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은 무엇인가
열린 마음의 지향이 선(禪)이다
<1>
사람마다 삶을 영위해 나가는 모습과 내용이 각각 다르다.
사람마다 각각이라는 이 다름으로 해서 인생에는 아름다움과 묘미가 가득한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마음을 열고 사는 사람도 있고, 아예 마음을 닫고 사는 사람도 있다.
지구상에 65억에 달하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의 삶의 내용이 똑같은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사람 사는 모습은 각각으로 다양하다는 뜻이다.
구지 표현을 하려고 들자면, 지구상에 현존하는 사람이 65억인데, 사람마다 삶의 내용과 방편이 각각 다르다.
사람 사는 방편이 65억 가지나 되는데 그 가운데 누구 한 사람을 모델로 선택하여 저와 같은 모습으로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각자가 생각하고 판단해서 자기 앞의 삶을 가꾸어 나가기 때문이다.
자기 앞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데에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본심(本心)이다.
본심을 잃으면, 인생을 잃어버리게 된다.
<2>
선(禪)은 본심(本心)을 밝게 가꾸는 작업이다.
나(我)의 본래 모습을 밝게 들어 내는 작업이다.
선(禪)은 때 묻지 않은 나를 때묻지 않도록 맑게 하는 작업이다.
불법(佛法)의 핵심은 반야의 지혜(통찰지)이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한 선객(禪客)들은 선(禪)을 통해서 얻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선(禪)을 통해 얻을 것이 없다면, 선객(禪客)들은 왜 선(禪)을 하는가.
선객들이 선(禪)을 하는 까닭은 "얻을 것 없는 경지를 얻는 것이 선(禪)" 이기 때문이다.
본심은 누구나 갖고 있다.
여여(如如)한 곳에서 이곳으로 올 때 이미 갖추고 온 본심이다.
여여한 곳으로부터 온 여래(如來)의 본심이기 때문에 청정무구하다.
단 한 차례 염정(炎程)에 물든 적이 없기 때문에 완전하다.
여여한 본심이요 밝은 본심인데 왜 그 본심을 구지 밝히려고 하는가.
본심을 버리고 삶을 영위해 나가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본심을 있는 그대로 쓰고 가면 그만인데, 왜 본심을 구지 밝게 하려고 하는가.
세속의 염정에 본심이 물들어 본심이 본심이 아니기 때문인가.
선(禪)은 나의 내면에, 본심을 변질시키지 않겠다는 확고부동한 결의를 각인하는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나에 대한 바른 인식과 굳은 신심(信心)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올바른 자아를 이루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 없다면, 선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올바른 자아를 형성하겠다는 자신과의 굳은 약속이 없이, 높은 산상에 아무리 오래 틀고 앉아 있어보았댔자 선이 되지 않는다.
선의 선결조건은 본심을 잃지 않겠다는 굳센 믿음이다.
겉보기에 선의 자세나 호흡의 모습, 혹은 생활선의 취지 등이 시중에 나도는 선과 유사한 듯 보이지만, 불법의 선은 여타의 명상법과는 근원적인 차이가 있다. 불법의 선은 자기의 본래면목을 잃지 않겠다는 각성이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선의 시원을 고찰해 볼 때 선의 대중화 기반을 닦은 어른은 역시 육조(六祖) 혜능(慧能:638~713)스님이라고 할 수 있다.
혜능스님은 몸의 좌선을 강조하지 않았고, 마음으로 화두 드는 것도 주창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본성을 바로 볼 것을 강조했다. 다시 말하면 견성(見性)을 강조했을 뿐이다.
<3>
조사(祖師)들은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로써 단박에 자신의 본성을 되돌아보라고 한다.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거나 부족한 것을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을 돌이켜 확인하면 그만이다. 그런 까닭에 돈(頓)이라 했다.
돈은 특수한 시간에 특수한 장소에서 특이한 사람들만이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행할 수 있는 자신의 본성의 되돌아봄이다.
그래서 열린 선이라고 한다.
본심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갖추고 있기 때문에 잠시 되돌아 보기만하면 되는 일이다.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을 맑게 닦아서 새롭게 사용할 따름이다.
그래서 열린 선은 형식과 방법에 구애받지 않는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선지식의 지도와 자신의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선지식조차도 자신이 갖춘 마음가짐 여하에 달렸다.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에게는 자연 그대로가 선지식이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선지식이지만, 마음을 닫고 사는 사람은 보살과 달마를 만나도 해도 얻을 것이 없다 하리라.
선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수행이다.
선은 다만 원칙일 뿐이요, 선을 현전화(現前化)하는 데에는 한 방법이 필요하다.
방법은 간단하다.
몸의 좌선(坐禪)과 마음의 화두(話頭) 챙김(看話)을 통합하여 본심을 굳세고 명확히 하는 일이다.
글: 김인수
http://blog.daum.net/k1231765
첫댓글 자비로우신 부처님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