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스스로를 “늘 정상 언저리에만 머무는 가수”라고 소개한다. 무슨 말인가 곰곰이 되돌아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16년 동안 히트곡도 제법 많았지만 최상급 수식어를 가져본 적은 없는 가수, 첫 번째 히트곡 ‘멀어져간 사람아’는 원조 꽃미남 김원준에게 묻혔고 최근의 히트곡 ‘해바라기’는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와 맞붙어 1위를 놓쳤다.
박상민은 늘 그랬다. 아무래 잘해야 No.2가 끝이었다. 하지만 2등이 꼭 불운한 건 아니다. 동시대를 주름잡던 동료들이 대부분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지만 그는 끈질기게 버텼으니 말이다. 소위 ‘가늘고 길게’ 살아온 것도 아니고 제법 스포트라이트도 받았다. 정상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비슷한 자리에 있던 남자. ‘ 무릎팍 도사’에서 추성훈이 애창곡이라며 불렀던 노래도 바로 그의 히트곡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박상민이 제법 오래가는 비결은 과연 뭘까.
#1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주량 제로 마당발 가수의 유쾌함
새 앨범 발매를 앞두고 박상민을 만나봤다. 그는 TV에서 보던 차림 그대로, 그야말로 딱 ‘박상민스러운’모습으로 나타났다. 새까만 비니와 그것보다 더 까만 선글라스, 그리고 짙은 수염까지 기른 얼굴로 “이번에도 그럭저럭 5등은 할 것 같다”며 허허 웃는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꾸준하다는 것은 1등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특히 대중의 취향 변화가 심한 가요계는 더욱 그렇다. 박상민은 스스로 이 바닥에서 장수하는 이유가 초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한 번도 벗지 않은 선글라스 같은 이미지를 얘기하는 건 아니다.
“제 초심이라는 게 뭐 거창한 건 아니고, 딱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일부러라도 겸손하자’는거예요. 가수든 연기자든 유명해지면 아무래도 어깨에 힘 들어가고 목 뻣뻣해지는 게 사람 심리잖아요. 사람들이 칭찬해 주면 마치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혼자 붕 뜨는거죠. 그러다가 한 번에 고꾸라지는 동료나 후배들을 많이 봤어요. 예전부터 나는 절대 저러지 말자, 늘 고개 숙이고 살자, 그러면서 16년을 보냈죠. 가수가 뭐 대단한 특권층인가요. 누가 알아보면 고마워하면서 친절하게 대하려 애쓰고, 그렇게 수더분한 맛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싫증을 안 내나봐요.”
실제로도 그는 겸손하고 붙임성이 좋아서 주위에 늘 사람으로 넘친다. 한번만 만나면 넙죽 넙죽 형님, 아우 하면서 십년지기처럼 대하는데다 작은 인간관계라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후배들 잘 챙기고 여기저기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가수협회 부회장’같은 감투도 여러개 쓰고 있다. 게다가 누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주말마다 지방의 작은 공연장까지 찾아가 노래를 부르고,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축가를 부탁하는 일반인들의 청까지 들어주는 편이다.
기자가 농담 삼아 “내 결혼식에도 축가를 불러주겠냐”고 물었더니 “이미 얼굴 한번 봤으니까 우리는 개인적인 부탁을 할 수 있는 사이”라며 넉살을 부린다. 남자들은 인간관계의 윤활유가 보통 술이다. 왠지 그도 말술일 것 같은 이미지다. 하지만 박상민은 주량이 ‘제로’다. 거의 한 잔도 입에 대지 못한다. 그래도 술자리 분위기를 확 띄우는 재주는 남다르다. 전국 공연장이며 각종 행사장을 돌며 쌓은 진행 경험에 입심 좋고 사람 좋아하는 성격이 더해져서 사람들과 노는 자리에서는 그야말로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따로 없단다. 가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보여주는 입담이나 코믹한 재치는 실제로 봐도 그대로다.
선글라스를 쓴 가수 박상민도, 맨얼굴의 남자 박상민도 닮은 구석이 많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소위 여기저기 ‘나대기’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것은 유명세를 치르는 사람이 혼자 있을때 흔히 느끼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방법중 하나였다. “가수가 노래할 때는 앞에 꼭 관객이 있잖아요. 눈앞에서 사람들이 내게 호응하는건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정말 특별한 감동이에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거랑 좀 다른 느낌이죠. 그런데 문제는 무대에서 내려왔을때에요. 상대적으로 외로움을 많이 느껴요. 마치 풍선 하나에 매달려 하늘 높이 떠가는 기분이랄까요.
높은 곳에 있지만 왠지 불안한, 이 풍선만 터지면 끝없이 추락할 것 같은 초조함이죠. 그런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친구나 지인들과의 관계가 참 중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주위 사람들한테 그렇게 대하는건지도 모르겠어요.” 대학로 연극 무대 출신들은 끈끈한 정으로 유명하고 개그맨과 아나운서는 아직도 엄격한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선후배간의 돈독한 관계가 남아 있다. 하지만 가수들은 그냥 자기 노래만 딱 부르고 서로 간섭 안하는 성향이 강하단다. 그나마 예전에는 오며가며 소식도 묻고 서로 챙겨주는 분위기였지만 요즘은 그 렇지 않다. 동지 의식 강하고 몰려다니기 좋아하는 성격의 박상민에게는 좀 서운한 일, 그래서 자기 주위 동료들끼리라도 잘 뭉쳐 다니려고 애쓴단다.
동료 가수 윤종신의 결혼식 축가를 위해 지방 공연 리허설을 취소했고 절친한 배우 정준호의 간곡한 공연 부탁에, 미리 잡아 둔 행사 취소하느라 계약금 돌려주고 위약금 물어주고 다음 행사때 출연료의 절반만 받겠다고 약속한 뒤에 친구에게 달려갔다.
#2 나보다 가족을 더 살뜰히 챙기는 효자 막내아들의 눈물
사실 그와 만나는 날짜는 몇 번이나 미뤄져 하마터면 원고 마감 일정에 맞추지 못할 뻔했다. 최근 부친이 암 진단을 받아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은 지난 2007년 위암 조기 진단을 받았지만 수술 후 완치돼 한숨을 돌렸는데, 최근 또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 그나마 완치율이 높은 암이어서 희망을 갖고 치료 중이지만 박상민의 마음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가수로서의 끼와 재능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귀염둥이 막내아들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버지 별명이 ‘풍류 박’이었어요. 저 어릴때, 그러니까 벌써 40년 전인데 없는 살림에 방마다 전축 시스템 갖춰놓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던 분이었죠. 천장에 구멍 뚫어서 스피커까지 달아놓으셨으니까 요즘 말로하면 대단한 홈 AV 시스템이죠. 채소 장사하면서 4남매 빠듯하게 키우셨는데 음악 듣는데 투자를 많이 하셨나 봐요. 아마 그 덕분에 제가 이렇게 됐겠죠(웃음).
또 저를 유난히 예뻐하셨거든요.” 아버지는 그에게 재능뿐 아니라 넉넉한 가슴까지 물려준 사람이다. 그의 부친은 최근까지 경기도 평택에서 농사를 지어 매년 주위사람들 40~50명에게 무료로 쌀을 나눠줬다. 이 사람 저 사람 잔뜩 나눠주고 아들들에게도 전화를 걸어‘쌀 보내주고 싶은 사람 이름하고 주소를 가르쳐 달라’며 인심을 쓴다. 잔정도 많아서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물건 한번 사면 잔돈도 잘 안 받는 분이었다. 돈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성격이 그랬다. 그의 부친은 언젠가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합석한 청년이 결혼식 주례 선생님을 구하지 못해 고민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직접 주례를 서고 박상민에게 축가까지 부르게 했다. 박상민이 10년 동안 40억 넘게 큰 기부 행렬을 계속한 것도, 일반 팬들의 축가 요청을 적당히 거절하지 못하고 주말마다 결혼식장을 순회하는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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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친은 조만간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짓는 게 꿈이었다. 박상민은 아버지를 위해 충북 영동에 땅 800평을 점찍어두고 깜짝 선물을 하려고 열심히 돈을 모으던 중이었는데 갑작스런 병마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박상민은 평소에도 가족들에게 뭔가 해주는 걸 좋아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밴드 활동하면서 돈을 벌어 형들의 대학 등록금을 내놨고 부모에게도 생활비를 보내면서 효자 노릇을 했다. 아마추어 밴드 시절에야 가족에게 경제적 으로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요즘은 마음 씀씀이에 돈벌이까지 넉넉한 가장인데 부모님 건강이 예전같지 않아 마음이 무겁단다.
#3 이름도 낯선 땅에서 이색 도전하는 재기발랄 사업가의 포부
박상민은 요즘 남다른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사업가를 꿈꾸고 있다. 그런데 아이템이 범상 치 않다. 구 소련연합 중 하나인 ‘키르키즈스탄’에서 광산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다. 금이며 각종 광물이 묻힌 광산을 현지 정부로부터 임대해 자원을 캐내고 상업화한다는 계획이다. 좀 엉뚱하고 쌩뚱맞아 보이지만 5년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했고 올해부터 광물을 캐는 작업이 첫 삽을 뜬다. 자신의 성을 따서 박스 PNP라는 회사도 설립했다. 컬투 개그맨 정찬 우와 동업하며 벌써 7~8차례 그곳을 다녀와 올해 3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다.
하지만 아직 조심스러워서 사업 계획을 여기저기 얘기하고 다니지 않는 편이다. 사실 그는 돈을 잘못 굴려본 기억이 있다. 모처럼 연락 닿은 동창이 자신의 사업에 투자하라기에 자기 돈 5억에 동료 연예인 돈 1억을 더하고 대출까지 받아 투자했다가 친구가 잠적하는 바 람에 수년째 허무하게 대출 이자만 갚아야 했다. 전 매니저에게 빌려준 돈 5000만원을 떼 인 적도 있다. 주위 사람의 말은 무턱대고 믿고 보는 성격, 계산적이지 못하고 남에게 퍼주기 좋아하는 타입이어서 어찌 보면 사업가로 서는 낙점이다.
“늘 매니저랑 함께 다니잖아요. 어지간한 일은 그 친구들이 다 대신해 주니까 저는 세상물정을 참 몰라요. 아역 배우 출신이거나 좀 많이 유명한 연예인 중에는 은행에서 돈 찾을 줄 모른다는 사람도 많잖아요. 저도 그런 식이에요. 그래서 누가 감언이설로 꼬드기면 홀딱 넘어가죠. 제대로 확인하거나 따져보지는 않고, ‘듣고 보니 괜찮은데? 그럼 나도 해보지 뭐’ 이런 성격도 한몫하죠.
그래서 이번 일은 조용히, 신중하게 혼자서 진행했어요." 사업을 준비하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도 많이 받았다. 믿을만한 사람들에게 사업 계획을 설명하고 투자자를 찾았지만 대부분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이름도 낯선 나라의 광산이라니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심없이 남을 대했던 그에게는 주위 사람들의 태도가 사뭇 섭섭했다. 게다가 이제 초기준비가 완료되고 광산 개발 라이선스 취득을 앞두고 있으니 갑자기 돈을 싸들고와 지분을 나눠갖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 서운한 감정은 더 커졌다.
‘사람 마음이 모두 나 같지는 않은가보다’싶었고, ‘사람들이란 참 간사하구나’싶은 생각도 들었다.“인간관계들이 전부 실리로 연결되어 있다는게 참 섭섭하고 마음 아프더라고요. 대가를 바라고 남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아니지만 내가 이만큼 저 사람을 대했는데 나중에 저 사람은 내게 그렇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되니까 가슴이 좀 아프더라고요.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사람의 그런 속성에 충격받을 나이는 지났지만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네요.”
#4 현명하고 똑 부러지는 여자와 결혼하고픈 마흔여섯 노총각
그래서일까. 박상민은 자신과 성격이 좀 닮았으면서도 무턱대고 다른 사람을 믿는 부분에 대해서는 옆에서 좀 제동을 걸어주고 케어해 줄 여자를 만나고 싶어한다. 현명하고 똑 부 러지는 여자야말로 대책 없이 손만 큰 그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저는 통장에 늘 돈이 없어요. 많이 벌지만 버는 만큼 그냥 다 쓰죠. 나한테 쓰든, 주위 사람한테 쓰든, 아니면 어딘가에 기부를 하든 말이에요.
사실 보통 직장인 분들보다는 벌이가 괜찮은 편이잖아요. 그러니 제가 돈 없다고 하면 다른 분들이 상대적인 박탈감에 화를 내실 수도 있지만 제 입장에서는 똑같이 빠듯한 거죠. 이런 부분을 좀 잘 체크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죠. 남이 뭐라고 말하면 앞뒤 안 재보고 무조건 믿는 성격도 좀 조절해 주고요.”
그는 올해 우리 나이로 마흔여섯이다. 혼기를 훌쩍 넘긴 제대로 된 노총각이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는 늘 그의 결혼 소식에 관심을 기울인다. 사실 올해 결혼을 약속하고 진지하게만 나는 여자가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뜻밖에 그는 손을 내저었다. “얼마 전에 한 방송에 출연했는데 작가들이 여자는 있느냐, 결혼해야 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자꾸 물어보더라고요.
이 나이에 없다고 하는 것도 좀 이상해서 그냥 있다고 말했더니 순식간에 결혼설이 퍼졌어요. 말해놓고도 좀 찝찝해서 편집해 달라고 했는데 그대로 방송에 나간 거죠. 결혼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이벤트인데 그렇게 소문이 나면 안 되잖아요. 얼마나 신중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겠어요.”
혹시 교제 중인 여자가 있는데 아직 결혼 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이냐고 물었는데 그것도 아니라며 허허 웃기만 한다. 혼기가 찰때즈음부터 집에서도 은근히 압박을 주는 눈치였지만 그것도 몇 년 지나니까 이제는 부모도 그냥 ‘때 되면 알아서 가겠지’하고 체념(?)한 눈치란다. 오지랖 넓고 주위 사람 잘 챙기는 성격 중에는 간혹 부인이나 가족등 아주 가까운 지인에게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는 반려자가 생기면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내주는 것보다 훨씬 더 잘해 줄 자신이 있단다.
“예전에 X맨 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제가 ‘소개팅 시켜주고 싶은 남자 1위’였어요. 친구들한테만 점수 얻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연애할 때는 여자친구한테도 나름 잘하거든요. 앞으로 결혼해도 그럴 거예요. 제가 집에 선글라스만 수백 개가 넘는데, 그것만 잘 이해해주는 여자라면요(웃음).
한없이 미룰수는 없으니 곧 좋은 소식이 생길 수도 있겠죠.” 마지막으로 그에게 2009년의 화두가 뭐냐고 물었다. 사업에 성공해야 한다거나 가수로서 음악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얘기를 꺼낼줄 알았다. 하지만 자기는 새해라고 굳이 별다른 화두는 없고 늘 똑같단다. 그저 지금처럼만, 주위 사람들 건강하면 그뿐이라며 소박한 꿈을 내보인다. “제가 가수 중에서 독보적인 톱스타도 아니고, 재주가 뛰어나 다른 일로 크게 성공한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 그냥 열심히 하는 그걸로 충분하죠. 재벌 자산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랑 내 주위 사람들 보살필 만큼 돈도 벌고 있으니 지금 이 정도면 딱 좋아요. 굳이 욕심 부릴 이유도 없고, 또 욕심 부린다고 더 잘될 것도 아니고요.
가족들 건강하고, 특히 아버지 병세만 호전되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음반 판매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그건 그냥 5등 안쪽에만 들면 된다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