미터 정도다. 길이는 보통 6~15미터 정도이며 형태는 I자형, L자형, S자형 등 다양하다. 올레 입구를 어귀라 부르며 여기서부터 집의 입구가 시작됨을 암시해준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올레 바닥의 양옆에 다리 팡돌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리 팡돌은 비가 올 때 흙이 신발에 묻지 않도록 한 것이다. 제주에서는 올레 길을 매우 중요시해 음력 정월에서 3월 사이에 고사를 지낸다.
제주도의 또 다른 특징은 온돌이 육지와 다르다는 것이다. 우선 온돌이 별로 많지 않다. 『제주풍토록』에서는 "품관 벼슬하는 집 이외에는 구들이 없으므로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돌로 메우고 그 위에 흙을 발라서 다 마르면 그 위에서 잔다"라고 적었다. 『탐라견문록』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마을 집에 구들이 없다. 다만 몇 간의 집을 만들어 놓고 사방에 벽을 세워 바람만 막는다. 중앙에 흙 난로를 설치해 불을 땐다. 겨울에는 한 집안의 남녀노소가 화로를 둘러싸고 누워 온기를 취한다."
17세기 후반 숙종조에 제주 목사를 역임했던 이형상은 제주도 살림집에 그때까지도 구들이 없다고 적었다. 제주도의 온돌은 부엌과 결합된 육지의 경우와 달리 아궁이를 별도로 두었다. 취사와 난방을 공용으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분리해 각각 설치한 것이다. 또한 주방공간이 3분의 1에 가깝도록 비중을 높인 것이 특색이다. 이는 겨울철에도 온난하므로 화입(火入)과 취사를 구분해 화재를 예방하려는 구조에서 출발한 것으로 겨울에 부는 북풍과 북서풍의 진입을 최소화한다. 제주에서는 아궁이에 불씨가 남아 있으면 바람이 들어와 삽시간에 화재로 번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엌을 단순한 취사 공간으로만 보지 않고 거름의 적재 장소로 활용한 것도 제주도만의 특성이다. 아예 부엌을 별도의 건물로 만들기도 했다. 솥은 온돌방 쪽이 아닌 외벽을 향하고 굴뚝도 설치하지 않으며 취사 연료로는 말린 소똥이나 말똥을 사용한다. 부엌이 주택의 가장 중요한 기본 요소라는 고정 관념을 여지없이 흔드는 것이다.
대청마루는 자택의 3분의 1을 점유할 만큼 넓은 면적이며 통로, 식사, 작업 등을 아우르는 공용 공간이다. 이것은 가옥 구조가 주민의 생업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알려준다. 대청마루 한가운데 '부섭'으로 통용되는 화로를 설치한 것도 지나칠 수 없다. 겨울철 거실 공간이자 작업장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화로 시설이 중앙에 있다는 것은 수혈식 주거와 맥락을 같이하는 원시적 가옥 구조의 틀을 아직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이 같은 구조는 구좌에서 남원에 이르는 제주도 동북 및 남동해안과 내륙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근세에 내륙에서 유민이 많이 들어온 지역인데도 과거의 전통이 고수된 까닭은 가옥 소유주들이 제주만의 특색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가옥 중에서 육지와 판이하게 다른 것은 정낭이다. 제주도에는 문이 없다. 고온다습한 풍토에서 나무판자로 문을 만들면 금방 썩을 뿐 아니라 강풍에 날아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낭이라는 아이디어가 도출되었다. 정낭은 무척 단순해서 집에 사람이 있고 없음을 표시하는 동시에 마소의 출입을 막기 위해 걸쳐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주목은 나무토막을 끼워두는 구멍 뚫린 나무 기둥이다. 근래에는 대부분 돌로 만들지만 원래는 나무로 만들었다.
정주목과 정낭을 통틀어 '정'이라고 한다. 세 개의 정낭 중 하나만 걸쳐 있으면 집주인이 없거나 잠깐 외출 중이라는 뜻이며, 두 개가 걸쳐 있으면 외출에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세 개가 모두 걸쳐 있다면 먼 곳으로 외출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도 걸쳐 있지 않으면 사람이 있다는 표시다. 정낭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베리아와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대만에도 정낭과 비슷한 문이 있다고 한다.
바깥대문은 '면문'이라 하며 그다음 문인 중문을 '이문'이라 한다. 이문 칸, 곧 중문 칸은 집으로 진입하는 골목인 올레의 끝이다. 성읍의 집들에서는 대개 정낭이 대문 역할을 해 이문 칸만 설치한 경우가 많다.
정낭은 제주도 정신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도둑과 거지, 대문이 없다는 삼무 사상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는 문도 없이 밭이나 바다로 나가서 온종일 일을 하다 돌아와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아쉬운 것은 제주도에 관광객과 외지인이 불어나면서 점차 정낭 정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읍마을로 시선을 다시 돌린다. 마을은 표선리부터 한라산 쪽으로 8킬로미터 올라간 곳에 있다. 현대로 치면 8킬로미터는 그다지 긴 거리가 아니지만 과거의 제주도에서는 매우 먼 거리였다. 제주도민들이 음료수로 쓰던 샘물들이 거의 해안에 분포하고 있었으므로 해안에서 10여 킬로미터나 산간으로 올라갔다면 여러 문제점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성읍마을에서는 두 곳에 빗물을 담아두는 못(물통)을 만들어 이를 해결했다. 사실 식수만 해결된다면 산지에 마을을 만드는 것이 불리하지만은 않다. 해일이나 해적의 위험이 있는 해변보다 여러 면에서 안전한 주거지이기 때문이다.
물이 귀한 성읍의 집집에는 빗물을 모으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있다. '새촘'이라고 하는데 나무줄기에 억새를 꼬아 묶고 끝을 항아리에 넣어 나무줄기를 타고 내려온 빗물이 항아리에 모이도록 한 장치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다.
성읍마을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다. 공간의 배치는 우리나라 읍성에 많은 宇(우)자형을 기본으로 남북 자오축 머리에는 동헌, 가운데에는 객사, 남쪽에는 남대문을 두는 형식을 취했다. 성곽은 직경 약 770미터 크기의 귀를 죽인 네모꼴이며, 중심은 객사 대문으로 되어 있다. 성곽의 높이는 4미터 정도 되는 장방형으로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현무암으로 쌓았다. 1980년대에 남문과 서문이 복원되었는데 모두 옹성을 갖고 있다. 옹성은 성문 앞에 팔로 감싸는 것 같은 모양으로 설치된 작은 성벽을 말하며, 성문을 은폐하고 성문에 접근한 적을 공격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시설이다.
남문을 들어서면 읍성의 중심축인 남북로가 곧게 펼쳐지며 끝에 객사가 있다. 객사는 대부분 왕의 뜻을 받들고 내려온 사신들을 머물게 하며 접대하던 곳이므로 동헌보다 서열이 높다. 그러므로 객사와 동헌을 중심으로 많은 관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발굴 조사를 거쳐 전면 7칸의 객사를 복원했다.
성읍의 동헌은 일관헌(제주특별자치도 유형 문화재 제7호)이며 객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세종 25년(1443) 현감 송섬이 처음으로 건설했고 이후 많은 보수를 거쳤다. 동헌은 '동쪽의 건물'이라는 뜻으로 이때 방위의 기준은 객사가 아니라 지방관의 가족이 거주하는 내아다. 동헌은 일반적으로 남북쪽과 동서축을 이루는 도로의 교차 지점 북쪽에 위치하지만 이곳의 일관헌은 남문에서 오는 축에서 서쪽으로 벗어나 있으며 현재 건물은 1974년 복원된 것이다. 편액을 '일관헌(日觀軒)'이라고 한 것은 중국 태산의 세 봉우리 가운데 맨 동쪽 봉우리를 '일관'이라고 한 데서 따왔다는 말도 있지만 정의현이 제주의 가장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 '해가 떠오르는 것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진다.
제주특별자치도 유형 문화재 제5호인 정의향교는 세종 5년(1423) 설치된 것으로 그 후 여러 차례 증·개축과 이건을 거듭하다 헌종 15년(1849) 방어사 장인식이 조정에 주청해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다. 현재 대성전, 명륜당, 수선당, 수호사, 내삼문, 협문, 동재 등이 복원되어 있으며 배향 공간인 대성전과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2고주 7량가로 전후퇴를 두었으며 전퇴는 개방된 일반적 형식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에 전후좌우 퇴를 두었으며 앞퇴에는 개방된 토방이 있다. 가운데 3칸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좌우에 온돌방과 고방을 배치했다. 제주도 가옥의 일반적인 칸살 나누기로, 부엌이 없고 대청이 3칸인 점만 다르다. 정의향교에는 현재 전패가 보관되어 있다. 대성전에는 5성, 10철, 송조 6현과 한국의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해마다 봄가을에 석전제를 봉행한다.
일관헌 일곽에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와 팽나무 세 그루는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되어 읍성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알려준다. 수령을 1,000년 정도로 보는 느티나무는 높이 30미터, 가슴 높이 둘레 5미터에 이르며 팽나무는 높이 24~32미터,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 2.4~4.5미터로 나무의 나이는 약 600년이다. 성읍마을에서는 봄에 이 느티나무에 싹이 트는 것으로 한 해 농사 결과를 점쳤다고 한다. 동쪽 잎이 먼저 피면 정의 고을 동쪽 지방의 농사가 잘되고, 서쪽 잎이 먼저 피면 서쪽 지방의 농사가 잘된다는 것이다. 정의고을을 지켜보는 산은 높이가 324미터로 영모르 또는 영주산이라 불렀다. 예로부터 신선이 살았으며 아침 안개가 끼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고 한다.
성읍마을의 특성은 제주도 고유의 초가집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읍을 민속 마을답게 이끄는 열쇠이자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정의현청 청사였던 일관헌 등을 제외하면 모두 초가집이며, 500년 동안 도읍지였는데도 기와집이 자리 잡지 못한 까닭은 초가집이 이 마을에 가장 적합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성읍을 들어가면 남북 방향으로 관통해서 마을을 둘로 나누는 큰 도로가 보인다. 사실 전통 마을이라 하면 아늑함을 연상하겠지만 성읍마을은 이런 생각을 처음부터 깨버린다. 일제 강점기 때 마을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본래 있던 소로의 폭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민가는 육지와는 다른 건축 기법을 갖고 있다. 대체로 一자형 평면을 가진 집 2채를 중심으로 했으며 제주도를 특징짓는 돌과 새를 주재료로 사용했다. 돌로 벽을 쌓고 새로 지붕을 덮어 초가집임은 분명하지만 모양은 다르다. 육지에서 초가집의 기본이 되는 볏짚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벼농사가 지극히 제한적인 곳에서만 이루어졌으므로 볏짚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볏짚이 쉽게 썩어 제주도의 독특한 지붕 형태가 된 것이다. 김정의 『제주풍토록』에 그 상황이 요약되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초가에 사는데 띠를 엮지 않고 지붕에 늘어놓은 긴 나무로 가로질러 눌러놓았다. 기와집이 극히 적으며 정의현과 대정현 등 군현관사도 역시 초가집이다."
오늘날 복원해놓은 관공서는 대부분 우람한 기와집이지만 육지를 흉내 낸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새 역시 항상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지붕갈이용 새를 조달하기 위해 띠를 관리하는 밭을 운용했다. 개인 소유가 아닌 마을 소유의 밭이었으며 대체로 해발 300미터 이상의 들판에 있다. 토지가 척박하므로 윤작법으로 수확물을 거두었다.
건물의 규모와 건물 수는 경제적 형편과 가족 상황에 따라 다르다. 살림이 어렵거나 식구가 단출한 경우는 안거리 한 곳에 살았으며, 좀더 여유가 있으면 안거리 맞은편에 밖거리를 두어 마주 보며 살았다. 제주도 말로 '거리'란 채를 이르며 안거리는 안채, 밖거리는 바깥채, 모서리에 두었다는 뜻의 모커리 또는 묵거리는 부속채를 일컫는다. 대문간은 이문간, 부엌은 정지라고 부른다.
육지의 전통 마을의 경우 안채와 사랑채는 성별로 사용 공간이 달랐지만 제주도에서 안채와 바깥채는 세대별로 사용 건물이 달랐다. 대개 안채는 부모가, 바깥채는 자식 세대가 사용했다. 부모 중 한쪽이 사망하거나 고령이 되면 사용자가 자식 세대로 바뀌었다. 생애 주기의 일정한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주인이 바뀐 것이다. 안거리, 밖거리라고 이름을 달리 불렀지만 규모나 재료 등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참고로 제주도에서는 안채와 바깥채를 쓰는 부모와 자식들이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지어주는 밥을 먹지 않고 초대받을 때에야 먹었다. 안채와 바깥채가 독립적으로 살림할 수 있는 부엌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통시도 따로 있었다. 돼지 사육과 관련 있는 경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두 경제 주체가 각기 통시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읍마을을 비롯한 제주도에서 집의 구성은 위계가 아니라 평등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전체가 중요 민속 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5채의 가옥이 별도로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더불어 정의현의 동헌인 일관헌과 정의향교가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제주 민요가 중요 무형 문화재 제95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물론 돌하르방 12기가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더불어 민속놀이, 향토 음식, 민간 공예, 제주 방언 등의 무형 문화유산이 아직까지 전수되고 있어 성읍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문화재가 많은 마을로 꼽힌다.
중요 민속자료 제68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의 고을 객사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1,072제곱미터의 넓은 터에 안채, 바깥채, 부속채, 창고, 대문간 등 다섯 채의 건물이 마당을 둘러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읍의 집들은 대지의 가장자리에 안채와 바깥채를 두고 그와 직각으로 부속채를 두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제주도에서 부엌은 취사, 식사, 작업 등을 위한 다목적 공간으로 건물 안의 마당인 봉당 기능도 겸한다. 날씨가 나쁠 때는 작업 공간으로 사용하므로 다른 지역의 한옥 부엌에 비해 상당히 넓은 것이 특징이다.
이 집에는 올레가 없고 대문간만 설치되었다. 원래 객줏집, 즉 순수한 살림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간을 걸러주는 요소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쇠막과 헛간 용도로 2칸의 부속채를 두었으며 바깥채와 대문간에도 쇠막이 있다. 바깥채에는 재래적인 농기구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마소에게 물을 먹이던 돌구유 몇 개도 있는데, 객줏집으로서 마소를 위한 공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창고가 세워진 자리에는 연자매가 있었다고 한다. 안채 문은 근래 변형되었지만 주춧돌, 받침돌 등은 물론 허벅을 얹어 두는 물팡 등은 과거 그대로다. 동전을 넣어두는 돈궤도 보관되어 있어 당시 살림살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중요 민속자료 제70호로 정의향교와 이웃해 있으며 과거에는 정의고을의 여인숙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주민들은 '여관집'이라고 부른다. 향교에서 거행하는 제례에 참석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이곳에 묵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여인숙이었으므로 큰길에서 올레 길을 따라 들면 대문 없이 정낭을 통해 곧바로 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
안채는 마당을 앞에 두고 동향하고 있으며, 헛간채는 안채의 맞은편에 서향하고 있다. 안채 뒤쪽에는 넓은 텃밭(우영)이 일구어져 있고, 수목들이 안채를 감싸듯 배경을 이루고 있다. 안채 앞 오른쪽에는 돼지우리와 함께 통시가 있지만 집 입구에 현대화를 의미하는 개량식 변소가 있어 좋은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안채는 한라산 산남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3칸 집이다. 안채의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대청마루의 왼쪽에 부엌과 작은방이 있다. 오른쪽에는 안방과 고방이 각기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안방과 작은방에는 굴뚝이 있으며, 대청마루와 안방의 전면에는 반 칸 폭의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대청마루 앞의 두 문은 모두 쌍여닫이 널문으로 오른쪽 문에만 머름을 들여 왼쪽 문보다 작은 호령창을 설치했다.
호령창은 주인이 일꾼을 부르거나 바깥사람과 간단한 대화를 나눌 때 이용하는 것으로 내륙의 들창문과 용도가 유사하다. 부엌 앞에는 물 구덕(바구니)을 얹어두는 물팡이 있다. 헛간채는 통칸으로 예전에 멍석이나 남방애 등을 두었던 곳이다. 한때 여관으로 사용되었지만 개조된 부분이 없이 한라산 산남의 단출한 재래 농가를 잘 나타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중요 민속자료 제71호로 지정되었으며 19세기 초엽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민 가옥이다. 동문 터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헛간과 외양간이 있는 좌우에 안채와 바깥채가 마주 앉아 있다. 3칸으로 된 대문간은 주택 규모에 비해 다소 커 보이는데 집이 동문으로 연결되는 큰길과 면해 있어 안과 밖을 좀더 뚜렷이 구분하기 위해 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대문간에 들어서도 안채와 바깥채가 모두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一자형 우진각 지붕의 초가로 안채와 바깥채 모두 3칸 집이다. 성읍의 주택을 이루는 채는 전면 3칸으로 구성되며 부엌, 상방, 구들이 각각 1칸씩 차지한다. 육지의 주택과 다른 것은 부엌에서 볼 때 상방, 곧 대청 건너편에 구들이 있다는 점이다. 육지에서는 부엌에서 난방하므로 부엌과 온돌방이 접해 있지만 제주에서는 난방이 필요 없는 상방이 부엌에 접해 있는 것이 기본이다. 안채는 재래식 온돌인 굴목으로 통하는 다른 문을 두지 않고 난간 쪽을 이용해 출입하는 제주도 전형의 가옥을 보여준다. 바깥채는 상방을 전면에만 시설하고 뒤쪽에 작은 구들을 배치했다. 안채를 180도 돌려놓은 모양인데 본래 부엌이었던 공간을 쇠막으로 사용하고 굴목에 작은 판문을 설치해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굴목으로 통하는 문을 별도로 두지 않고 난간 쪽으로 출입하도록 만들었다.
마소를 사람과 같은 지붕 안에 두는 것은 제주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많은 지역에서 동물과 주인이 함께 생활하는데 당시의 재산 1호라고도 볼 수 있는 마소가 평안해야 주인도 평안하기 때문이다. 개조된 부분이 별로 없어 재래적인 가옥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며 마을 길보다 다소 낮은 마당에서 북쪽 초가집 지붕들 사이로 한라산이 보이는 것이 일품이다.
중요 민속자료 제69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의고을 당시부터 1914년 면사무소가 표선리로 옮겨올 때까지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순조 29년(1829) 건설되었으며 안채, 바깥채, 부속채가 ㄷ자형으로 위치하고 있다. 안채와 바깥채는 1979년에 보수해 원래 모습에서 다소 변형되었다. 호령창은 그대로 남았지만 부엌에 있었던 부섭은 사라졌다.
이 집은 대문간과 본채 사이에 긴 공간이 있다. 제주도 민가로서 드물게 대문간을 둔 이유는 남문에서 객사에 이르는 도로에 면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문간과 안채, 바깥채 사이의 다리 팡돌은 Y자형으로 놓여 있다. 성읍의 여러 집에서 보이는 바닥 처리로 토질이 메마르면 푸석푸석 먼지가 나지만 일단 물을 머금으면 반죽처럼 되어 신바닥에 붙기 때문에 고안된 것이다. 제주도에서 예전부터 나막신이 발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안채는 작은 구들 없는 3칸 집으로 뒤에 장독대가 놓여 있고 바깥채 뒤에는 우영(텃밭)이 있다. 바깥채는 예전에 관원들이 숙소로 사용했는데 상방이 가운데 있지 않고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 제주도의 일반적인 집 구조와는 다소 다르다. 상방은 가옥의 가운데를 차지하는 중심 공간이다. 대개 상방에서 식사하며 안채의 경우 제사도 이곳에서 지낸다. 상방은 샛문으로 부엌과 연결되며 상방과 난간이라 불리는 툇마루 사이에 호령창을 설치한다. 호령창은 쌍여닫이 널문으로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아랫사람을 부르기도 하는데 제주도 일부 지역에만 설치한 독특한 구조다. 집 입구에는 원님만 마셨다는 원님 물통, 즉 못이 있다.
고상은 가옥은 중요 민속자료 제72호로 고평오 가옥과 이웃해 있다. ㄱ자형으로 안채와 부속채만 남아 있는데 과거에는 대장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안채 건물 자체가 대장간이므로 주거용이라기보다는 작업 공간의 단출한 형태다. 그러므로 안채는 현재처럼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지 않고 하나의 큰 공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장간 한가운데 땅에 기둥 뿌리를 묻는 생깃기둥(상기둥)을 세우고 비스듬히 대들보를 얹었던 원초적인 가옥 형태로 추정한다. 이 집은 올레도 없으며 특히 우엉 등의 외부 공간은 거의 두지 않았다. 고평오 가옥과 인근이므로 원님만 마셨다는 원님 물터가 바로 맞은편에 있다.
제주도를 이야기하면서 마을의 안녕을 비는 무속 신앙 장소인 '할망당'을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제주도에는 350개의 당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곳에서 모시는 신 중 80퍼센트가 여신이다. 제주도에 이처럼 당이 많은 까닭은 1만 8,000명에 달하는 신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도 신 나름으로 으뜸 신, 버금 신이 있다. 할망신이 있는가하면 손자나 증손자뻘 신도 있다. 성읍 성안에만 20곳의 무속 장소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중 안할망당, 광주부인당, 일당, 개당은 아직도 남아 있다. 주민의 신수와 건강을 관장한다는 안할망당은 '관청할망'이라고도 부르며 일관헌 남서쪽 옆에 있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예로부터 현청(일관헌) 구내 서쪽 노거수인 팽나무를 신목으로 해 기왓장 위에 비녀, 옥구슬 등을 놓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후에 돌로 제단과 울타리를 쌓았는데 1971년 성읍리사무소를 신축하면서 정면에 인접되자 현 위치로 이설, 2평가량의 나지막한 슬레이트 건물 안에 시멘트 제단을 축조, 감실을 만들어 '현해수호신지위'란 위패를 봉안해 주민들의 안녕과 신수를 기원하는 곳으로 이용해왔다. 1991년 현 건물로 개축하고 '안할망신위'로 대치 봉안했으며 1996년 건물을 보수하면서 고증을 거쳐 제단 위에 감실을 마련 기왓장, 비녀, 옥구슬 등을 봉안했다."
송심자 제주도문화유산해설사는 현재에도 많은 사람이 안할망당에서 치성을 드리는 등 무속의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성읍마을이 지닌 가치는 더 없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의 간판이라면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색의 돌하르방을 거론하는데 성읍도 예외는 아니다. 성읍에는 동·서·남문 입구에 각각 4기씩 12기의 돌하르방이 있는데 약간씩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다른 지역의 돌하르방에 비해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눈썹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돌하르방을 '무성목'이라고도 부르는데 성읍에서만은 '벅수머리'라고 한다. 김영돈 교수는 영·호남 지방에서 장승을 벅수, 벅시 등으로 부르는 것을 볼 때 육지의 장승이 유입되어 돌하르방으로 변모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장승의 개념이 제주도에 도입되었다고 하더라도 돌하르방이 특산이 된 데에는 제주도만의 정신이 배어 있다. 돌하르방을 현무암 재료로 만든다는 고집이 그것이다. 육지의 전통 마을과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은 제주도인들이 열악한 환경에도 끈기를 갖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원천이었다.
그 많던 전통 마을이 대부분 사라진 지금, 성읍이라는 전통 마을이 남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흥미 있는 것이 성읍마을의 오메기 술이다. 제주도는 밭과 논의 비율이 49대 1이므로 쌀농사가 어렵고 기상도 농사에 적당하지 않아 먹고사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술 역시 쌀로 만들 엄두를 내지 못했고 조로 만들었다.
오메기 술을 빚기 위해서는 우선 좁쌀을 가루 내 익반죽하고 도넛처럼 가운데에 구멍을 내 떡을 만들어야 한다. 이 오메기 떡을 이용해 술을 빚는다. 이처럼 떡을 만들어 빚는 술은 이화주, 동정춘 등이 있으며 꿀처럼 단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오메기 술은 현재 제주도 무형 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가난의 산물이 문화재가 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성읍마을에는 제주도의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감귤나무가 없다. 성읍마을의 지리적 위치에 따른 영향인지는 모르나 여러 사람이 심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한다. 물론 감귤나무가 없다고 해서 주민들이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전통 마을로서의 위상이 감귤나무가 없다고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