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무덤의 호위 병사
무덤 이야기를 하다보니 ------, 과거로 되돌아가서 진시황의 호위 병마용과 후한 경제 능묘의 호위 병마용을 비교해보자.
용(俑)은 중국 장례 풍습에서 죽은 사람과 함께 넣어두는 사람이나 동물의 조각상을 말한다. 진시황릉의 봉분은 높이 55m, 남북 515m, 동서 485m의 크기로 여의도 공원의 10배에 조금 못 미친다. 4개의 갱으로 나뉘어 있는데 1974년 가장 넓은 1호갱이 발견되면서 발굴이 시작되었다. 병마용 1호갱에는 실제보다 조금 큰 크기의 흙으로 빚은 사람과 말이 6천여 개나 놓여 있다.
이들은 당시 진나라 군대의 사병과 전차를 끄는 말들로 실전에 사용되던 군복과 무기를 갖추고 진법대로 놓여 있다. 병마용은 원래 채색되어 있었으나 발굴 때 햇빛에 노출되면서 색이 바래버려 흙색이 되었다.
중국 역사상에서 진시황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고의 권력자이다. 그의 직위와 권능만큼 그의 무덤도 호화롭게 꾸몄다.(미발굴). 그러나 1호 갱에 이어 2, 3호 갱에서 8000여 병사용과 말, 마치 등의 호위군단은 발굴되었다. 우리가 모두 너무 잘 알므로 설명은 생략하겠다. 그러나 진시황이 병마용을 만든 이유는 사후세계에 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사후에도 불사의 삶을 누리기를 바라면서, 그를 호위해 줄 병마를 용으로 만들어 부장한 무덤의 호화장식이다.
진나라 이후에 전 중국을 통치한 나라는 유방이 세운 漢나라이다. 유방이 중국을 통일 하여 통치할 때는 작은 반란 정도로 시끄러움은 있었지만, 온 나라가 전쟁에 휘밀리지 않았다. 그의 아들-손자인 문제-경제 때는 중국 역사에서도 황금시기라는 문경지치라고 부른 시기이다.
경제의 능묘도 발굴하였다.
황제의 능묘답게 많은 부장품을 발굴하였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능묘에서 출토된 병마용이다. 용도는 진시황의 병마용처럼 사후세게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일일 것이다.
후한의 경제는 유방의 손자로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은 최고의 안정을 누렸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경제적 풍요로움은 진시항보다 월등 높았다고 하였다. 그런 시기에 만든 경제 능묘의 병마용은 진시황과 비교한다면 너무 초라하다.
용의 크기는 크기는 겨우 60cm 정도이고, 모두들 옷을 벗은 벌거숭이들이다.
이것은 시대의 사유세계에 변화가 온 것이라고 말한다. 진시황만큰 불사의 세계, 사후에도 현세의 영광이 지속된다는 생각이, 없어진 것은 아니ㅣ만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후 세계를 보호한다는 병마용을 상징적으로 만든 것이다. 벌거숭이인 이유는 진시황의 병마용처럼 갑옷까지도 조각하지 않고, 천으로 만든 옷을 입혔다. 세월이 흘러 옷은 삭아져렸기 때문이라 한다. 그들은 이 세상을 현실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다음 왕인 한무제는 가장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유학사상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선택한 것도 이와 같은 시대 배경을 나타낸 것이다.
첫댓글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