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서서히 서울역을 출발하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6학년. 고등학생 1학년. 인 두 명의 동생들을 모처럼 만에
얼굴 한 번 보기 위해서였다. 안 본지 1년 반 개월이 넘어 서고 있었다.
남자 녀석들이라 금방 컷을 생각에 자신 보다 키가 클까 아직 성장기니 크고 있을 까
자신보다는 아직 작겠지 이런 저런 들뜬 생각이 들었다.
창밖으로는 화면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하얗게 덮인 세상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짧지만 엄마와의 통화를 되새기며 가는 내내 눈을 붙였다.
- 뭐라고?
“지금 내려갈려고 기차표 까지 끊고 기다리고 있어요.”
- 평소 땐 그저 이 어미 얼굴만 보고 가더니.
“오늘은 크리스마스잖아요, 엄마.”
- 도현인 좋아할 텐데, 상욱이가 걱정이다.
“그 녀석은 제가 하고자 하는 거에 항상 불만 가졌던 녀석이었잖아요. 괜찮아.”
- 그래, 올 때 조심해서 오너라. 딸, 보고 싶네.
“나도 엄마. 좀만 기다려. 빨리 내려갈게.”
뚝-.
엄마와의 통화를 끊고 빨리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아무래도 걸리는 마음의 한 구석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전처럼 엄마의 얼굴만 보고 목사님의 안부를 묻고
그렇게 조용히 갔다가 조용히 돌아올 걸 후회가 일고 있었다.
막내 도현은 내가 음악을 하는 거에 매우 즐거워했다.
피아노 반주에 노래도 따라 부르고 내가 생각나는 대로 건반을 두드리면
좋다면서 옆에 같이 앉던 도현이.
하지만 공부보다 음악에 더 심취해 있는 나를 탐탁치 않게 보던 상욱이.
“뭐?”
“음악을 할 까 해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한다. 누나, 아빠 뒤를 잇겠다면서?”
“아니, 음악을 하고 성공하면 아버지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아빤 음악을 취미로 하셨지, 누나보고 그 길로 가라고 하지 않으셨어. 알아?
아버진 누나가 아버지 뒤를 이어 실패한 사업을 다시 일으키시길 바라셨다고.”
“알아, 알아. 그냥 한번 꺼내본 소리를 가지고 그렇게 닦달하니? 사람 민망해지게.”
“누나, 똑똑히 알아둬. 아빠의 마지막 유언. 아빠의 뜻을 이어달라는 그 유언 말이야.”
한창 중학생의 사춘기 시절을 겪던 상욱은 가난한 처지에도 불만 한 번 표하지 않고
바르게 자라주었지만 아무래도 의사셨고 한 기업의 회장이셨던 아버지의 뒤를
잇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음악을 하고 싶다는 나의 장난스레 꺼내었던 말 한마디에도
발끈하곤 했다. 그런 내가 연락한번 하지도 않은 채 살다가 간만에 집에 들른 나를 보면
반가워할까. 두 동생에게 주기위해 그동안, 과외로 돈을 벌어 저축해 두었던 비상금의
일부를 빼어 산 MP3와 PMP.
노래를 즐겨 부르던 도현은 아버지가 사주셨던 마이마이를 지금껏 간직한 채
노래를 들었었고 집에서 인터넷 강의로 열심히 공부하던 상욱에게
딱 안성맞춤 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채경아!”
“아버지!”
눈앞에 나타난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해오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이쁘게 자라주었구나.”
“아버지!”
주위를 둘러보자 한 때 호화스럽게 살던 그 시절의 하얀색 주택이 보였고
넓은 마당엔 작은 연못이 있었다.
나무 기둥과 기둥사이에 매단 그네까지.
그 풍경이 내 눈에 들어오자 이건 분명 꿈이란 걸 알아챘다.
그네에 다정히 앉은 아버지와 나.
“내 뜻을 들어주어 고맙구나.”
눈가에 주름이 잡힌 채 웃으시는 아버지가 나의 손을 포개며 잡으시더니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셨고 그런 아버지의 듬직한 그 어깨에 기대었다.
“아직 정확하지 못한걸요. 크게 성공하고 싶은데.”
“이미, 이루었지 않았니. 그 정도면.”
“아버지가 제게 그러셨죠. 기억 하세요?”
기대던 머리를 어깨에서 떼어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잘 모르겠다는 표정의 아버지.
“음악이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더라. 음악이 아픔을 달래주더라.
의사보다 위대하더라. 기업가보다 너그럽더라.”
“허허허. 기억이 나는구나. 네가 딱 10살 되던 때 말해주었지, 아마?”
“몰랐어요. 의사가 되서 아픈 사람 고쳐줘야지. 아버지 뒤를 이어 사람들을 다스려야지.
그런 생각을 했었죠. 그래서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했어요.”
“채경아.”
“응?”
아버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나는 10살 때의 나의 어린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얀 바탕에 빨간 꽃들이 수놓아져 있던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양 갈래로 리본으로 묶여 있던 어린 나의 모습이었다.
“이 아빠가 좀 힘들구나.”
“아빠, 아빠, 힘들어 하지마. 아빠 옆에 엄마도 있고 나도 있고 상욱이, 도현이 까지 있잖아.
아빠는 우리들만 보면 힘이 솟는 다며. 매일매일 아빠 회사 놀러갈게.”
“채경아. 넌 뭐가 제일 되고 싶니?”
“아빠 같은 사람.”
“어떻게?”
“의사 되서 아픈 사람 고칠 거구, 회장이 되어서 큰 기업을 내가 다스릴거야.”
“우리 이쁜 채경이. 아빠가 미안해서 어떻게 하니.”
“아빠 왜 울어?”
“우는 게 아니야. 채경이 해맑게 웃는 모습 보니까 눈이 부셔서 그런 거야.”
그네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나의 머리를 여러 번 쓰다듬으며
글썽글썽 맺힌 그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채경인 암기를 잘하니까, 아빠가 하는 말 외울 수 있을 거야.”
“뭐든지!”
“세상엔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있지만, 나쁜 사람은 죄를 지어도 용서 할 줄 알아야해.
그래야 그 사람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할 수 있는 거란다.
그런데 용서하지 못하는 때가 있을 땐 말이다...”
“응, 아빠. 나 지금 외우고 있어.”
“그 사람을 좋아해. 좋아하고 좋아하다보면 하늘이 벌을 주실 거야. 비를 말이지.
너무 화가 나는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비를 뿌리신단다.
나쁜 사람을 대신 용서하시기 위해 비를 뿌리신단다.
하늘이 그동안 참아왔던 그 이쁜 마음에 감동하여 비를 뿌리신단다.”
“음... 외울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으로만 기억하거라.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돼.”
또 한번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똥말똥 쳐다보는 그 눈을 보며 싱긋 웃어 보이셨다.
“그래서 아빠는 나쁜 사람 용서했어?”
“아니.”
“그래서 나쁜 사람 좋아했어?”
“아니.”
“그럼?”
“그래서 아빠까지 같이 벌을 받는가봐.”
“아빠.”
“우리 이쁜 채경이.”
작은 체구의 나를 꼬옥 안으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얼굴이 닿은 부분이 촉촉이 젖어 왔다.
끝끝내 참아왔던 그 눈물을 흐느낌 없이 흘리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들어왔다.
“아빠...”
.
.
.
“아빠...”
“학생, 학생.”
“아빠...?...”
“다 왔어.”
눈가에 물이 젖은 채 정신을 차려 눈을 몇 번 깜빡깜빡 거리다 창문을 내다보았다.
사라들이 기차에서 내려 저만치 사라져 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남은 사람이라곤 나뿐이었다.
짐이라고 해봤자 선물 두 개가 들어있는 작은 쇼핑백을 들고
기차에서 내려 멀어져 가는 사라들의 뒤를 따라 역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는 방향의 버스를 타고 점점 가까워져 오는 탓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을 따라 걸어 서로 붙어있는 집들을 지나쳐
초록색의 대문 앞에 멈춰 섰다.
“후우...”
크게 한 숨을 내쉬고 대문에 붙어있는 초인종을 띵-동. 띵-동 눌렀다.
“누구세요?”
똘망똘망한 막내 도현의 변함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리퍼를 찍찍 끌어 신고 대문을 여는 도현.
“도현아.”
“누나!”
“안 본 사이에 많이 컸네?”
“누나, 누나, 누나!”
내 허리를 끌어안고 부비부비 얼굴을 품에 문대고 선 도현이.
내년이면 중학생이 될 녀석이었지만 아직 어리기만 했다. 방에서 나오시는 엄마.
“채경아!”
“엄마!!!”
“상욱아, 채경이 누나 왔구나. 나와 보렴.”
나는 신발을 벗어 마루로 들어섰고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려
어느새 키가 나만큼 커져버린 잘생긴 상욱이 나왔다.
“오랜만이야, 상욱아. 자, 여기 크리스마스 선물. 메리 크리스마스.”
내 눈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 신발을 신고 나가버리는 상욱이.
쇼핑백에서 꺼낸 포장지 싸인 상자를 앞으로 내밀던 내 손이 그렇게 허공에 멈추고 말았다.
“누나, 누나. 나는, 나는?”
“아, 자 여기. 네가 좋아할 만한 거야. 메리 크리스마스.”
“우와, 누나 짱! 짱!”
선물을 받고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도현이.
한손에 아직 들려있는 선물을 상욱이 나온 방으로 들어가
책이 펼쳐져 있는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마, 교회에 갔을 거다. 쌓인 건 풀어야지.”
“응, 엄마.”
나는 그렇게 집을 나와 교회로 향했다. 갈색의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채경이구나.”
“아, 목사님!”
변함없는 모습의 목사님이 알아보시고 먼저 다가왔다.
“상욱이가 뛰어오더니 인사도 없이 예배당으로 들어가더라.”
“잘 있으셨죠?”
“많이 이뻐졌구나.”
“덕분에요.”
목사님은 그저 웃으시고 눈짓으로 예배당을 가리켰다.
나도 싱긋 웃으며 천천히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피아노 소리가 점점 커져왔다.
예배당으로 들어서니 아무도 없는 빈 곳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피아노 소리가 예배당 안에 울려 퍼졌다.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쾅-.쾅-.쾅-.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멋대로 건반을 내리치는 상욱이.
그 소리에 놀라 움찔해버렸다.
.
.
.
쏴---아. 쏴---아.
교회를 나와 좀만 걸으면 나오는 푸른 바다.
아버지가 머무시는 바다의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은 나와 상욱이.
“왜왔어?”
“크리스마스잖아.”
“그 크리스마스가 365일이었으면 계속 왔겠네.”
“상욱아.”
“그거 알아? 누나가 말도 없이 떠나고 나서 도현이 엄청 울고
그런 도현이 달래느라 일도 못 나가시고 애타하시던 엄마.
그보다 일도 이곳저곳 돈이 되는 곳이라면 궂은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돈을 버셨어.
나라고 뭐 편하게 지낸 줄 알아? 솔직히...”
울컥 했는지 말을 멈추는 상욱이.
그런 상욱이 안쓰러워 말조차 꺼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있었다.
“솔직히 말야. 누나한테 이것저것 틱틱 거렸던거.
여기 저기 받아 쌓인 스트레스 풀기 위함이었어.
절대 누나가 미워서 그랬다거나 하지 않았단 말이야.
나는 그냥 내 옆에 있어 너무 편해서...
힘들면 기댔고 슬프면 그냥 울어 버릴 수 있었던
그랬던 누나가 갑자기 사라져서 그게 더한 스트레스였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방황을 했단 말이야.”
입술을 잘근 씹으며 충혈되어 오는 눈에 고인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계속 말을 잇는 상욱이.
“그래도 누나가 한 번쯤이라도 오겠지. 오겠지...
우리들이 어떻게 사는지 뭐하고 지내는지 궁금해서 한 번쯤 오겠지.
누나가 오면, 경시대회 나가서 상탄 거 자랑해야지.
장학금 타면서 학교생활 하고 있다고 자랑해야지.
밴드 활동도 해서 인기 많다고 자랑해야지.
교회에서 반주 한다고 자랑해야지.
여자애들이 나 보러 교회 온다고 자랑해야지.
자랑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하루에 다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쓰잘데기 없는 걱정까지 하고...흐윽....흐으윽...
그렇게 며칠 몇날을 기다리면, 기다리면, 기다리면 누나가 올 줄 알았는데.. 흐윽...”
첫댓글 와 재밋어요! 제가 지켜보고잇는거 아시죠? 흐흐 건필하세요 작가님!
고마워요^ㅡ^ 님도 건필하세요>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