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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묵상글 (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 믿음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면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4: 46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7:23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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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04 04:20
- 믿음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우리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라고 하는 것에 신자라면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내 믿음,
예, 내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이냐? 그것이고,
모든 신자가 다 그렇게 믿느냐 그것입니다.
이는 신자라면 하느님 존재를 믿지만 나의 하느님으로 믿느냐 그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나의 하느님으로 믿지는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이나 중동에는 있지만
자기가 사는 곳에는 안 계시고 자기 삶 가운데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객관자로 계실 뿐이지 토마스 사도가 고백하듯이
나의 하느님이시고 나의 주님이신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라는 말도
우리는 이런 뜻에서 받아들여야 하고
이런 뜻에서 추종자가 되어야 하기에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영도를 받는 진정한 추종자의 요건을 보겠습니다.
우선 진정한 추종자는 예수님의 영도를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 이런 당연한 말을 제가 하느냐 하면 요즘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자들이
예수님의 영도를 받지 않고 전광훈이라는 작자의 영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히브리서가 우리 믿음의 영도자를 바라보자고 하는데
그들은 영도자인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전광훈이를 보고
주님 말씀은 듣지 않고 노상 전광훈이의 유튜브를 봅니다.
진정한 추종자는 우선 보는 것부터 잘해야 합니다.
진정한 추종자는 자기 영도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습니다.
그런데 눈을 떼고 있다면 주님은 영도자가 아니고 그는 추종자가 아닙니다.
다음으로 진정한 추종자는 말 그대로 추종을 잘해야 합니다.
영도자를 보긴 보지만 멀리서만 보고 추종까지는 하지 않고,
따라가더라도 멀찍이 따라간다면 진정한 추종자가 아닙니다.
제 생각에 우리가 많이 걸리는 것이 이것일 겁니다.
집중해서 보지 않고 멀찍이서 보고,
바짝 따라가지 못하고 멀찍이 따라는 가는 것 말입니다.
오늘 히브리서가 주님이 우리 믿음의 영도자일 뿐 아니라 완성자라고 하는데
우리가 믿음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묻습니다.
주님이 우리 영도자입니까?
우리는 그분의 추종자이고
그분의 영도로 믿음을 완성하는 진정한 추종자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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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2.04 06:24
신부가 된 지 몇 년 안 되었을 11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자동차 문을 닫다가 허리에 큰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그냥 주저앉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근처에 사는 신부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청했고, 이 신부의 도움으로 바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신학생 때 테니스를 무리하게 쳐서 허리를 다쳤었는데, 그 자리였던 것입니다. 입원 후 치료받으면서 다시 일상생활을 할 정도가 되어 퇴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해에도 병원에 또 입원했습니다. 이번에도 11월이었고, 물건을 들다가 주저앉은 것입니다. 그다음 해에는 어떠했을까요? 맞습니다. 또 11월에 또 입원했습니다. 그다음은 어떠했을까요?
다행히 그 뒤 허리 때문에 입원한 적은 없습니다. 허리 운동을 꾸준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합검진 때, 허리 검사를 했는데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허리 근육이 잘 발달하여서 이제 허리 아플 일은 없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들어서일까요? 더는 허리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11월이 되면 입원했을까요? 아마 ‘허리가 또 아플 거야.’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제한적 믿음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믿음이 중요합니다. 부정적 믿음을 갖게 되면, 여기에서 탈출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믿음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줍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자기 믿음대로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았습니다. 회당장에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르 5,35)
이런 말에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의 일을 비웃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도록 하시는 주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논리를 앞세워서 부정적 믿음을 계속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을 향해 비웃음도 던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통해 가능한 것을 부정적인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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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탐욕은 일체를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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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하혈병을 치유 받은 여인 이야기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야이로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간청을 드립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이 애틋한 사랑과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라 나섭니다. 비로소 딸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막 길을 돌아서는데, 사람들이 소식을 전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르 5,35)
참으로 모든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드는 순간입니다. 오로지 한 곳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는데,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가 싶더니 와르르 무너져 버린 참담한 순간입니다. 그야말로 하염없이 넘어지는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순간을 맞이하면, 우리는 어찌하는가? 이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이 순간, 하염없이 넘어지고 말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릴 것인가? 사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응답해야 할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그렇습니다. 바로 이 죽음의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길러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생명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예, 주님!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이 믿음의 시련이기도 했지만, 바로 기회의 순간이었습니다. ‘따님이 이미 죽었으니,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을 따를 것인가? 라는 결단의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야히로의 믿음을 끌어올리십니다. 딸의 병을 고쳐주실 분으로 믿었던 예수님을, 이제는 이미 죽은 딸을 살려내실 수 있는 분으로, 그 믿음을 끌어올리시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자라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더 깊은 믿음에로 이끄신 까닭입니다.
참으로 믿음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 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 5,41)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일어나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일어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일어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진리 안을 걷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마르 5,30)
주님!
군중 속에 있지만 말고, 당신 옷에 손을 대게 하소서!
쫓아다니지만 말고, 당신 옷을 꼭 붙들고 따르게 하소서!
간절함과 믿음으로 말씀의 옷깃을 꼭 붙들게 하소서!
당신 말씀의 옷을 입히시어 당신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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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으로 무릎을 꿇자
어려서의 기억입니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께서는 놋쇠 밥그릇 뚜껑을 따듯하게 하여 배에 올려놓고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때때로 “내 손이 약손이다”하시며 배를 만져주시면 곧 통증이 멈추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배를 차게 하면 탈이 나니까 밥그릇 뚜껑을 이용해 따뜻하게 해 줌으로써 그 원인을 치료해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담긴 약손이었으니 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딸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큰 고통이 회당장을 무릎 꿇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고통도 은총의 한 부분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시련과 역경, 고통, 눈물을 거두어 주리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믿음으로 승리하여라!
일반적으로 회당장처럼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 근심 걱정거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내면을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그 고통을 통하여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무릎을 꿇고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5,23). 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만약에 회당장이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슬픔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아이를 살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위도 있고 부러워할 것 없는 회당장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딸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그보다 더한 일도 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남모르는 근심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 못 할 고민이나 근심 앞에서 회당장처럼 무릎을 꿇는지,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4,39) 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인 제자들의 모습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 어둠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3-5). 오늘은 믿음의 손이 그리운 날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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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페루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이 왔습니다. 잠시 머물려고 했는데 어느덧 27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가정 방문을 하면서 어린 딸과 함께 사는 눈이 먼 엄마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집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수녀님은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후원자와 다시 방문했을 때입니다. 후원자는 수녀님께 엄마를 병원에 데려가 보라고 했습니다. 혹시 볼 수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수녀님은 엄마를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는 검사한 후에 빛을 받아들이기에 수술하면 다시 볼 수 있을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의사가 수녀님에게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이 자매와 어떤 사이인데 이렇게 데려왔습니까? 수녀님은 선교사라고 했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모두가 한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수녀님의 말을 들은 의사는 수녀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그 엄마의 눈을 뜨게 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한쪽 눈을 뜨게 하는 비용을 도와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하느님께 자기도 착한 일을 하였다고 말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엄마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수녀님이 엄마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눈을 떠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딸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고 싶습니다. 수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한 일도 전염이 됩니다. 후원자의 따뜻한 마음이 의사의 마음을 움직였고, 눈이 먼 엄마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영어 시간에 배웠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동네 길가에 뾰족하게 나온 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지나다니면서 그 돌 때문에 넘어지곤 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입니다. 마을의 한 청년이 곡괭이를 가지고 와서 뾰족하게 나온 돌을 캐기 시작했습니다. 빙산의 일각처럼 돌의 일부만 나온 것이지, 커다란 돌이 묻혀있었습니다. 청년이 돌을 캐내기 시작하니,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돌을 치웠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넘어지는 일 없이 길로 다닐 수 있었습니다. 45년이 지났는데도 그때 읽었던 글이 생각나는 건, 제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길가에 떨어져 있던 타이어를 옮긴 적이 있습니다. 차들이 다니는 길이고, 자칫 타이어 때문에 사고 날 수 있기에 옮기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많은 증인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복음을 보면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종을 위해서 예수님께 치유를 청했던 백인대장이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굳이 오시지 않고, 한 말씀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이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는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여관에 데리고 가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 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신앙을 갖는다는 건, 증인이 되는 겁니다. 교회가 2000년을 이어올 수 있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 증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탈리타쿰’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나태함에서 성실함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기적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기적이 따라오는 겁니다. 오늘은 중용 23장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하게 하고, 남을 감동하게 하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 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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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우리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 주위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엄청난 군중 사이를 비집고 스승님을 외치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자 모두 길을 내주었습니다. 그가 스승님 발 앞에 엎드렸는데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은 회당장이 아닌가? 저렇게 높은 사람이 여기 어인 일인가?’라고 말입니다.
그가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스승님은 회당장이라는 사람의 집을 향해 걷고 계셨습니다. 하늘의 구름이 움직이듯 군중도 스승님을 호위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시던 스승님이 뒤를 돌아보시며 누군가를 찾고 계십니다. 그렇게 둘러보시는데 한 여인이 스승님 앞에 나와 울음을 터트립니다. 아주 왜소한 모습에, 남루한 옷차림이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녀가 울음과 말을 섞어 뱉어내는데 잘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의 스승님을 저는 좋아합니다. 스승님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몸뿐이 아닌 마음의 병에서도 벗어나 건강해지거라.”
다시 길을 가려 돌아서는데 회당장의 얼굴빛이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 아마도 딸이 죽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에 도착해 딸이 죽어있는 방에 들어갔습니다. 스승님은 그녀 곁에서 손을 잡고 다정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 순간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녀만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아까 그 여인도 일어난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주위의 모든 사람도 다시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넘어져 있던 믿음을 일으켜 세워주신 것입니다.
‘탈리타 쿰, 탈리타 쿰, 탈리타 쿰’ 여인처럼, 회당장처럼 주님 앞에 나와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그럼 기꺼이 우리의 집에 오시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아직입니다.
이제 2월입니다.
1월에 결심했던 것을 벌써 포기하려 하십니까?
아직 이릅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 겨우 2월입니다.
영화로 치면….
이제 광고 끝나고 막 본 영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10분의 1도 안 지났습니다.
포기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늦지도 않았습니다.
일 년의 시작~
지금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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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과 치유의 여정
“믿음의 영도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
“앞서 난 발자국을 따라 밟아본다. 먼저 간 사람이 길을 냈다면 나 또한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다산>
“안연은 이렇게 말했다. ‘순임금이 누구며 나는 누군가? 하려고만 하면 누구나 그와 같을 것이다.”<맹자>
바로 믿음의 여정이 그러합니다. 누구나 믿음의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믿음과 치유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일과가 참 분주합니다. 예수님의 참 모습이 잘 드러나는 오늘 복음의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의 구마이적사화에이어 오늘 복음은 주님의 소생이적사화와 치유이적사화가 뒤따릅니다. 예수님의 이적에 앞서 수혜자의 믿음이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믿음의 본보기가 야이로라는 회당장이요 그는 호숫가에 계시는 예수님을 찾아 그분 발 앞에 엎드려 간곡히 청합니다. 극진한 믿음이 표현이 이런 겸손한 모습입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야이로의 겸손하고 간절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은 즉시 그와 함께 나서십니다. 이어지는 또 한분 믿음의 모범이 하혈병을 앓던 여자였습니다. 무려 열두해 동안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진 여자였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이런 악조건속에서도 절망이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혈병을 앓던 여자는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살며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과연 그 여자는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알아 챈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댓는지 물으며 사방을 살피십니다. 그 여자는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얻드려 사실대로 다 아룁니다. 앞서의 회당장처럼 참 절박한 믿음에 지극히 겸손한 자세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치유선언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혈병의 치유의 구원에 병자의 믿음이 결정적이었음을 봅니다. 이어 계속되는 야이로 회당장 딸의 치유과정중 예수님의 말마디도 큰 위로가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회당장에 대한 격려가 흡사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참 다정하게 들립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회당장 집에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순간에 꼭 대동했던 셋 애제자들입니다. 회당장의 집에 이르러 소란한 광경과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목격한 주님의 처신도 지극히 평온하고 침착합니다. 예수님의 큰 믿음을 엿볼수 있는 장면입니다.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에 들어가십니다. 살아 있는 장면을 보는 듯 오늘 복음의 장면 어느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살리시니 이 또한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탈리타 꿈!”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말인데 참 은혜롭습니다. “일어나라!” 바로 부활을 상징하는 말마디입니다. 그대로 미사중 우리를 격려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좌절하여 무기력중에 있을 때, “탈리타 쿰!” 하며 벌떡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평생 마음에 담고, 입에 달고 살아야 할 말마디가 “탈리타 쿰!” ‘일어나라!’요, 하나 더한다면 벙어리 입을 열게 하신 “에파타!” ‘열려라!’는 말마디입니다.
소녀는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니니,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 열두 해 하혈병 앓던 여자가 고생한 햇수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서 넋을 잃었다 합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믿음과 예수님의 치유의 구원 응답을 통해 크게 배우고 깨우쳤을 사람들입니다. 아마 회당장 딸의 소생과 더불어 이들의 영혼도 다시 살아나는 치유의 구원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더불어 주님을 만났을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한두번 치유가 아니라 평생 치유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만날 때 치유의 구원이니, 치유의 여정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 믿음의 여정과 함께 감을 봅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역시 믿음의 선택, 믿음의 훈련, 믿음의 습관, 믿음의 성장입니다. 날마다 평생, 온마음. 온힘을 다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믿음의 훈련도 없습니다.
오늘 야이로 회당장과 하혈병 앓다가 주님을 만나 치유받은 무명의 여자는 믿음의 모범입니다. 회당장 딸의 소생이적을 통해, 하혈병 앓던 여자의 치유 구원을 통해 전화위복의 진리를 배웁니다. 회당장은 딸의 죽음을 믿음의 계기로 삼았고, 하혈병 앓던 여자는 그 불치의 병을 믿음의 계기로 삼아 주님을 만났고 둘다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두분 다 결코 역경에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여 절망에 주저앉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찾았고 만났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니 온갖 역경을 믿음의 계기로, 전기로 삼는 것입니다. 정말 큰 죄는 절망입니다. 절망의 모든 순간들을 믿음의 전기로, 계기로, 즉 주님을 만나라는 신호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이 우리 믿음의 여정에 참 좋은 격려가 됩니다.
“이렇게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래서 모든 역경의 순간들을 전화위복, 바로 믿음의 전기(轉機), 믿음의 계기(契機)로, 영적성장의 계기로 삼아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온갖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예수님의 믿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결코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믿음의 영도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주님과 일치하여, 참으로 복된 믿음의 여정, 치유의 여정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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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고운 손>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마르 5,23)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마르 5,24)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마르 5,41)
나
당신에게
손을 내밉니다
나
당신과
가까이하고 싶어서
나
당신에게
손을 얹습니다
나
당신에게
가고 싶어서
나
당신에게
손을 댑니다
나
당신을
품고 싶어서
나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나
당신에게
머물고 싶어서
나
당신을
손으로 쓰다듬습니다
나
당신을
느끼고 싶어서
나
당신에게
손을 흔듭니다
나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서
나
당신과
손을 잡습니다
나
당신과
하나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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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4)
치유의 길
모든 환자의 처지에 알맞은 약을 주십시오. 환자들을 돌보고 온갖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을 고쳐 주십시오. 그들을 교회에 건강하게 되돌려 보내십시오. 양 떼를 먹이되,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무례하거나 무시하지 말고(참조: 에제 34,4; 마태 20,25) “새끼 양들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시는”(이사 40,11) 착한 목자처럼 하십시오.
-사도 현장-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엑카르트는 가난을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행복 자체인” 예수가 그랬듯이, 우리도 가난을 통해서 복을 받고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처소에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할 수 있다.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엑카르트는 자기가 말하는 가난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내적인 가난이자 철저한 가난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않으며, 아무것도 가지지 않올 만큼 철저한 가난이며, 우리의 터, 곧 신성과 우리가 하나 되는 자리를 건드리는 가난이다. 이러한 행복과 가난은 무와 접촉한다.
우리는 앞에서 엑카르트가 네 가지 방식으로 무를 사용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아무개가 아닌 하느님으로서의 무, 하느님처럼 아무개가 아닌 우리네 지성으로서의 무, 자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의존하고 하느님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로서의 무,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들여다보는 투명한 방법으로서의 무, 본 설교에서는 이 네가지 무의 경험이 모두 암시되고 있다. 이 경험들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326)
✝️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2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요한 14-18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I. 신심의 계시.
1번째 준비. 복되신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의 성심에 대한 신심을 알리도록 명하신다.
2번째 준비. 성심에 대한 견고하고 지속적인 신심을 구한다.
첫 번째 요점. 발현.
두 번째 요점. 복되신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세 번째 요점. 성심 신심을 포용해야 하는 이유.
첫 번째 요점. 발현.
고찰. 이 발현에서 세 가지가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1) 이처럼 나타나신 분. 그리스도는 그의 성심에 대한 신심을 인간에게 드러내기 위해 천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분은 친히 이 귀중한 선물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오셨다. (2) 발현의 목적과 대상, 즉 모든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우리에게 성심의 귀중한 보물을 전달하는 것. 이 보물은, 그리스도 자신이 말씀하셨듯이, "인간을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할 성화와 구원의 은총을 포함하고 있다." (3) 발현의 방식. 광선, 불꽃, 십자가, 가시관, 상처를 보라. 이는 모두 우리 각자에 대한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을 가장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적용.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길, "나의 신성한 마음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 더 이상 이 불타는 사랑의 불꽃을 내 속에 담아둘 수 없어, 사람들에게 그것을 퍼뜨리고 알려 그들이 그 안에 담긴 보물로 풍요롭게 해야 한다." 사랑은 확산되기 마련이다. 만약 예수님의 사랑이 정말로 내 마음속에 불타오른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나는 성심 신심의 사도인가? 나는 성심의 책과 그림, 스카풀라와 배지를 널리 퍼뜨리고 있는가? 나는 기도의 사도의 일원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리고 있는가?
애정과 결심. "누가 나로 하여금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든 마음을 당신께 사로잡도록 허락할까. 당신의 마음의 사도가 되어 당신의 사랑을 온 세상에 퍼뜨릴 수 있도록 간청합니다." (성심의 모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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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역사를 통해 본 인간의 본성을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강만연 [fisherpeter] 2025-02-03 ㅣNo.179791
약 한 달간 힘든 시기 동안 역사책을 읽고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고 찾아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세세한 부분을 중점으로 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단순히 어떤 지나간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사건 너머에 있는 인간의 본성이 신앙에 접목됐을 때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은 서기 10세기에서 20세기 동안 천년의 기간과 중국과 고려, 조선,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탄핵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정치와 권력의 상관관계 속에 여인들이 그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자료도 인간의 본성을 종교와 신앙이라는 틀을 벗어나 원래 어떤 구조적인 메카니즘이 작용했는지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역사학자도 아니고 또 한 달 동안 이런 사실을 공부한다고 해서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큰 틀 안에서 봤을 때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고 안 사실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다큐멘터리 하나를 본 게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냥 우연히 발견하고 본 것인데 제가 한 달간 공부한 역사를 단칼에 정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 중요한 결론을 내린 게 있는데 그걸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기록을 통해서 본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에서 인간 본성 안에 내재적으로 가진 본성은 아무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고 해도 또 문화가 다르다고 해도 그건 거의 변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출현과 지금 현생 인류가 되기까지의 자료와 고증이 이런 결론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의 전면에도 등장한 경우도 있었지만 역사의 후면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보통의 일반적인 시각과 통념으로,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여성은 상대적으로 남자에 비해 적다고 하는 인식이 있었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만 사회적인 구조 때문에 그게 발현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여성도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 못지않게 어쩌면 남자보다도 더 큰 권력욕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 조금은 놀라웠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하나 느낀 게 있습니다. 이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자식까지도 살해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과 고려사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적인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단순히 세상적인 권력욕구 때문에 자식을 죽인다는 그 사실이 이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런 역사가 있었단 사실입니다. 이건 무엇을 우리에게 시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사실과 관련해서 최근에는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모성애'입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성애는 기본적으로 인간 속에 내재된 본능이라고 하는 사실이라고 흔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사실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선천적으로 지닌 속성이 아닐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고 있습니다. 아직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정립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모성본능인 모성애도 후천적으로 경험과 학습에 의해 습득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최근 나온 이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조금전에 언급된 역사적인 사실에 대입해보면 이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권력욕 때문에 자식을 죽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선천적으로 내재된 본능인 모성애라는 기존의 관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최근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이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제 지금부터는 신앙의 눈으로 이 사실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봤을 때 권력욕이 죄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도 하나의 인간의 부질없은 욕망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보면 죄에 가까운 죄성을 가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제가 어떤 신학자의 글을 통해서 그런 설명을 한 것을 봤습니다. 여기서는 그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실을 다 통틀어 하나로 정리를 해본다면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결론도 최종적으로는 신앙의 눈으로 전체를 봤을 때 나올 수 있는 결론입니다. 인간은 원래 원래부터 가진 고유의 본성은 기본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건 동서양 시대와 시간적인 공간을 초월해서 인간이라면 공통적인 성질인 것입니다. 길게는 지금부터 2만 년 전 인류까지도 그게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의 인류도 만약 지금 시간을 되돌려 지금 존재한다면 그 사람들도 교육을 하고 하면 비행기도 운행할 수 있고 우리와 똑같은 행동과 지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재의 연구는 이런 사실을 뒷바침할 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타고난, 본성적인 본능도 중요하지만 후천적으로도 그 본성과 본능을 보완하거나 수정할 다른 환경적인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 영향이 선한 영향이면 선한 쪽으로 변화가 될 수 있지만 그게 선하지 못한 환경적 요인이라면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근묵자흑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권력욕과 같은 욕망 이런 것도 죄성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최종적으로, 통합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속에 있는 근본적인 죄성을 씻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근본적으로 타고난 것이라고 하는 고정된 시각으로만 본다면 절대 변할 수 없고 고칠 수도 없습니다. 변화가 될 수 있는 환경에 일단 노출이 되어야 하고 그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환경은 많이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예를 든다면 마치 여성들이 태교를 하는 것처럼 그와 같은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듣고 하는 그런 환경입니다.
마치 인간의 본성인 모성애가 후천적인 요소에 의해 형성될 수도 있다는 그 이론과 통합해서 본다면 그렇습니다. 이건 실제 이런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 우리가 끊임없이 노출되지 않고 그냥 맹목적이고 관성적인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항상 유아기 때 신앙으로만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지적장애인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몸은 시간이 지나면서 육체적인 변화가 있는 성장은 분명 눈에 나타나지만 정신적인 성장은 어느 지점에서 성장이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떤 사람도 전혀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신앙의 성숙은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했는가 하는 시간적인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양도 중요하지만 그와 병행해서 자신이 변화가 되려고 하는 의지적인 측면이 없다면 단순히 육적인 몸의 성장과 변화만 있지 영적인 영혼의 성장은 멈춘 채 시간만 흐르고 변화가 없는 신앙으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신앙으로 한평생 신앙을 하게 된다면 인간적으로 봤을 때 불행한 신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는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또 어떤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건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자신이 그런 방법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노력도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남들 장에 가니 따라 가는 그런 신앙은 어쩌면 불행한 신앙으로 전락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찬미예수님! 여기에 언급한 여성은 아주 지극히 단순한 예시이지 여성이 그렇다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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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두려워하지 말고 그저 믿기만 하면 /
박윤식 [big-llight] 250203. 19:28 ㅣNo.179795
/ 연중 제4주간 화요일[1](마르 5,21-24.35-43)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 얹으시어 그 애가 병이 나아 살게 해 주십시오.” 라며 간청하였다. 그는 율법에 충실하고 사회적 존경을 받고 있는 이었다. 그리고 다른 유다인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었던 이다. 그래서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채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께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체면마저도 버린 것이다.
놀랍다! 어쩌면 그럴 수가? 딸의 아픔에 의사도 아닌 예수님께 손 얹어 주시기만 하면 살 것이라며 매달릴 수가? 과연 그런 결심이 가능했을까? 솔직히 고백하건대 “믿음은 산도 옮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을 근성으로 들은 우리 아닌가? 이만치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그런 강력한 믿음 갖지 못했다. 사실 믿는다며 수십 번도 더 고백했지만, 어쩜 본심이 아니었는지도.
그 때에 그의 집에 있는 이가 와서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그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 몇 만 데리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는 “어째서 소란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게 아닌 자고 있다.” 라고 이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탈리타 쿰!” 이 말은 예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씀이다. 제자들이 너무 놀란 나머지 스승님의 말씀을 ‘소리 나는 그대로’ 적어 놓았던 것일 게다. 이 한마디에 죽었던 소녀가 곧바로 일어났으니 얼마나 놀랐으랴! 예수님 말씀은 이렇듯 위력이 있었다. 하느님 목소리이기에. 그러니 우리는 그분 음성 늘 가까이하자. 애정이 담긴 말은 죽음까지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독이 담긴 말은 칼이 되어 상처를 남긴다.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주위에서 여럿이가 비웃었지만, 그분은 그 아이 손을 잡으시고 “탈리타 쿰!” 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으로 살리셨다. 그분에게는 죽음도 ‘자고 있는 것’일 뿐일 게다. 그래서 말씀으로 언제나 바꿀 수 있다. 실패와 좌절에서도 일어설 수 있다. 삶이 힘들고 우울할 때 감실 앞으로 나아가보자.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라며 간절히 청해보자. 그분께서는 ‘탈리타 쿰!’이라 말씀하시며 우리의 손을 다정스레 잡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 살리신 이야기는 복음에 세 번 나온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의 딸, 나인이라는 동네에 사는 과부의 아들, 마르타의 오빠 친구 라자로이다. 이 세 사람 생명을 살리신 기적은 그 어떤 기적들보다도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직접 보여 주는 의미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리시며 당신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보이셨다. 그분께서는 호기심이나 두려움보다 당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셨다. 사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으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 빠지지 않게 할 게다. 예수님만이 새 생명 주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분이시다. 회당장인 야이로와 같이 그 누구의 비웃음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믿기만 하자. “탈리타 쿰!” 그분의 확신에 찬 음성이 귓전을 스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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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솔한 믿음만이 구원의 은총을 /
박윤식 [big-llight] 250203. 19:28 ㅣNo.179794
/ 연중 제4주간 화요일[2](마르 5,25-34)
복음에서 믿음에 대한 가장 감동적인 것 중 하나가 하혈하는 부인의 치유이다. 열두 해나 몹쓸 병으로 하혈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 오랜 기간 숱한 고생으로 여러 의사의 손에 가진 걸 다 쏟았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군중에 섞여 그분 뒤에서 옷에 손을 대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 받겠지.’라고 생각했기에. 과연 그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랬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둘러보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에 엎드려 다 아뢰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이렇게 여인은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기적을 몸소 체험한다. 그러나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기적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인의 믿음이 일으킨 기적이다. 이 믿음이 있는 곳에 구원의 희망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 좋아. 병이 낫지 않아도 좋아. 이 서러운 운명을 알아만 주셔도 나는 한이 없겠어.’ 그녀는 예수님 앞에 감히 나서지도 못하고 멀찍이 따라간다. 그러다 애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분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그녀의 마음에 뜨거움이 전해졌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선생님. 사람들이 저리 밀쳐 대고 있는데, 선생님 옷에 손을 댄 사람을 찾다니요?” “아니다. 누군가 내게서 기적의 힘을 빼냈다.” 이 말에 여인은 깜짝 놀란다.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비로소 느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이 담긴 그녀의 손길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야이로라는 회당장 딸의 손을 붙잡아 죽음에서 일으켜 주신 것처럼, 그녀의 믿음마저 붙잡아 일으키셨다. 울며 엎드린 그 여인에게 예수님의 따스한 음성이 들린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사실 우리에게도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지만, 그 누구에겐 꼭 털어놓고 싶은 자신만의 부끄러운 비밀이 있었으리라. 이게 삶을 늘 무겁게 만들었고 내적 자유를 잃게 했다. 그러기에 우리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이해하며 사랑해 주는 이런 만남을 갖고자할 때가 있었다. 그 비밀을 자비의 하느님께 의탁하고자 신앙을 택한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만남 앞에서 엉엉 울며 나만의 아픔을 하소연 한 적도 있었다. 가장 좋은 만남은 아마도 감실 앞 조배 때였다. 우리 믿음과 기도가 간절해질수록 주님 말씀도 선명히 들렸으리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도다!”
하혈하는 이 여인이 바로 그 경우이다. 당시에 이런 이는 율법에 따라 ‘불결한 여자’로서 가까이해서는 안 될 부정한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열두 해라는 그 지긋지긋한 세월을 혼자 말 못하는 아픔을 안고, 남몰래 이리저리 의사들을 찾아다녀야만 했단다. 이제 그 여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오로지 예수님 그분의 치유 능력에 의탁하는 것이었다. 불결한 몸이지만 감히 용기를 내어 두려움에 떨면서, 예수님 뒤로 몰래 가서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자비의 음성을 듣는다. 감동과 환희로 얼룩진 여인의 모습도 그려진다. 따뜻함이 흐르는 것 같다. 믿음의 결과는 이렇듯 감동적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으로 응답하신다. 우리가 얼마나 겸손 된 정성으로 다가가는지, 얼마나 진솔한 애절함을 지닌 채 다가가는지가 문제일 게다. 지금 이 시각, 우리도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에 ‘믿음’을 담뿍 실었으면 좋겠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씀의 주인공이 우리였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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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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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죽어가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소녀는 병으로 결국 죽었고
한 여자는 열두 해 동안이나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우선 하혈하는 여인의 경우
그녀의 믿음이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그녀는 정말 치유됩니다
소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병은 고칠 수 있어도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다는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생명에 관한 모든 것에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회당장의 고백이 나오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딸에게 가는 길을 계속해서 안내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안내가 아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길을 멈추셔야 했을 것입니다.
치유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치유 받아야할 당사자의 믿음일 수도 있고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는
다른 사람의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인가 청하는데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청하면서도
그것이 과연 이루어질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한 때 필요한 것이
함께 청하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한 믿음과
너의 부족한 믿음이 더해질 때
더 큰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총합이 늘어나는 것을 넘어
나의 부족한 믿음도 더 키울 수 있게 됩니다.
나보다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보면서
배우게 되고
결국 나도 그처럼 굳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헛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여럿이 모여서 함께 그 믿음을 표현한다면
그 효과는 더 클 것입니다.
부족할지라도
우리 각자의 믿음을 하느님께 고백하고
또한 그 고백으로 서로의 믿음을 북돋워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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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 34)
건강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의
어쩔 수 없는
병고(病苦)가
있기에
건강한 삶이
있습니다.
가까운
병고를
우리 삶에
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삶들입니다.
볼품없는
우리를
사랑해야 할
사람도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건강한 삶이란
자신의 삶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병은
건강을 되찾는
방식입니다.
나아질 수 없는
삶이 아니라
나아질 수 있는
삶입니다.
아픔은
우리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살리시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살아야 할
소중한
생명입니다.
아직 아무 것도
끝난 것이
없습니다.
다시
건강해져야 할
소중한 삶입니다.
병고에서
벗어나
새롭게
써 내려갈
건강한 삶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창문을
새롭게
갈아 끼우는
새로운
마음입니다.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지고
새로워지는
믿음과 구원의
새로운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소녀의 아픔도
여인의 아픔도
모두 주님께
내어드리는
봉헌의
건강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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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이요, 하느님의 손가락입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치유뿐만 아니라 이미 숨이 끊어진 회당장 딸의 목숨까지 소생시키신 예수님의 전지전능한 모습에 사람들은 너무 놀라 그야말로 넋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넋’은 다른 말로 ‘혼(魂)’, ‘혼백(魂魄)’, 영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넋이라는 것은 죽어야 사라지는 것이지만, 갑작스레 큰 충격을 받을 경우, 모든 생각이나 사고가 일시 정지되는데, 이런 상태를 넋이 나갔다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치유나 구마, 소생은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놀라운 능력은 그분 안에 하느님께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계심을 드러내는 표지였습니다.
은혜롭게도 잠시나마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어쩌면 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하느님 나라를 잠시나마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 대목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나 던져봅니다.
왜 우리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라운 치유와 구마, 소생 현상을 찾아보기 힘든 것인가?
왜 우리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방식이 좀 다르지만, 예수님 시대 그 역동적이고 충격적이었던 치유와 구마, 소생 현상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손가락을 통해 이루어지던 놀라운 일들이 지금 이 시대에는 또 다른 선인들과 의인들을 통해 지속되고 있음을 저는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잘 준비된 의료진들과 누군가의 피나는 연구 끝에 발명된 최첨단 의료기기들이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시키고 살려내고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싶은 선한 의지를 지닌 의료진들의 얼굴은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들,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난민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그들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후원하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사람들은 제2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프고 견디기 힘들어서 겨우겨우 통증을 참아내고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이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2천년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사랑의 기적을 각자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계속해나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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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5,21-43: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회당장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주님께 도움을 청한다. 이것은 모든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일 것이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23절) 회당장이 이렇게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고 계셨다. 많은 군중 틈에서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의사들에게 병이 낫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다. 오랜 투병 생활로 그의 심신은 피폐해졌고, 죽음에 가까이 이르고 있었다. 그녀의 생명까지도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여인은 고통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님의 옷을 만진 것은 믿는 마음의 부르짖음이었다. 육체로는 스스로 부당하다고 여긴 여인은 마음으로 다가가 믿음으로 하느님께 손을 댄다. 여인은 그 순간 치유되었음을 느낀다. 아드님의 치유 능력을 통하여 여인의 믿음이 드러났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숨은 믿음을 보시고, 눈에 보이는 치유를 선사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건강해져라”(34절).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식을 전해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회당장은 믿었고, 딸은 되살아났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집으로 가시어 사람들을 다 내쫓으셨다.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말씀하시고 나서,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세 사도와 함께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소녀를 깨우실 수 있는 분에게는 소녀가 그저 자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41절) 뜻이다. 주님의 목소리에 소녀의 숨이 곧바로 돌아왔다. 소녀는 깨어났고 살아난 아이를 부모에게 돌려주셨다. 소녀는 되살아난 몸으로 일어났고,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었다(43절). 우리 자신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기 부당한 하혈하는 여인과도 같을 수 있으며, 잠을 자는 소녀와도 같다. 주님이 말씀 한마디로 치유 받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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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불가능한 일은 없다. 불가능하다는 생각만 존재할 뿐이다.
두 장애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한 청년은 축구, 레슬링, 권투 등 만능선수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79년 권투 시합에서 사고를 당해 하반신을 못 쓰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치료를 받고 보조기를 쓰면 혼자서 걸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에게 산에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정상에 다다르자, 그는 그를 산에 옮겨 준 친구들에게 잠깐만 자리를 피해 달라고 하고는
숨겨 가지고 온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4세였습니다.
다른 한 청년은 어느 날 불량배들에게 칼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는 투지로 노력한 끝에 낙하산 점프의 묘기를 보였고, 특별 장비를 갖춘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며 혼자서 취사, 세탁, 청소 등을 하며 생활합니다.
그는 또한 휠체어 스포츠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관한 세 권의 사진첩을 출간하였습니다.
시련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시련은 어떤 식으로든 찾아옵니다.
그 시련을 대하는 자세가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고 실패로도 이끕니다.
그 시련을 대하는 자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주위에 그런 믿음을 줄 사람이 없다면 안 좋은 결말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믿음을 굳건히 지켜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혈병 여인과 회당장은 그러나 믿음을 방해하는 많은 장애들을 만납니다.
하혈병 여인은 처음에 돈이 좀 있었습니다.
돈과 의사의 말을 믿었습니다.
전 재산을 다 날렸다면 의사들은 이제 포기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혈병 걸린 여인은 포기를 몰랐습니다.
믿음을 저해하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을 모시고 가다가 믿음이 약한 종을 만납니다.
종이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회당장은 주저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그런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믿음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 혼자 강한 믿음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모든 사람들을 쳐내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면 먼저 그것을 끊어버릴 용기부터 있어야합니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심지어 믿음을 비웃으면 내쫓아버리십시오.
불가능은 없다는 믿음을 주는 사람과 가까이하십시오.
미국의 마리온 라이스 하트 여사는 경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해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경비행기로 그것도 여자가, 84세의 나이로 대서양을 횡단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트 여사가 비행을 배우기 시작한지 겨우 2달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비행을 시작한 이유도 ‘혼자 시간을 때우기에 아주 좋다’는 이유뿐이었습니다.
단순히 비행을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 많아지는 혼자 있는 시간을 규모 있게 보내려다보니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이후로 하트 여사는 ‘나는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세계의 여러 곳을 작은 경비행기로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사가 도착하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환영을 했고 그 때마다 여사는 ‘기진맥진하지만 매우 행복하다’는 소감과 함께 사람들의 환대에 감사했습니다.
하트 여사의 도전은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특별함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불가능하다고 믿으면 불가능한 것이고 가능하다 믿으면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을 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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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마르 5,22-24).”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5-36)”
1)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여자를 고치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믿음’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예수님을 믿어서 불치병을 고친 이야기”로만 해석한다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해석하기도 편하고 강론하기도 편하게 되는데, 그런 해석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 라는 오해로 이어집니다.
그 오해는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데도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나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라는 좌절과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믿기만 하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또는 “믿음만 있으면 기적이 일어난다.” 같은 말은,
사이비 종교에서 흔히 하는 말입니다.
2)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간절하게 기도해서 불치병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분명히 있지만, 병이 치유되지 않고 그 병으로 그냥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누구는 고쳐 주시고, 누구는 고쳐 주시지 않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믿음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이 더 필요한 것인가?
<34절에 있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을, 여자의 믿음이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기적은 여자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이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이긴 한데, “이제부터는 믿음을 더욱 굳게 가지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병석에 누워 있는 병자에게 문병을 가서,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잃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격려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병은 주님의 뜻이다.”, 또는 “믿음만 있으면 이 병은 무조건 반드시 낫는다.” 같은 말은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말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심어 주는 말입니다.
‘병에 걸리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닙니다.
무슨 병이든지 간에 그것을 잘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병이 낫지 않더라도...
3)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7ㄴ-10).”
바오로 사도는 어떤 병 때문에 평생 고생했다고 전해집니다.
<통증이 무척 심한 불치병이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까지 했던 바오로 사도였지만, 그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가 주님께 치유의 은총을 ‘세 번이나’ 간청했는데도, 주님께서는 그 청을 들어 주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의 병약한 몸이 오히려 주님의 힘을 증언하기
때문이라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하고 체험합니다.
4) 회당장 야이로에게, 또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자에게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었던 딸이 살아난 것으로 야이로의 희망이 완전히 이루어졌을까?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까?
여자의 경우에도, 불치병이 완치된 것으로 희망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 바랄 것 없는 상태에서 남은 인생이 행복하기만 했을까?
예수님 덕분에 다시 살아난 소녀도, 불치병이 완치된 여자도,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죽었고, 그러면 그 다음에는?
‘몸의 건강’은 하느님 나라에 가는 여행길에 필요한, 또는 중요한 것이긴 한데,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고,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몸만 건강하고 영혼은 건강하지 못해서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일이 생긴다면?
<지옥은 몸만 건강한 사람들이 가는 곳, 하느님 나라는 몸은 어찌 되었든지 간에 영혼이 건강한 사람들만 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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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5,21-43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보통의 경우 환자는 의사에게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치료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알아서 잘 치료해주시라고 믿고 맡길 뿐이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 속 회당장은 예수님께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에서 낫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아온 병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 치유해주신다는 소문을 전해듣고는, 그분께서 그렇게 해주시면 자기 딸도 병에서 나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집으로 가던 도중 딸이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이미 죽어버렸다면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주신다한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절망에 빠지려는 찰나,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게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믿음이란 주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그분께서 당신 뜻대로 하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내 뜻과 계획대로 안되면 어쩌나’하는 쓸 데 없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과 회당장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만나지요. 그 여인을 처음에 가로막은 것은 그녀가 가진 재산이었습니다. 다른 여인들에 비해 재산을 많이 갖고 있었기에 자기도 모르는 새 그것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긴 겁니다.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은’ 뒤에야 비로소 그녀의 마음은 주님을 향하게 됩니다. 그 여인을 가로막은 두번째 장애물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로 인해 자기 병을 치료해달라고 주님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고 몰래 뒤에서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지요. 물론 그 소박하고 단순한 믿음만으로도 질병이 치유되는 은총을 받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녀의 믿음이 깊고 강해져 구원에 이르는 것이기에, 주님은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아시면서도 일부러 사람들 앞으로 그녀를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며 그녀에게 구원을 약속해주시고, 그녀가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지는 것이 또한 참된 평화를 누리는 것이 당신께서도 바라시는 바임을 천명하시며 그녀의 마음 속에 있던 일말의 죄책감까지 다 지워주십니다.
한편 회당장의 믿음을 가로막은 건 ‘이제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라고 말하며 그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주변사람들입니다. 그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척, 예수님이 고생하시지 않게 신경써주는 척 하지만 실상은 그의 마음을 어지럽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려는 사악한 세력의 계략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모든 이들을 다 내쫓으시고 그가 오로지 당신에게만 집중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권능으로 죽었던 그의 딸을 되살려주시지요. 그 결과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삶과 죽음까지 주관하시는 주님이심을 알아보고 믿게 됩니다.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입니다. 우리들 역시 그저 예수님을 쫓아다니기만 하는, 그분께 대한 참된 믿음 없이 각자의 욕망에 사로잡혀 그분을 밀쳐대는 군중들 중 한 사람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주님은 참된 믿음과 철저한 순명의 각오로 당신께 손을 뻗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주님 말씀을 듣고 지킴으로써 그분의 권능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오게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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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일어나라!”
신앙의 정곡의 길을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 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브 12,1-2)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지침인 것이지요.
바로 세상 살면서 여러 가지 장애와 주춤함이 있다 해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을 신앙인으로 잘 살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서간의 저자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성실하신 그분의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2, 3)
서간의 표현대로 주님이야말로 어떠한 부끄러움에 구애됨이 없이 십자가의 수치까지
겪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신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과 병 고통에서 지친 한 여인에 대한 치유의 손을 내미신 주님에게서
그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회당장은 모두가 우러러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얼핏보기에는
그에게 어떤 아쉬움도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도 그의 사랑하는 딸의 죽음의 위기 앞에 한탄 아버지였습니다.
그의 주님 앞에서의 간청은 너무나 간절했기에 누구에게도 무릎을 끓은 적이 없는 그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분 앞에 엎드려 자신의 딸을 살려주십사 애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 주시려 길을 떠나십니다.
그 길에서 열 두해나 하혈하는 부인을 만납니다. 그 부인도 주님을 깊게 신뢰하지만
자신의 병이 부끄러워 주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여인을 사랑하시고 끝내 손을 내밀어 사랑을 전하십니다.
이야기는 죽음의 절망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이
필요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 소녀를 잡으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주님께서는 병의 처참함, 희망에서 절망의 상황에서도 그곳에 계십니다.
모두가 떠난 것 같은 허황한 곳에서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고 치유와 사랑을 베풀어
일어나게 하십니다.
바로 그들의 절망을 십자가의 수모와 십자가의 고통에서 이미 다 겪으시며
이기셨습니다. 한 옹큼도 안 되는 세상의 위로를 찾지 말고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을
찾고 그 사랑 안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용기를 찾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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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으로 함께 걷는 행복의 길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위력으로 하혈을 하는 여인을 고쳐주시고, 회당장의 딸을 소생시켜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죽어가는 딸의 병을 고쳐 다시 살게 달라고 간청하는 회당장 야이로의 부탁을 받은 터였다(5,22-23). 그런데 하혈하던 여자가 군중에 섞여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이 여자는 열두 해 동안이나 병치레를 하면서 가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유대인들의 축제에도 참여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 지내왔을 것이다. 하혈하는 여인은 불결하다고 여겨져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안 되는 병이자(레위 15,25)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수치스런 병으로 여겨졌다.
인간적으로 극도로 절망하던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려 병을 고치고 싶은 애절한 심정에서 유다인의 규정 위반이나 수치스러움을 괘념치 않고 예수께 매달렸다. 그 여자는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5,27-29).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처럼 철저히 소외된 그 여자를 “딸아”라고 애정어린 호칭으로 부르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5,34)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옷을 만진 많은 사람 중에 믿음으로 옷자락을 만진 그 여자만이 치유를 받았다(5,30-31).
그 여인의 절박하고 애절하게 간구하는 마음과 하느님의 위력을 지니신 예수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전적인 의탁이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 치유를 일으켰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병을 고쳐주시느라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 그토록 간곡히 청했던 회당장의 딸은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하고 말씀하신다(5,36). 그분은 절망과 슬픔에 사로잡힌 회당장에게 하느님의 권위로 격려하시고 그의 집으로 가셨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어린 딸의 싸늘한 주검을 앞에 두고 소란스러워 했고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였다(5,38).
그런데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소녀에게 “일어나라!”하고 말씀하시어 그 아이를 소생시키셨다(5,41-42). 이 소생사화에서 예수님께서는 소생이적을 일으켰던 엘리야나 엘리사보다 훨씬 탁월한 분이심이 드러난다.
오늘 복음에서 믿음으로 그녀가 하혈증을 고침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회당장도 믿음으로 죽었던 딸이 ‘곧바로 일어나 걸어 다니는’ 기적을 보게 된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인 듯하다. 사회 전반적으로 신뢰가 깨지고 권위가 실추되고, 인간성이 존중받지 못하고, 사회적 안전장치가 부실해지며, 가장 기본적인 삶을 살아가기에도 그야말로 ‘퍽퍽한’ 현실이다. 서민들의 삶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이 절망적이고 마음 아픈 현실에서 하느님만이 살길이요 우리 편임을 믿도록 하자! 이 어려운 상황을 버텨 나가도록 함께 해주신 분도 주님이요, 이 고통의 터널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도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뿐임을 명심하도록 하자!
아울러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며 탄식하던 이들의 “고통과 슬픔 중에 함께 하는 마음”과 주님을 향한 절박하고 애절한 믿음을 지니고, 온전히 주님께 자신을 내맡기며, 우리 함께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며 힘을 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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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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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4. 연중 제 4주간 화요일.
서로 이해하고, 서로를 즐겁게 하는 삶
<2025.2.4> 아침을 여는 묵상 (수 22:21~34절)
❝서로 이해하고, 서로를 즐겁게 하는 삶❞
❚ 공동체 안에서 서로 간에 오해가 생겼을 때, 자신이 판단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 오해를 어떻게 풀어가야 합니까?
➲ 잘못 판단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21~23절).
요단 동편의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은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에게 자신들의 행동이 전혀 그런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 여호와를 부르며 요단 서편 사람들의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태도에 반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를 두 번에 걸쳐 부르면서 하나님이 자기들의 정당한 행동을 잘 알고 계시니 이스라엘 역시 잘 알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나아가 자신들이 여호와께 죄를 짓는 일이라면 자신들을 구원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22절). 또한 자신들이 제단을 쌓은 일이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제사를 드리기 위한 행동이라면 여호와께서 친히 자기들에게 벌을 내리셔도 좋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입니다(23절).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반응하면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4:28절에서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선한 의도를 가졌더라도 서로 오해하고 성급한 반응을 보이면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는 언제나 갈등이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갈등이 생겼을 때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때, 갈등의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끝날 수 있습니다.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과격한 행동을 합리화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지키기 위해 모두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우리 자신의 판단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로 이해하고 인정하므로 즐겁고 행복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대화해야 합니다(24~29절).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의 사람들은 자손의 신앙을 위해 제단을 쌓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들이 제단을 쌓지 않으면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후손들을 이스라엘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단을 쌓는 일이 불가피했음을 역설하며 번제나 다른 제사를 드릴 생각으로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니라고 자신들의 주장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습니다(24~26절). 그들은 여호와의 제단 모형은 번제나 다른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요, 단지 요단 동편과 서편 사람들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려는 목적만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단 동편 사람들은 번제나 소제나 다른 제사들을 드리기 위해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제단을 무시한 채로 다른 제단을 세운 것이 아니었고, 여호와를 거역하고 그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28~29절).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약속의 땅을 얻는 전투에 참전했는데, 자손들이 이스라엘 백성임을 인정받지 못할까 봐 증거물로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요단 서쪽의 지파들이 자신들의 경솔한 판단만을 믿고 그들과 전쟁을 벌였다면 비극적이고 참혹한 결과를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앞뒤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행동한다면 상대방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오해하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간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으면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막기 위해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대화하고 인정하므로 즐겁고 행복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 서로 이해할 때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30~34절).
비느하스와 이스라엘 회중의 지도자들은 요단 동편 지파들의 해명을 듣고 기뻐했습니다(30절). 또한 비느하스는 그들이 동족상잔의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진노의 손길로부터 건져 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31절). 그 후 요단 서편 지파의 대표자들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거주하는 길르앗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간의 상황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고하였습니다(32절). 이스라엘 자손은 그 보고를 듣고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요단 동편의 지파들과 싸워 그들을 멸하자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았습니다(33절). 그 후에 르우벤과 갓의 백성은 그 제단을 ‘엣’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믿는 증거다’라는 뜻입니다(34절).
요단 동편 사람들의 의도가 전해졌을 때 이스라엘에는 기쁨이 임했습니다. 우리도 서로 이해하고 하나님 안에서 한마음을 품을 때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해하는 사람과 오해받는 사람 모두 아픔과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에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공동체의 평화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간의 오해를 풀고 서로를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다른 사람에 대하여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세심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도 충분히 귀를 기울이고, 서로 이해함으로 즐겁고 행복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격하게 행동하지 말고 공동체를 위하여 신중히 행동할 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다른 사람의 말에도 충분히 귀를 기울려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기를(22:21~3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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