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해 흥미가 없는 수준을 넘어서 그 "혹세무민성"에 대해 일종의 적대감마저 가지고 있는 내가 어떤 드라마를 볼 때는 이유가 별로 없다. 첫째는 나의 주제일 경우일 것이다. 아마 주제가 뚜렷한 대하역사 드라마이거나 다큐멘터리 성격이 강한 것들이 그런 경우이겠고, 둘째는 정말 뛰어난 "작품"일 경우이다. 하지만 드라마라고 하는 것들이 다 끝나기 전에 그것이 뛰어난 작품일 거라고 미리 알기는 참 어렵고, 드라마는 끝나고 나면 쉽게 볼 방법이 없으니 나는 그냥 드라마는 원래 안 보는 거라고 스스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한 두 편을 보고 거기에 빠져서 결국 끝까지 좋은 시청자가 되었던 드라마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기억 나는 드라마로는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가 고작이다. 나 역시 이래저래 배우자를 고르던 시절에 재미로 보았던『질투』, 최민식과 한석규가 나왔던 『서울의 달』, 손창민과 최진실이 부부로 나왔던 『장미와 콩나물』, 생각보다 재미있었던 재천이 아저씨(최불암)의 때 늦은 연애담 『그대 그리고 나』 정도가 고작이다. 거기다 그 유명하다던 특별기획들, 예를 들면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같은 드라마도 띄엄띄엄 보는 바람에 스토리가 연결이 안 되는 정도이니 나는 드라마 공화국이라는 한국에서 드라마와 담을 쌓은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던 내가 『네 멋대로 해라』라는 드라마 DVD를 빌려보는데 이르기까지, 그 여정을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가 처음 방영되던 2002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눈여겨 봐오던 양동근과 『킬러들의 수다』에서 나를 뻑 가게 만든 공효진이 출연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그게 다였고, 효진이를 동근이가 배반하고 화장품 모델에게 간다는 설정이 기분 나빠 그 드라마는 조각조각 본 것을 다 합쳐서 1시간이나 되었을까.
그러다 올 여름에 장진의 코미디 영화 『아는 여자』에서 이나영을 발견하고, 아주 놀란 것이다. 어, 저 애가 연기를 하네? 광고나 찍는 줄 알았더니? ... 나는 차근차근 이나영이 출연했던 영화를 빌려보기 시작했는데, 불행하게도 몇 편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본 영화가 좀 시덥잖은 『영어 완전정복』, 조승우가 돋보인 『후아유』였다. 이걸로 이나영을 봤다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해서, 큰 결심을 하고 『네 멋대로 해라』 DVD를 빌려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드라마 비디오나 DVD를 빌려보던 사람들을 비웃던 내가 이 대열에 쑥스럽게 동참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이나영 때문이었다. (아, 쪽팔려...)
20부의 DVD 중 12편을 보고 난 어느 날 아침, 나는 드라마 속의 복수처럼 내 맘대로 배신을 때리기로 했다. 아, 이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최고의 여배우는 서갑숙이 아니라 이나영이다. 얼굴 이쁜 것은 이유가 아니다, 연기가 이유다, 라고 사기 치듯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다만, 나는 오랜만에 배우의 연기에서 연기의 순수함을 느꼈다. 그의 외모가 이 장점을 무한대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도 애써 부인할 필요는 없으리라.
2.전개-승(承)
이나영에 흠뻑 빠져 『네 멋대로 해라』를 보는 동안 나는 굉장한 혼란에 빠졌다. 나는 내 속에서 거의 "중독"에 가까운 열망을 발견했다. 단순하게 이나영을 보고싶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좀 느낌이 다른 그게 무얼까... 다음 회를 기다리게 만드는 드라마의 술수에 말려든 걸까, 아니면 너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회사 일을 새삼 깨닫고 새로운 위안을 찾은 걸까... 알코올로 결코 달성할 수 없는 이상하고 신비스럽고 평화로운 에너지의 고양상태. 마치 오래 전, 기억도 가물가물한 열 일곱 소년 시절 경험했던 기도원의 새벽...그 느낌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버릇은 다시 도져 나는 드라마를 분해하고 해석하고 석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드라마인가? 멜로물이냐 액션이냐 따위의 구분으로는 도저히 이 드라마의 성격을 규정하기 힘들었지만 그런 구분 없이도 나는 점점 이 드라마의 미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나의 완고한 비난성 비판적 시각에 걸려들지도 않아 장르를 규정 당하기 어려운 이 드라마가 나에게 그토록 정체가 불분명했던 이유는, 이 드라마가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쉼 없이 던지는 정말로 오랜만에 만나는 일종의 "종교적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아마 "종교"라는 장르 규정에 대해서는 실 없어서 웃는 사람들이 많을 지도 모르겠다. 종교라는 장르는 신앙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크며 어떻게 흔들리고 어떻게 극복하며 어떻게 궁극을 성취해 가는지를 그리는 드라마나 영화를 가리키는 용어다. 너, 제 정신이냐? 『네 멋대로 해라』를 두고 니가 지금 종교 도라마라고 하는 거냐?
그렇다. 전개과정을 완전히 생략하고서도 나는 이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답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씬과 대사만으로도 나는 이것을 입증해드릴 수 있다. 정말이냐고? 12부에서 전경은 왜 소매치기 따위를 좋아하느냐는 한기자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마음을 봤어요, 처음부터... 성격 좋은 사람은 많이 봤지만 그게 마음은 아닌 거 같아요... 그 사람의 마음은 내 마음을 울려요, 1분 1초도 안 쉬고 내 마음을 울려요... 그 사람은 나한테만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처음 봤어요 한 기자님. 난... 최고의 사람을 만난 거예요!... 최고의 마음을. 지금, 만나고 있어요."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이런 느낌을 가진다는 것은, 이것은 일종의 신앙고백이다. 헛것을 본 것이건 자기 최면이건, 아니면 최소한의 진실이 담긴 것이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랑이 신앙의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이야기다. 남녀 간의 애정, 그 사랑이 갈 수 있는 가장 신성한 형태, 그것은 세속의 신앙이다. 이것은 억지스러운 신파나 멜로를 완전히 초월해 있는 종교적 장르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다만 그것이 속세의 것이기에 성속을 구분하는 우리가 속스러운 그것을 성스럽다 하지 못할 뿐이다.
뿐만이 아니다. 이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도대체 처음부터 쉽지가 않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회적 계급이다. 그것도 시청자가 베풀 수 있는 아량의 도를 넘어있다. 비록 고급스럽게 돈을 벌었다는 행색은 나지 않으나 분명 부잣집의 딸인데다 잘 나가지는 못했으나 대학물을 먹었고, 피아노를 배워 인디 밴드의 키보드 주자인 전경(이나영)이 한 편에 서있다. 반대편에는 어려서 아비와 어미가 찢어진 집안에서 허덕거리다 보육원에 맡겨져 소매치기가 된,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다가 겨우 맘 잡고 스턴트 맨을 하는, 반은 건달인 고복수(양동근)가 있다. 아무리 도라마라지만 이거 너무한 거 아냐?
거기다 만남의 설정은 울화가 치밀 정도로 파격적이다. 전경은 보컬이었던 친구의 수술비를 복수에게 소매치기 당하고 친구를 잃는다. 소매치기 복수가 전경의 지갑을 털면서 그들의 만남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애정의 시작치고 가당하기나 한 설정인가? 결과적으로 친구를 죽게 한 원수와 사랑에 빠지는 이 기이한 설정에 대해 보는 사람은 참을 수 없는 어색함과 불쾌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이거 뭐야! 엽기 드라마야?
이들의 주변은 또 어떤가? 하나같이 제대로 된 인간들이 드물다. 그들의 가족은 다른 드라마에서도 흔히 보는 꼬이고 꼬인 가족사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두 사람 역시 여기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롭지 못할 뿐만아니라 그 조건은 그들을 시시때때로 속박한다. 가족들 뿐만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드라마 속의 "준 가족"들 역시 이런 성격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상적인 세속인이 보기에 이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사랑이다. 그래서 한 기자는 나영의 고백을 듣고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미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이 미친 짓을 "사랑"이라고 시청자에게 윽박질러서 어쩌자는 말인가?
그러나 드라마는 윽박지르지 않는다. 안 볼테면 그만 두라는 식으로 제 갈 길을 열심히 가지도 않는다. 그들이 왜 사랑에 빠지는지 억지로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냥 멋대로 하도록 놓아둔다. 그리고 나서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슬쩍 요구한다. 두 사람의 사랑을 "허구의 극적 설정"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가능한 현실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냐...?
문제는 어느 쪽을 선택하건 그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서 드라마의 설정을 따지고 드는 나의 시도는 완벽하게 작가에게 제압당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황당한 설정은 그저 재미를 위해 갖추어진 조건들일 뿐이고, 또 이렇게 장황한 분석이 필요없는 드라마일 뿐이다. 이건 픽션이란 말이다, 픽션, 그냥 그렇게 보면 되지 뭘 말이 그렇게 많나. 아닌게 아니라 더 황당한 설정도 있는데 이 정도의 드라마를 못 참는데서야 드라마 볼 자격이 있겠는가.
반대로, 참으로 진지하게, 숙명여대 앞에서 풀빵을 팔던 아저씨와 눈이 맞아 학업 중에 결혼한 어느 젊고 예뻤던 여자의 사례를 들며 설정의 현실성을 새삼 강조해봐야 더 감동받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세상 일이란 것이 때로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이쪽 저쪽을 다 인정한다고 해도, 나같은 세속인이 판정하기에, 이것은 한 때의 치기나 열정이 불러온 잘못된 만남일 수는 있어도 "숭고한 사랑"은 아니어야 한다. 픽션이라도 그렇고 넌픽션이라도 그렇다. 소매치기를 올바른 길로 계도한 성소녀의 이야기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장르의 명칭을 종교라고 부른 나의 분석은 완전한 오독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보라... 작가는 의도적으로 어렵고 복잡한 장애물을 두 사람 사이에 굳건하게 세워놓고 시작한다. 그것은 서로 쳐다만 볼 수 있을 뿐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대한 강의 양 둑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친구의 원수, 전직 소매치기,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건달, 이미 그를 가족(남편)처럼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남자, 시한부 인생... 복수의 인물설정을 냉정하게 현실의 인물상으로 그려놓고 내가 과연 이런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라, 고민이 필요없다, 한 마디로 "미쳤냐?"
그런데, 모든 신앙은 미친 짓이다. 당신은 정말로 하느님의 외아들이 그 자리를 버리고 인간의 몸으로 내려와 내 죄를 사하려고 자진해서 죽었다고 믿는가? 아니면 당신은 수 천, 수 만 번의 삶을 거듭하다 이 생에서 인연을 끊고 번뇌를 태우고 매트릭스를 벗어나 궁극적인 우주에너지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가? 내가 보기에, 어느 걸 믿건 당신은 미친 사람이다. 미치지 않고, 어떻게 그런 말도 되지 않는 말들을 믿을 수가 있는가?
미친 짓이 틀림없다는 심증은 가지만 당신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마 방법이 없을 것이다. 믿는 사람에게 보여 달라고, 증거해보라고 투정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만약 당신이 "그런 것은 결코 없다"라고 믿는다면 당신 역시 미친 것이 틀림없다. 세상에는 확실한 것이 없으니까. 하여 문제는 믿음이다.
"너같은 년들은 잡 생각이 많아서 믿음이란걸 모르지? 믿는다는게 뭔 줄 아냐? ..... 그 사람이 날 속여두, 끝까지 속아 넘어 가면서두 그냥 믿어버리는 거..그게 믿음이다."
자신의 애인을 뺏어가는 여자에게 질러댔던 송미래의 말은 불행하게도 그 여자의 현실이 된다. 전경은 이 미친 짓을 실천한다. 전경은 그 강을 넘어간다. 마지막 설정인 죽음마저도 이들 사이의 넓디 넓고 깊고 깊은 강의 행세를 못하고 초라하게 퇴장하며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젊은 엉아들이 뻑 가서 감동 먹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비록 도라마에서이지만 그 강을 넘는 상상은 항상, 치기나 신파, 거룩함이 아니면 문학으로만 가능했을 뿐,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 신앙은 논리를 이긴다. 그러나 그것은 맹목이 아니다. 인간은 거기서 인간성의 깊이를 체험한다. 사랑이 신앙이 되면 그것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그것을 경험했고, 시절이 많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그 믿음은 변함이 없다. 물론 그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어떤 이는 평생 겪지 못하는 수도 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세상이 그의 것이다.
이 신앙의 차원을 보통사람에게 설득하기 위해서는, 좀 불편하지만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따라서 주인공들은 자신의 가족과 주변인물에 대해 헌신적인 인물로 표현된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역시 드라마라는 한계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주인공들은 꼬인 가족관계와 개인관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해야하는 일종의 사명을 가진 상태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을 통해 주변의 "세상은 변한다."...!!!...그들의 사랑은 그것을 더 빛나게 만든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빛나는" 대사를 듣고있다 보면, 현실의 언어가 가진 힘과 드라마의 스토리 탤링이 엮여 나는 작가의 힘에 눌리고 말 것 같은 압도감을 느낀다. 어떤 대사는 내 젊은 시절, 그렇게 말해보고 싶었으면서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말이었다....
고복수 ...나 찾아 왔어요?
전경 네.
고복수 왜요?
전경 ...그냥요... 그냥요... 그냥 찾아왔어요.
고복수 ..내가... 뭐 해줄까요.. 전 경씨?
전경 ........좋아해두 되나요?
3.그리하여-전(轉)
사실 이 드라마의 진정한 미덕은, 사랑이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또 무신 소리냐고? 딴 소리가 아니다. 이미 처음부터 했던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랑이란 사실 상대방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 활용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물론 서로서로 활용하는데 대한 상호간의 합의가 이 이기적인 작업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이런 작업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얻기 위해 불가피한 희생을 잠시동안 치를 수는 있다. 그러나 노래 가사에도 있듯이 영원히는 못한다. (I can't live if living is without you, 그 다음은 I can't live I can't give anymore~다.)
신앙 수준에 가까운 사랑이란 그 이기심을 극복하고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원하고 필요해서 상대를 사랑한다. 그것은 분명하다. 오죽하면 이미 애인 있는 두 사람은 그것을 확인해가며 만난다. 고복수는 그 감정을 스스로 정리할 줄도 아는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지만, 내 사랑을 위해 의리를 저버리는 이 과정에 대해 몇 년 전의 공효진 팬이었던 나는 사실상 분노를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미래야... 울지마.. 미래야...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근데... 좋아하는데... 그 사람이 너무나 심장에 깊이 박혀서... 그걸 뜯어내면... 심장마비루 내가 죽어... 살자구 하는 짓이니까... 니가 용서해. 응? ...이쁘구 날씬한 미래야.. 밥.. 잘먹구..."
비록 그 용의주도함은 형편없는 자책으로 돌아오긴 하지만 이것은 분명 이기적인 선택이고 그것은 항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사랑은 자기애다. 그 사랑이 자기애를 넘어서는 순간, 그 짧고도 빛나는 순간, 우리는 그 숭고함에 치를 떤다. 거기에는 감동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말 하려는 거야?
"복수씨. 그냥...사는 동안 살구.. 죽는 동안 죽어요.. 살 때 죽어 있지 말구.. 죽을 때 살아 있지 마요."
사람들은 사랑을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종교적 사랑은 항상 순간 순간의 존재로만 그 관계를 나타낸다. 저넘은 내 애인, 저 아줌마는 내 마누라 같은 식으로는 사랑의 진정한 본색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두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얼핏 엿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유치장에 갇힌 두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복수 쪼그려 앉아있지 말구, 다리 펴구 있어요. 그러다 쥐나요.
복수 미안합니다.. 경이씨.. 미안해요.
전경 ...(의경에게) 아저씨. 이 말 좀 전해주세요.
의경 ...
전경 오늘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지금... 옆에 있어서 너무 좋다구요.
의경 (복수에게..) 들었습니까?
복수 ...네.
존 레넌도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Love is real Real is love
Love is feeling Feeling love
Love is wanting To be loved
Love is touch Touch is love
Love is reaching Reaching love
Love is asking To be loved
Love is you You and me
Love is knowing We can be
Love is free Free is love
Love is living Living love
Love is needing To be loved
처음에는 현실 속에서 느끼고 만지고 비벼야 하지만 그것이 끝나면 우리는 존재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순간순간 존재할 뿐이다. 완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해 저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거기에 자유와 삶이 꽃 핀다. 그 경지까지 가고나면, 사실 사람의 인생은 끝난 것이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 그 "사랑", 즉 존재감이 빠진 삶은 지루한 것이다. 그 사랑, 존재감이 없다면 인생이란 불필요한 종양같은 것이 되고 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혹을 자기 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복수 경이씨... 기분 드럽게 좋아요.. 나. ....기대이상이야.
우리 경이씨.. 내 병 알면.. 울구.. 이상하게 나 보구...
아. 진짜 구질구질할 줄 알았네..
그래서 경이씨 꼴두 보기 싫을까 봐, 얼마나 겁났는데...
...이렇게 웃어주구..
너무 쬐끔 웃어서.. 좀 그렇긴 하지만...
증말 살맛 난다...난... 지금 죽어두 좋다.. 뭐.. "
전경 죽는게.. 뭐... 별건가?..
고복수 인생을 알어, 경이씬...
4. 정리-결(結)
어떤 식으로 표현하건 내가 이 드라마에 흠뻑 빠져버린 경험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름답고 빛나는 이 간접 경험을 통해, 나는 아내를 다시 본다. 천만다행이다, 나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그러나... 결론적으로 나는 이 드라마를 지지하지 않는다. 지지할 수 없다.
이 드라마도 여느 드라마와 다르지 않게 너무 쉽게 운명적 사랑에 빠지고 너무 쉽게 서로에게 헌신한다. 우리의 지난한 현실을 생각나면 질투심이 일 정도로 지나치게 많은 우연이 등장하고 지나치게 많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들을 낭비하고 지나치게 조밀한 인간관계의 그물이 쉴 새 없이 출렁거린다. 물론 그 이음새를 잡스러운 나열에 그치지 않게 만드는 작가의 노력이 가상함에도 불구하고, 이건 드라마일 뿐임을 자각시키는 억지가 그대로 노출된다.
그것 뿐인가...우리의 비루한 삶의 쓰레기들과 그 반대편의 거룩한 숭고함을 동시에 포섭해 이야기의 당위를 끌어내고 관념적인 인간의 한계와 애정의 영원성을 무기 삼아 드라마의 표피를 위장하는, 전형적인 드라마적 사기술에 지지를 표명할 수 없다. 하여 나는 고백한다, 이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며 상상 속에서도 존재하는 거라 우길 수도, 그런 것을 경험해 본 척 할 수도 없다.
"나, 이제 미래 몰라요. 내 기억은... 미래를 알지만... 내 마음은, 이제... 미래 몰라요....마음이... 모른척 하래요. 마음이 잔인해지지 않구... 어떻게... 한 사람만을 좋아합니까? 착한 마음으로는... 세상 전부를 좋아하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만 좋아하려면, 착해선 안돼요. ...잔인하게... 한 사람 좋아할래요. 나중에, 후회해두, 좋을 사람... "
작가의 고백대로라면 차라리 그냥 착한 마음이 종교 도라마에서는 맞는 것이 아닐까? 세상 전부를 좋아하는 그 마음을 보고 전경은 복수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 마음을 그대로 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드라마는 결국 이런 저런 외피를 뒤집어 쓰기는 했지만, 넘겨짚어 기만하는 연애담, 세련된 신파극은 아니었을까?
"나, 저 사람 없으면... 죽을 때까지 이렇게 담배만 펴야지. ... 죽을 때까지 아무 것두 안하구, 밥도 안먹구, 세수두 안하구, 음악두 안하구, 이렇게 담배만 펴야지... 여기 앉아서 계속 담배만 펴야지..."
...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긴 해도, 누구든 그렇게 한 번 살아보고 싶지 않을까.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합니다.
그렇게 다시..남자와 여자는..사랑을 시작합니다.
여자와 남자는 낯선 세상이 두렵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습니다.
변한 건, 여자와 남자입니다.
이제, 여자와 남자는..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는
둘 사이에 가로놓인, 죽음의 벽에 주먹질을 합니다.
그러나, 벽은.. 남자와 여자의 노력보다 강합니다.
지친 남자와 여자는
그 벽에 얼굴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고,
벽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이제.. 그 죽음의 벽마저 사랑합니다.
여자와 남자가 살고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사랑을 즐기고, 세상을 즐기고, 죽음을 즐깁니다.
여자와 남자는 사랑을 살고, 세상을 살고, 죽음을 삽니다.
여자와 남자는 지금.. 행복합니다."
그 드라마의 마음은 드라마를 보고있는 동안 1분 1초도 쉬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 드라마는 나에게만 특별한 드라마가 아니라,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드라마였죠. 우리는 최고의 드라마를 만난 거였죠, ...............지금도 만나고 있죠.
나이 생각하면 정말 쪽팔려서, 이런 글 쓰고싶지 않지만, 아직도 징징 울립니다. 하지만, 앞으로 몇 년간은 절대로 다시 보지 않을 겁니다.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직감이 들거든요...드라마 따위에 중독이나 되다니...그러나 전 그 드라마의 마음을 봤습니다. 작가도 아니고 감독도 아니고 연기자도 아니고, 드라마의 마음...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 겁니다, 그 드라마가 울린 우리의 마음을. 내 마음을... 우리 마음 속에 겨자씨만한 순수함이나마 남아있지 못했다면, 이 드라마가 우리의 마음을 울리지는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남아있는 비록 보잘 것 없으나마 아직까지 꺼지지 않은 마음을 본 겁니다.
그 마음의 이름이 순수이건, 사랑이건, 착함이건, 헌신이건...그런 건 상관없어요, 우리가 우리 마음을 보았다는 것, 그것 하나로 우리는 웃고 울고 행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렇지 않다면, 이 뻔한 드라마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요?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우리를 이렇게 울릴 수 있을까요?
제 마음을 보게 만들어준 네멋에 대한 고마움을 아직 더 말할 기회가 남아있겠지만, 이제 그 "중독증"은 접을 랍니다. 중독되면 사랑하기 힘들거든요, 제가. 그래서 전 사랑을 간직한 채 네멋을 기억할랍니다. 동근이와 나영이가, 박성수와 인정옥이 어떻게 되건, 그건 이제 네멋과 큰 관계가 없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물론 잘 되면 좋겠죠, 네멋의 추억을 아름답게 만들 우연한 편지가 될테니까요...
그러나, 더 잘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일 겁니다....어제 신경질을 부리는 저에게 마눌님이 농으로 그러더군요, "복수는 안 그러는데!" 저도 웃었지만 한 순간 "마음"이 얼어붙더군요, 참내, 드라마 배역하고 현실을 사는 사람하고 어떻게 비교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드라마에서 본 것이 내 마음이었다면, 나는 복수가 아니지만, 그들의 순수한 헌신의 조각난 가루 크기로나마 남아있을 내 마음을 보아야겠죠...
첫댓글병원 가보세요. 님의 머리 속에도 네멋종양이 자라고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리셨군요. 저도 네멋에서 받은 감동으로 삶이 좀 더 풍요러워진 사람 중 한사람입니다. 네멋을 만나 기쁘고 행복합니다. 네멋 보고 제 집사람에게 더 잘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시니 네멋을 모르는 이들에게 많이 전하세요. ^^
첫댓글 병원 가보세요. 님의 머리 속에도 네멋종양이 자라고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리셨군요. 저도 네멋에서 받은 감동으로 삶이 좀 더 풍요러워진 사람 중 한사람입니다. 네멋을 만나 기쁘고 행복합니다. 네멋 보고 제 집사람에게 더 잘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시니 네멋을 모르는 이들에게 많이 전하세요. ^^
좋은글이네요 ^^
종양 생긴지 벌써 2년 됐습니다...ㅎㅎ...첨 종양생겼을때 마음을 다시 느끼게해 주시네요..감사^^
좋은글 잘 보앗슴니다...모두들 행복하세요^^*
와..대단한 글이네요
헐....거의 30분간 넋을 놓고 읽었네요......ㅡㅡㅋ;;;;; 재미있게 잘봤습니다....근디 대충 내용은 알겠는데...너무 어려운 단어가 나와서 읽는데 애먹었네요...ㅋㅋ 암튼 잘봤어요...^^
아.. 지금에라도 읽길 잘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네멋 처음 본지 1년쯤 됐지만, 요즘 아는여자보고 다시 네멋을 하나둘씩 꺼내봅니다. 그러면서 점점 허무함과 절망감이 생기고 있었는데, 조금이나마 매울 수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