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9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요한 5,1-16
사람에겐 이 두 질문의 답을 찾기 전까지는 안식이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양 문 곁에 있는 벳자타 못에서 병의 치유를 바라며 38년이나 매일
그곳에 나와 앉아있는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선 요한에게 ‘양 문’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40’을 채워야 합니다.
숫자 ‘40’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이 완성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숫자입니다.
38년은 ‘은총과 진리’, 곧 ‘2’가 모자란 숫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를 충만히 지니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 은총과 진리가 어떻게 전해지는지 보여주십니다.
먼저 ‘벳자타’는 ‘올리브의 집’이라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은총은 보통 기름으로 상징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곧 ‘은총’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온 그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으로써 벳자타 연못의 병자는 완전히 그리스도의 양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은총과 진리를 받기 전에 38년이나 은총을 바라며 연못에 머물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벳자타 연못에 가끔 천사들이 내려오는데 그때면 물이 출렁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가는 한 사람만 치유를 받습니다.
하늘의 은혜를 바라며 평생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을 주님은 불러주십니다.
‘가톨릭 신문’에 카이스트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이론물리학연구센터에 재직 중이던
뛰어난 물리학자가 사제의 길을 택한 예수회 김도현 바오로 신부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외아들인 그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친척들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오늘 벳자타 연못에서 일어난 일을 볼 수 있습니다.
김 신부는 50년 중 30여 년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시기였다고 표현합니다.
38년은 안 돼도 30년을 찾은 것입니다.
76년도 4월에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갑자기 쓰러지셨고 수술은 해야 하지만 사실상
사망하실 가능성이 더 컸던 시기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뇌종양을 수술해서 살아나신 분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셨고 그 후유증을 견디며 사셔야 했습니다.
이때 친가의 유일한 천주교 신자께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인간의 생사를 쥐고 계신 분은 따로 계시다” 라는 말씀과 함께 세례를 받기를 권유했습니다.
이때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 뒤로 계속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미사도 다니고 냉담도 하며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공부를 잘하여 카이스트에 입학하였습니다. 삶은 하루하루가 고난이었습니다.
굉장한 경쟁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적이 안 되는 학생들은 아래서부터 퇴학당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도 몇 명씩 자살하는 학생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실제로 자신이 잘 아는 친구도 자살하였습니다.
여러 친구가 학업 때문에 목숨을 끊는 것을 보며 다시 76년에 자신에게 닥쳤던 질문이 심각하게 다시 올라왔습니다.
“인간의 생과 사는 과연 무엇인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왜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죽음 이후의 세상은 무엇인가?”
물론 주위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지만, 과학을 공부하다 보니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신앙에서는
다들 멀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과학이 죽음과 내세까지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았어도 더는 벳자타에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생과 사를 주관하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지 않으면 주님은 그 사람에게 은총을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나 김 신부는 이 질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김 신부는 그런 사조에 빠지지 않고 대학원 다니면서도 오히려 매일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논문 지도교수가 그런 것을 원치 않았음에도 그는 더 중요한 질문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악착같이 매일 미사와 묵주기도 성체조배를 했습니다.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2000년에 어머니와 상주 가르멜 수녀원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원장 수녀님이
“수도 성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를 통해서는 은총을, 이 수녀님을 통해서는 진리가 다가온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펄쩍 뛰셨고 김 신부는 귀가 솔깃했습니다.
수녀님은 가르멜보다는 예수회에 가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그 이후 예수회 성소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서울대 이론물리학연구센터에 가서 일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결혼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습니다.
이때 자신의 학년에서 가장 유능하여 3년에 대학을 끝내고 또 3년에 박사 학위를 마쳐
독일 연구원에서 경력을 쌓고 있던 누구나 부러워하던 한 친구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됩니다.
2004년의 일입니다.
며칠간 큰 충격에 빠져 있다가, 다시 생사를 쥐고 계신 분 그리고 삶의 의미를 바라볼 수 있었고 수도회 입회의 마음을 굳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처음의 질문이 인간의 생사를 쥐고 계시는 분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었다면, 이젠 그분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은총과 진리가 주는 답변입니다.
먼저 여러 기적과 같은 체험을 통해 생사를 쥐고 계신 분이 당신임을 알려주시고 그다음엔 진리를 통해 죄짓지 말고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해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기도하던 중 한 성경 구절이 머릿속을 스쳐 갔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르 8,35)
순간 세상에서 무엇을 가진다 한들 결국 하느님 품에서 제대로 죽는 게 가장 좋은 삶이고, 다른 이들 또한 그렇게 잘 죽도록 도와주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주님, 이제 저는 그냥 무조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 묻는 것을 포기하면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생과 사를 주관하는 분이 계신지, 나는 왜 생겨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입니다.
벳자타 병자의 38년은 생과 사를 주관하는 존재를 찾는 마음입니다.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찾는 마음입니다.
이 두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진리로 응답해 주십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하느님의 양의 무리에 들게 됩니다.
벳자타 연못은 하느님 나라의 양의 무리에 들기 위해 반드시 고민해야만 하는 그곳에 끝까지 머물 줄 아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 마음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주님은 은총과 진리로 그 사람을 당신 우리로 초대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면 아직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9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에제키엘.47,1-9.12
요한 5,1-16
자비하신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언젠가 반드시 내 인생에 봄날이 찾아오리라!
한해 두해도 아니고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꼼짝못한 채 앓아누워있던 병자의 외침이 남의 말 같지 않습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복음 5장 7절)
저도 돌아보니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끝도 없이 길고 어둔 터널을 빨리 빠져나가 버려고, 그렇게 발버둥쳐도 스스로의 힘으로 안 되더군요.
깊고 축축한 수렁에서 벗어나보려고 기를 써봐도, 그럴수록 더 깊이 빠져들더군요.
빨리 나아보려고, 그래서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도 허사였습니다.
아무리 기를 써도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있더군요.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고,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며 모든 것 다 포기하고 내려놓는 순간, 위로부터 가느다란 희망의 빛이 내려왔습니다.
오늘 은혜롭게도 벳자타 못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38년 차 환자 역시 그랬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10년, 20년도 아니고 38년입니다.
당시 유다 사회 평균 수명입니다.
그는 거의 한평생을 병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냥 병도 아니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꼼짝달싹 못하는 중증의 병이었습니다.
그의 엄청난 인내심이 놀랍니다.
기대할 것이라고는 단1도 없는 상황에서도 끝끝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자신에게도 기회가 오겠지, 하는 간절한 기대를 안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 무한한 인내의 결실이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유심히 주변을 살펴볼 일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래서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인 우리들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오늘 은혜롭게도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은총을 입은 환자가 평생에 걸쳐 바친 기도는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언젠가 반드시 때가 오리라. 그때 나는 힘차게 일어서리라.
단 한 순간이라도 사람답게 살다가 죽으리라. 언젠가 반드시 내 인생에 봄날이 오리라!”
환자가 견뎌온 그 오랜 인고의 세월이 결국 오늘 결실을 맺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자비가 환우의 비참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질병이든 영혼의 질병이든, 우리 인간의 병은 여간해서 잘 낫지 않습니다.
천천히 주님께서 개입하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들과 더불어 주고받은 상처, 우리가 부모로부터 겪은 애정결핍,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끼고 사는 극도의 미성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순식간에 치유되지 않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면,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면,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아주 천천히 은총의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29일 [사순 제4주 화요일]
복음: 요한 5,1-16: 건강해지고 싶으냐?
벳자타 연못에서 38년간이나 고생한 병자가 등장한다. 환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38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보시고 다가가신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6절) 하고 물으신다. 환자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7절) 사랑이 없는 곳에는 도와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환자의 청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누워있는 병자에게 선뜻 다가가신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를 따뜻하게 대하신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8절) “일어나라!”라는 것은 치유를 내린다는 뜻이며,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는 말씀은 치유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네 들것을 들고”라는 것은 지금까지는 죄에 억눌려 있었지만, 이제는 너 자신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너 자신을 잘 다스리면서 가만히 있지 말고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곳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여 사랑해야 하는 주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아직 주님께 도달하지 못했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있다. 그 이웃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분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 받은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들것을 지고 걸어갔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요.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10절) 한다. 즉, 치유를 기다릴 순 없었다 해도 왜 들것을 지고 가라고 하였는가? 이다. 그는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의 권위 뒤로 숨는다.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11절) ‘나를 치유해 주신 분의 명령을 내가 따르지 않을 이유가 뭐요?’라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치유 받았음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치유 받은 남자를 성전에서 만나신 예수께서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14절)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온 그가 죄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어 그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은 그가 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아신다는 뜻도 내포되어있다.
어제까지 우리는 들것에 누워있던, 물이 출렁거려도 우리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곁에 계시다. 우리를 들것에서 일으키셨다. 또한 들것을 들고 우리가 입은 은혜를 확인했다. 다시는 들것에 다시 쓰러져서는 안 된다. 항상 주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걸어가야 한다. 더 나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