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바드르 뭉크(1863-1944)
1863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의관이었으나 동시에 개인병원도 열어서 상류사회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종교에는 광신적이었고, 우울했고, 신경질적이었다.
어머니는 5세 때 폐결핵으로 죽었다. 열 세 살 때는 뭉크 자신도 피를 토했다. ‘내가 건강해진다면 신에게 봉사하겠다.’고 기도했다 한다. 누이는 열 다섯 살 때 역시 폐결핵으로 죽었다.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은 뭉크를 평생 동안 괴롭혔다. 이런 가족사로 아버지도 광기에 가까웠다고 한다. 어머니가 죽은 뒤로는 이모인 카렌 비욜스타트가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다. 뭉크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소년 시절의 아픈 경험들은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 그의 정서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의 그림은 죽음과 질병 등 비극적인 소재를 자주 다루었다. 1895년에 그린 ‘병실에서의 죽음’은 어릴 적의 기억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의 유년시절을 생각해보면 죽음의 무게와 의미를 일찍부터 느꼈다.
1879년에 아버지의 권유로 공업학교에 들어갔으나 1880년에는 화가가 되기를 결심하고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도 동의했다. 1882년에 여섯 명의 공예하교 동기들과 아클리에를 열었다. 이때 독일 회화와 프랑스 자연주의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
1883년에는 인상주의를 반영하는 소묘를 그렸다. 6월에 오슬로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영했다. 이것이 뭉크의 최초의 전시회이다.
1884년에 해군 군의관의 부인과 사랑에 빠져서 6년 간 지속했으나 사랑의 결실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거의 팜므파탈적인 여인으로, 여인 관계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1889년에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파리 유학을 떠났다. 인상파의 그림에 흥미를 느꼈으나 고갱의 평면적 색채와 구불구불한 선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이후로는 주제 선택에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고호의 영향을 많이 받고, 표현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 파리의 유학은 뭉크를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상징주의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이로서 뭉크는 노르웨이의 가장 위대한 화가인 동시에 독일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독서를 하거나 뜨개질을 하는 그림은 더 이상 흥미가 없다. 인간 내면의 감성과 현대인의 정신적 불안, 그리고 인간의 숙명을 표현하고자 한다.’
베를린에서 열었던 첫 번 째 전시회에서 뭉크의 그로테스크한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엄청난 반응을 보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술에 대한 모욕이라고’ 분노했다. 소수이지만 뭉크의 글미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베를린 화단은 이 문제로 뜨거운 논쟁에 휩싸이면서 독일 미술가 협회는 이 일로 분열이 일어났다. 이 일을 계기로 뭉크를 지원한 마그 리버만 등은 베를린 분리파를 결성했다.
1893에는 드레스텐, 베를린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이때 뭉크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절규’를 그렸다. 뭉크는 회화라는 양식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관을 표현했다. 관람자의 감성을 집요하게 자극하여 생각을 하도록 한다. 뭉크의 표현주의는 색은 단지 묘사의 수단이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이다. 음악적으로 사용했다. 그의 그림은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에게 엄청남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자신은 표현주의 작가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마돈나’를 그리고, ‘죽음의 손길이 삶에 미치고 있다.’라는 표현을 했다. 이 작품을 처음 발표하였을 때는 정자와 태아가 그려진 액자에 끼웠다고 한다. 농염한 성적 매력이 넘치는 여인을 통해서 사랑과 수태의 의미를 보이고자 했다.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에는 경제적으로도 무척 어려웠고, 인간관계도 힘들었다. 뭉크는 오로지 작품에만 매달렸다. 불안은 오히려 그의 삶을 지탱해주었다. 그에게 검은 천사의 역할을 했다. 그는 ‘죽음은 삶의 시작이며 새로운 결정의 시작이다.’라고 보았다.
인간이 갖는 원초적 욕망 중 질투, 우울, 슬픔, 고독 등과 같은 다소 어두운 감정을 주로 표현했다. 그는 강박관념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경쇠약에 걸렸다. 그는 작품을 위해서 생명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만큼은 모든 것이 행복했다고 한다.
ㅜ뭉크가 그린 주제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느끼는 소외, 개개인의 두려움 감정, 여인들이 생애의 여러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운명들, 남녀간의 사랑과 갈등,. 성의 심리적 육체적 갈등 등을 그렸다. 이러한 뭉크의 여인관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 ‘마돈나’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 여인은 성을 갈망하는 눈길로 남성(또는 관람자)를 바라본다. 이 그림에서 마치 사랑은 죽음을 의미하듯이 그렸다. 뒤로 젖힌 머리와 한 손을 머리 뒤에, 또 한 손은 등 뒤에 두는 이런 자세는 일종의 굴복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뭉크는 여인의 강렬한 성적 유혹과, 동시에 여인 자신이 피해자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작품 ‘사춘기’는 사춘기에 다다른 소녀의 육체적 인식을 표현하였다. 그녀의 커다란 눈과 동작은 육체적으로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심리적 혼란, 즉 기대감과 두려움이 엇갈린 내면을 표현하였다. 뒤편에 크게 그려진 그림자는 두려움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또는 남성의 상징이랄까, 죽음의 상징일 수도 있다.
본능과 무의식, 욕망과 질투, 절망, 사춘기, 성숙기, 노년기 죽음으로 이끄는 비정상적인 애욕 등 인생의 주기와 감정을 다룬 뭉크의 대표작은 ‘생의 프리즈’ 연작이다. 1902년에 베르린 분리파 전시회에 전시하였다.
상징주의 화가들이 아주 모호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면, 그는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표현하였다. 그의 표현이 과감한 만큼 거센 반발도 받았다.
뭉크의 전성기는 1900년을 전후한 몇 년간이다. 그후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여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다.
1900년 즈음에 튤라 라르슨이라는 여자가 결혼을 요구하면서 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 사건으로 더욱 방황하고 보헤미안 적인 생활에 빠졌다. 세잔이나 고호에 못지 않은 명성을 얻었지만 말년의 그의 삶은 병마와 방황과 고독으로 쌓여갔다. 정신과 치료도 받았고, 유럽을 여행도 하였지만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치가 독일을 통치하던 1933년에 뭉크의 작품은 ‘퇴폐예술’로 분류되어서 압수 당하고 폐기처분되었다.
거의 숨어살다시피 하다가 1944년에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