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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학산 법광사터에서
천지간에 외로이
크면서 바다를 본 일이 없는 저에게 바다는 정말 무서운 존재이어요. 포항에 처음 왔을 때 해풍이 옷자락을 파고드는 거리에 서면 마음 갈피조차도 바람에 나부끼더군요. 하지만, 갯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다가 가을이면 누나의 얼굴처럼 수수한 꽃을 피우는 해국을 저도 이젠 닮아가는 지 모르겠습니다.
포항에 살면서 삶에 지쳐갈 때, 고향처럼 푸근한 인정을 느끼고 오는 살갑고도 조촐한 곳이 있답니다. 새봄엔 도음산(禱蔭山) 천곡사(泉谷寺)를 찾고 늦가을엔 비학산(飛鶴山) 법광사(法光寺) 터로 오릅니다. 얼음 밑으로 응달에 쌓인 눈이 녹아 흐르면 얼레지 꽃이 비탈에 무리지어 피어나는 천곡사엔 선덕여왕이 병을 치유한 신비로운 샘이 있고, 들국화가 논두렁 밭둑에 샛노랗게 피어나는 법광사 터에는 벙어리가 말문이 터진 이적이 일어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옛탑이 있답니다. 천곡사가 여성적인 섬세한 미가 새록새록 샘솟는다면, 법광사는 남성적인 쓸쓸함이 묻어나는 절이지요.
퇴근 걸음으로 적별보궁(寂滅寶宮) 비학산(飛鶴山) 법광사<法光(廣)寺>의 옛 절터에 홀로 올랐습니다. 법광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되고, 아라비아인 석상이 지금도 지키고 서 있는 흥덕왕릉이 안강에 있지만 왕 사후에 벌어진 왕실간의 싸움으로 죽은 김균정이 세우고, 청해진 장보고 군대의 도움으로 대구에서 민애왕 군대를 깨고 왕이 된 그 아들 신무왕과 그 손자 문성왕이 지금의 자리로 옮긴 원탑이 있는 신라 왕실의 원찰이지요.
형수는 합장하고 탑돌이를 하고 언니는 비문을 더듬어 읽었다던 일이 문득 떠오르더군요. 퇴락한 천년 고찰 이 법광사 터는 조선시대에도 시대와 불화하고 불의에 항거한 방외지사와 운수납자들이 머물다 간 고찰이었어요. 변방의 쓸쓸함과 시간의 아득함, 인생의 덧없음을 읊조리고 문득 삶을 발견한 ‘관조(觀照)와 문학’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성리학 유교문명 국가의 생명력이 발흥하던 시기의 성군, 세종 임금님이 기특히 여겼던 신동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언니도 익히 알고 있겠지요. 그이가 열다섯 나이에 어머니 상복을 벗고, 고려 목우자(牧牛子) 지눌(知訥) 스님이 팔공산(八公山) 거조암(居祖庵)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하고 그 수행 도량으로 삼았던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에 머물며 준(峻) 스님에게 불교를 배웠지요. 그리고 상경하여 과거 공부를 하고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공부하러 들어갔다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책들을 불사르고 방랑길에 올랐고, 사육신의 참화를 피눈물 지으며 응시했지요.
불의에 분노하고 세조에 항거하며 이후 설잠(雪岑) 스님이 되어 비승비속으로 천지간에 떠돌이가 되었지 않습니까. 방랑길 십년이 되는 스물여덟 나이에 신라 천년 불교 문명의 쓸쓸한 역사의 향기가 사람을 품어주고 위무하는 고도 월성(月城)의 금오산(金鰲山) 중턱 용장사(茸長寺) 경실(經室)에 머물지요. 분황사에서 화쟁국사(和諍國師) 원효(元曉) 스님의 비를 어루만지고, 당나라 다성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을 읽고 또 차밭도 일구었지요. 그러다가 책을 사러 한양으로 올라가 호불 군주 세조 치하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도 언해하지 않았습니까.
유교와 불교 문명, 권력과 야인, 중심과 변방, 승려와 유자, 세간과 출세간, 삶과 글이라는 경계에서 천지간을 방랑한 매월당이 몸이 처한 현실의 번민을 역사의 시공간에서 초월하며 글로 승화시킨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어쩌면 그이의 분신이 구축한 정신적 해방구인지도 모르겠어요. 술에 취해 동도(東都)의 밤거리를 활보하고, 밤이면 <<이소경(離騷經)>>을 읽으며 비통해 하였지요.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굴원에 의탁하고, 도연명(陶淵明)에 화답하는 시 60여 머리를 남기기도 하였고요. 동가식서가숙하며 길 위에서 읊조린 시들은 그이의 불멸하는 영혼의 편린들이지요.
매월당이 금오산에 깃들어 살던 시절에 신라에서 발해로 가던 역로를 따라 동해 바닷가 길을 따라 갔지요. 청하(淸河)에서 핀 살구꽃을 울진 성류굴을 지나고 삼척을 지나 정선에서 다시 보기도 하였는데, 이 때 그가 여기 법광사에 하룻밤 묵으며 남긴 시가 전해옵니다.
宿神光縣法廣寺 신광현 법광사에 묵으며
古壁丹靑剝 옛 벽의 단청은 떨어져 나가고,
經營歲月深 흘러간 세월 오래기도 하구나.
鳥啼人正靜 새는 지저귀나 사람은 참으로 고요하고
花落葉成陰 꽃은 졌으나 잎은 그늘을 이루었네.
芳草沿階綠 향기로운 풀 섬돌을 따라 짙고,
淸風入樹陰 맑은 바람 나무그늘에 불어온다.
別峯啼謝豹 딴봉(別峯)에서 호소하듯 울부짖는 표범소리,
忽起故山心 문득 옛 동산의 마음을 일깨우네.
매월당이 역사와 시간의 여울에 떠내려가고 임진왜란의 폭풍이 이 땅을 휩쓸고, 또 광해군이 서인들에게 내쫒긴 뒤에 <<어우야담(於于野談)>>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계부 유몽인(柳夢寅)의 날조된 역모 죄에 연루되어 흥해와 이웃한 청하고을에 귀양 와 열 두 해를 살았던 취흘(醉吃) 유숙(柳潚, 1564-1636)이 여기 법광사에 올라 스님이 읊어 전하는 매월당의 시에 시간을 뛰어넘어 화답한 일이 있지요. 역모 죄에 내몰린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는 오언 고시를 남겨 놓고 있어요. 이 시는 유불도 삼교에 노닐었던 옛사람들이 얼마나 정신세계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았던가를 보여줍니다. 또 사백여 성상 앞의 법광사 모습이 아련히 떠올라 시간의 너울에 저는 잠시나마 정신이 아득해 오더이다. 무한한 시공간에 태어나 유한한 삶의 길에서 떠도는 제 삶이 옛 사람들의 시를 타고 얼마나 고양되는지 모르겠어요.
法廣寺次梅月堂韻 법광사에서 매월당 시에 차운함
寥落千年寺 고즈넉한 천년 고찰,
荊榛一逕深 가시넝쿨에 깊숙이 싸인 길.
塵埋金佛暗 금불은 티끌에 묻혀 어둡고,
松覆石壇陰 석단은 소나무 그늘이 덮었지.
只有居僧老 그 절에 사는 스님은 늙었으나,
能傳過客吟 길손인 나에게 매월당 시를 전해 주었네.
上頭梅月句 맨 먼저 매월당의 시구를 읊었는데,
聽罷更淸心 듣고 나자 다시 마음까지 맑아지네.
聞道眞平主 듣자니 신라 진평왕은,
祗園用力深 기원정사에서 불교 숭배에 힘썼다네.
龍淵開寶地 용 못 메워 황룡사 보배로운 절을 지을 땅 열었고,
蜃閣結層陰 이층 금당 구층 목탑 신기루 같은 누각 세웠지.
亡國如鴻去 망한 나라는 기러기처럼 가버리고,
空山有鳥吟 빈산에 새소리만 들린다.
佛身無所托 부처님은 몸들일 곳 없으니,
人事益傷心 인간사는 더욱 마음 아파.
古殿嵬然在 옛 전각은 우뚝하니 솟아 있으나,
罘罳落照深 담장 안으로 낙조만 깊숙이 비춘다.
雪晴平野闊 눈이 개자 들판은 넓어 보이고,
雲度亂峯陰 구름이 지나가자 봉우리들마다 그늘졌구나.
偶托遠公社 우연히 혜원 선사의 백련결사에 의지했다가,
還爲信父吟 마침내 오자재(吳子才)처럼 불교에 귀의하였네.
燒香方丈靜 향불 사르자 방장실이 고요하여,
頭白悔癡心 늘그막에 어리석은 마음을 뉘우치네.
陶巾尋寺遠 도연명처럼 유건(儒巾)을 쓰고 멀리 절 찾았고,
謝屐入雲深 사령운 마냥 나막신 끌고 구름 깊은 동산에 들었지.
隣客從茶圃 이웃 사람 차밭을 찾았고,
鄕僧話漢陰 시골 스님 삼각산에서 매월당과 대화했네.
靑山圍古郭 청산은 옛 성곽을 둘러 있고,
白雪動高吟 양춘백설가(陽春白雪歌)를 소리 높이 읊었네.
牢落乾坤內 천지간에 외로이 떨어져서,
偏傷歲暮心 늙을 때까지 서러운 마음으로 살았지.
***오자재(吳子才, 1131-1162): 남송(南宋) 명주인(明州人), 이름은 병신(秉信), 자 자재(子才), 자호는 신수(信叟), 정토신앙 수행.
오자재는 송 고종 소흥(紹興) 연간에 조정에서 관료로 있었다. 간신 진회(秦檜, 1090-1155)와 의견이 충돌하여 관직에서 추방되어 고향 명주(明州)로 돌아와 성 남쪽에 초가를 짓고 선 수행에 몰두하고 잠은 관(棺)에 들어가 잤다. 새벽에 동자가 관을 두드리며 노래 부르게 하였다.
「오자재야, 돌아가자. 삼계(三界)는 안락하지 않아서 머물 수가 없는 곳이다. 서방 정토에 연꽃 속 태(蓮胎)가 잇으니 그곳으로 돌아가자.」
오자재는 이 소리를 듣고 일어나 참선했다. 오랜 뒤에 진회가 죽자 예부시랑으로 조정에 다시 나가서 도첩령(度牒令)을 다시 시행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충하자고 하다가 진회의 당인에게 부처에게 아부하여 복을 얻으려 한다는 탄핵을 받아서 상주(常州) 지사로 좌천되었다.
소흥 26(1166)년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서 서울 임안(臨安, 현재의 항주(杭州))로 가다가 소산(蕭山) 역에 앉아 선정에 들더니 잠시 뒤에 가족들에게 조용히 들어보라고 하였다. 가족이 모두 천상의 음악을 들었는데, 오자재가 말하기를 “청정 극락 세계에서 정념을 놓쳐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황금 연꽃 좌대가 이미 눈앞에 와 있으니 나는 마땅히 서방정토로 가야겠다.”라고 말을 마치자 그대로 입적하였다.(<<불조통기(佛祖統紀)>>).
吴信叟,名秉信,明州人。绍兴中官于朝,与秦桧忤,斥为党人。归而筑庵城南,日夕宴坐。制一棺,夜卧其中;至五更,令童子扣棺而歌曰:“吴信叟,归去来!三界无安不可住,西方净土有莲胎,归去来!”闻唱即起,习禅诵。久之桧死,以礼部侍郎召。时停度僧之令,信叟请卖度牒以裕国用。因论及桧党,卒为桧党所中,论以佞佛邀福,出知常州。二十六年复被召至萧山驿舍坐。顷之,令家人静听,咸闻天乐之音,即曰:“清净界中失念至此,金台既至,吾当有行。”言讫而逝。-《佛祖统纪》
***양춘백설가(陽春白雪歌):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이란 글에 보이는 〈양춘백설가〉로, 지음(知音)의 노래를 뜻한다. 어떤 사람이 영중(郢中)에서 처음에 〈하리파인(下里巴人)〉이란 노래를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다음으로 〈양아해로(陽阿薤露)〉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고, 다음으로 〈양춘백설가〉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던바, 곡조가 더욱 높을수록 그에 화답하는 사람이 더욱 적었다 한다. (<<文選>> 권45)
신라 왕실의 비불(秘佛)인 부처님 진리를 빛으로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을 모신 가람 한 가운데의 이층 고식 건축인 금당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이젠 부처님 앉았던 돌 연화좌대는 천년 세월에 씻기고 사람들의 무지한 손길에 깨어지고 넘어져 있어 저는 마음이 쓸쓸하여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불국사와 비견되던 웅장한 가람의 회랑과 강당의 주춧돌과 석대만이 고추밭 고랑, 파밭 이랑 사이에 흩어져 있는 절터를 걷는 저의 모습이 언니의 눈에도 밟히는지요. 지금 절터에는 깨어진 기와 조각들만 나딩굴고, 대웅전은 어디 있었는지 짐작조차도 할 수가 없습니다. 금빛 부처님은 땅에 파묻혀 나무꾼 총각, 풀피리 부는 목동이 소를 묶던 말뚝으로 썼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저며 옴은 무슨 까닭일는지요. 단청이 떨어져 나가고 퇴락한 법당에 먼지를 덮어 쓴 부처님을 보고 옛사람들이 무정한 세사에 쓸쓸함을 이기지 못하여 탄식하던 일이 어제 일처럼 아리게 전해 오는군요.
불교의 유무형의 존립 근거를 부수고 짓밟았던 가혹한 시대에 태어나 사명대사 같은 제자들과 함께, 왜구들이 이 땅을 분탕질했던 참혹한 칠년 전쟁을 극복한 공로로 허물어진 부처님 집안의 기둥을 다시 세우고 석양을 드리웠던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 스님도 이 절에 당도하여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過法光寺 법광사를 지나며
風雨千間屋 오랜 세월의 풍우를 겪은 규모 큰 절인데,
苔塵萬佛金 많은 부처님의 금빛이 이끼 먼지로 찌들었네.
定知禪客淚 정히 알겠다. 나 같은 선객들의 눈물이,
到此不應禁 예서 흘러내림을 금할 수 없다는 것을.
어링불을 굽어보며
사소한 일의 공리공담으로 붕당 간에 끝이 보이지 않는 권력 다툼의 소꿉장난을 한 숙종 시대에 조선의 선비들은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명산대찰과 산중암자를 찾아 소풍을 떠나기도 하였지요. 원주의 대학자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 선생도 그러한 분인데, 암자들에 묵으며 스님들과 대화도 하고 성현의 글을 읽기도 하였습니다. 유불도의 진리에 경계가 본래 없음을 체득하며 근원의 자리에서 마음을 청징하게 하고 성품을 함양하였지요. 선생이 영덕 오십천 가를 지나 보경사 암자들을 오르고 비학산 법광사에 당도하여 절 뒤로 수백 걸음을 걸어올라 의상암(義湘庵)에서도 하루 묵었지요. 다음날 종일토록 눈 아래 삼십 리 바깥의 흥해 고을과 어링불(魚龍沙-영일만) 바다굽이를 굽어보며 슬픈 감회를 이기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영조 때인 1742년에 경기 관찰사 홍경보가 양천 현령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을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하고, 연천군수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을 오게 하여 글을 짓게 한 일이 있지요. 한탄강 지류 적벽에서 소동파가 <후적벽부>를 지은 지 열한 갑자가 되는 10월 보름에 뱃놀이를 재현한 것입니다. 겸재는 청하 고을에 내려와 내연산 용추를 그렸고 겸재의 이름이 폭포 암벽에 새겨져 있습니다. 청천은 일월지향 연일현감으로 내려와 문사들을 가르치다 벼슬에서 물러나 고령으로 은퇴하였지요.
청천 선생이 고령에 은거할 때 법광사 석탑을 중수했습니다. 그 때에 탑 안에 모셔진 부처님 진신사리 스물두 알이 발견되었고, 사리에서 닷새 밤낮으로 빛이 뿜어져 나와 이 비학산 골짜기 바위와 수풀을 대낮같이 밝히고, 일을 성심껏 도운 공덕으로 절에서 얻어먹고 살던 벙어리가 말을 유창하게 하는 이적이 일어났지요. 이런 일을 스님들이 청천거사에게 비문으로 써줄 것을 부탁하였고, 청천의 글을 옥돌에 새긴 <석가불사리탑비>는 땅에 묻혔다가 백여 년 뒤에 발견되어 지금처럼 다시 서 있지요. 국화와 물고기가 새겨진 빗돌 지붕과 받침이 모두 본래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지만, 얼마나 소중한 비석인지 몰라요. ‘진경시대(眞景時代)’ 두 거장의 숨결이 우리 고장에 이렇게 나란히 남아 있다는 일이 여간 복된 일이 아니지요. 비문을 읽지 못해 의미를 알 수 없어하던 언니의 부탁으로 십년 만에 제가 다시 옮긴 비명에 이런 구절이 나오지 않습니까.
惚怳有象 聞諸伯陽 ‘황하고 홀한 그 가운데 모양이 있네.’ 이 말은 노자에서 들었는데,
玄珠象罔 信者蒙莊 도리의 진면목을 상망이 얻었음을 믿은 자는 장자이었네.
앞 구절은 <<노자>> 21장에서 가져왔고, 뒤 구절은 <<장자>>에서 취했지요. <<장자>><천지(天地)>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요.
황제(黃帝)가 적수(赤水)의 북쪽 곤륜산(崑崙山)에 올라서 남쪽을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현주(玄珠:도의 본체)를 잃어버렸다. 찾아도 찾지 못해 사람을 보냈다. 이주(離朱: 분석)도 끽후(喫詬: 시력)도 찾지 못했는데, 상망(象罔:무심)은 현주를 찾아내었다. 황제가 말하기를 이상하구나! 상망이 얻을 수가 있다니!
언어 이전의 실상을 말하는 중도의 진리, 불교의 반야 지혜를 중국 문명은 노장 사상의 인식 틀로 이해하였지요. 그러니까 저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청천거사가 노장사상으로 격의(格意)한 불교를 철저히 알아챌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청천거사는 성리학이란 이념이 사유와 문장을 옥죄고 사회적 활동을 규제하는 적장자 위주의 수직적인 신분제 질서 속에서 서얼로 태어나 오히려 유불도 삼교를 넘나들면서 정신적인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고, 실존의 고독을 극복한 사람이었던 게지요. 그이는 서른여덟의 나이에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에도에 다녀오며 일본의 지식인들과 불교의 지혜를 논하고 돛대 아래에 앉아 <<장자>>를 읽기도 하였고, 말년에 거처를 정관재(靜觀齋)라 이름하고 <<금강경>>을 읽으며 반야 지혜를 오득하였습니다. 조선의 유마거사라고 부를 만하지요.
지난여름에 저는 베이징에서 기차를 타고 낙양성, 장안성을 지나 히말라야 산맥에 숨은 제 영혼의 고향, 티베트의 라사로 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언니, 이 무슨 희유한 인연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말로만 듣던 그 곤륜산 고개를 넘어갈 줄은 정말 짐작도 못하였지 뭡니까. 청천거사도 장자도 가보지 못한 장강 발원지 곤륜산에서 황제가 잃어버리고 상망이 찾은 그 ‘현주(玄珠)’를 ‘장강원두(長江源頭) 통천하(通天河)’를 지나며 백설이 휘덮인 성스런 옥주봉(玉珠峯) 자락에서 찾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눈 밝은 그대
시를 쓰는 언니가 태어나 살고 제가 뿌리내려 깃들어 사는 이 고장 흥해 고을에 이백여 년 앞 영조 임금님 시절에 선비 시인이 살았지요. 그 분은 농수(農叟) 최천익(崔天翼, 1712-1779) 진사이지요. 재상을 지내다 흥해 군수로 좌천되어 내려온 섭서(葉西) 권엄(權欕, 1729-1801)은
‘도정절의 시 <의고(擬古)>에 동방의 한 선비가 있어 옷이 언제나 남루 하고, 얼굴은 밝더라고 하였는데, 궁벽진 바닷가에 사는 농수야말로 영락없이 그런 사람이다(陶靖節云 東方有一士 服不完 而容常好 農叟儘其人也歟).’
고 하였지요. 그이의 글과 인품은 난세의 은일지사 도연명을 닮았지요.
유재건(劉在建)이 역사의 무대에서 조명을 받지 못한 중인, 서민들의 전기를 모아놓은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1862년)에 여항의 문학인으로 오를 만치 농수는 세상에 이름난 시인이었지요. 과거에 장원급제한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가 청천이 선생을 외우(畏友)로 허여하였을 정도이니까요.
농수 사후에 제자들과 고을 사람들이 성금을 내어 선생의 시문집을 새겨 낼 때 일입니다. 제자 유인복(柳寅福)이 흥해 군수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 1732-1809)에게 스승의 유고들을 산정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청성은 농수가 청천과 어울려 촉석루에 올라 지은 시에서 ‘달과 빛을 다툰 것은 그 당시의 일이요(斗月光爭當日事)’란 구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지요. 유인복이 꿈속에서 이 일을 스승에게 물었지요. 그러자, “나도 성에 차지 않아, 그 구절을 ‘매서운 기세로 쇠뇌를 당기니 일월과 빛을 다투고(日月光爭張弮怒)’로 고치고 싶었는데 원고에 미처 쓰지 못했네.”라 한 일을 청성이 전하고 있지요. 청성은 연암 박지원, 아정 이덕무, 담헌 홍대용, 초정 박제가 같은 북학파 명유들과 교유하였던 사람으로 정조의 문체반정을 옹호하는 일로 임금의 총애를 받은 문장가이었습니다.
농수의 문집 목판이 완성된 날에 제자 사암(思菴) 최기대(崔基大)가 두 글자가 이지러져 어떻게 윤문(潤文)할까 깊이 우려하고 있는데, 꿈에 농수 선생이 나타나 그 두 글자를 제시한 일도 있지요. 농수는 죽어서도 시작(詩作)을 할만치 시성(詩聖) 두보 못지않은 치열한 시혼을 가졌던 분이지요. 섭서가 농수 선생의 삶을 기리고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이의 시문학 세계를 평하였는데, 이런 말을 하고 있어요.
또 비학산에 올라 지은 시들에는 참으로 고결한 가을 기운이 감돈다. 황량한 절터의 석대에 서성이며, 남겨진 옛 빗돌을 읽고 옛 일을 생각하는 쓸쓸함, 빈 암자에 머물며 옛 부처님께 예불 드리는 시심이 드러난다(又登飛鶴山 秋氣正高潔 荒臺 讀遺碑 虛菴 禮古佛).
농수 선생이 비학산에 올라 스님들과 주고받은 시들을 언니도 가만히 읊조려 보시면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 소개할까 합니다.
上法廣寺見巨眼上人說華嚴經贈一律
법광사에 올라 거안스님이 화엄경을 설법하는 것을 보고 율시 한 머리를 줌
寂寞桑門裏 적막한 절집 안에,
惟師闡佛靈 스님만이 부처님의 신령스러움을 천명하네.
偶來法廣寺 우연히 법광사에 와서,
普說華嚴經 화엄경을 널리 설한다네.
雙樹風猶在 사라쌍수의 풍모가 아직 남아,
稠林夢欲醒 중생의 꿈을 깨우려 한다.
隨緣三宿客 인연 따라 온 세속의 나그네,
長嘯海山靑 바다와 산의 푸름을 길게 휘파람 분다.
上法廣寺贈會中諸上人 법광사에 올라 화엄회 중의 여러 스님들에게 줌
(一)
不揀新知與素親 새 벗과 평소의 친구를 가리지 않고,
聽經團坐雨花茵 불경소리 들으며 꽃비 떨어지는 자리에 둘러앉았네.
白頭歡喜緣何事 백발의 나도 무슨 일로 기뻐하는가,
欲向如來問後身 다음 세상 몸을 얻을지 부처님께 묻고 싶어서지.
(二)
我識瞿曇度世情 나는 알겠다, 고타마 싣달다가 세속의 정을 벗기려고 하였으나,
只緣癡鈍說分明 다만 어리석고 둔한 사람 때문에 설법을 분명히 하였음을.
有人曾見蓮臺否 사람 있어 서방정토 구품 연화대를 일찍이 보았는지 모르지만,
未必看經爲往生 반드시 경전을 보아야 극락왕생을 하는 것은 아니지.
(三)
名山後會正難期 명산을 뒷날 또 만날지 기약하기 어려워,
三笑花陰解手遲 삼소정의 꽃그늘에서 잡은 손을 더디게 놓았지.
一部華嚴未了意 화엄경 한 편의 이해하지 못한 뜻을,
數聲幽鳥報人知 깊숙이 숨은 새소리가 사람을 깨닫게 하네.
偶吟贈宇澄上人 우연히 읊어 우징스님에게 줌
隱寂與兜率 은적암과 도솔암을,
往來如我家 내 집같이 왕래하였는데.
山門日色異 절문에는 해 저물고,
禪室夜光明 선방에는 밤 등불 밝다.
坐處雲生壑 앉은 곳은 구름 이는 골짜기이고,
吟時鶴在柯 시를 읊조리는 때에 학이 나뭇가지에 앉는다.
居僧爲伴侶 여기 사는 스님과 반려가 되어,
相與誦波羅 서로 더불어 바라밀을 독송한다.
宿隱寂菴贈宇洪上人 은적암에 묵으며 우홍 스님에게 줌
佛燈靑熒照衣巾 불전 등촉의 푸른 불빛 옷과 유건을 비추는데,
淸夜談玄共上人 청량한 밤의 현담을 스님과 함께 한다.
三十八年重到容 삼십 팔년에 거듭 이른 얼굴,
自疑來去夢中身 이렇게 오고가는 것이 장자의 꿈속 몸인가 의심스럽군.
첫 두 머리는 선생이 대체로 마흔 중반의 제 나이가 되어 거안스님이 법광사에 와서 <<화엄경>>을 강론하는 산림법회에 참석하고는 느꺼움이 일어나 읊조려 스님들께, 뒤의 시들은 오암대사 의민 스님의 제자승인 우징, 우홍 스님들에게 주었던 시이지요. 선생은 비학산의 이들 암자에 머물며 스님들과 반야지혜의 현담(玄談)을 나누며 진속의 티끌들을 씻고, 삶의 심연에 투영된 당신 실존과 문득 마주치기도 하였을 테지요.
대한제국 시기에 산남의진(山南義陳) 의병들의 항일 전쟁 근거지가 되어 일본군이 올라와 불 지르고 깡그리 부수어 버린 안국사 터에 나뒹구는 중수비에 우징, 우홍 두 스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혜성(慧惺)스님 말씀하길 은적암과 도솔암은 법광사의 산내 암자였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어요. 안국사처럼 산남의진 의병 항일 전쟁을 도왔던 법광사가 이렇게 폐허가 된 것도 일본군의 방화와 파괴 때문이지요.
아래의 시는 월포 오두촌에서 남해현감 김석경의 손자로 태어나고 보경사에 주석하며 <<화엄경>>을 강론하고 시를 잘 지어 명유들과 어울려 ‘영남의 종장(宗丈)’으로 일컬어진 농수 선생의 절친한 벗이었던 오암당(鰲巖堂) 의민(毅旻) 스님(1710-1792)이 화답한 시입니다.
한 분은 진속에 머물며 흥해 고을의 아전으로 산 선비로 공자님을 스승삼아 살았고, 한 분은 출세간에 노닐며 내연산 보경사 암자에서 스님으로 수행한 부처님 제자였지요. 유교와 불교 문명이 음양으로 공존했던 조선시대는 인류 문명사에서 참으로 고귀하고도 성숙한 역사임에 틀림없음을 저는 두 분의 시에서 진하게 느낍니다. 이 시들을 읽는 저의 삶도 향기를 머금어 가는 것이겠지요. 언니에게 이런 시들을 편지에 담아 보내는 이 가을날에 남모를 행복감에 젖습니다.
次法廣寺 華嚴會 參崔上舍韻 법광사 화엄회에 참석한 최상사의 시에 차운함
謾求心外佛 속세의 마음을 벗어난 부처의 마음을 구하는데 게을러,
堪愧塔中靈 사리탑중의 부처님 신령스러움에 부끄러움을 견디기 어렵다.
勝會知誰力 이 훌륭한 화엄회의 모임은 누구의 힘인지 알겠으니,
衰年幸此經 노쇠한 나이에 이런 경험은 다행스러운 일일세.
翛然神欲醉 거침없는 자유스러움에 정신이 취할 듯하다가,
直下意還醒 곧바로 어리석은 마음은 다시 깨어나네.
法樂無人會 불법의 즐거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逢君眼忽靑 눈 밝은 그대를 만나니 홀연히 반가워지는군.
언니, 가을은 참 슬프고도 고결한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탑전에서 합장하고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참배하고, 이 절에 머물렀던 옛 사람들을 만나니 마음에 미묘한 법열이 일어났습니다. 저의 존재는 우주의 한 점으로 소멸하고 세사의 번뇌는 저 만치 삶 밖으로 물러나더이다. 해거름에 천지간의 나그네가 되어 홀로 비학산 기슭 옛 가람을 거니는 저는 천년 세월에 씻기고 돌이끼 푸른 당간 지주와 연화대좌, 고탑을 어루만졌습니다. 논두렁엔 벼가 여물고 밭둑엔 쑥부쟁이 꽃 화사하게 빛나더이다.
달력을 보니 벌써 구월구일 중양절이 다가왔습니다. 볏짚 태운 연기 오르는 들길을 지나 부처님 진리의 빛이 머무는 절터에 언니와 함께 오를 날을 손꼽아 기다려 봅니다. 바다 물빛은 맑고 들국화 향기 짙은 정녕 가절(佳節)인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