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이른바 동태 복수법(반좌법)이라고 불리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가르침을 더욱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을 강조하신다. '
그래서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마저 돌려 대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살면서 억울한 일이 많습니다.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하고,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으로 소외를 당하고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벌이나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기도 하고,
누명을 쓰거나 이유 없이 해를 입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기도 합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에게 고통을 안겨 준 사람에게 그만큼
하느님께서 갚아 주시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내가 받은 슬픔과 고통을 그들도 똑같이 받아 보아야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정의가 바로 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탈출 21,24)는 ‘복수 동태법’이라는 법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와는 반대로 더 억울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려거든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구나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느냐고 항변하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무조건 참아라.’, ‘무조건 용서해라.’,
‘무조건 사랑해라.’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복수의 칼날을 세우지 말라는 면에서는 맞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음의 성경 대목과 함께 보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 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끌려가시어 대사제 한나스의 심문을 받으십니다.
그때에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께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18,22)며 예수님의 뺨을 쳤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무조건 맞기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18,23)
예수님께서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불의에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왼뺨마저 돌려 대라는 것은 ‘무조건 참고 참아라.’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실제 많은 교우가 ‘참고 참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며
자신의 화를 털어놓습니다.
‘착한 사람’에 대한 강박 관념에 시달리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말하는 ‘착함’은 ‘정의’가 배제된 것이 아닙니다.
덮어놓고 굴복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 말씀은 불의에 무조건 당하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 대항하되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실제 예수님께서는 불의에 항거하시면서도
왼뺨마저 내놓으시는 용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이 정신에 따라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하느님만이
악인을 이길 수 있다네.
오직 그분만이
심판에 대한
권한을 갖고 계시므로
끓어오르는
우리의 분노 위에는
겸손과 인내라는
십자가를
얹어 놓아야 한다네.
하느님께 대한 신뢰만이
우리가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라네.
- 김혜선 아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