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03
10월7일[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연중 제27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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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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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0QaoZcsl01U
[서울대교구 장세훈 임마누엘(상계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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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 매일의 사랑 고백, 묵주 기도!>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여기저기 몸도 아팠지만, 이 길을 계속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업 땡땡이도 많이 치고, 제대로 신학 공부도 하지 못했습니다. 늘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지라, 30년 전부터 반성하는 마음으로 매일 영성 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습니다.
좋은 영적 독서 책 한 권을 만나면 마치 횡재한 기분입니다. 탁월한 영성가들의 신앙과 삶, 지혜와 경험이 맞춤형으로 내 손안으로 딱 들어오니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최근에 영적 독서를 하던 중에 묵주 기도와 관련된 풀톤 쉰 대주교님의 말씀을 접하고 정말 가슴이 뛰고 설레었습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때로 우리가 매일 바치는 묵주 기도는 지루한 반복이나 그저 해야 하는 일상의 의무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인들 사이에서는 수시로 서로 사랑을 확인합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해요 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아름다운 진리에는 지루한 반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묵주 기도는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치면, 그것은 “성모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묵주 기도를 누구보다도 좋아하셨던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묵주 기도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단순하고 깊이가 있고, 훌륭한 묵상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제 영혼의 눈앞에는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이 지나갑니다.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로 구성된 그 신비들은 성모님의 마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있는 친교를 나눌 수 있게 저를 이끕니다. 찬미의 기도이며 간구의 기도인 묵주 기도가 묵상 기도로 넘어가길 희망합니다. 묵상을 동반하지 않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묵주 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구원송 등 염경기도의 조합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묵상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염경기도와 묵상기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기가 막힌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문 매 신비 안에 반드시 ‘무엇무엇을 묵상합시다!’ 라는 문구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묵주 기도는 당연히 묵상 기도입니다.
묵상이나 관상에로 나아가지 못하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체에 불과합니다. 또한 묵상 없이 그저 입으로만 줄줄 바친다면 묵주 기도가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이방인들의 빈말처럼 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묵주 기도를 자주 바치면 좋은 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칠 때, 성모님께서 더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성모님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더 우리 가까이 현존하십니다.
결국 묵주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현존 체험, 성모님 동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주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 성모님께서 언제나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신다.’는 의식을 지니게 되니,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쁘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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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F9Ss_xexu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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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기도 잘 바치는 법: 묵주기도는 어머니께 내미는 어린이의 손>
10월은 로사리오 성월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이 기념일이 정해진 이유는 교황 비오 5세와 교회의 묵주기도를 통한 엄청난 하늘의 개입을 온 교회가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결정적 사건은 이렇습니다.
1571년 그리스도교 신성 동맹은 해군력이 훨씬 우월하고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준비가 되어있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엄청난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두 세력은 그리스 레판토 바다에서 결정적으로 맞붙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전투는 패배로 끝날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러면 속수무책으로 모든 유럽이 이슬람화될 위기였습니다. 이때 교황 성 비오 5세는 그리스도교국에 대한 큰 위험을 인식하고 신자들에게 승리를 위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모든 교회와 수도원에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했으며, 자신도 큰 신심으로 묵주기도를 인도했습니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신성 동맹은 많은 역사가가 기적적인 해군 승리로 간주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스만 군대는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그들의 제국이 유럽으로 확장되는 것은 중단되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교황 비오 5세는 승리를 성모 마리아와 묵주기도의 덕분으로 돌렸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교황님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셨고, 나중에 이 축일을 10월 7일에 묵주기도의 성모 축일로 바꾸었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그의 묵주기도 장려는 이 강력한 기도에 대한 신심을 가톨릭 세계 전체에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가 제정한 로사리오 성모 축일은 묵주기도가 단순한 개인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바꿀 힘을 지닌 기도라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자랑 중의 자랑은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멀게만 느껴질 때 어머니를 통한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에 꺼리셨음에도 첫 기적을 행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성모님의 청원 때문이었습니다.
묵주기도는 본래 시편 150편을 하루에 다 낭송하던 수도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편도 내 생각을 끊고 이미 있는 기도문에 정신을 집중하는 행위입니다. 묵주기도가 잘 바쳐지려면 기도하는 중에 나를 믿는 마음을 내려놓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생각을 끊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행위입니다. 아이들의 가장 강력한 힘은 “엄마!”라고 반복해서 부를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소화 데레사가 꿈을 꾸었는데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며 불쌍하고 애절한 눈만 치켜뜨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안타까움에 다른 누구보다 소화 데레사를 들어 가장 높은 곳에 앉히십니다.
묵주기도의 힘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단순하게 반복하는 말속에 나를 파묻으면 주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내가 하는 말과 각 신비를 묵상하며 최대한 나의 생각을 내려놓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엄마에게 내미는 아이의 손에 다른 생각이 들어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은 나를 믿는 행위입니다.
공동으로 묵주기도의 힘의 사례에 대해 들은 것은 수없이 많습니다. 미국에서 사목하던 신부님이 자기를 비웃던 마귀 들린 사람을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며 쫓아냈던 일, 그리고 성당 레지오 단원들이 밤새워 기도하여 익사한 청년을 되살린 일 등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는 성모님께 청할 때 예수님께 청하여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묵주기도는 개인적으로도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르완다 대량 학살의 생존자인 임마꿀레 일리바기자의 책 『로사리오: 내 생명을 구한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녀는 당시 숨어있던 91일 동안 묵주기도를 바치며 자신이 체험한 묵주기도의 능력을 크게 네 가지로 말합니다.
1. 하느님의 손에 숨겨져 보호받는다는 믿음: 임마꿀레는 그녀가 숨어 있는 동안 묵주가 그녀의 방패가 되어 외부의 압도적인 두려움과 위험으로부터 그녀에게 깊은 보호감을 제공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밖에서는 폭력이 만연하고 살인범들이 집을 수색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묵주를 꼭 붙잡고 자신과 벽 너머의 혼돈 사이에 거의 물리적인 장벽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그녀를 둘러싼 공포로부터 그녀를 보호하시고, 겉옷으로 그녀를 덮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의 형태가 아니라, 성벽 밖의 악의 손길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손에 숨겨졌다.”라는 심오한 느낌이었습니다.
2. 하느님 용서의 능력을 받게 됨: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께서 경험하신 가장 중요하고 신비로운 순간 중 하나는 마음의 심오한 변화였습니다. 은신 초기에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살인자들을 포함하여 자신의 동족을 살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묵주기도를 계속 바쳤고, 특히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이 그녀의 영혼에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용서가 그녀와 그녀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고, 원수들을 위한 예수님의 수난의 고통에 자신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3. 천사들의 존재를 느낌: 임마꿀레는 숨어있는 동안 천사들이 거의 눈에 띄게 나타났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녀는 묵주기도를 바치는 동안 그 방에 천사들이 있어 그녀와 다른 여성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살인범들이 위험할 정도로 그들을 발견할 뻔했지만, 항상 뭔가가 그들이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 보였던 여러 사례를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기도하는 순간 하늘의 존재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개입하고 있다는 깊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성모 마리아께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셨다고 믿으며 끊임없는 묵주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겼습니다.
4. 혼돈 속에서도 신비로운 평화의 힘을 느낌: 상황의 극도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임마꿀레는 묵주기도가 어떻게 그녀에게 신비로운 것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평화에 대한 심오한 감각을 가져다주었는지 설명합니다. 대량 학살이 밖에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동안, 화장실 안에서 그녀는 공포를 뛰어넘는 평온함을 경험했습니다. 특별히 환희의 신비를 바치면서 그녀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탄생을 연결했으며,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예수님의 세상에 오신 것이 희망을 가져왔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했습니다. 이는 그녀를 둘러싼 악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희망과 평화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이 평화를 묵주기도를 사용하여 그녀에게 은총을 부어주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신비로운 선물로 여겼습니다.
임마꿀레는 묵주기도가 자기 생명을 구했다고 말합니다. 기도를 하기 전에는 그 두려움과 고통에 차리라 발각되어 죽기만을 바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5단짜리 묵주는 그녀가 용서하고, 평화를 찾고, 하느님의 자비를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심오한 내적 치유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손만 내밀면 잡아주실 어머니가 계심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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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상일은 참 모를 때가 많습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도 무척 다릅니다. 저의 형제들도 모두 성격과 외모가 다릅니다. 큰 형은 예술적인 감각이 좋았습니다. 필력도 좋고, 그림도 잘 그리고, 음악적 재능이 있었습니다. 작은 형은 좋은 몸을 지녔습니다. 형제 중에 키가 제일 컸습니다. 달리기도 잘 했고,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렸습니다. 저는 큰 형과 달리 예술적인 감각이 부족했습니다. 작은 형과 달리 좋은 몸을 타고 나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제게는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성품을 주셨습니다. 공장에서 출고 되는 물건은 기능이나 성능이 다르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들이 반품을 요구할 것이고, 회사는 곧 어려움에 처할 것입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기에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어도, 같은 선생님에게서 배웠어도 성품과 기질이 다른 것입니다. 진화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성격과 체질이 좋다고 합니다. 코로나와 같은 질병이 찾아와도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실 때입니다. 같은 로마 병사지만 반응이 달랐습니다. 어떤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려고 했습니다. 빨리 끝내려고 예수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러나 어떤 병사는 이방인이었음에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 저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구나!” 예수님 옆에 있던 죄인들도 반응이 달랐습니다. 한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오. 그리고 나도 구해 주시오.” 그러나 또 다른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갈 것이다.” 오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율법학자의 관점은 ‘나의 이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예수님의 관점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입니다. 나의 삶은 과연 어떤 관점에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 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훗날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제안으로 2002년부터 빛의 신비가 묵주기도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로써 묵주기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환희의 신비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한 묵상입니다. 빛의 신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묵상입니다. 고통의 신비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영광의 신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들 또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희망하는 묵상입니다.
신학교에서 지낼 때입니다. 매일 저녁 7시 15분이면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혼자 할 때도 있지만 함께 할 때도 많았습니다. 본당 신학생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교구 모임과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학교에는 묵주를 들고, 기도를 하는 신학생들의 기도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 기도는 신학생들을 지켜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예방 주사를 맞는 것처럼 묵주기도는 신학생들을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었습니다. 저도 묵주기도에 대한 작은 체험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묵주기도를 하려고 차를 잠시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큰 차가 제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차를 멈추지 않았으면 큰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막 하려고 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제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오늘 하루를 묵주기도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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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25-37: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율법 교사는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25절)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율법 교사는 계명을 말씀드렸다. 주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신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37절)이 그의 이웃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4절)이라고 한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는 필요한 치료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치료제이다. 어떤 말씀은 상처를 싸매고, 어떤 말씀은 기름을 바르고 어떤 말씀은 포도주를 붓는다. 그분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노새에 태우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말씀하신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5절) 이튿날은 바로 강도를 맞은 사람이 구원받은 날로 부활의 날이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하느님의 두 계약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상처 입은 값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 고귀한 피가 우리를 구원하여 죽음의 아픔을 면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매 맞고 반죽음 상태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준 이가 당신이심을 알려주셨다. 우리의 상처를 보살펴 주는 이보다 더 가까운 이는 없다. 그분을 우리 주님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으로 사랑하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 된 몸 안에서 다른 어려운 지체들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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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을 가만히 보면, 율법 교사가 질문하지만 사실 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다른 곳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예수님이 아니라 율법 교사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신명기에 있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에 있으니 율법 학자가 이 계명들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예수님께서 그 계명들을 지키게 하신다고 하여서 그에게 새로운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다시 묻는 것은 그가 어제 우리가 묵상한 것처럼 규정이 없어도, 규정보다 더 나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웃의 범위를 한정하려 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범위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만 계명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법을 최대한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2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이웃을 한정하려 할 때, 그는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는 계명을 실천하여 생명을 얻었을까요?
마지막에 그는 강도에게 이웃이 되어 준 이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10,37)이라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계명들을 진심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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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0ㄴ-35)
1)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라는 계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한 일입니다.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해 준 것입니다. <“사랑이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고 실천하기”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산상설교에 있는 ‘황금률’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곧 ‘황금률 실천’입니다.>
2) 이 비유를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ㄷ)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은, 느닷없이 ‘가장 작은 이’의 위치로 떨어진 사람이고, 그 사람을 도와준 일은 곧 주님을 도와드린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면, 심하게 다쳐서 죽어가는 그 사람이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을 믿고, 섬기고, 사랑하는 신앙인이, 자기가 사랑하는 주님을 도와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 옛날의 성서학자들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나’로, 나를 도와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예수님’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살리시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내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누군가가 와서 나를 도와준다면, 나를 도와주는 그 사람은 나의 수호천사이기도 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요한 1서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사랑받고 있음을 믿는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는 법입니다. 반대로, “나는 사랑받은 적 없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 실천을 할 줄 모르는 차가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벤허’ 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노예 신세가 되어 끌려가다가 사막에서 갈증으로 고통을 겪을 때, 군인들의 위협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한 바가지의 물을 건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공 벤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관객들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향해서 가실 때, 벤허는 그 죄수가 바로 자기에게 물을 주었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물 한 바가지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벤허를 노예 신세에서 구출해 준 것도 아니고, 벤허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서 구해 드린 것도 아닌데, 예수님과 벤허가 서로 주고받은 한 바가지의 물은 많은 것을 나타내는 ‘심오한 상징’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로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 주님께서 말없이 건네주시는 물 한 바가지인지도 모릅니다.>
4)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실화가 아니라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사랑 실천을 하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적대 관계였고, 서로 상대방을 원수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기 위해서, 그냥 지나가 버린 사람들을 사제와 레위인으로 설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으로도 생각해야 합니다. “네가 지금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하겠느냐? 그냥 지나가겠느냐?” <입장을 바꿔서, 내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해서 큰 고통을(죽을 위험을) 겪고 있을 때, 누구든지 아무나 나를 좀 도와주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때, 하필이면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또는 평소에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다가와서 기꺼이 도와준다면? 그러면 한순간에 ‘원수’가 ‘생명의 은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랑은, 그래서 위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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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의 핵심 단어는 ‘이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계명이 바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루카 저자는 다른 공관 복음 저자들과(마르 12,28-34; 마태 22,34-40 참조) 달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으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계명으로 함께 제시하면서 이웃 사랑이 결코 하느님 사랑과 떨어질 수 없는, 같은 효력을 발휘하는 계명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던 율법 교사는 이웃 사랑의 주제를 이어 나가며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도와야 할 이웃입니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 노새, 여비 등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탁월한 본보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율법 교사의 질문이었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질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이는 이웃에 대한 율법 교사의 생각을 바꾸게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고르고 선별하는 것에 더 마음을 쓰는 ‘나’ 중심의 사고에서, 내가 직접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겠다는 ‘상대방’ 중심의 사고로 전환한 것입니다.
곧 내가 정해 놓은 ‘이웃’의 범주에 누군가 자격이 되어 들어오면 그제야 사랑을 베풀겠다는 소극적 태도에서, 나 자신이 먼저 발 벗고 나서서 누구든 그의 이웃이 되어 주겠다는 적극적 태도로 변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내 이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인색한 사랑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랑,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이며 당신께서 몸소 십자가 죽음으로써 보여 주신 진정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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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 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사베리오 신부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10,37)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한다. 도심 한가운데 살다가 도심에서 이십여 킬로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50여 가구 남짓한 똑 같은 모양을 한 새로 지어진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었다. 주변에는 맑은 개울도 흐르고 과수원과 논과 밭도 쉽게 보이는 곳이었다.
그 동네에는 작고 예쁜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 천주교 신자는 우리 집안뿐이었고, 거의 모든 동네 친구들은 예배당에 다니고 있었다. 주일이면 가족들과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성당이나 수도원 미사를 참례했지만, 평일에는 친구들과 함께 예배당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목사님께서는 좋은 아저씨 같은 느낌의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아이들이 모이면 늘 먹을 것을 한 광주리에 담아서 내놓고는 하셨다. 여름방학이 되고 아이들과 예배당에 모이는 시간이 늘어났다. 목사님께서 제안을 하신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연극을 한 번 해보자고 말이다. 우리는 모두가 ‘좋아라’ 하며 박수를 쳐댄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내놓으신 대본이 바로 오늘 복음으로 읽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였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나를 가리키시며, “착한 사마리아인을 대열이가 해주었으면 좋겠구나.”라는 제안을 하신다. 모두들 열심히 해서 멋진 연극을 만들어보자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얼떨결에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말았다. 주인공이 된 것이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각자의 역할에 맞는 대본을 열심히 외워나가며 매일 적당한 자리를 찾아가며 연습을 했다. 발표 날짜가 다가오자 소품을 구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당시야 변변한 소품을 구할 수 있는 상항이 아니었으니, 각자 집에서 포대기나 수건 같은 것을 가져와, 둘둘 감거나 뒤집어쓰면서 나름대로 그럴 듯 한 분장을 만들어 나아갔다. 드디어 발표 날이 되었고, 예배당으로 온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공연을 하였고, 동네 어른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이렇게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이야기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성서에 나오는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은 원래 이스라엘 사람과 같은 민족들이었다. 하지만 빈번한 외세의 침략으로 이방인의 피가 섞이게 되었고, 선민의식을 중요시하던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결한 족속들로 몰아세웠다. 사람들로서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 취급을 하는 분위기였고 상황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사마리아인을 드셨다는 것은 그냥 착한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특히 정통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산다고 자처했던 율법학자에게는 상당한 반발을 살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아직도 어린 시절의 목사님의 인자하셨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 이렇게 가톨릭의 사제로서, 당시 목사님보다도 나이가 많은 삶을 살고 있지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대할 때마다 그 목사님이 떠오른다.
모두가 개신교인 아이들 속에서 천주교 신자인 나를 선택하신 그분의 마음, 그리고 아이들에게 미래를 살아감에 있어 절대로 경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려 ‘착한 사마리안의 비유’를 선택하셨던 그분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으로 그어놓은 선들, 그 선들 안에서 서로를 적대하며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 이익을 위해서라면 도리도 논리도 없어지고, 언제든지 동료와 적을 바꿀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선(善)과 옳음(正) 그리고 사랑(愛)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복음적 아름다움과 행복을 만들어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거라.”는 말씀에, 옳기 때문에 “예” 하고 따를 수 있는 삶이 행복한 삶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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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명기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한 율법교사의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참된 이웃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한 일간신문에서 읽었던 기사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간선도로변의 상점에 2인조 괴한이 침입, 주인 부부를 15분간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으나 이 일대를 지나던 30여명의 시민들이 이를 구경하는 바람에 범인들이 그대로 달아나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주인은 범인중 한 명의 바지자락을 붙잡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와달라'며 통사정했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뒤늦게 출동한 경찰이 목격자 진술을 받기 위해 시민들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집에 가야 한다',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떠 경찰은 목격자 진술마저 받지 못했다"
극단적 이기주의와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란 중병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람이 한 사람만 있었다면 적어도 그 주인 부부는 그렇게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 뿐더러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더 큰 상처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주위 사람들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야 하며 그것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길은 고도 차가 1천미터나 되는 경사진 길이고 계곡과 절벽이 많은 광야를 통과해야 했기에 도둑이나 강도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인물들의 묘사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사람은 예루살렘에서 거행되는 의식에의 종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의식을 마치고 사제들의 도시인 예리고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이웃사랑에 대해 가르침을 잘 받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를 보고는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외국인이며 이교도, 즉 유다인들의 괄시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모호한 강도사건에 전혀 말려들 생각이 없었을 것이고 잘못하면 의심을 받고 죄를 뒤집어 쓸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그 사람의 상처를 보고 응급치료를 해 주며 또한 온통 자신의 일처럼 처리합니다. 그의 시간과 가진 돈은 이제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앞으로 필요한 그 모든 것에 대해서까지도 책임을 지겠다고 합니다. "저 사람을 잘 돌보아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예수께서 이러한 인물들의 대립적인 태도를 부여하심으로써 오늘 복음이 의도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즉, 형제들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보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형식주의적 전례, 결실이 없는 예배행위를 반대하고 계십니다.
즉,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오직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을 돌보지 않는 잘못된 신앙을 반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웃을 존중하며 이웃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삶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라 불리었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저는 처음에 사람들을 회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고 사랑이 부족한 우리의 차가운 가슴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고백소 안에서 고백하는 죄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주일미사 빠진 것과 교회법적 규정을 따르지 않은 것이 혹시 전부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의 고백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려고 애썼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성찰하고 고백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범위를 한정시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이웃이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인 동족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다가 좀 더 축소되어 자기 그룹이나 종교적, 정치적 집단만을 일컫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혹시 이것은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아는 사람, 나하고 친한 사람, 내 그룹,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내 이웃이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내가 모르는 사람, 내 그룹이 아닌 사람에겐 무관심하거나 냉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협소하고도 이기적인 테두리를 부수어 버리시며 사랑의 개념을 확대시키십니다. 친구이든 적이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과 정의는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매일 체험하는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함을 기억합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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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
어렸을 때,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 는 말을 듣고 자랐기에 먹기 싫어도 먹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먹기 싫은 것은 안 먹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라, 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려고 했지만, 지금은 마음 가는 대로 싫으면 싫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이런 저에게 예수님의 오늘 복음,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라고 하신 말씀은 참으로 저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불편하게 합니다. 솔직히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 우익단체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몇몇 친일 추종파들, 특히 주ㅇㅇ과 같은 사람은 정말이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욕설과 함께 분노가 솟구칩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고 말씀하시지만 그렇지 못한 저를 향해 예수님은 “모르면 책임이 없지만,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은 사람은 매를 더 많이 맞을 것이다.”(루12,48) 하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10,25) 하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직접 대답을 주시지 않고, 그 교사에게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자신이 배운 바를 바탕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0, 27)라고 응답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한 해답으로 제시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의 대답을 옳은 답으로 인정하시고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 28) 하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엔 루카의 명확한 편집 의도가 드러납니다. 루카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사랑의 실천’, 즉 앎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더욱 루카 복음사가는 율법 교사의 입으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10,29)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함으로써 그 구체적인 참된 사랑의 실천 방법을 예수님께서 가르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시고, 이를 통해서 성경의 가장 의미롭고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율법 교사가 제기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이웃이란 통상적인 개념, 곧 서로 가까이 인접하여 사는 집, 이웃에 사는 사람이라는 관점을 뛰어넘은 새로운 관점에서 이웃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즉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서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로 발상을 전환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결국 이웃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기준으로나, 타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도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가까운 곳에서 나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장소적 즉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웃이지만 이를 넘어서서 지금 여기서라는 구체적으로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이웃이며, 그에 대한 나의 응답이 참된 사랑의 실천이라고 제시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이웃사랑이란, 지금 이곳(=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서 죽게 된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은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셋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와 레위는 그 사람을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10,31.32)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라는 표현이 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단지 사제와 레위 두 사람의 방향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내면의 상태와 행동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어떤 연유에서 그 사제는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 사제의 평소 의식과 행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제는 위급한 사람이 보이기보다는 “누구의 주검이든 그것에 몸이 닿는 이는 이레 동안 부정하다.”(민19,11)라는 율법 규정이 먼저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저처럼 가장 사제 직분에 충실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참으로 자비하시고 사랑스러운 하느님을 믿고 사는, 하느님의 대리자로서는 적합한 사람은 아닌 듯싶습니다. 레위인은 본디 성전에서 종사하는 사람이며,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고도 십일조를 받아 걱정 없이 살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괜스레 복잡한 일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 또한 가엾은 마음이야 있었겠지만, 마음보다는 머리가 우선하고 몸이 따르지 않았기에 못 본 척, 길 반대쪽으로 결국 오던 길로 지나가 버림으로써 스스로 초주검을 당한 사람의 이웃 됨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필요를 외면함으로써 이웃사랑의 실천하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곧 사랑을 완성할 기회를 박차버린 것입니다. 이 비유의 반전은 바로 사제와 레위인과 달리 유대인과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인이 바로 초주검을 당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고, 실제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종교, 인종, 이념, 신분, 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바로 사마리아인처럼 지금 여기서 자신을 필요한 사람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주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베푼 것을 되받으려 하지 않았으며, 단 한 번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머물며 쉴 곳을 마련하는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초주검을 당한 사람이 온전히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돌봄으로 그의 진실한 마음과 행동의 순수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마리아인과 초주검을 당한 사람의 관계는 바로 예수와 상처받은 모든 인류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흔히 소극적 구원과 적극적 구원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소극적 구원이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물에서 살려 내줌이라면, 적극적 구원이란 물에서 살려낸 그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그에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마리아인의 사랑에는 이런 복합적인 사랑을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역시 그 길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을 당한 사람일 수 있고 또 강도를 만나 초주검을 당한 사람을 만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서건 우리 모두 아는 만큼 실천해야 하고, 실천하는 만큼 아름다운 세상, 사람다운 냄새가 풍기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리라 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지금 여기서 나의 이웃은 누구이며, 그 사람을 어떻게 배려하고 동반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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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제나 남의 떡이 더 커 보입니다. 이런 현상이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저의 경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겼던 것 같습니다. 옆집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 제 장난감보다 더 좋아 보였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의 가방, 옷차림 등에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지고 싶은 것을 사주지 않는 부모님께 대한 원망도 가졌습니다.
시기심은 평등의 원칙이 깨졌다고 생각될 때 나옵니다. 그토록 갈망했지만,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 삶을 누군가가 살고 있을 때 불평등하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불평등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삶을 보고 자기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져도 순간의 만족일 뿐 영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모든 감정을 통해, 불공평의 결과는 나의 욕심일 뿐 불공평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욕심 가득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삶이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상태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고, 또한 다른 이들을 향해 축하의 마음을 전달하는 여유도 갖게 됩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자기 안에서 치워나갈수록,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자리하시게 됩니다. 여유와 편안함을 갖게 되고,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필요한 사랑의 마음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율법에 나오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이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즉,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인 사랑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통해 하십니다.
자기는 옳고 따라서 자기는 당연히 최고의 것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말로써 정의를 잘한다 해도, 이웃으로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즉, 율법의 세부 조항을 열심히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욕심, 시기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갇혀 사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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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웃이 되어 준 사람>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사촌만도 못하다(잠언 27,10)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되어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에는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 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 27,10).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가 이웃입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 불타오르길 희망합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었는데 마침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지나가 버렸고 또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그도 역시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율법 교사가 자신 있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 하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누가 이웃이며, 이웃이 아닌지에 대해서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남으로 보았고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우리가 병들고 궁핍한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곧 고통을 받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입니다.”(성 마더 데레사)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마음을 먹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이길 바랍니다. 그저 '어떤 사실을 보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 납니다.”“친구란 언제나 사랑해 주는 사람이고, 형제란 어려울 때 도우려고 태어난 사람이다.”(잠언17,17)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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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
루카 10,25-37 (가장 큰 계명, 착한 사마리아의 비유)
그때에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저기
사람이 있어
애틋이
눈길
건네고
거기
사람이 있어
바지런히
발길
내딛으며
여기
사람이 있어
따뜻이
손길
내밀어
사람에게
사람이
기꺼이
이웃이
되어주니
참으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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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사랑의 여정, 섬김의 여정>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은 묵주기도 성월 10월에 맞이하는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오늘 기념일에 대한 유래를 나눕니다. 묵주기도의 기원은 1208년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 근처 프루이유에 있는 수도원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가 성 도미니코에게 나타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묵주기도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날은 바로 1571년 10월 7일, 바로 오늘 그리스 앞바다 레판토에서 유럽의 명운이 걸린 이슬람 제국과의 해전이 벌어졌던 날입니다.
이날 오전부터 오후 늦게까지 신성동맹의 유럽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치열한 격전을 벌렸고 마침내 유럽 기독교 국가 동맹의 승리로 끝납니다.
이날은 10월의 첫 번째 주일이었고,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는 비오 5세의 독려하에 하루 종일 모든 신자들이 묵주기도를 바쳤으며 결국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승리했다 하여 시작된 오늘 승리의 성모 축일입니다.
이후 교황 비오 10세는 10월 첫째 주일이었던 축일을 10월7일로 확정시켰고, 1969년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승리의 성모 축일” 명칭에서 지금의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기념일로 바꿉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10월 묵주기도 성월, 묵주기도의 은총이 우리 ‘사랑의 여정’, ‘배움의 여정’, ‘섬김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계시의 복음을 갈라인들 교회에 선포합니다. 바로 구원은 능동적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인간에게 가능하다는 복음이요, 오늘 복음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그대로 입증됩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의 불순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만 그의 질문은 옳았습니다. 예나 이제나 모든 구도자들의 궁극적 질문입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역으로 율법학자의 생각을 묻자 그는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옳게 대답합니다. 그러고 보니 율법학자는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알면서,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물은 것이요 이를 간파하신 예수님의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하였습니다.”
모든 율법과 복음의 요약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정답을 지체없이 인정하시고 흔쾌히 답하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이대로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면 영원한 생명을 살 것이란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는 이에 승복하지 않고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유명한 예화가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 복음은 35년전 제 사제서품후 1989년 7월16일 신림동 천주교회에서 첫미사 때 복음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때 “사람이 되는 길”로 강론을 했고,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자를 외면하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린 종교인인 어떤 사제도, 어떤 레위인도 사람됨의 시험에 불합격했고 이 죽어가는 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살린 사마이아인만이 사람됨의 시험에 합격했다 강조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 모두의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종교인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참으로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부끄럽게 하는 놀라운 충격적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초주검이 된 자에 대한 세 사람의 경우의 예화를 든 후 율법학자와 주고 받은 대화가 오늘 복음 이해의 열쇠가 됩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의 동사입니다. 뜬구름 잡는 추상적 질문은 이제 그만하고 네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를 사랑의 실천으로 도우며 영원한 생명을 살라는 것입니다. 저 멀리 밖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곤경중에 있는 이웃을 도울 때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내 중심의 “누가 내 이웃이냐?” 물을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 곤경중에 있는 불우한 이웃을 중심에 두라는 것입니다.
참 놀랍게도 곤경중에 있던 자를 살린 자는 거룩한 종교인인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이교인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이런 사마리아 사람처럼 곤경중에 있는 이웃이 되어 이웃 사랑의 진수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검증되는 법입니다. 충격적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 독자들은 배우라는 것입니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들의 두 필수적 자질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요 ‘배움에 대한 사랑’이요, 이를 위한 겸손과 근면입니다.
배움에 대한 사랑의 달인(達人)은 호학(好學)의 공자이고 호학은 논어와 공자를 관통하는 주제어입니다. 무엇보다 배움의 여정중 사랑을 끊임없이 배우고 실천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내 중심의 이기적 물음에서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 이웃 중심에서 물어야 할 것이며, 이웃 중심의 섬김의 여정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섬김의 사랑의 절정의 모범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길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웃 중심의 섬김의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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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다른 복음은 없다!>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다른 복음 곧 자기가 전해준 복음과 다른 복음을 믿는 것에 대해 나무랍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당시 갈라티아 신자들 뿐 아니라 오늘 이곳의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른 복음을 따라 살고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오로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복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이고, 이웃사랑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모든 일정을 끝내고 돌아온 그제 얘기입니다. 비행기를 탔더니 제 좌석은 가운데 좌석이었습니다. 열세 시간 삼십 분을 가야 하는데 가운데 좌석이라니!
게다가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서양인으로 몸무게가 200kg이 넘는 거구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로 치면 1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저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데 이런 사람이 제 이웃이라니 그야말로 악몽이었습니다.
옛날 초등학교 때 책상을 같이 쓰는 옆 친구와 가운데 금을 긋고는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넘어오면 싸우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제 자리를 넘어오고 침범하는 그런 이웃인 셈입니다.
실제로 저는 양쪽 남자들 가운데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였는데 특히 그 거구의 넘치는 엉덩이 살과 허릿살이 제 좌석까지 쳐들어와 저의 살과 맞닿았고 그래서 저는 오는 내내 그의 열기로 인해 무척 더웠습니다.
그래서 이 이웃과 만난 나의 오늘은 불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30년 전 미국에 살 때 같이 살던 형제가 생각났습니다. 그 형제도 200kg이 넘었던 형제이고 그래서 살을 빼기 위해 고생하던 형제였지요.
그 형제를 생각하며 제 옆의 친구를 생각하니 그가 가엾기 시작했습니다. 그 거구가 비즈니스석에 타지 못하고 제가 타는 좌석에서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저의 불운보다 그의 고통이 보이고 가엾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웃은 대체로 이런 사람입니다. 가까이 있기에 찌르고 상처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아무리 찌르려고 해도 멀기에 찌르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상처를 주려고 해도 주지 않고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의 기준은 거리의 가깝고 멀고가 아니고, 나와 같은 동네 사람이거나 같은 족속이거나 그런 것도 아닙니다.
거리나 관계 면에서 가깝든 멀든 내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고, 그래서 나를 괴롭게도 하지만 그도 괴로움 중에 있는 사람이 우리가 흔히 사랑해야 할 이웃입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 주며 되돌려 받을 것을 알고 꾸어주는 것은, 세리들도 죄인들도 잘하는 사랑이라고, 그러므로 죄인에게나 의인에게 똑같이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야 당신이 가르치신 사랑이라고 주님 말씀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 곧 사람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율법의 가르침이 복음이라며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무리가 갈라티아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도 이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다른 복음은 없고, 오늘 주님 말씀하신 ‘사랑 복음’밖에 없음을 확고히 믿고 살아가는 우리가 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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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또 하나의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0,25-37)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말씀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합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10,35) 그러자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10,26) 하고 묻자, 그가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28)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10,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사제와 레위인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지극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10,36)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묵주 기도의 성모님을 기억하는 날에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하고, 성찰하게 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또 하나의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묵주기도'는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성모님의 손을 잡고 예수님의 삶 전체를 깊이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있는 기도', '우리를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이끄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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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37)
사랑의 실체가
간절한
기도라는 것을
묵주 기도를
드리면서
절실히
깨닫습니다.
마르지 않는
기도의
마음을
끊임없이
흐르게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 손에는
한결같은
묵주가
들려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묵주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이웃의
모습 또한
묵주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도가
바로
묵주 기도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기도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묵주 기도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하며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줍니다.
한없이
기도하시는
성모님을
부르며
오롯이
우리의 삶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묵주 기도로
우리의 생활이
바로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신비로운
기도가
묵주기도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로
진심으로
기도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환희, 고통
영광, 빛의 길을
성모님과 함께
걸어갑니다.
묵주 기도에
동참하는
은총 가득한
묵주 기도
성월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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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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