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Q 테스트
''바보에게 공부는 필요 없어!"
악몽에 시달리던 열다섯 살 박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은
식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휴우. 꿈이었구나'
빅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얼굴의 그늘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꿈인 동시에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한달 전 빅터는 컴퓨터실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로널드 선생이 컴퓨터를
'켜라 on ' 라고 말한 것을
'열어라 open' 로 잘못 알아듣고
PC 케이스를 뜯어내려 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입을 벌린 채
빅터를 쳐다보았고,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로널드
선생이 부리나케 달려와 빅터의
귀를 고무처럼 잡아당겼다
''넌 도대체 머릿속이 어떻게
돼먹은 거냐? 천 달러가
넘는 컴퓨터를 뜯어내겠다고?
돌고래도 너보다는 똑똑할 게다.
멍청한 놈. 바보에게 공부는
필요 없어! 나가서 장사나 배워!"
로널드 선생의 고함이
아직도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아 빅터는 귀를 막아버렸다
오늘도 로널드 선생의
수업이 있는 날이다.
영원히 아침이 밝지 않았으면
했지만, 어느 새 동이 터서
창밖이 환하게 밝아있었다.
빅터는 몸서리를 치며
트레일러의 창문을 열었다.
건너 편 정비소에서
자동차 타이어 휠 나사를 조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정비소 기술자들 중
가장 일찍 출근을 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벤츠를 몰고 다니는 정비소
사장인 게레로 씨보다도 나이가
많지만 아버지에게는 집도 없다.
''빅터야. 일어났니?"
빅터가 트레일러 문을 열고 나가자.
아버지가 손을 흔들며 시원스레 웃었다.
아버지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슬퍼 보였다. 저 슬픈
표정을 빅터는 본 적이 있었다
빅터와 아버지는 낡은
이동식 트레일러에서 살고 있다
오랫동안 앓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조금씩 술에 빠져들었고.
점점 취해 있는 날이 늘었다.
술 때문에 아버지가 몇 번
이나 직장에서 쫓겨난 다음에는
살던 집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트레일러로 짐을 옮겨 오던 날
빅터는 마냥 신이 났다.
트레일러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어디로 떠나는 거냐고 연신
질문을 퍼부어대던 빅터에게
아버지는 아메리카 대륙
일주를 떠날 거라고 말했다
''대... 대륙 일주요? 그.... 그럼
우우...편번호...
9... 0001 로... 스앤젤레스
890... 44 라라... 스베이거스
10...001...뉴.. 욕도 간다고요.
또... 우우... 편..." 빅터가 미국의
전 도시와 우편번호를 말하기
전에 아버지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 전부 다 갈 거다. 돈을
조금 더 모은 다음에 말이다."
하지만
트레일러는 미국 대륙은커녕
도시 밖으로도 나가지 못했다
술 때문에 몇 차례
더 직장을 옮겨야 했던 아버지는
옛 동료인 게레로 씨의 배려로
어렵사리 정비소에 취직했고,
트레일러를 정비소와
가까운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술에 잔뜩
취해 트레일러 바퀴를 떼어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대륙
일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트레일러의 네 바퀴가 떨어지자
아버지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대신 정비소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 되었다.
빅터가 스쿨버스에 오르자 더프가
"꿔억! 꿔억!" 돌고래 흉내를 냈다.
실제로 돌고래가 그런 식으로
우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아이들을 웃기는 데는 효과만점이었다.
스쿨 버스 안에서 폭소가 터졌다.
아무리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더프의 입에서 나오면 반응이 좋았다.
더프는 운동을 잘하고 머리도 좋고
쾌활한데다 얼굴도 잘 생겼다.
더프는 뭐랄까, 온 세상
사람이 사랑하는 것 같았다.
자기를 괴롭히지만 않았더라면
빅터 역시 그를 좋아했을 것이다
빅터가 처량한 눈길을
보내자 더프는 히죽거렸다.
빅터는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른 채 자리를 잡기 위해 기웃거렸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들은
빅터가 다가 오자 은근슬쩍
빈 옆자리에 가방을 올려놓거나,
아예 노골적으로 다리를 올려놨다.
아이들은 빅터와 가까워지는 것을
일종의 서열 추락으로 받아들였다.
''빨리 앉지 않고 뭐하는 거야?
너 때문에 출발을 못 하잖아!"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어물대는
빅터를 향해 버스 기사가 소리쳤다.
"꿔억! 꿔억! 꿔억!"
더프의 패거리들이 여기
저기서 돌고래 소리를 냈다.
빅터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통로를 걸어갔다.
그리고 버스 뒤편에서 가방이 놓여
있지 않은 빈자리를 하나 발견했다
빅터는 옆자리의
주인을 힐끔 쳐다봤다.
기다란 갈색
머리카락을 말총처럼 묶은 로라가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버스가 출발해 빅터는 얼떨결에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게 되었다
하지만 로라는
그때까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명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슬금슬금 곁눈질을 하던
빅터의 눈이 어느새 로라에게 박혔다.
콧잔등의 주근깨가 귀여웠다.
그리고 긴 속눈썹 아래로
빛나는 파란 눈동자가 살짝 보였다.
빅터는 로라가 푸른 눈동자를
지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빅터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뭘 보니?" 석상처럼 앉아 있던
로라가 거슬린 듯 눈을 흘겼다.
빅터는 뜨거운 양철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고고.. 마워. 로라."
''도대체 나한테 뭐가 고맙다는 거니?''
"여옆... 자리에 앉게 해줘서..."
"난 이 버스의 주인이 아니야.
빈자리에 앉는 건 너의 당연한 권리야."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래도 빅터는 로라와 대화를
한다는사실에 적잖이 흥분됐다.
빅터는 친구가 없어서 늘
혼잣말을 중얼거려야 했기 때문이다.
빅터는 마른 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떼었다
"예....예전에 흑인은 버스에 못 앉았대.
또:.. 또 여자는 투표권이 없었대.
그리고 로마시대엔..."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로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쌀쌀맞게 고개를 돌렸다.
빅터는 고개를 숙였다.
당황할 때면 늘 그렇듯 손가락이
제멋대로 꼼지락거려졌다
''호... 혹시 나 때문에
화.. 난 거라면 미안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애처롭게 말하는
빅터를 향해 로라가 쏘아붙였다.
"너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로라는
답답한 듯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그대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빅터는 의기소침하게 등을 구부렸다.
한동안 떨리는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던 빅터의 눈길이
어느새 저도 모르게 로라를 향했다.
한 뼘쯤 열린 창으로 훈풍이
불어왔다. 로라의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간지럽게 흩날렸다.
햇빛에 반짝이는
머릿결이 꼭 금실 같았다
***
그날 2교시.
로널드 선생이 두툼한 종이
뭉치를 팔에 끼고 교실로 들어왔다.
로널드 선생은
그것을 IQ 테스트지라고 했다.
아이들은 예고되지
않은 상황에 응성거렸다
"선생님, 이번 주 시간표에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 미리 공부를
한다고 머리가 갑자기 좋아지진 않아."
로널드 선생은
교실 안의 볼멘소리를 싹둑 자르고
무표정하게 1Q 테스트지를 돌렸다.
아이들은 책상 위에 오른 용지를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내려다보았다.
"선생님, 원숭이 IQ가 몇인가요?"
더프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원숭이는 50 정도고
침팬지는 65 정도로 알려져 있지."
''그럼 돌고래는요?'
로널드 선생이 대답도 하기 전에
교실은 이미 웃음바다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꿔억! 꿔억!"
돌고래 울음소리가 들 렸다.
''하하하! 오늘 메를린
학교의 IQ최저점이 깨지겠군."
"돌고래, 걱정 마. 동물보호
협회에서 널 보호해줄 테니."
''꿔억! 간식은 정어리로 주세요.
사육사님. 하하하!"
교실전체의 시선이 빅터에게 쏠렸다.
구석자리에 앉아 있던 빅터는 보이지
않는 총알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불편해지자 또 손가락이
타자를 치듯 저절로 움직이며
연신 책상 위를 두드렸다.
"빅터!" 로널드
선생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그놈의 피아노 좀 그만 칠 수 없어?"
빅터는 손가락이 떨리지
않도록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그 때 더프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빅터는 특별히 더 문제를 잘
읽어야 할 거야. 수족관에 들어
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또 다시 교실 전체에 웃음이 터졌다.
빅터는 굽은 어깨를 더욱 움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