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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과 들국화
밀고 밀리던 전쟁이 잠깐 멈춘 고요한 아침.
언덕 위에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느티나무를 향하여 한 병사가 열심히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병사는 총을 가슴에 껴안고 몸을 납작 엎드린 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던 언덕이었다. 며칠간 밤낮없이 계속된 전투로 병사의 부대는 모든 것이 떨어지고 말았다.
총알도 떨어졌고, 포탄도 떨어졌고, 식량도 바닥이 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병사의 부대에 총알이 떨어진 때와 비슷한 시각에 적진 쪽에서도 총쏘기를 멈춘 것이다. 적군은 왜 전투를 중단하였을까?
적군이 다시 공격하여 올 시각은 언제쯤일까? 병사의 임무는 그것을 알아내는 일이었다.
언덕 여기저기에 병사들의 시체가 보였다. 아군의 시체도 보였고, 적군의 시체도 보였다. 언덕 여기저기에는 들국화도 보였다.
흰색 들국화와 보라색 들국화가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다.
병사는 흰색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 철모의 위장망에 꽂았다. 다행히도 병사가 언
덕 위까지 오르는 동안 한 방의 총알도 날아오지 않았다. 병사는 재빨리 느티나무 둥치에 몸을 숨기고 다람쥐처럼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무성한 나무 잎사귀에 몸을 숨기고 망원경으로 적의 부대가 있는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새벽까지 불을 뿜던 적의 대포는 잠자듯 엎드려 있고,
적의 병사들이 따발총을 가슴에 안고 쓰러져 자고 있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병사는 망원경의 초점을 좀더 멀리 맞추어 보았다. 초등 학교가 있고, 면사무소가 있고, 소방서의 높은 망루가 우뚝 서 있던 마을.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망원경에 잡히는 것은 불타 버린 마을의 황량한 풍경뿐이었다. 병사의 눈이 뿌옇게 흐려 왔다. 그 마을은 바로 병사의 집이 있는 고향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병사는 오늘 아침에 위험한 정찰 임무를 자청하였다.
"너는 그런 일을 하기엔 너무 어려."
"이번 일에 나보다 적격자는 없시오. 난 저 쪽 지리를 손바닥의 손금처럼 환히 알고 있시요. 나를 보내 주시라요."
그래서 그는 정찰대로 뽑히게 되었다.
한 달 전, 병사는 고향 집에 갔었다.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던 병사의 부대는 그의 고향 땅까지 밀고 올라갔었다. 그러나 곧 다시 밀리기 시작하여 지금의 이 언덕을 경계선으로 사흘째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니, 살아 계시기만 하시라요. 내레 꼭 만나러 가갔시오."
한 달 전에 고향 마을로 달려가 그의 집 대문을 들어섰을 때, 아버지께서 쓰시던 사랑채는 폭격으로 폭삭 내려앉았고, 뒤꼍의 감나무는 포탄을 맞고 허리가 부러져 있었다.
그러나 살림집인 안채만은 고스란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어머니 생각을 하며 부엌문을 열었다. 부엌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말끔하였다. 시렁에 가지런히 얹혀 있는 놋그릇이랑 사기그릇들도 평소 그대로였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꿀을 넣어 놓으시던 노란색 사기 항아리도 시렁에 그대로 얹혀 있었다. 그는 학교에 갔다 오면 늘 어머니를 부르며 부엌문을 열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솥에서 알맞게 쪄진 감자나 고구마를 꺼내 주시곤 하셨다.
어느 날, 일찍 집에 돌아온 그가 부엌문을 열어 보니 어머니께서 안 계셨다. 배가 고프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해서 시렁에 얹혀 있는 꿀단지를 내려서 안에 든 노란 꿀을 둘째 손가락으로 꾹꾹 찍어서 빨아먹었다. 물론 어머니께서 아시면 꾸중들을 일이었다. 어머니께서 항아리 속에 넣어 두시는 꿀은 형제들이 체하였거나 아버지께서 약주를 많이 잡수신 날에 비상약으로 쓰는 상비약이었기 때문이다
. 그 뒤로도 그는 어머니 몰래 가끔 꿀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곤 하였다.
그는 텅 빈 부엌에 멍하니 서 있다가 꿀단지 앞으로 걸어갔다. 꿀을 찍어 먹으려고 단지를 내렸다. 그 때, 착착 접힌 하얀 종이가 사뿐히 부엌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워서 펴보니 어머니의 글씨였다. 어머니께서 연필에 침을 묻혀 꼭꼭 박아 쓴 글씨가 눈물 속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때 그의 부대는 사기 충전하여 북진하는 길이었고, 사령부에서는 인제 며칠 안에 백두산 상상봉에 태극기를 꽂고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일러 주었기에,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 곳을 떠났다. 가족의 소식을 알려고 지원하여 남쪽 군대가 된 일, 인제 며칠 뒤에 전쟁을 끝내고 어머니를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어머니의 편지 끝에 간단히 적어서 꿀단지 밑에 다시 넣어 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그의 부대는 후퇴하게 된 것이다.
병사가 올라온 반대쪽 언덕을 한 병사가 풀섶에 몸을 숨기고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총을 가슴에 껴앉고 무릎으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나무 위에 있는 병사와 피부색이랑 눈동자의 색깔이랑 머리카락의 색깔이 똑같았다. 다만, 입고 있는 군복의 색깔이 조금 다를 뿐이었다.
나무 위의 병사는 푸른색 군복에 푸른색 철모를 쓰고 있는데, 그는 누런색 군복에 누런색 헝겊 모자를 쓰고 있었다.
누런 군복의 병사도 언덕을 기어 올라오며 병사들의 시체를 보았다. 아군의 시체도 보았고 적군의 시체도 보았다. 그러나 언덕 여기저기에는 들국화도 피어 있었다.
보라색 들국화, 흰색 들국화가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다. 누런 군복의 병사는 보라색이 도는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 군모에 꽂았다.
들국화 옆에는 딸기나무도 있었다. 초록색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빨간 딸기에 투명한 아침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병사는 얼른 딸기 한 알을 따서 입 속에 넣었다. 새콤달콤한 딸기가 빈 뱃속에 흘러들자, 잠자고 있던 허기가 후다닥 깨어났다. 병사는 허둥지둥 주위의 딸기들을 훑어다가 입 속으로 쑤셔 넣었다.
정신 없이 딸기를 먹다가 그는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였다.
'여기는 위험하니, 따 가지고 가서 저 느티나무 위에서 먹어야겠군.'
병사는 풀섶에 몸을 웅크리고 딸기를 따서 주머니에 넣기 시작하였다. 주머니마다 딸기가 가득 찼을 때, 병사는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언덕 위에 도착한 누런 군복의 병사는 재빨리 느티나무 아래로 기어가 다람쥐처럼 나무 둥치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는 나뭇잎이 무성한 큰 가지에 걸터앉아 망원경으로 맞은편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새벽녘까지 불을 뿜던 대포는 자는 듯이 엎드려 있고, 소총을 껴안은 적의 병사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자고 있었다.
왜 쉬고 있는 것일까? 언제쯤 다시 공격할 것인가? 좀더 높은 가지에 올라가 멀리 있는 적군의 후방까지 보면 무언가 좀더 알아 낼 수 있지 않을까? 누런 군복의 병사가 높은 가지로 올라가기 위하여 고개를 들었다.
"꼼짝 마!"
날카로운 소리였다. 병사가 고개를 제껴 위쪽을 보니 한 병사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푸른 군복에 푸른 철모를 쓴 것만 보아도 적군임이 분명하였다. 누런 군복의 병사는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총 이리 내고, 머리에 손 얹어!"
그는 총을 벗어 푸른 군복의 병사에게 내밀었다. 아, 이렇게 죽게 되다니!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서 죽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더구나 저 병사는 나와 같은 남쪽 사람이 아닌가? 내가 북쪽 군대에 의용군으로 끌려오지 않았다면 저 병사와 나는 같은 편이 아닌가? 세상에 자기 편의 총에 맞아 죽게 되다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아, 하느님! 저를 한 번만 살려 주세요. 그는 마음 속으로 울부짖었다.
"죽이지는 않겠어."
푸른 군복의 병사가 말하였다. 앳된 음성이었다.
"그 대신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 그렇지 않으면……."
누른 군복의 병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부대는 왜 전투를 중지했지? 언제 다시 공격해 올 거지?"
"……."
"대답 못 하겠어?"
푸른 옷의 병사가 가슴을 총구로 쿡쿡 찔렀다.
"무기가 떨어졌어."
"죽고 싶어?"
푸른 군복의 병사가 어깨를 총구로 건드렸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넌 우리가 언제 다시 공격할 것인지 알아보러 온 거지?"
푸른 군복의 병사가 말하였다.
"어, 그걸 어떻게 알았지?"
누런 옷의 병사가 물었다.
"그야……."
푸른 옷의 병사는 대답 대신 킥킥 웃었다. 그런 모습이 꼭 장난꾸러기 학생 같았다. 그러나 입술이 하얗게 튼 것으로 보아 갈증과 허기가 역력한 소년의 얼굴이기도 하였다.
"배고프지? 나한테 딸기가 있는데……."
누런 옷의 병사가 말하였다.
"딸기?"
순간 푸른 옷을 입은 병사의 눈이 빛났다.
"주머니 속에 있어. 언덕을 기어 올라오다가 땄어."
"꺼내 봐. 왼손으로……."
누런 옷의 병사는 오른손은 머리에 얹은 채, 왼손으로 주머니에서 딸기를 꺼내었다. 그 때, 푸른 옷을 입은 병사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나 푸른 옷의 병사는 미심쩍다는 듯 다시 말하였다.
"먹어봐."
누런 옷의 병사가 딸기를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리며 삼키는 것을 보고서야 푸른 옷의 병사는 딸기를 먹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먹던 푸른 옷의 병사가 멋쩍은 듯이 말하였다.
"너도 먹어."
푸른 옷의 병사와 누런 옷의 병사는 허겁지겁 딸기를 입 속으로 쑤셔 넣었다.
"내 입술도 그렇게 빨개?"
한참을 먹던 푸른 옷의 병사가 누런 옷의 병사에게 물었다.
"응. 여자 같아."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쿡쿡쿡 웃었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 것 같아?"
푸른 옷의 병사가 빨갛게 물든 입술로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글쎄?"
"이번 전쟁에서 어느 편이 이길 것 같아?"
"글쎄?"
"난 아무도 이기지 말았으면 좋겠어. 아니 양쪽 다 졌으면 좋겠어. 난 고향이 북쪽이
거든. 저기 저 마을이 내 고향이야."
누런 군복의 병사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같은 편이라는 희망이 와르르 허물어지는 소리가 가슴에서 들렸다.
"그런데 왜 남쪽 군대에 소속해 있지?"
누런 옷의 병사가 의문의 눈초리로 물었다.
"남쪽의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전쟁이 터졌어. 글세, 갑자기 전쟁이 나
더니 삼팔선이 막혀 집에 갈 수가 없었어. 그래서 고향 소식을 들으려고 북진하는
군대에 자원을 했지. 부대가 우리 동네를 지날 때 가 보았더니 식구들은 아무도 없고
어머니 편지만 있었어. 어머니가 보고 싶어."
푸른 옷의 병사는 품 속에서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서 누런 옷의 병사에게 보여 주었다.
"흠! 우리는 참 이상한 운명이군. 나는 남쪽에서 왔어. 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지. 밀고 내려온 북쪽 군대가 나를 의용군으로 끌고 왔어. 그러니 우리는 완전히
위치가 바뀐 셈이군."
누런 군복의 병사가 한숨을 토하였다. 순간, 푸른 군복을 입은 병사의 눈에 번개 같은 빛이 번쩍 빛났다.
"좋은 수가 있시오!"
푸른 옷의 병사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만약에 우리가 옷을 바꾸어 입고 서로 반대편으로 내려간
다면 돌아가지마자 가슴에 총알을 받을 거야."
"그거이 아니야요."
푸른 옷의 병사는 주머니에서 몽당연필을 꺼내어 어머니의 사진 뒤에다 무언가를
적더니 누런 옷의 병사에게 내밀었다.
"우리 집 주소야요. 만약에 이 전쟁이 한 달 안에 끝나지 않으면, 수고스럽지만 우리
집에 가서 소식 좀 전해 주시라요. 우리 오마니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만 아셔도
기뻐하실 거야요."
푸른 옷을 입은 병사의 눈이 희망으로 타올랐다. 누런 군복을 입은 병사의 눈빛도
서서히 타올랐다.
"아저씨 주소도 적어 주시라요. 제가 전해 드리갔시오."
누런 군복의 병사도 어머니의 주소와 약혼자의 주소를 적어 푸른 군복의 병사에게
내밀었다. 푸른 군복의 병사는 주소를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은 뒤에 어깨에서 따발
총을 벗어 누런 군복의 병사에게 내밀었다.
"아저씨, 이거요."
누런 군복의 병사는 총을 받고 고맙다는 표시로 고개를 한 번 숙여보였다.
"얘, 그런데……."
누런 군복의 병사가 주저하듯이 말하였다.
"아까 왜 나를 살려 주었지? 너는 나를 쏠 수도 있었는데……."
"아, 그거이요? 들국화 때문이야요. 아저씨 모자에서 꽃을 보았을 때, 총쏘기가 싫
었시오.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나쁜 사람이 없다고 우리 오마니가 그랬시오."
푸른 옷의 병사가 웃을 때, 그의 철모에 꽃힌 흰색 들국화도 고개를 끄덕이듯 흔들렸다.
"그리고 들국화는 우리 오마니께서 제일 좋아하시던 꽃이야요. 어머니께서는 개울
에 빨래를 갔다가 오실 때에 들국화를 꺾어 옷섶에 단추처럼 꽂고 오시고는 했시오.
그리고 가을이면 창호지 사이에 들국화를 넣고 내 방문을 발라 주시곤 했시오.
들국화를 넣으면 방에서 향기가 나고, 고 향기 때문에 행운이 찾아온다고 하셨시오……."
"그랬구나……. 고맙다. 너의 행운을 빈다. 어머님을 꼭 만나기를……."
"아저씨도 행운을 빌어요. 고향에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겠시오."
그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서둘러 느티나무 아래로 내려
갔다. 푸른 옷의 병사는 남쪽으로, 누런 옷의 병사는 북쪽으로. 그들은 조금 전에 기
어 올라왔던 언덕을 이제는 가슴을 펴고 걸어서 내려갔다.
첫댓글 한국교육개발원 고 신세원 원장님의 실화가 바탕이 된작품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