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예라
오른쪽과 왼쪽 – 파라샤 바예라
아브라함은 이쯔학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건이라는 놀라운 절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성에서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바예라(Vayera)’ 파라샤는 아브라함과 그의 생애를 다루는 두 번째 토라 구절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야아콥과 에서가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살아 있었지만, 다음 두 구절은 이쯔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겪은 열 번째이자 마지막 시련이고, 그가 지상에서 행한 봉사의 절정인 ‘이쯔학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건’으로 마무리됩니다.
항상 오른쪽으로 돌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할 산 중 하나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이전 파라샤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네 땅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지시와 비슷하게 들립니다.
그 첫 번째 명령을 받은 후, 아브라함은 평생을 여정 속에서 보냈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한 후, “아브라함은 남쪽으로 이리저리 여행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그 땅의 길이와 너비를 두루 돌아다니라”고 명령하셨고, 이어 “내 앞에서 행하며 진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동안 미지의 땅을 향한 여정에서 엄청난 거리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파라샤트 바예라에서는 모리아 산으로 향한 그의 마지막 여정에 이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에 그치지 않고, 심오한 영적 성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까요?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에서 잠시라도 쉴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이 질문의 열쇠는 “아브람이 남쪽을 오가며 여행했다”는 구절에 있습니다. 남쪽은 정오에 태양이 가장 높이 뜨는 곳이며, 항상 햇빛이 쏟아지는 방향입니다. 토라에서 남쪽은 “오른쪽”으로도 불립니다. 반면, 북쪽은 어둡고 “왼쪽”으로 불립니다.
카발라에서 오른손은 자비를, 왼손은 힘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오른쪽을 방향으로 선택했는데, 이는 그가 처남 롯에게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끊임없이 “남쪽”으로 나아간 것은, 사람과 창조주에 대한 그의 사랑이 끊임없이 발전함에 따라 그의 자비로운 속성이 그에 상응하게 발전했음을 의미합니다.
‘레크 레카(Lech Lecha)’ 파라샤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진실’이라는 속성을 ‘사랑’으로 변화시켰으며, 일생 동안 자비로운 속성을 갈고닦아 더욱 친절하고, 관대하며,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올바른 믿음
“올바른”(יָמִין)은 자비와 연관될 뿐만 아니라 “믿음”(אֶמוּנָה)과 어원이 같아서, 성경에서는 이 두 단어가 때때로 서로 바꿔 쓰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점점 더 “올바른” 사람이 되어감에 따라, 그의 남쪽으로의 여정은 또한 그의 믿음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자비에서 뛰어나던 만큼 믿음에서도 뛰어났는데, 성경 구절에 “그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신자들의 조상”입니다. 그는 참된 유일신 신앙을 확립하고 인류에게 전파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전진은 점점 더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향하는 추진력을 상징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무한한 믿음의 비밀을 드러냈는데, 그것은 드러날수록 끊임없이 발전하고 꽃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남쪽으로 향하는 이 두 가지 의미, 즉 자비로 향하는 것과 믿음으로 향하는 것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힐렐 장로는 이 두 가지 속성을 매우 높은 차원에서 드러낸 또 다른 인물입니다. 힐렐은 “사람을 사랑하는 아하론의 제자”였으며, 심지어 고의로 자신의 자제심을 꺾으려 했던 이들에게조차 이 자비의 교리를 실천하고 설교했습니다. 그는 또한 “날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매일의 양식을 보내주실 것을 신뢰한 위대한 신앙인이기도 했습니다.
자비는 오른쪽에서 자유롭게 흘러나오지만, 왼쪽의 힘과 두려움의 한계로 인해 제약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광범위한 힘은 인간 지성의 한계로 균형을 이룹니다. 이는 힐렐의 “좌파” 학우이자, 두 사람 중 더 엄격하고 비판적이었던 샤마이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실제로 샤마이와 그의 제자들은 힐렐보다 지적으로 “더 예리”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높은 수준의 믿음을 가진 힐렐은 오른쪽에, 지성인인 샤마이는 왼쪽에 위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힐렐 학파의 사상에 따라 결정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유연하고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사색하는 유대인’
이러한 새로운 관점을 통해, 우리는 왼쪽—그의 ‘이성’—에서 오른쪽—그의 ‘믿음’—으로 이어진 아브라함의 여정이 지닌 영적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이모니데스는 아브라함이 어린 시절부터 지적 탐구를 시작하여, 진실에 도달할 때까지 밤낮으로 깊이 사색한 끝에, 세상을 창조하신 신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추론해 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이성적 분석을 바탕으로 신을 섬기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성은 그를 논리를 초월하여 신앙의 초의식 영역에 도달하게 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이성적 사고를 넘어선 곳에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아무리 심오하고 그 범위가 넓다 해도 여전히 한계가 있는 반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한계가 없습니다.
카발라에서 이는 지성을 포함한 영혼의 의식적 능력을 초월하는 초의식적 ‘왕관’(영혼 속 믿음의 근원)에 해당합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깨달음 속에서 지성을 통해 습득한 모든 지식을 제쳐 두었습니다. 내 모든 지식 위에 있는 것은 나의 단순하고 진실한 믿음이며, “모든 지식의 목표는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아브라함에게 일회성 성취가 아니라, 지성에서 믿음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지속적인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전진하며 자신의 마음과 지식을 신성을 이해하는 데 바쳤고, 그 결과 매일 새로운 지식의 지평이 그에게 열렸습니다.
그가 어느 날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전날보다 더 많은 것이었고, 그의 새로운 지식은 그를 더 오른쪽으로 나아가게 요구하는 새로운 왼쪽을 동반했습니다. 그는 오늘날 자신에게 믿음으로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이 자신의 이성에 통합되어 합리적인 사고가 될 때까지 자신을 고양시켰고, 이는 그를 그 너머의 새로운 믿음의 차원으로 이끌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성에서 믿음으로, 그리고 새로운 이성과 새로운 믿음으로 “앞뒤로” 오가며 여정을 이어갔습니다.
마지막 여정
모리아 산으로 향한 아브라함의 마지막 여정은 믿음의 정점에 이르렀으며, 이는 그를 극우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가 사랑하고 오랫동안 기다려 온 아들―“큰 민족”이 되리라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실현이자, 미래 전체에 대한 그의 모든 희망이 담긴 존재―을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러한 역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쯔학을 통해 네 자손이 불릴 것”이라는 신성한 약속과 이 명령이 어떻게 정면으로 상충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것이 아동 제사를 엄격히 반대했던, 아브라함이 인류에게 가르쳐 온 교육 원칙과 모순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논리적인 설명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논리의 빛이 끝나는 곳에서, 믿음의 빛이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하시두트에서는 아브라함이 겪은 모든 시련이 믿음의 시험이었으나, 이쯔학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건은 그의 믿음을 극한까지 시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안에 왼쪽을 포용하기
아브라함이 오른쪽과 자비를 상징하는 반면, 그의 아들 이쯔학은 두려움과 심판에 해당하는 왼쪽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쯔학을 제단에 묶고 그를 제물로 바치려 함으로써 궁극적인 오른쪽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이성을 완전히 버리고 자신의 ‘왼쪽성’을 극복하여 순수한 믿음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그
러나 카발라는 ‘이쯔학을 제단에 묶은 사건’을 우가 좌를 이긴 승리의 표현이 아니라, 우 안에 좌가 내포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쯔학을 죽이지 않았으며(하느님께서 금하시길), 그저 그를 장작 위에 눕혀 묶어두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쯔학을 제단에 묶은 행위는 우와 좌가 하나로 결합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쯔학의 제물을 이러한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아브라함의 성취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게 됩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전 위치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남쪽”, 즉 “오른쪽”으로 여행할 때마다 그는 “왼쪽”에서 멀어집니다. 그가 “믿음”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내딛을 때마다, 필연적으로 자신의 이성을 뒤로 남겨두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브라함의 영적 성장 초기 단계에서는 사실이었지만, 이쯔학을 제물로 바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전의 위치를 떠나지 않고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른쪽으로 점점 더 나아가다가, 마침내 “제단 위, 장작 위에” 묶어 둔 아들 이쯔학이 바로 ‘왼쪽’의 전형이라는 결정적인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인 목적이 ‘오른쪽이 왼쪽을 죽이고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소년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것임을 계시하셨다. 오른쪽은 왼쪽과 하나가 되어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며, “그 둘은 함께 갔습니다.”
지성과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끊임없이 의식을 지성에서 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가장 높은 형태에는 어떻게든 우리의 제한적이고 분석적인 지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왼쪽이 오른쪽 안에 포함된 것과 같습니다. 가장 높은 차원의 순수한 신앙 안에 포함된 지성은 신앙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그 깊이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무한한 비밀을 드러냅니다.
창조 이전에 존재했던 원초적 토라와 관련하여, “나는 그분 곁에서 젖먹이[אָמוֹן; ‘믿음’(אֶמוּנָה)과 같은 어근에서 유래]였으며, 매일 그분의 기쁨이 되어 언제나 그분 앞에서 놀았다.”라고 한 구절이 말합니다. 실제로 카발라의 용어로 말하자면, 믿음(왕관)은 “어떤 개념 너머에 숨겨져 있는” “더 높은 지성”입니다.
누가 주도하는가?
이 과정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왼쪽’을 상징하는 이쯔학이 ‘오른쪽’을 상징하는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음을 밝혀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이쯔학을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는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만, 이쯔학이 그곳에서 내려왔다고 명시한 구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에 현자들은 이쯔학이 실제로 희생되지 않았음에도 ‘번제물’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이쯔학을 제단에 묶는 행위를 통해 아들의 영혼의 근원이 자신보다 더 높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경외”(פַּחַד יִצְחָק)로 불리지만, 이 표현은 또한 “경외가 웃을 것이다(Fear will laugh)”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왼쪽이 오른쪽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계시는 세상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웃음을 가져다주는 완전히 새로운 혁신입니다.
이쯔학이 심판과 두려움의 속성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그토록 큰 기쁨과 유쾌함이 발산되는 것입니다. 이는 장차 유대 민족이 특히 이쯔학에게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라고 말할 때 온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실제로 카발라에서는 이쯔학이 미래의 메시아적 인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쯔학(יִצְחָק)은 “웃을 것”이며, 메시아(מָשִׁיחַ)는 “기뻐할 것”(יִשְׂמָח)입니다.
By Imry GalEin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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