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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은 본문 내용과 별 상관 없습니다)
윌리엄 브래드포드 쇼클리(William Bradford Shockley)는 1910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스탠포드 대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아들인 쇼클리 역시 부모의 뛰어난 지능을 물려받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과학과
기계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고 중고등학교 때도 놀라운 재능과 식견으로 주변에서
명성이 높았다. 고교 졸업 후에는 칼텍과 MIT 대학원에 입학. 26살에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졸업 후에는 당시 신소재였던 반도체 연구의 최선두에 서 있던 벨 연구소에 입사,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동량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쇼클리의 앞은 탄탄대로였다.
또한 그는 과학 말고도 여러 방면에 뛰어난 팔방미인이었다. 쇼클리는 능수능란한
말솜씨를 가진 웅변가였고, 상대에게 어필할 수 있을 수준의 아마추어 마술사였으며
뉴저지에서는 유명했던 암벽 등반가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세간의 말처럼
'천재'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았다.
넵, 천재
하지만 신이 조인성에게 국가대표급 간지스펙을 주심과
동시에 세기에 남을 발연기를 함께 주셨듯이
쇼클리 역시 월드클래스급 지능과 동시에
치료도, 검진도 난해한 중병을 함께 안고 태어났다.
그 병의 이름은 바로
'중2병' 이었다.
그가 이런 중병(?)을 앓고 있음을 그의 부모와 주변 사람들은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쇼클리는 어려서부터 남의 시선을 끌기 위해 이상한 행동을 벌이곤 했다. 갑자기 괴상한
애완동물을 기른다던지, 보물 찾겠다고 집 마당을 판다던지 하는 일은 양반이었고 학교에
처음 가는 날 권총을 들고 가는 것도 그에게는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남들과
어울리지 못 하고 괴짜 취급받기를 즐겼으며 그 행동은 어른이 되는 날까지 죽 이어졌다.
쇼클리의 이런 행동이 단순한 애들장난이 아니라는 걸 그의 부모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들이 보통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 할까봐 ,한 때는 아들을 집에서 가르치려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텔리인 쇼클리의 부모들도 그의 뒷바라지에는 힘이 부쳤는지
그들은 결국 쇼클리를 유년군사학교에 진학시켰다. 군대가서 사람된다는 말마따나
군사학교에서 구르다보면 사람이 될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군사학교의 약발이 있기는 있었던지 이후 쇼클리는 무사히 학업을 마쳤고
촉망받는 인재로 성장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좋아했던
쇼클리의 성격은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쇼클리는 이미 벨 연구소 내에서 건방지고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고,
자신 외에 남을 믿지 못하는 편집증적인 성격은 동료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또한 쇼클리는 여전히 식사 도중 갑자기 연구소 구내식당의 벽을 타고 기어오른다던지 하면서
남의 시선을 끄는 것도 즐겼다. (아마도 자신의 암벽등반 경험을 뽐내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시선에 담긴 것이 선망이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이었다는 건 잘 몰랐나보다.
그의 성격이야 어쨌든, 쇼클리는 벨 연구소를 대표하는 과학자였고
그의 연구인생의 앞날은 밝았다. 입사 이후 고체 소자 반도체 연구에
뛰어든 쇼클리는 점차 실리콘을 비롯해 다른 소재로 연구범위를 넓혀나갔다.
그러던 와중인 1947년, 쇼클리의 동료였던 존 바딘(John Bardeen)과 월터 브래튼(Walter brattain)이
수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반도체의 전류를 제어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1주일 후
바딘과 브래튼, 그리고 쇼클리는 AT&T의 중역들 앞에서 자신들의 성과를 공개했다.
전자공학을 기초부터 바꾸어 놓은 위대한 발명품, 트랜지스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아래부터 윌리엄 쇼클리와 존 바딘(왼쪽), 월터 브래튼(오른쪽)
이 발명에는 쇼클리의 충고와 그가 이룩해놓은 기존의 연구성과들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쇼클리 본인은 발명 자체에는 자신이 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최초의 트랜지스터 특허에는 쇼클리 본인은 등재되지도 못 했다. 이에 절치부심한 쇼클리는
서로 다른 전류가 흐르는 물질을 포개 성능을 향상시킨 '접합 트랜지스터 연구'에 착수했다.
연구를 시작한지 2년만에 쇼클리는 접합 트랜지스터 이론을 완성했고 1951년에는
시제품 제작에도 성공했다. 이렇게 쇼클리는 트랜지스터 발명에 기여하고, 한단계
발전시킴으로서 전자공학을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런 그의 업적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과라는 세간의 찬사를 받았고 1956년 윌리엄
쇼클리는 바딘, 브래튼과 함께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쇼클리가 바라마지 않았을 영예였고 그의 인생이 가장 빛나던 시기였다.
타임 지 올해의 인물도 해뜸
20명 중 한 명이었지만
하지만 쇼클리는 이에 만족하지 못 했다.
쇼클리는 자신이 늘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따라서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자연히 '대접'해 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벨 연구소 수뇌부에
대놓고 '자신을 왜 중역으로 기용하지 않는가' 하는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트랜지스터 특허권 문제로 벨 연구소와 갈등이 생기자 쇼클리는 이직을 결심하게 된다.
쇼클리를 원하는 곳은 많았다. 쇼클리 정도의 인재라면 교수 자리 정도는
능히 내줄 대학도 널려 있었고, 쇼클리에게 오기만 해달라는 연구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 어느 자리도 '천재' 쇼클리에게는 탐탁치 않았다. 그에게는 좀더 자신을
빛나게 해줄, 연구와 성공을 동시에 실현시키줄 자리가 필요했다.
1956년, 40대 중반의 쇼클리는 20년간 근무한 벨 연구소를 나와 자신만의 기업을 세운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평생을 웃음거리로 만든 모든 재난의 시작이었다.
50년대는 학자로서 쇼클리의 최대 전성기였다.
쇼클리는 당대 최신기술인 반도체 연구의 선두주자였고, 그의 연구에 거액을 투자하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다. 스탠퍼드 대학 부총장인
프레드 터먼(Fred Terman)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쇼클리의 연구가 향후 미래를 결정할 중대한 사업이라 생각했고, 또 그의 회사를 자기 대학 근처에
유치한다면 장래 자기 제자인 전자공학과 학생들이 취업하기도 쉬워질거라 기대했다.
(이건 결국 전자만 맞았다.)
허허허 ㅆㅂ
그는 쇼클리의 창업 계획을 알자 열렬히 쇼클리 영입 경쟁에 나섰고,
쇼클리도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캘리포니아가 싫지 않았다.
1956년, 쇼클리는 고향인 캘리포니아의 마운틴 뷰(현재의 실리콘 밸리)로
금의환향해 자신의 꿈인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 를 설립했다.
쇼클리는 처음부터 자신만만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연구자들로 '반도체 드림팀'을 만들고자 했다.
미국 유수의 천재들을 자기 밑에 두고 마음껏 반도체를 개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제일 먼저 자신이 있던 벨 연구소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회사에 들어와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벨 연구소의 동료들은 쇼클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은 뉴저지를 너무 사랑한다느니, 벨 연구소에 정이 들었다느니 여러 핑계를 대며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와 함께 노벨상을 받았던 바딘은 아예 연구소를 떠나 일리노이
대학 교수로 이직했고, 브래튼도 연구소의 다른 부서로 책상을 옮긴 뒤였다.
결국 첫 번쨰 스카우트에 실패한 쇼클리는 그대신 아직 자신에 대한 평판을
전혀 모르는, 아직 학교를 벗어나지 못 한 젊은 인재들에게 눈을 돌렸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 유진 클라이너같은 대학을 막 졸업한 새내기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업계 거물이자 대선배인 쇼클리가 스카우트를 해왔을 때, 아직 신출내기였던 그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직 꼬꼬마 공학도였던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는 쇼클리와 처음 대화했을 때를 회상하며
'하나님과 말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많은 신도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도
곧 자신의 신에게 실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날은 정말 빨리 왔다.
1956년, 쇼클리는 세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기업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은 시작부터 난항에 부딪혔다. 그리고 그 원인의 중심에는
물론 '천재' 쇼클리가 있었다.
쇼클리는 연구에는 분명 귀재였지만 그 외 분야에는 되려 보통만도 못 했다.
그는 능수능란한 웅변가기는 했지만, 스스로의 오만과 남의 깔보는 태도로 인해 그 것이
사교성으로 이어지지는 못 했다. 그는 수레바퀴 속 햄스터마냥 세상물정에 어두웠다.
사업 초기, 그가 이웃사촌인 HP 창업주
데이빗 팩커드(David Packerd)
에게 했던 질문은 거의 전설로 남아 있다.
'사업은 일단 시작했는데 비서는 어디서 불러야 하나?'
'연필은 대체 어디서 사와야 하는 건가?'단 몇 마디로 팩커드를 시껍하게 만든 쇼클리의 질문은
그의 사업이 어떻게 망할 지를 훤히 보여주는 단면들이었다.
어휴, 나도 많이 놀랬음 ㅈㅈㅈ
또한 쇼클리의 다른 사람을 믿지 못 하는 심성도 사업을 휘청거리게 한 주 원인
중 하나였다. 노이스와 함꼐 입사했던 고든 무어(Gordon Moore)는 후일 인터뷰에서 자기가
입사 면접을 볼 때 쇼클리가 마치 가축을 사듯 벼라별 개인적이고 모욕적인 질문들을 집요하게
물어봤다고 증언했는데, 이건 누구 말마따나 어디까지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그 후로도 쇼클리의 기행은 계속 되었다. 하루는 쇼클리가 갑자기 회사 게시판에
공지 하나를 붙였다. 거기에는 전 직원의 월급 명세가 뺴곡히 적혀 있었다. 이름과
직급, 월급까지 적힌 그 공지는 직원들에게 마치 학창시절 등수가 공개되는 것
마냥 민망함과 모욕감을 주었다. (과연 1등이 누구였을가는 참 의문이다)
다른 하루는, 쇼클리의 비서가 손을 다쳤다. 문을 열다 쇳조각에 손을 베인 것인데, 쇼클리는
이 것이 자신을 음해하려는 음모라며 범인을 잡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는 범인을 '색출'하겠다며
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 하겠다고 성을 냈다. 결국 그 쇳조각은 부러진 압정으로 밝혀졌고
이 건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쇼클리는 점차 연구소 안팍에서 고립되어 갔다.
물론 이런 쇼클리가 직원들의 협동이 필요한 기업 경영을 잘 해나갈리 없었다.
쇼클리는 회사 설립 이후 부지런히 연구를 계속 했고 시제품을 만들어냈지만, 직원들은
그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쇼클리는 단독 작업을 즐겼지만, 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해설하는
데는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계속되는 그의 기행에 불만을 품은 일부 직원이 태업을 벌이면서,
결국 설립 1년이 지나도록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는 별 성과도 내지 못 한채 적자만 내게 되었다.
사태가 이쯤되자 직원들도 분위기를 대충 파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보스 쇼클리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며, 그의 특출남이 결코 회사에
유익하지 않음을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쇼클리를 비지니스 대신 연구에
열중할 수 있는 '고문' 정도로 물러나달라고 주주들과 쇼클리 본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를 않았다. 1956년 말, 쇼클리가 노벨 상을 받아버린 것이다.
한창 기세가 오른 쇼클리는 물론 사장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주주들은 '노벨상 받은 사람'이 사장으로 있는게 주가에 도움이 된다 생각했는지
그의 해임을 반려했다. 결국 쇼클리의 직원들은 포기해 버렸다.
1956년 쇼클리의 어머니 집에서 열린 노벨상 수상 축하파티.
바로 다음 해 이 사진에 찍힌 사람 중 거진 반이 도망쳐 버렸다.
1957년 말, 쇼클리가 가장 총애했던 젊은 인재 8명이 회사를 떠났다.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 등 쇼클리가 직접 발로 뛰며 스카웃했던 이들이
입사 1년만에 사직서 한 장 써놓고 경쟁사로 도망간 것이다. 쇼클리는 길길이
날뛰며 저주를 퍼부어댔지만 이 때 빠져나간 핵심 두뇌들은 쇼클리의 사업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주었다.
물론 이 따끔한 기억 이후에도 쇼클리의 행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남과 대화를 할 때 모든 대화를 둘째 마누라에게 옮겨적게 했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스파이더맨의 편집장마냥 직원들을 해고하곤 했다.
그는 여전히 안하무인 절대 권력자로 회사에 군림하기를 원했지만
그와 반대로 그의 왕국은 점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쇼클리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프로젝트는 경쟁사에 뒤쳐지기 시작했고, 여러 개의 수입성있는
제품 개발에 성공하기도 했음에도 그의 사업은 점점 기울어져 갔다.
결국, 설립한지 5년도 지나지 않아 회사는 클레바이트 사에
매각되는 등 혼란을 겪다 1968년 재매각된 뒤 결국 폐쇄되고
말았고 쇼클리의 꿈과 야망도 그와 함께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현 실리콘 밸리에 위치한 쇼클리의 연구소 자리
지금은 빈집 하나 덜렁 서 있다고
많은 사람들은 이제 쇼클리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쇼클리의 평생을 건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반도체 연구에서도 젊은 천재들과
경쟁하기에 환갑이란 나이는 너무 많았다. 쇼클리에게 남은 것은 노벨상을 받은
대과학자답게 옛날 좋았던 시절에 대해 순회강연이나 하고 자서전이나 쓰면서
점잖게 여생을 보내는 것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쇼클리는 채 1년도 안 되어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 것도 최악의 모습으로
1970년대는 새로운 우생학의 전성기였다.
1945년 나치의 거대한 우생학 실험이 개발살난 후 침체된 우생학을
다시 부활시킨 것은 엉뚱하게도 1970년대 미국의 과학자들이었다.
그 대표주자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교육심리학자 아더 옌센(Arther Jensen) 교수였다.
그의 이론은 난해하고 통계로 가득했지만, 그 메세지 자체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과학적이며 논리적인 방식으로 연구해 본 결과,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것이었다.
옌센의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사용한 것 중 하나는 아이큐 측정이었다.
백인과 흑인 등 소수민족들의 아이큐, 학업 성취도 등을 통계를 내고 다각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그들은 백인보다 여러 면에서 미치지 못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주장들이 얼마나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연구 밑에 깔린 전제의 주관성과 통계의 대상을 선정하고 그 결론을 내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문제들, 무엇보다 판단의 기준이 된 '아이큐'라는 개념 자체에 문제점까지
하지만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우월감을 '과학'으로 증명한 옌센의 이론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열렬한 성원을 얻었고, 수많은 후속 연구가 뒤를 이었다.
그들은 흑인들의 학업성취도와 소득수준, 몇 살에 첫 섹스를 하고 자식을 낳느냐에서부터
심지어 자지 크기(콘돔 판매업자에게 물었다 함)까지 통계를 내 근거로 내세우며
백인의 우월함을 설파해댔다.
그리고 바로 그 안에 쇼클리가 있었다.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 쇼클리는 이제 우생학자 쇼클리로 변신했다.
그는 이제 반도체의 미래 대신 백인의 우월함과 그들의 순수함을 위협하는 외국인들의 박멸을
설파하는 데 공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쇼클리의 주장은 다른 '연구자'들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물론 쇼클리의 이론이 다른 자들과 근본적으로 틀린 건 아니었다. 쇼클리의 이론 역시
' A는 우월하고 B는 열등하다. 그리고 내 책을 사서 읽어 주시는 독자분들은 A라능 'ㅅ' '
라는 이 바닥의 기본공식은 충실히 지켰다. 하지만 이유립이 환빠의 기원을 세운 이후, 그 뒤를 이어 나온
후속 주자들이 한단고기를 뛰어넘기 위해 '조선은 사실 중국에 있었다.' '고구려는 페르시아에 있었다'
따위의 과격한 이론을 내세운 것과 같이 쇼클리의 이론도 보다 과격하고 극단적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쇼클리의 주장을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인류의 위대함은 바로 인간의 지능에 있으며 지능이 뛰어난 사람(바로 자신과 같은)들은
특별한 관리와 대우를 받아야 한다. 유전적으로 지능의 진화를 저해하는 존재들을 거세함으로서
지능의 우수성과 진화의 가능성을 보존해야 한다. 본디 그런 족속들은 자연선택에 의해
도태되어야 하지만, 현대의 사회제도는 경쟁을 제한함으로서 열성인자를 증폭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불합리한 사회를 개선하여, 열성 인간을 제거하고
우성 인간을 양성하는데 주력해야한다
물론 위의 모든 내용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이렇게 인류 진화의 첨병이 된 쇼클리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전국에서 강연을 하며 자신의
'학설'을 설파했고 '아이큐 100 이하의 '열등한 종자들'은 알아서 거세하라' 는 요구를 글로 써
사방에 투고했다. 그는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 정자은행을 설치하고, 뛰어난 지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정자를 기증하라고 광고하기도 했다. (물론 쇼클리 자신도 기증자 중 하나였다.)
그 활동이 결실을 맺었는지 쇼클리는 '이 분야' 에 있어서 정상의 위치에 올랐다.
과학계에세 그와 비슷한 정신상태를 가진 과학자들과 공동활동을 하기도 했고 홀로코스트 조작설,
백인의 우월성 연구 등을 지원하기로 악명 높은 극우백인우월단체 '파이오니어 재단'은
쇼클리에게 십수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노벨상 수상자로서 쇼클리가 가졌던 과학자로서의 명망과 사회적 위치는 봄에 눈독듯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쇼클리의 마치 50년대 SF소설 속의 악역들같은 지능에 대한 집착과
열등한 자들을 거세하라는 등의 정신나간 이론들은 세간에서 조롱과 비난을 넘어
동정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언론들도 여기에 가세했다. 언론에서 쇼클리라는 이름은
'우생학자'들의 저열함과 심각성을 논할 때 단골로 사용되는 떡밥이 되었고, 그의
노벨상 수상자라는 과거의 영광은 아주 탐스러운 씹을 거리고 전락하고 말았다.
쇼클리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1981년, 쇼클리는 자신을
'히틀러 똘마니(Hitlerite)'라고 표현한 아틀란타 콘스티튜션(Atlanta Constitution) 지를
고소했다. 법원은 아무리 상대가 쇼클리라고해도 콘스티튜션 지의 표현은 과했다고
생각했는지 쇼클리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피고가 쇼클리에게 기사를 통해 피해를 줬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대가로 쇼클리에게 무려 '1달러'를 배상할 것을 명령했다.
쇼클리를 까는 건 이제 비단 언론 뿐만이 아니었다.
쇼클리가 열정적으로 진행했던 강연에는 지지자들과 함께 그를 조롱하는
이들이 언제나 함께 했다. 그들은 쇼클리의 강연에 KKK단 차림을 하고 들어오거나
쇼클리가 발명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쇼클리를 조롱하는 발언을 녹음해
강연장에 트는 등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세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쇼클리는 마치 홀린 듯이 우수한 지능의 보전과, 열등한 자들의
배제를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쇼클리가 마지막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82년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였다.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한 쇼클리는 단 하나의 공약만을 내세웠다.
'열성 인간 추방, 우성 인간 양성'
이 정신나간 공약에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솔직한 지지율로 대답했다.
쇼클리는 예비선거 승자인
피트 윌슨(Pete Wilson)에게 1퍼센트 대를 밑도는 처참한
지지율로 떡실신당했고 밑바닥인 8위로 선거를 마감했다.
낄낄
쇼클리는 이제 더이상 과거의 영광스런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었다. 그의 친구들과
자식은 모두 떠나갔고 영광과 지위도 그 뒤를 따라 그의 손에서 사라졌다.
1989년, 그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캘리포니아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병실에는 재혼한 아내만이 처량히 자리를 지켰을 뿐이었다.
그의 친지들은 그의 죽음을 신문을 보고서 알았다.
미국이 낳은 최고의 천재이자 반도체혁명의 주도자이면서,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였던 쇼클리는 이렇게 바보처럼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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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클리의 드라마틱한 몰락은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됨과 동시에
의문을 하나 안겨줬다. 대체, 무엇이 천재였던 그를 그 꼴로 만든걸까?
물론 쇼클리가 70년대에 갑자기 우생학자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지능을 과시하며 남을 깔봤던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또한 로버트 노이스는 과거를 회상하며 쇼클리가 너무나도 진지하게
'세상 사람들의 10% 정도는 정신병자' 라는 이야기를 자기에게 해대서 시껍하게 했다고 증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쇼클리의 엘리트 주의가 심각해진 것은 역시 70년대의 일이었다.
대체 쇼클리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정신과 의사도 아니거니와, 쇼클리를 깊이 연구한 연구자도 아니다.
하지만 쇼클리가 그 때 어떤 상태였을지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쇼클리가 대변신을 겪은 70년대 초, 그의 상태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의 원대한 야망이 담긴 사업은 여러차례 매각되는 수모를 겪다가 결국
풍비박산이 났고 재기의 길도 그리 밝아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억들도 그를 괴롭혔다.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뛰쳐나갔던 8명의 직원들은 1956년
캘리포니아에 자그마한 반도체 회사를 차렸다. '페어차일드 반도체'라고 명명한 이 작은
회사는 전자혁명을 틈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성공에 만족 못 한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68년 이 회사를 나와 자신들의 반도체 회사,
바로 '인텔(Intel)'을 세운다.
Yes, I am!!!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회장과 CEO 직을 수행하며 회사를 컴퓨터와 반도체 업계의 톱으로
성장시켰고 그들은 미 경제계를 주무르는 거물이자, 세계적인 백만장자가 되었다.
바로 쇼클리가 바라마지 않았을 지위였다.
뿐만 아니라 제이 라스트, 쉘든 로버츠 등 다른 여섯도 각자 세계적인 벤처
투자자나 대학 교수 등 사회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낄낄 우리 부자됬음
이들에 대한 쇼클리의 증오와 질투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쇼클리는 그들을 '여덟 배신자'라 부르며 평생 증오했지만, 그 불길은 원수들 대신 그 자신을 불태웠다.
쇼클리는 평생을 우월감에 쌓여 살았다. 그는 놀라운 지능을 가진 천재였고, 튼튼한 몸을
가진 엘리트이자 세계 최고의 지성을 상징하는 노벨상 수상자였다. 때문에 그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멸시했고, 자신의 우월성을 전파하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쇼클리는 늙었고, 사업은 실패했다.
스포츠맨이었던 몸도 이제는 여기저기 삐걱였고 연구도
예전처럼 수월하지 않았다.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쳤던
애송이들은 이제 세계 유수의 백만장자가 되었다.
물론 그는 아직 스탠퍼드 대에서 강의도 했고, 노벨상 수상자로서의
지위도 있었지만, 그는 더이상 자신이 원하는 만큼 우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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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인터넷에서 항상 누군가를 공격해대며 남의 인생을 망가뜨리는데 그렇게 열심인데,
그럴 바에야 일이나 공부에 좀 그런 정열을 기울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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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때마다 나의 세계랭킹이 올라가잖아.
-리라짱 전파만세 블로그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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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쇼클리는 이런 선택을 한다.
더 이상 우월하지 않다면, 우월해지면 될 거 아닌가?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재주인 '지능'으로
남을 까기 시작했다.
지능이 높은 자는 우월하다.
지능이 낮은 자는 진화를 저해하니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진화를 저해하는 사회 제도는 수정되어야 한다.
아이큐가 100 이하인 자들은 인류를 위해 스스로 거세하라.
나는 우월, 너는 병신
=====================후기 비스무리=======================
솔까말, 처음 이 글을 쓰게 됬던 것은
몇 년 전에 넷에서 만난 한 역덕 때문이어뜸.
그 사람,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뜸. 책도 논문도 많이 읽었고
기본소양도 풍부하고 나같은 지잡대 사학과보다 훨 나았음.
그런데, 솔직히 그 사람의 글을 보면 같은 역덕으로써 많이 부끄럽더라구요 'ㅅ'
글 내용은 좋음. 많이 읽고 공부한 것도 보이고, 발로 뛴 노력도 보임.
하지만 그 글을 다 읽고 나면 꼭 간장을 한컵 마신 것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한 번 그 사람이 썼던 다른 글들도 주욱 읽어봤음. 그러니까 조금씩 그 이유를 알게 되뜸.
그 이유는 그 사람은 독자들이 아닌 병신들을 위해 글을 썼기 때문이어뜸
그 사람 글에서 일관되게 느껴졌던 느낌들은 이거였임.
'내가 열심히 발로 뛴 결과 사실은 이래. 너희들은 틀렸어, 이런 병신들'
'나는 이렇게 사료를 많이 찾았는데, 너희들은 왜 아무 것도 못 찾았어? 이런 병신들'
'나는 이렇게 공부를 많이 했는데, 너희들은 역사에 아무런 관심도 없냐? 이런 병신들'
이 것을 떠올리자, 내가 예전부터 이 사람에 대해 가졌던 의구심이 모두 풀린 기분이어뜸.
사실 옛날 이 사람 글을 읽다보면 의문가는 게 많았다능. 이 사람은 말로는 역사를 연구한다,
역사를 바로 잡는다 하지만 대체 뭘하는 지 궁금했다능 'ㅅ'
그토록 아는 게 많고, 바꾸고 싶은 것도 많았다면,
왜 대학원에 올라가 계속 공부하지 않았을까?
왜 그 내용을 논문으로 써서 학회지에 투고하지 않았을까?
왜 책으로 써서 자신이 깠던 사람들과 정면대결을 하지 않는걸까?
왜 연구성과에 아무런 반영도 안 되는 넷에서 저런 글을 싸는 걸까?
'취미라서', '사는 게 바빠서'라고 단순히 생각해 볼 수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이유는 그 사람의 목적은 역사가 아닌 다른 데 있기 떄문이었던 거 가틈
그 사람의 글들은 그가 증오하는 병신들을 까기 위해 쓰여진 글들이어뜸.
결국 그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고대사도, 중세사도, 근현대사도 아니었뜸.
그는 우생학자들이 흑인을 까기 위해 콘돔 크기를 묻고 다녔던 것처럼
사료를 찾고 논문을 읽은 거 뿐이어뜸. 그렇게 생각하자, 그가 반대파들의
리플은 생까면서 일부 네임드들의 내방에는 질질 싸던 것도 이해가 가뜸.
왜냐하면, 이 비좁고 훵한 넷에서 남을 까는 것만이
한순간이나마 그를 우월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어뜸 'ㅅ;
그 역덕이 쇼클리와 다른 점은, 그는 평생이 걸려도
노벨상을 타지 못 하리라는 것 정도였음.
한줄 요약 - 솔까말, 제대로 된 역사학자가 이런 데서 키배할리가 없잖아
첫댓글 ㅎㅈ ㅎ;;; 옛날 생각도 나고 그러네요.
옛날이염?
제가 기행이 심했거든요.
그런거라면 저도 남말할 처지가 아닌지라 (…)
그거슨 인간 원심분리기.
ps.음, 대충 어떤 부류인지 견적은 잡히네요
근데_너도_그_사람_까고_있잖아.txt
부제: 나 병신? 너 나치.
안타깝네요.
쇼클리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저런 짓을 하던 작자였군요. 자, 오만과 자존심이 만든 병신이 하나 있습니다.
글을 읽어보니깐 정신장애 진단기준 중에서 '자기애성 성격장애' 진단기준에 맞는 것 같군요.
그건 그렇고.. 본문에 아서 젠센이 언급되었는데 아서 젠센은 학계에서의 명성과 대중들에게 알려진 악명이 극히 갈리는 학자로 유명하더군요. 대중들에겐 우생학자로 악명높지만, 학계에서는 과학적인 정신계측학자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는군요. (뭐 전 아직까진 젠센의 논문을 뒤져보지 않아서 이 분에 대해서 평가내리긴 그렇습니다만.. 근데 분명한 우생학자(예를 들면 리처드 린)들과 공동논문을 내는거 보면..-.-)
이상하게 1960년대에 몇몇학자들이 우생학자가 되는이유가 여기 있었군요
이름부터가 "쇼크(Shock)"ley 네엽.
이런 쇼킹한 분 같으니라구..
근데_너도_그_사람_까고_있잖아.txt (2)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글의 포인트가 '타인을 까서는 안 됨'인가요? 그보다는 '지식의 다소보다는 소통의 자세나 의도가 중요하다'는 것이 포인트 아닐까 싶은데요.
핵심을 짚으셨군요.
그런데 현재의 키배에선 그런게 사실 불가능 하거든요.. 거의 특정인을 노리고 쓴 글이라 어떤 의도의 것인진 자세힌 모르겠지만 (아마 이렇게 정리된 글이 그다지 유행하지 않은 걸 봐선 더 그렇군요) 대체로 키배가 터지면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힘으로 화력투사를 한 후에 요즘엔 소통이다 뭐다 떠들어 내는 걸 줏어들은 건지, 이걸 쓴 작자가 한번 거하게 털린 후에 징징 거리는걸 안받아준다고 한바뀌 우회해서 이런걸 떠드는 건지도 모르겠고..
결론은 특히 이글루에서 터지는 키배같은건 밑도 끝도 없는 화력투사라 그냥 남이 하는 말은 절반은 대꾸하고 절반은 무시하는게 통상적인 일이거든요..
대화할때 남을 깔보거나 욕을 하느냐 마느냐 이런건 그냥 자신이 결정하고 책임질 일이죠. 이글루스의 환경이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저런... How ㅄ's made 로군요(...)
'통솔력의 부재'로군요. 사람을 이끌줄 모르는 사람이 사업을 하니까 쫄딱 망...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자기애는 필요하죠...그렇지만 과했어요...안타까울 뿐이죠...결말이 삼류 소설이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