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누가복음 1:57-80
우리 머릿속에 그려있는 성탄의 그림은 마구간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하면 어딘가 겸손하고 온유하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가랴는 그의 찬송시에서 예수님을‘구원의 뿔,‘돋는 해’로 말했습니다. 이는 약하고 앳되 보이는 아기 예수님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약해 보이는 아기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빛이 있었습니다. 사가랴가 예수님을 구원의 뿔이요 돋는 해로 찬양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 통해 우리도 큰 은혜를 받고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사가랴처럼 높이 찬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날 한 유대 시골 동네 늙은 할어버지가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체 자기 집 대문에 ‘빨간고추’를 잔득 매달은 금줄을 내걸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와, 드디어 애기를 낳았군요’하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때 대문 안에서 “응애, 응애”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호호 할머니였던 엘리사벳이 기한이 차서 천사의 말대로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57). 그러자 이웃과 친족들이 “오호호, 하나님께서 사가랴 제사장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군요.”하며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카톡카톡 하며 축하 이모티콘이 날아 왔습니다. 친척들은 분유, 젖병등 각종 유아용품을 사들고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율법대로 아이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던 만큼 이 할례식은 집안의 큰 경사였습니다. 그들은 할례식을 하며 아기의 이름도 짓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모인 문중어른들은 아버지를 따라 ‘사가랴2세’로 짓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벳 사모님이 갑자기 눈을 부아리며 “아니구먼유. 요한이라고 해야 해유.”하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친족들은 ‘아니 그래도 가문의 돌림자가 있는데.. 어째 족보에도 없는 그런 요상한 이름을 짓는댜’며 극구 반대했습니다. 기쁘고 축하해야할 날에 예상치 못하게 언쟁이 생기고 심지어 언성이 높아지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해도 결론이 나지 않자 그들은 최종 결정권을 부친에게 넘겼습니다. 그때까지도 사가랴는 불신하는 말을 했다가 천사로부터 벙어리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가랴는 서판을 달라하더니 아이의 이름을 썼습니다. "요한"
그러자 그들은 다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게 뭔 일이랴? 고얀 일도 다 있구먼” 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사가랴 부부는 가문의 전통, 주변 사람들의 생각등을 다 물리치고 이름 짓는 것부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절대적인 자세를 가지고 아이의 이름을 천사가 일러 준대로 ‘요한’이라고 지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이렇듯 하나님의 뜻에 잘 순종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64절을 보면 사가랴가 순종하여 아들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자마자 순간 혀가 풀리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찬양을 보면 아들을 주신 것을 찬양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는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찬송하리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사가랴는 무엇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첫째, 돌보사 속량(해방)해 주신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68-75) “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돌보셨다'는 것은 '찾아오셨다'(has come)뜻입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 심방 오셨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제사장 나라로서의 뜻을 두셨는데도 그들은 무수히 죄를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징계하여서 강대국들의 지배와 포로생활을 하는 수모를 겪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당시도 로마의 지배 아래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비참한 것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책망하는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도 없고 책망도 없으니 이것처럼 힘든 벌도 없습니다. 우리도 자식이 잘못하면 야단을 쳐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해도 야단도 하지 않으면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스라엘백성들은 마치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같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하고 외쳐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 긴 침묵을 깨뜨리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사람이 되어 그들 가운데 찾아오신 것입니다.
원래는 죄지은 우리인생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해달라고 호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인간은 교만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밖에서 역사속으로 들어와 우리 가운데 함께 해주시고자 찾아오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은 추상적인 아니라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찾아오셨으므로 실제로 우리의 내면은 참 생명과 평화와 감사가 넘치게 되었고 우리의 삶이 변화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심령에 실제로 임재하셔서 겸손하게 우리를 돌보아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68b를 보면 -돌보사 '속량하셨다'고 했습니다. 속량은 노예상태에 있는 자를 값을 치르고 해방시켜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들은 죄의 노예요 마귀의 노예였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에는 힘이 있습니다. 술도 힘이 있습니다. 알콜중독자가 술을 끊으려고 하면 더 술마시고 싶어집니다. 담배도 힘이 있습니다. 담배 끊으려면 더 담배가 피우고 싶어집니다. 마약이나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죄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더 센 누군가가 구해주어야 합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술마시는 사람에게 그냥 끊으라면 어렵지만 더 강한 예수님의 은혜가 임하면 술이 끊어집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더 좋고 강하기 때문에 자연히 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죄의 노예된 우리로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위해 이 땅에 보내졌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로 이 죄로부터 해방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영원한 석방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우리의 몸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은혜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일생 죄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인생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은혜는 강하게 해방시켜 줍니다. 죄로 인해 지옥의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던 우리를 돌아보시고 속량해주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찬양합니다.
둘째, 구원의 뿔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 그런데 사가랴가 예수님을 왜 구원자라라고 하지 않고 구원의 뿔이라고 했을까요?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신33:17) 뿔에는 힘이 있어 원수를 파멸시킬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뿔이 달린 짐승들을 보면 자기 뿔을 상당히 과시하며 뿔로 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소싸움을 보면 소들은 서로 뿔로 상대방을 찌르면서 싸웁니다. 작은 염소들도 싸우는 것을 보면 서로 뿔을 들이밀고 싸웁니다. 뿔있는 짐승들은 뿔만 믿고 뿔로 싸웁니다. 특별히 코뿔소는 자기의 뿔을 믿고 사자를 향해서도 돌진합니다. 사자가 아무리 용맹스러워도 코뿔소앞에서는 알아서 깁니다. 이처럼 뿔은 엄청난 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뿔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그러면 이 구원은 누구로부터 구원입니까? 71절을 보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구원의 뿔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강한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의 원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엡6:12, 벧전5:8) 사단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여서 사람의 내면에 역사하는 어두움의 권세자입니다. 사단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태권도가 5단이라고 해도 사단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사단의 힘은 아주 강력합니다. 요한계시록 13:1절을 보면 사단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는데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습니다. 뿔에 열 면류관이 있다는 것은 사단이 무적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만큼 사단의 뿔은 강하고 힘이 있습니다. 사단은 이 뿔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의 약한 부분을 향하여 사정없이 공격합니다. 사단의 뿔에 일단 찔리면 힘을 쓰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사단이 가지고 있는 뿔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교만의 뿔, 음란의 뿔, 회의의 뿔, 두려움의 뿔, 염려의 뿔, 허무의 뿔, 우울의 뿔, 섭섭의 뿔, 시기와 미움의 뿔이 있습니다. 사단이 이런 것으로 사람들을 사정없이 들이 받아 버리면 사람들은 이내 회의에 빠지고 우울에 빠지고 음란에 빠지고 교만해지고, 두려움에 빠지고 미움에 빠집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사단의 뿔은 더 날카롭고 강력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음란물과 게임이라는 것입니다. 음란물의 해악은 날이 갈수록 더 심각하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피폐케 하고 인격을 파괴합니다. 이런 음란과 정욕의 뿔에 찔려 정신이 이상해지고 많은 아이들이 인생을 망칩니다. 게임의 뿔은 가공할 힘을 가지고 애 어른 할 것이 없이 마구 찔러 쓰러뜨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없는 세계는 사단의 세계입니다. 사단이 7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로 신나게 사람들을 찌르고 무수한 사람들을 지옥문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느냐 세상이 왜 사단의 세상이냐 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영적 세계를 몰라서 그렇게 말합니다.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죄에 빠뜨린 후부터 인간과 세상을 지배해왔고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단이 휘두르는 뿔에 받혀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고 무기력하게 되고 범죄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하루평균 자살자가 37명으로 OPEC국가중 자살율1위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단의 뿔에 찔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온갖 회의와 불신, 절망과 미움, 허무와 두려움을 심고 결국 우리로 우울증에 빠지게 하고 가정을 깨뜨리고 자살하게 하여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는 지옥으로 내던져 버립니다.
누가 이 사단의 완전하고 교묘한 술책과 그 뿔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이 원수의 손에서 누가 우리를 구원하겠습니까? 이는 오직 구원의 뿔 되신 예수님만이 이 원수 사단을 물리치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권세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속량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파하시고 사단의 머릿통을 깨부셨습니다. 사단의 일곱 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을 박살내 버리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안으로 깊이 들어와서 중심으로 순종하는 자에게는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주십니다. 십자가 보혈을 덧입고 의로워지므로 누구나 사단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원수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74,75절을 보면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우리 중에 만일 하나님을 섬기기를 부담스러워하는 분들이 있다면 우리는 사단을 섬기는 옛 생활로 돌아가게 됩니다. 옛속성이 도지게 합니다. 예배드리기를 부담스러워하거나, 사는 목적을 하나님께 두기를 싫어하고 내 맘대로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고자 한다면 이는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한 행위요 이내 사단의 뿔에 찔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단으로부터 구원해주셨으니 우리성도님들은 종신토록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사가랴는 예수님이 돋는 해가 되는 것을 찬송했습니다.(76-79) 사가랴는 76, 77절에서 그의 아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며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의 죄사함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죄 값을 치를 수 없기에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78a).
이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은혜가 임합니까? 78b, 79절을 보면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1)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돋는 해는 희망을 상징합니다. 죄와 사망으로 인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인생들에게 예수님은 돋는 해로서 위로부터 임하여 우리 심령에 어두움을 밀어내고 참 희망을 주십니다.
2) 평강을 주십니다. 인간은 평강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돋는 해로 임하여 두려움과 허무를 몰아내고 평강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무슨 죄를 지었든지 예수님께 나아와서 도움을 요청하면 만드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죄를 용서받으면 평강이 임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는 다니지만 죄를 용서받는 것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죄책감을 그냥 무겁게 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해결받지 못하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이 죄를 용서받으면 예수님이 그 사람의 마음에 돋는 해처럼 떠오르게 되고 삶은 역동적이고 열정적이 됩니다. 소망과 비전이 넘칩니다. 형제들은 비젼과 박력이 넘치고 자매들은 환해지고 예뻐집니다. 말4:2절에 보면 “내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한다고 하였습니다. 우울함으로 병든 마음, 허무주의로 병든 마음, 운명주의로 병든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료해 줍니다. 그때 우리는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기쁨으로 뛰놀게 됩니다. 참으로 돋는 해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 인생에 해가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과 평강이 있게 되었습니다.
2023년 전 조그만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의 삶을 바꾸고 우리에게 참 구원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이제 하나님을 종신토록 섬길 수 있는 복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가랴에게 임한 성탄의 은혜가 우리에게도 부어져서 예수님의 성탄을 힘차게 찬양하시길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