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강의 -4- :
어머나, 3월초부터 여수시 교동 선원양성소에서 강의를 할 수 있도록 이력서와 갑종 2등 기관사 면허장도 첨부하라는 낭보에 너무 반가워서 정신도 멍한 상태였다. 내가 움직여서 처음 강의할 수 있다니 그런 고마움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벅찬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봉급이 문제가 아니고 일거리로 직장생활에 첫발을 디딜 시점이라 감지덕지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첫 출근하여 소장님을 비롯한 강사진과 사무직원들과 서로 인사를 나눴으며 양성소의
배경이 어색했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르다 보면 점차적으로 적응하고 강사의 역할분담도 익숙해지지 않으랴.
그럴수록 자신을 낮추고 세상 이치도 경험하며 산전수전도 겪어본 연배들의 공손한 자세를 보면서 혹시나 설익은 행동으로 인해 실수 연발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즉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잘잘못의 판정을 알 수 있으므로 매우 신중하고 세심하면서 유연한 처세에도 십분 노력하여 좋은 반응이 얻을 수 있도록 정진할 때, 삶의 의미를 새삼 절감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곳 수강생들은 아침반 6개월 코스, 교제는 책을 만들어서 효과적인 강의에 중점을 둘 것이며 항해, 기관과 과정도 수강생의 자질을 향상시킬 교육이념에 협조해주십시오. 더불어 6개월 과정을 이수하게 되면 수료증과 함께 선원수첩도 발급받고 소양교육을 통해서 승선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고 말씀하셨다.
소장님은 인접한 여수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십시오. 더불어 유니폼까지 맞추어주셨다.
거기에다 주어진 역량만큼 최선을 잘해보라는 기관과 담당 L강사님의 선처는 효율적으로 배울 점도 많았고 배려하는 태도에 긍정적인 선입감의 표정부터 좋은 인상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을 맞이했으며 선원수첩 소지자들도 1년에 한번-씩 소양교육은 필수과정이었다. 외국으로 송출하는 사람들이나 배에 승선하다 보면 반공교육을 전제로 대남간첩에 대한 정신적 훈시와 함께 항만청에서 인준을 받은 이후에 철저한 사상을 심취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로다.
그런 연유로 유효적절하게 현장실습을 겸해서 직접 항해할 곳은 "남해대교" 첫나들이에 마음부터 도무지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때를 맞춰 봄기운의 아지랑이 노란 개나리와 진달래 가 만발하면서 물씬 풍긴 벚꽃마저 시샘하듯 정신까지 산란하다.
수강생들과 함께 실습을 다녀왔고 남해대교를 배경으로 선미에서 찍은 사진도 받았다. 비록 우리 지구의 70%를 차지하는 바다라는 울타리 속에 인적, 물적 컨테이너 선박들도 국가와 국가끼리 운송된다. 배의 구성원들은 이런 교육을 통해서 자격증을 취득하여 세계 곳곳마다 활발하게 선상생활에 적응하며 보수도 받고 구경도 하면서 그네들의 생활도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학창시절 열심히 공부하지 못했던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나간 과거를 후회한들 실속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차곡차곡 알맹이가 되기 위해 독서하는데도 독자적인 주관이 뚜렷해 지며 확고한 신념과 변화된 인간으로 발전하여 주길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ㅇㅇ만원이라는 봉급을 받았다. 그래서 부모님께 드릴 조그만 선물도 구입했다. 저녁때가 되어 가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부모님과 저녁상 앞에서 수저를 들고 어머님의 화색이 흡족해하시며 기특하다는 말밖에 더 이상 할 말이 없구나. “더욱 건강한 몸으로 남들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하늘에서 내려준 제2 인생과 너의 모든 자질도 사회에 촉진제가 되어주길 기원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생각해 보면, 한 달 동안 뜬 눈으로 3번의 뇌수술과 식물인간이 되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극진한 간병의 배려 때문에 불가능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나의 목숨을 다해서라도 기어코 생명의 끈을 끊어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억척같은 모성애가 있었기에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의 가치로 희소성의 집념이 새로운 개척정신의 의미로 솟아날 것이다. 어떻든 부모님의 심정으론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심장에다 촛불을 지펴준 뿌리를 튼튼하고 돈독하게 만들어 주셨기에 삶의 의미도 함께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개월 동안 강의하면서 가을 문턱에 이르러 해기사 자격증 시험을 한 달 정도 남겨두고 특강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병종 기관사 시험에 합격하여 자격증을 취득하면 50톤 미만의 선박들은
기관장으로 취업이 가능하므로 특강을 안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즉 수강생의 수료와 함께 선원수첩(여권)도 항만청에서 발행하는 절차도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이런 특강을 잘 활용해 주기 위해서 둔탁해진 머리에도 무척 신경이 예민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로다.
그런 덕분에 하루 7시간 강의가 쉽지 않음을 피부로 느낀 자신에게 노-란 오줌 색깔로서 확인할 수 있었다. 기관의 실린더와 피스톤의 생성과정에서 말하듯이 흡입-압축-폭발-배기의 순서가 계속 반복된다. 연료의 공급과 바다에서 펌프로 끌어올린 냉각수도 기계의 과열을 냉각시키는 과정, 엔진의 프로펠러도 rpm 회전수에 따라 그 배의 속도는 시간당 15노트, 20노트, 30노트로서 거리를 잴 수 있다.
교과서를 학문적으로 이론화시킨 학생들과 학문을 도외시했던 그들은 기계를 만지는 솜씨로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어느 누구와도 뒤지지 않은 실력의 소유자들이지만 책과의 거리감은 외나무다리를 걷는 기분이로다. 그런 연유로 특강할 계기가 마련되었고 조금씩 발전해가는 모습에서 강의할 수 있는 능률도 신체적 균형이 좋아지는 양상에서 가일층 노력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보름간의 강사료로 10만원이란 보수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항만청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하여 선원양성소의 규율이 해체된 까닭은 소양교육을 자체적으로 흡수하게 된다며 양성소의 용도가치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란다.
그것도 복이라고 몇 개월간의 강사 소임을 다했지만 졸지에 실업자가 되고 보니 다른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더 있으랴. 거기에는 조금씩 두뇌가 향상되는 마당에 정신적인 출구까지 막힌 상태로 민감했던 동작들이 둔해지며 개척해야 할 실리도 캄캄한 검은 구름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