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자료는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회에서 조사한 자료에서 발췌한 것으로, 각종 자료와 증언을 통해 드러난 바로는 제주4.3평화공원의 불량위패는 최대 수 천여 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중에서 4.3폭동에서 적극적으로 살인 방화에 가담한 악질 위패는 수 백여 기에 이르고 있다.
제주4.3평화공원의 불량위패들
-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
1) 남로당제주도당 경리부장(회계부장) 현복유
-제주자유수호협의회의 ‘제주도 4월3일은’ 3집 20쪽
“조천면 신흥리 현보규(34)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4권. 429쪽,
‘이제사 말햄수다’ ①, 255쪽
“1949년 2월1일….희생자는 노약자와 어린이였습니다. 이날 희생자 중 신흥리민은 현복유(玄福裕)의 모친(80대), 문윤현(여.61), 이윤문(여 60대)….
아들이, 남편이, 혹은 아버지가 입산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대신 희생된 것이었다. 80대 노인인 현복유의 모친도 조천중학원 교사였던 현복유가 입산한 때문이었다.”
“현복유(조천면 신흥리)
• 일제 때 일본대학 수학, 8․15 후 들어옴
• 1946년 3월 이후 조천중학원장, 사회 가르침
• 1948년 도당 경리부장
※ 1949. 6.29.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143 (9-72)
“이 마을에는 무장대의 재정을 총괄하던 남로당의 거물 현복유(玄福裕 . 일명 보규‧寶奎)가 있었다. 그는 변호사시험에 합격, 서울 대법원에서 그를 불렀으나 남로당 관계자들이 고장을 위하고 대의를 위한다며 그를 붙잡았다. 그래서 그는 폭도들을 양성하다 시피 한 조천중학원의 교장이었고, 후일 폭도사령관 이덕구(李德九)는 부교장이었다. 현복유의 영향으로 많은 청년들은 좌익으로 휩쓸리고 말았다.”
-2011. 3.24. 신흥리 이용국 증언, 제주자유수호협의회의 ‘제주도의 4월3일은 ' 3집 366쪽-
2)남로당 제주도당 선전부장 현호경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45쪽
“성산면 성산리 현호경(38) 행방불명; ‘이제사 말햄수다’ 256쪽, 162쪽
• 현두길 부친으로 학교 직원이었음
• 1946년 쌀 사건으로 체포된 유일한 사람(* 제주도 건준, 성산면 대표 집 행위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선전부장)
• 주정공장을 운영하였음
“ 쌀사건으로 체포된 현호경 씨는 당시 향교 직원이었지. 그 분은 일제시대 무근성에 있던 주정공장을 운영했었어. 그때 그냥 잡혀가서 암살되고 시체도 없지. 그 분 아들이네 일본에 살았었지. 그분 아들이 현두길인데, 그 당시 당간부였지(주: 현두길은 1946. 9. 당 간부부장이었음)
- ‘이제사 말햄수다’ 162쪽 -
※ 현호경; 1949. 6.30.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212(10-09)
‘제주도의 4월3일은?’ 2집 37~39쪽에는
“ 독립운동가. 일본공산당 당원으로서 항일운동. 본관은 연주(延州)이며 사업가 현승오(玄承五)의 손자이며 현길홍(玄吉弘)의 차남, 성산읍 성산리 태생이다.
그의 형 현호진(玄好珍)도 일본에서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약칭 전협) 토건노조의 노동운동과 항일활동에 참여, 특히 김문준(金文準: 조천)의 영향을 받아 투쟁의 수위를 높였다. 또 누이 현호옥(玄好玉)도 전협 오사카(대판, 大阪)화학노조 부인부장으로 투쟁하던 중 체포되어 2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현호경은 가명으로 전태련(全泰連), 일본식 성씨로 마츠모도(송본․松本), 오오다니(대곡․大谷), 야마다(산전․山田) 등 다양하게 사용하며 지하운동에 임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사카에서 토목공사의 노동자로 1932년 9월 일본공산당에 입당. 1933년 공산당 오사카시 동(東)지구 오르그로 시위원회(市委員會)의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34년 4월에 일경에 검거, 이때 ‘적기(赤旗’ 및 그 밖의 문서의 살포에 종사하면서 3월경 ‘적기’ 독자그룹을 조직하여 그 회원을 확대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1935년 1월 21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주거지는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동성구․東成區) 대금리정(大今里町)에 있었다. 당시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제주인은 약 4만 명에 이르고 매년 제주를 왕복하는 자가 3만 명이어서 생활이 안정하지 못하고 노동현장에서 방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 도항자(渡航者)들은 대부분 오사카에 살았고, 항일 운동․노동운동에 관련되었다.
공산주의 운동으로는 김문준, 무정부주의 운동으로는 고순흠(高順欽)이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으며 다음으로 조몽구(趙夢九), 김석송(金石松), 송성철(宋性徹), 김달준(金達俊), 강주호(姜周鎬), 현호경 등을 들 수 있다.
간사이(관서․關西)지방에서 사상 운동에 종사하는 제주인은 약 4백 명에 달하고 이들이 교포에 주는 영향은 대단히 컸다. 일제 당국에 의해 요시찰(要視察)․요주의(要注意) 인물로 분류되었다. 항상 미행과 감시를 받고 있던 제주 사람으로 산북(山北) 지방 사람은 80여 명이고 산남 사람은 25․6명 정도였다. 1933년에 현호경은 일본공산당 오사카위원회 책임자가 되었고 강주호 등도 간부가 되어 그 활동력은 일본인을 능가할 정도로 돋보였다. 그들이 투옥당하고 또 당국의 탄압이 심해져 1935년 이후의 공산당 활동은 차츰 궤멸되어 갔다.
그는 일제 말기 경방단(警防團)에 접근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은 바 있었으며 해방 후 귀향하여 한때 좌경활동을 하였고 이후 남로당 목포시당 책임자로 활동한 바 있다. 1949년 갑자기 암살당하였다.
- 김찬흡의 ‘20세기 제주인명사전’ 420~421쪽 -
3)남로당제주도당 부위원장 간부부장 이신호(일명이신우)
-‘제주도의 4월3일은?’ 5집 220~222쪽
"대정면 하모리 이신호(47) 사망;‘이제사 말햄수다 1’ 251쪽, ‘제주도의 4월3일은? 2집’ 33~34쪽
“이신호(李辛祜, 이신우‧ 李信祐로도 불림)
• 1931년 ‘농민테제사건’에 연루됨
• 1932년 ‘세화리 해녀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2년 구형 언도
• 대정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하다가 위원장으로 천거됨
• 1947년 3․1대회 후 검거되어 6개월형 언도
• 출옥 후 활동은 안 했으나 48년 10~11월경에 집 문앞에서 피살 됨
- ‘이제사 말햄수다’ 251쪽 -
“ • 이신우 씨도 모슬포 출신이지요? 그 지역 어느 분의 애기로는 국회의원에 출마만 했더라면 틀림없이 당선되었을 분이라고 하던데요.
그렇지. 그 외에 오대진, 강문석, 김달삼도 다 그 지역 출신이었지.”
- ‘이제사 말햄수다’ 161쪽 -
“ 난 제주도에 미군정이 온 뒷날 떠났어. 대정면에서도 죽어버린 이신우 선생하고 내가 갔어. 도청에서 미군정이 뭘 한다기에. 그럼 둘이서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을 모아가자고 서삼리에 들었어. 거긴가도 농번기라서 사람이 없어. 한림에 가보니 회의하고 있는데… 한 9명은 되어. 그래서 동촌인민위원회 책임자들허고 다 모이난 21인이 되어.
도청에 가니까 군정 그 사람덜 설명 듣고, 우리쪽 요건을 들어달라고 협력을 요청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우리쪽 요건들 들어주면 협력을 하겠다더군. 그 당시 이념은 그 사람덜은 명목뿐이지.” (해방직전 해안 감시대장)
-‘이제사 말햄수다’ 175쪽 -
* 남로당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 부위원장, 간부부장 등
- ‘4․3은 말한다 ①’ 535쪽 -
* ‘4․3은 말한다’에서는 이신호(李辛祜)로 불림.
• 대정면 건준(위원장 우영하‧禹寧夏) 부위원장, 행정부장 -위의 책 68쪽-
• 8‧15 이전 옥고를 치른 명단
이신호(李辛祜, 하모, 대정면 인민위부위원장)=징역 2년-위의 책 83쪽- • (이운방옹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엔 입법의원으로 문도배와 제주읍의 김 택수가 선출됐으나 결격사유 문제가 생겨 김택수는 차점의 김시탁으로 교체됐다고 한다. 또 어떤 연유에서인지 남제주군에서도 각 면 대표 2명 씩 14명이 모여 모슬포의 이신호 등 2명을 입법의원으로 선출했으나 그 들은 곧 사퇴했다고 전한다.) -위의 책 189쪽 -
• 대정면의 3․1절 집회는 대정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6,000 명의 군중들로 대성황을 이룬 가운데 진행되었다. 가파도에서도 100 여명의 주민들이 어선을 타고 나와서 행사에 참여할 정도였다. 기념식은 이운방 의 사회로 대정중 교장 이도일과 일제시대부터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벌 여 온 이신호 등의 연설로 진행되었다.
- 위의 책 289쪽-
“강일용은 1947년 3‧ 1시위 때 해방 후 대정면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주도하고 남로당 제주도당 부위원장을 맡았던 이신호(李辛祜, 이신우‧ 李信祐로도 불림)가 상모리 출신이어서 또래들과 함께 참석했다. 이신호가 연설하는 도중 미군에 의해 체포돼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이신호는 곧 풀려났다. 그러나 파업 등이 이어지면서 이 사건으로 6월 징역형으로 육지 형무소에서 복역했고 48년 11월 총살됐다.”
-2012. 9. 25. 강일용(22년생,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2리) 증언 -
4)남로당제주도당 인민해방군사령관 김의봉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20쪽
“조천면 와흘리 김의봉(28) 사망; ‘4·3은 말한다’ 4권. 424쪽
“무장은 군사부만 갖고 있었습니다. 군사부는 모두 4개 지대로 나뉘었는데 제1지대(조천면 관할)는 이덕구(신촌리 출신), 제2지대(구좌면)는 김대진(신촌리 출신), 제3지대(남원면)는 김의봉(金義奉. 와흘리 출신), 제4지대(대정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오아무개(대정면 출신)가 각각 맡았습니다. 이중 1지대만 1백 명 안팎이고, 나머지는 50 명 가량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김의봉 북제주군 와흘 출신. 인민유격대. 이덕구가 사살된 뒤 유격대원을 통솔하였고 각종 투쟁으로 인민군 진격에 호응하자는 정치사업 진행(인민유격대는 56년까지 활약).”
- 아라리연구원의 ‘제주무장투쟁 ’ 인명목록 471쪽Ⅰ
‘이제사 말햄수다’ 1, 243쪽
“• 삼양 간이학교 졸업(4년제) • 일제 때 와흘리 청년회 단장으로 마을에서 신임을 쌓고 8․15 이후 와흘리장, 인민위원장을 겸함 • 입산 후 1949년 6.7. 이덕구가 체포되고 나서 이어 사령관이 됨.”
“동태운 총경 휘하 박원협 경위가 직접 지휘하는 사찰유격중대가 15일 하오 11시 30분경 조천면 와흘리 부근 산록에서 적의 군사총책 김의봉(金義奉)이가 지휘하는 약 20명의 무장공비를 포착, 약 40분간에 걸쳐 치열한 교전 끝에 적의 수괴 김의봉(조천면 와흘리 출신, 당 32년)과 중요 간부 강봉오(姜奉吾, 별명 강□수, 조천면 와흘리 출신, 28)외 여비 1명을 사살하고…”
-제주신보 1953년 4월 17일, ‘제주4‧3사건자료집 3’ 235쪽 -
5)남로당제주도당 인민해방군 참모장 김완식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21~22쪽
“조천면 북촌리 김완식(23)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4집. 94쪽
“1948년 6월16일 북촌리….하필 그 날에는 입산했던 청년 7~8명이 그들 표현대로라면 ‘휴가차’ 마을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의 리더는 무장대 참모장격인 김완식(金完植)이었다.(김완식은 무장대 핵심 간부로 훗날 유명한 ‘관음사’전투를 지휘했으며, 끝내 산에서 자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제사 말햄수다’ 1, 242쪽
“• 입산하여 무장군 참모장 역할 • ‘관음사 전투’ 책임자로 투장 중에 죽음
• 일제 때 해군 준위로 늘 포켓에 권총을 넣고 다녔다 함”
6) 북한 인민군 사단장 이원옥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41쪽
“조천면 북촌리 이원옥(29) 행방불명; ‘이제사 말햄수다 ①’ 252쪽
“ 이원옥(북촌리)
• 1947년 가을, 입산하여 연락임무를 띄고 1948년 10월 이북으로 감
• 한때 선장의 경험을 살려서 20일간 서쪽 경로로 배를 저어 20일만에 해주에 도착했다 함
• 이북에 있다가 6‧25 인민군 남하 때 사단장으로 내려옴
• 7천 명을 거느리고 낙동강 전투에서 사망.”
7)남로당제주도당 위원장 김달삼 비서실장 박태전
‘제주도의 4월3일은?’ 75~77쪽
“제주읍 영평리 박태전(23) 행방불명; 2011.3.22., 4.27. 이기형(李琪亨,
24년생,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백록회를 함께 하였던 박태전은 1947년 12월,
이기형의 집을 찾아와 그의 어머니에게 일본으로 간다며 인사했다.
이기형에게는 “내년 봄에 시끄러우니 삼촌(그의 어머니)을 모시고 육지로 피하라. 너는 실력이 있으니 취직도 손쉬울 것이다”라며 4‧3을 예상하여 제주를 떠나도록 간곡하게 권유했던 친구이다.
그런데 2연대 선무공작대 담당 김동근(金東根)소위가 밤중에 와선 “연대장이 찾는다”고 하여 함께 짚차에 올랐다. “박태전을 아느냐”고 김 소위가 묻자 “친구이고 일본에 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소위는 “친구”라는 답에 놀라며 “산에서 체포됐다”고 말했다.
함병선(咸炳善) 연대장은 “폭도들이 다량의 무기들을 은익했는데, 소재지를 알고 있는 것은 박태전 뿐”이라며 그를 설득하여 달라고 부탁했다.
이기형은 “친구를 배반할 수 없다. 조건은 목숨을 살려달라”고 요청했다. 함 연대장은 “자백하면 살려준다”는 약속을 했다. 박태전이 있는 제주농고 수용소 천막에 들어서니 그는 혼자 수감되어 있었다. 머리와 수염이 마구 자라 봉두난발이었다. 다만 눈만은 동그랗게 뜨고 반짝반짝 빛났다.
“오래간만이다.” 박태전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귀순 삐라 잘 읽었다. 문장보고 너가 쓴 줄 알았다. 특히 달력 밑에다 귀순을 종용하는 글을 쓰는 아이디어는 너 아니면 누구도 흉내도 못 낸다”는 정겨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달력, 폭도들에게는 음력이 함께 적힌 달력이 정말 필요했고 선뜻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에만 있는 줄 알았던 그를 보았을 때 이기형은 만감이 교차했다. 박태전은 이덕구가 사살된 후 폭도들의 모든 뒤처리를 혼자서 하고는 잡아가라는 듯 토벌대 앞에 나타나 체포된 때였다.
이기형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박태전이가 일본에 가지 않고 산에 올라갔고 체포됐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쇠고기 불고기, 계란부침, 옥도미 생선구이 등 정성스런 도시락을 만들어 줬다.
이튿날 점심시간, 박태전은 한 숟가락을 뜨고는 눈물을 흘리며 “삼촌님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기형은 어렵게 운을 땠다. “무기류 묻은 곳을 알리면 너의 생명은 보장을 약속받았다” 고 말했다. 박은 눈을 치켜뜨며 도시락을 그에게 내던지며 “너도 친구냐, 개새끼 가라”고 처절한 고함을 질러댔다.
이기형은 “너의 신념이 늘 옳다고 생각하느냐. 그까짓 총은 미국에서는 몇 시간, 몇분 이면 만든다. 네가 살아온 22년을 생각하라. 22년이면 총 수백만정을 만들고도 남는다. 네가 묻어둔 총 몇 년이나 가겠느냐. 살아있어야 신념대로 사는 것 아니냐” 등으로 간절한 설득이 이어졌다.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3일 후 김동근 소위로부터 박이 “곰곰 생각해보니, 생명을 보증해 주겠다면 배반치 않겠다”며 무기류 숨긴 곳을 가리키겠다고 마음을 돌렸다는 것이다. 남제주군 쪽 3곳, 북제주군 쪽 2곳 등에서 찾아낸 무기류는 남국민학교에 쌓았는데 무려 2개 교실분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쯤 후 교원양성소 직원실에 새 군복으로 말쑥하게 입은 박태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연대장과 함께 간다”고 말했다.
몇 년 후 김동근 소령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 친구 대단한 놈입니다. 튀었습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2연대와 함께 청진까지 북진하다 중공군이 몰려오자 어느 틈에 도망친 것이다.
10여년이 지난 오현고 재직시절, 북교 교사로 함께 있었던 고봉식 오현고 교장이 오현고 동창회 초청으로 일본을 다녀오고서는 그에게 “박태전이 살아있다”고 말했다. 형형한 눈빛 때문에 박을 기억해 내는 친지들에게 “너 박아있다”고 말했다. 형형한 눈빛 때문에 박을 기억해 내는 친지들에게 “너 박태전 아니냐 ”하면 유창한 일본어로 “나는 일본인”이라고 신분을 감춘다는 것이다. 주로 북한에 있으나 일본에 자주 나온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친구사이에는 “너는 제2 6‧25가 있어도 박태전이 있으니 무사할 것”이란 농담을 자주 듣곤 했다.”
“박00
0. 키는 작고(158~160cm) 왜소한 체구. 머리가 비상함. 일제 때 일본에서 공부한 인테리. 북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음
0. 4·3 당시 26세 정도. 김달삼 비서장을 함. 후에 귀순, 전향하여 귀순공작대를 조직, 전 섬을 돌며 귀순 권고 삐라를 뿌림. 당시 제주 주둔 헌병대장과는 일본 유학시 같은 학교 동창이었다고 함 ”
-‘이제사 말햄수다’ 2집 284쪽 -
8) 남로당 서남부지역 인민유격대 총책 고두옥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19쪽
“중문면 중문리 고두옥(27)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4집. 248쪽
“1948년 11월5일…. 이중 강정생과 고산원은 각각 고두옥(高斗玉)의 어머니와 여동생이다. 9연대 군인이었던 고두옥이 부대를 탈영해 무장대 활동을 하는 바람에 그 가족이 대신 보복학살을 당한 것이었다. 한 주민은 ‘일본군 경력도 있는 고두옥은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데도 글씨를 잘 썼고, 대학 졸업자인 것처럼 행세해 서울의 동양방적에 취직할 정도로 당돌한 사람이었다’며 ‘입산한 후에는 애월면부터 서귀면까지의 무장대 책임자였다’고 말했다. 고두옥과, 아들을 따라 산으로 피신했던 그의 아버지 고갑부(高甲富)는 후에 산에서 토벌대에게 잡혀 총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
9)제주지검 프락치 이재만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17~18쪽
“애월면 신엄리 이재만(31) 사망; ‘4·3은 말한다’ 4권. 142쪽
“4․3취재반은 …. 그런 작업 끝에 이재만(李在萬.33)과 이창우(李昌佑.26) 형제를 찾아냈다. 신엄리 출신인 이재만은 제주지방검찰청 소속 검사보의 위치에 있다가 입산한 자였다. 또 그의 동생 이창우는 특별수사대 소속의 경찰관으로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검속된 후 행방불명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재만 검사의 입산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미뤄볼 때 프락치사건이 노출되면서 도주 입산을 감행한 것이 아닌가 유추된다. 이재만은 일본 중앙대를 중퇴. 군산부청에 근무하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되자 고향에 돌아와 애월초등학교 교사, 해방 후에는 제주도에서 미군정 장관 통역관, 제주도에서 처음 시행한 검사보 시험에 5명과 함께 합격했다. 셋째 형(이창우)과 8촌 손자 이성지는 둘 다 경찰관으로 재직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간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수장을 시켰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물론 두 분의 시신은 여태껏 찾지 못했습니다.”
“이재만은 애월국교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고, 해방 후에는 제주에서 미군정관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제주도에서 처음 시행한 검사보 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검사보로 있다가 입산 활동 중 사망하였다.”
-4‧3교육피해조사보고서 87쪽. -
“ 여기서도 산에 올라간 사람이 몇 분 있었어. 우두머리는 신엄에 있었주게. 백창원, 이재만, 장남진 씨 이분들이 우두머리격인 사람들인데, 내려와서 우리 아버지에게 같이 올라가자고 설교하기도 하고 때리기도 했지. 또 박찬종 씨도 있구나. 뒤에 경찰에 사살당했지만, 이 사람도 큰 우두머리라. 이재만이는 44식 총 세워놩 위협하며 설교했다고. ”창인아, 내 말 안 들을라?“, ”자식아, 내말 들어라“ 허멍…”
- ‘이제사 말햄수다 2’ 160쪽 -
“ 1949년 12월 12일 법조계 인사들이 처형되었다. 이에 앞서 각 기관 적화음모사건이 미수에 그치자 군 수사 당국은 법조계에도 의심을 품던 중 이재만(李在萬) 검찰관 대리가 잠적하자 최원순(崔元淳) 법원장, 김방순(金邦順) 검찰관 대리, 송두현(宋斗鉉) 법원서기장, 김진영, 양성두, 홍인표 등 법원직원을 농업학교 천막수용소로 끌고 가서 최원순 법원장만 석방하고 나머지는 모두 직결처분했다. 이 처형을 주도 지휘한 것은 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卓聖綠) 대위였다. 그는 경남 진주출신으로 마약중독자였다. 그리고 이재만 검찰관 대리는 금덕리 위 노꼬메 오름 굴속에서 잡혀 광령리 ‘왜왓’에서 군인들에 의해 총살되었다. <4‧ 3은 말한다 310, 311>”
-‘도제50년 제주실록’ 46쪽 -
“이와 관련 ‘제주도 피의 역사’에는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경찰관들이 48년 11월 7일을 기해 봉기하기로 하였는데, 그중 밀고자가 있어 사전에 50여명의 경찰관이 체포되어 중합(제주읍 산지항 부근)에서 한꺼번에 수장되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세상에는 비밀이란게 때로 쉽게 노출되는 경우도 있다.
이 수장과 관련하여 1960년 6월에 국회 특별조사팀이 내려 왔을 때 ‘양민학살 진상규명신고서’를 낸 애월면 신엄리의 이경무(李敬武)씨는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하였다.
이성지(李成枝), 22세, 학살직전 수감처는 제주경찰서, 제주경찰서 제주감찰청 통신과 무선계에 근무중인 1948년 10월 31일 검속되어 11월 5일 학살되었음. 죄과는 전무한 바 피해자의 친척에 폭도가 있어서 동지라는 혐의를 걸었음. 사체는 행방불명이녀 수장되었다는 소문이 있음. 사체행방을 조사해 주기 바람.
여기서 이경무 씨가 ‘죄는 전무하나 친척에 폭도가 있어서…’라는 주장은 상당히 포괄적이긴 하지만 아마도 이성지의 할아버지뻘 되는 이재만(33), 이창우(李昌佑, 26) 형제를 지칭하는 듯하다. 이재만은 현직 검사로써, 경찰과 서청이 잡아들이는 억울한 양민들을 무죄방면한 경우가 많아서, 경찰과 서청으로부터 ‘빨갱이 검사’라는 누명을 쓰고, 항상 복수하겠다는 협박에 시달렸는데, 얼마나 괴로웠으면 ‘검은 개놈들 다 죽이겠다’며 일본도를 들고 가출하여 입산(入山)했던 장본인이다. 그의 입산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이 프락지 사건 직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직도 이름 밝히기를 꺼려하는 이재만 검사의 막내동생 이모(현 67세) 할아버지는 이렇게 증언하였다고 한다.
‘큰 형은 일제 때 일본 중앙대학교를 중퇴하고 군산부청에 근무하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고향에 내려와 애월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당시 나는 군산에 살았는데, 큰형(이재만)이 산에 올랐다가 죽었다는 애기를 들었다. 시신은 일가 어른들이 찾아와 매장했다. 셋째형(이창우)와 8촌 손자뻘 되는 이성지 둘 다 경찰관이었는데, 경찰에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수장시켰다는 소문이 있었다.… 물론 두 분이 시신은 여태껏 찾지 못했지요.’
-오종규의 ‘제주도 4‧3사건 봉기인가 폭동인가 그 진상은 이렇다’ 201쪽-
10) 경찰 프락치 송창염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19쪽
“제주읍 오라리 송창염(26) 사망; ‘4·3은 말한다’ 4집. 142~143쪽
“경찰 프락치사건에 연루된 특별수사대원 가운데는 제주읍 오라리 출신 송창염(宋昌琰) 형사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송 형사는 프락치 사건이 발각된 직후 자신의 99식 장총을 갖고 입산했다가 뒤늦게 경찰 토벌작전에 걸려 생포됐다. 그는 자신이 근무했던 특별수사대에 끌려와 어제의 동료 형사로부터 취조를 받는 비운을 겪었다.”
11)끝까지 항거한 인민유격대원 변창희
-‘제주도의 4월3일은?’ 4집 165~166쪽
“제주읍 이호리 변창희(18) 사망; 제주신보 1956년 4월 5일
‘제주4․3사건자료집 3’ 282~283쪽
“3일 하오 잔비를 포착하고 전과를 거두었다는 보고에 접한 신(辛相黙) 경찰국장은 즉시 경찰국을 비롯한 관하 각서에 비상소집을 명령, 전 경찰관을 도원하고 광범위에 걸친 색비전을 개시하였으며 신 국장은 연(延) 사찰과장을 대동, 교전지구로 출동하였다.
만 2년만에 올린 토비(討匪) 전과는 전 경찰관의 신경에 예민하게 자극을 주고 있다. 4일 아침 김녕지서에 있는 신 국장은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자못 쾌활한 어조로 전과 내용을 밝히면서 전과를 거둔 7명의 소대원에게 부두목 정권수(鄭權洙)에 현상금으로 걸었던 35만환을 지출하고 용감히 정(鄭)을 사살한 고태흥(高泰興) 순경을 특진시키겠다고 말하였다.
경찰은 색비전을 강행하는 한편 귀순하면 생명을 보장한다는 약속에 변동은 없다.
전화인터뷰 가운데 신 국장은 대항하지 말고 손을 들었으면 살아서 하산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부언하였다.
3일 잔비와의 교전에서 경찰의 피해는 전혀 없다. 4명으로 줄어든 잔비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두목=김성규(金成奎, 중문면 색달리, 36세)
△오원권(吳元權, 구좌면 송당리, 39세)
△변창희(邊昌熙, 제주시 이호동, 22세)
△한순애(韓順愛, 여, 조천면 와산리, 23세) ”
“한달 후인 1954년 2월 13일에 조화옥(여, 당 19세)이 귀순함으로써 무장대 세력은 5명(남 4, 여 1)과 무기 3정이 남아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귀순한 조화옥은 “1개월 전부터 식량이 완전 두절되어 소채‧ 감저‧ 마필육 등으로 연명하고 있다. 부락은 경비망이 무서워 접근을 못하였으며, 자신이 포함된 4명의 무장대는 굴속도 불안하여 가시덤불 속에 돌담을 쌓고 1매의 모포를 덮고 취침하였다. 잔비는 5명이고 무장은 소총 3정인데, 부상단한 김성규가 소총 1정을 갖고 한순애와 같이 행동하고 있고 정권수, 오원권, 변창희 등 3명이 소총 2정을 갖고 별도로 행동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간의 어려웠던 생활상과 내부실정을 실토하였다.”
-‘제주도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53쪽 -
“…지난 21일 식량을 구하려고 제주시 월포동(* 월평동의 오기) 모처에 잠복 중이던 소위 한라산 인민군 사령관의 처 한순애(韓順愛, 22)를 생포한 현지 경찰에서는 한(韓)의 진술에 의하여 27일 오후 5시 50분경 전기 사령관 김성규(金成奎 , 39)와 전투대 책임자 현창희(玄昌熙, 22, 변창희의 오기) 양 명을 한라산 산록에서 교전 끝에 사살하고 나머지 한 명에 대한 포착작전을 방금 진행 중에 있다고 한다.…”
-조선일보 1957년 3월 29일, ‘제주4․3사건자료집 3’ 293쪽 -
12) 북한 인민군(소대장급) 김기추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51쪽
“애월면 납읍리 김기추(19) 행방불명; 2006. 2. 10. 진희백(31년생,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2398) 증언
“1951년 겨울, 부산시 서면 포로수용소.…
그 포로가 다름 아닌 우리고향 출신이며 본인보다 한 살 위이고 초등학교 1년 선배인 김기추였습니다.
의외였지만 고향사람을 타향에서 만나서 한편 반갑기고 하고 ‘너 김기추 아니냐” 라고 물었는데 그도 나를 알아보고 ‘그렇다’고 대답하여 서로 신원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는 포로 중에서도 똑똑해서 소대장급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낙동강 전투까지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했고,…김기추의 친형인 김기전도 같은 포로로 이곳에 수용돼 있음을 알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김기전은 반공포로가 되고, 김기추는 친형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사상전향을 하지 않아 공산포로로 남게되자, 김기전은 고향출신 군인(12명)들을 만날 적마다 “내 동생을 반공포로가 되도록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에 따라 몇 번 설득을 했으나 김기추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접촉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후 형은 석방되어 귀향했고, 김기추의 행방은 불명… 공산포로와 함께 북한으로 갔다고 생각합니다.”
13)북한 인민군 김태봉
-‘북조선에서 사라진 친구와 나의 이야기’ 하기와라 료, 1998. 일본문예춘추사
14)남로당제주도당 지도부 백창원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48쪽
애월면 ″ 강수헌(28) 행방불명; 위의 책. ″
“애월면 고성리는 …. 이 마을 출신 중에는 구엄국교 교사를 지냈던 문기호(文基好)가 4‧3 초기부터 입산해 무장대의 중책을 맡고 있었다. 1947년 ‘3‧1절 발포 사건’에 항의해 사표를 제출했던 중문지서 순경 강수헌(姜樹憲, 이명 강려생‧姜呂生)도 이 마을 출신이었다. 그는 곧 입산해 무장대원이 됐다.”
애월면 신엄리 백창원(41) 행방불명; 2008.5.26. 김여만(19년생. 제주시 719-1. 전 신엄리 의용소방대장, 대한청년단 애월면 단장, 신엄리 단장, 신엄지서 후원회장) 증언
“우리동네 출신이며 나와 신우사립보통학교 동창이고 나보다 3세 위인 이재만(제주검찰 검사보, 남로당 신엄리책)이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면회해달라는 요청이 와 만났다. 그는 “그 날 일은 남로당 애월면책인 신엄리 출신 백창원이가 18명을 인솔하고 가서 저지른 일이며 나는 그날 살인하지 않았다. 다만 이순일 집에 방화하는 데는 내가 참여했다. 여러 가지로 미안하다”고 사정했다.”
“한라산의 무장대 60여 명은 전쟁발발 소식을 듣고 7월 어느날에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고 한다. 이때 고승옥, 백창원, 송원병 등 지도부에 있던 3명은 ‘인민군이 목포까지 왔으니 제주도에 상륙한 이후에 나가야 한다고’고 주장했으나 젊은이들은 ‘4.3을 일으킨 영웅적 전통을 소극저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42쪽
15) 인민재판 주재자 이보택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수정의견 접수내용’ <1> 47~48, 52~55쪽 2003. 9.
16)박진경 대령 암살범 강자규 중사
-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59쪽
“ 애월면 상귀리 강자규(28)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③’ 205쪽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의 혐의자들이 속속 체포됐다. M-1 소총으로 직접 박 대령을 쏜 범인은 부산 5연대에서 파견됐던 손선호(孫善鎬, 당시 22세) 하사로 밝혀졌다. 이밖에도 암살 동조자들로 양회천(梁會千, 25) 이등상사, 신상우(申尙雨, 20) 일등중사, 강자규(姜子奎, 22) 중사, 배경용(裵敬用, 19) 하사 등이 체포됐다.”
‘제주4.3사건의 진상’ 375쪽 2012.9. 10. 현대사포럼에도 관련 자료 있음
17) 과도 입법의원, 제주건준 집행위원 김시택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55쪽,
“조천면 조천리 김시택(46) 사망; 2011.1.7. 김응삼(29년생, 제주시 이도2동) 증언
“김시택과 김시탁은 동일인으로 일본으로 밀항했다.
1945년 9월10일 결성된 제주건국준비위원회 조천면 대표로 집행위원이 됐을 때의 이름을 김시택이었다. 조천면 인민위원회 문예부장으로 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으로 문도배와 함께 선출됐으나 12월 12일 개원식에 참석치 않고 사퇴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79쪽)
그는 1949년에 일본으로 밀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딸 세민은 북한에서 아나운서로 활약했고 세철, 세종 두 아들도 북한에 있고 이 중 한명은 동구권 북한 대사를 지냈다.”
18) 3·1 파업 경찰관, 입산 무장대원 강수헌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17쪽
애월면 고성리 강수헌(28) 행방불명;‘4·3은 말한다’④ 81쪽
“애월면 고성리는 …. 이 마을 출신 중에는 구엄국교 교사를 지냈던 문기호(文基好)가 4‧3 초기부터 입산해 무장대의 중책을 맡고 있었다. 1947년 ‘3‧1절 발포 사건’에 항의해 사표를 제출했던 중문지서 순경 강수헌(姜樹憲, 이명 강려생‧姜呂生)도 이 마을 출신이었다. 그는 곧 입산해 무장대원이 됐다.”
19)41명 탈영 주도 강정호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22쪽
“성산면 오조리 강정호(22) 행방불명;‘4·3은 말한다’ ③ 114쪽
“입산자 가운데는 이밖에 대정면 안성리 출신의 강기창(姜基昌, 3기생), 성산면 오조리 출신의 강정호(4기생), 남원 출신의 김태흥(金泰興)도 포함됐다.
9연대에서 탈영한 41명의 병사들이 대정지서에 나타난 것은 5월 20일 밤 11시 30분께 였다.”
“김달삼은 문상길에게 즉시 탈영을 시키라고 지령하였다. 11연대 1대대 3중대장 문상길에게서 지령을 받은 통신대 최 상사도 즉시 행동에 옮겼다.
[5월 20일 저녁을 먹고 특수야간훈련으로 위장하여 소대원 전원 입산한다. 입산 루트는 부대 밖을 나갈 때 안내원이 있을 것이다. 1차 작전은 대정지서와 서귀포경찰서를 기습한 후 입산한다. 즉시 행동에 옮기기 바란다.]
최상사는 대정 출신 강기창과 성산면의 강정호, 남원면의 김태홍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 이선교의 ‘제주4‧3사건의 진상’ 164쪽 -
20)다랑쉬굴 아지트 폭도 대장 오달용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24쪽
구좌면 상도리 오달용(21) 사망;‘4·3은 말한다 ⑤’ 56쪽
“입산자 오달용(吳達用)의 형 오달인(吳達仁)은 제주경찰서 수사계장이었다. 결국 오달인은 경찰을 떠나게 됐고 고향에 있던 아버지 오종현(吳宗炫, 60), 어머니 고두복(高斗福, 62), 형 오달중(吳達中, 43) 아내(22)는 토벌대에게 희생됐다.”
“1948년 11월8일 밤 종달리 김호준 등 5명을 납치 입산시키고 당일 김호준은 공비들로부터 살해됐고 정권수의 지시로 재산자 10여 명을 지위했다.”
-북한이 쓴 ‘제주4‧3사건-3’ , 지만원 ‘제주 4‧3’ -
“오달용은 구좌면 일대 폭도사령관 정권수 밑에서 구좌면의 동부지구를 지휘하던 폭도대장. 도망쳤기에 당연히 숙청 대상이었으나 동창 오달용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다짐을 받고 그를 용서해줘 살아났다. 은월봉 근처에서 20일간 전전하다 다랑쉬굴로 가 10여일 머물렀다. 다랑쉬굴 속에는 정권수와 오달용의 지시를 받고 있던 종달리 출신 강태용(33), 고태원(25), 박봉관(31), 함명립(19), 고순환(26) 고순경(20) 형제, 고두만(20) 등과 하도리의 여자 3명이 있었다. 여자 중 이성란(19)은 구좌읍인민위원회(위원장 문도배)의 부위원장이었던 오문규의 며느리. 오문규는 3․1 사건이후 경찰의 수배를 받자 일본으로 밀항했다. 강태용의 경우 그의 형 강태관이 해방 전부터 이북에서 살아 그곳 인민위원회에서 요직을 맡고 있어 경찰의 주목을 받자 입산했다. 고태원은 당초 우익이었다. 대동청년단 단장직을 놓고 알력이 있다 오지봉이 단장이 되자 입산했다. 종달리 출신 입산자는 다랑쉬굴에서 대부분 숨졌다. 오원홍도 입산자였다.”
-2011. 9. 7. 채정옥(26년생, 구좌읍 종달리) 증언, ‘제주도의 4월3일은? 4집 173쪽 -
21)인민위 간부였던 폭도 대장 유신출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29쪽
“대정면 인성리 류신출(36) 행방불명;‘4·3은 말한다 ⑤’ 305쪽
“인민위 간부라 해서 꼭 무장대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정고을에서는 비교적 일치했다. 인민위 간부 출신 무장대로는 유신출(柳辛出, 인성리, 37)이 유명하다. 그 역시 일제 때 일본 대판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사람이다. 유신출은 1948년 5월 10일 무릉지서 습격에 가담했다가 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월 10일 저녁, 대정면당 소속 무장대원들에 의해 무릉지서가 불에 타고경찰관 3명이 죽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무장대원이었던 유신출이 폭약(오린당이란 사제 폭탄의 일종)을 잘못 터뜨려 죽는다.”
-‘4·3 장정 6’ 47~48쪽
“그 때 내 손으로 오린당이란 것을 만들었는데, 다이나마이트보다 더 위력이 강한거라. 오린당이 어떤 거냐면 왜정시대에 일본놈들이 지뢰(*기뢰)를 바다에 띄우면 배가 지나가다가 터지게 되는 거라. 이것을 구해다가 폭탄을 만들었는데, 노랑한 오린당이라고 한 그 약을 솜을 넣은 깡토에 넣고 쇠조각을 넣고, 솜을 깔고 또 그 위에 오린당을 놓아서 다진 다음에 그 끝에 심지를 박는 거지. 심지는 일정허지 않거든, 왜냐하면 폭발하기 전에 시간 여유를 두어야 할 때는 길게 하는 것이고, 붙이면서 바로 던질 것이면 짧게 하는 것이지.”
-‘4·3 장정 6’ 75쪽
22)인민해방군 지도부 송원병
-‘제주도의 4월3일은?’ 4집 158쪽
“대정면 보성리 송원병(35) 행방불명;‘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42 쪽
“한라산의 무장대 60여명은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어느 날에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고 한다. 이 때 고승옥, 백창원, 송원병 등 지도부에 있던 3명은 ‘인민군이 목포까지 왔으니 제주도에 상륙한 이후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젊은이들은 ‘4․3을 일으킨 영웅적 전통을 소극적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날 밤에 허영삼, 김성규 등이 주동이 되어 고승옥 등 세 사람을 포박했고, 이튿날에는 인민재판에 부쳐 살해하였다.”
“1920년대 후반기 이후 야학이 사상성, 정치성을 띠게 됨에 따라 일제의 탄압도 거세어 졌다. 위의 두 번째 노래는 20년대 말~30년대에 걸쳐 불리워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성리의 송원병, 김두옥, 보성리의 조석두 등 각 부락 단위로 있었던 야학의 교사들 중에는 4·3 항쟁이 발발하자 입산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 역시 부락민들에게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4·3장정 6’ 24쪽 -
23)총파업 투쟁위원, 유격대 전투 지휘자 김상훈
-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61쪽
“제주읍 이호리 김상훈(20) 사망; 이선교의 ‘제주4‧ 3사건의 진상’ 357쪽
“제주시 이호동 김상훈은 제주민전 명예의장으로 총살된 자인데 희생자 명단 367쪽에 있다.”
“ 김상훈(金相訓)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 유격대 전투 지휘자. 53년 3월 11일 동료 4명과 함께 사살당함.”
-아라리연구원의 ‘제주민중항쟁 Ⅰ’ 인명목록 469쪽 -
24) 경북 예천 경찰관 제주 파견, 입산 경찰 윤상근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67~168쪽
타지방 경북 윤상근(26) 행방불명; 한라일보 2003년 8월 13일자 김 창후 한라일보 칼럼
“인사발령부에는 윤씨의 부친 윤모 순경을 1947년 5월 6일자로 제주경찰감찰청에 다른 동료 몇 명과 근무를 명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윤씨는 덧붙였다. “… 어머님이 늘상 애기했던, 아버님이 제주도로 내려간 몇 달 후인 8월경(제주도) 조천지서에서 (경상북고) 예천경찰서 개포지서로 전화해 아버님이 조천지서 경찰관 12명과 함께 행방불명됐다고 알려줬다는 것과 이웃 면 출신으로 제주도에서 군 복무를 하던 박모씨가 우리 집을 찾아와 윤순경은 다른 수명의 경찰과 근무지를 이탈했다 6일만에 체포돼 9월 1일 총살되어 바다에 던져졌다고 말해줬다는 사실 외에 말이지요”…
그때 나는 애기를 듣고 소위 ‘4‧ 3 수형인명부’를 확인한 결과, 부친은 1949년 6월 30일 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10월 2일 다른 2백48명과 함께 당시 제주공항 바닷가에서 총살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반드시 희생자 신고를 하도록 당부했었다.”
※윤상근; 1949. 6. 30.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209(10-06)
25)무장대 지대장 김만옥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28쪽
“애월면 하귀리 김만옥(20) 사망; 2012. 6. 26. 장갑순(30년생, 제주시
애월읍 하귀1리) 증언
“장갑순은 그의 부친이 워낙 엄격해 동창은 물론 또래들과 놀지를 못했다. 그가 놀기를 좋아해 또래들과 함께 놀았다면 좌익 활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옆집에 살던 1살 아래 김만옥(20)은 폭도의 작전 참모 역할을 했다. 김만옥의 형 김만두는 월북해 생사를 모른다. 그와 동갑인 양명원의 아버지는 양군옥으로 애월면 인민위원장을 한 골수 좌파이다. 양명원의 형인 양진원(19)은 부친의 영향으로 좌익 활동을 하였다.
장갑순의 오촌 숙부 장재선(32)은 경찰관 시험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폭도로부터 살해됐다.”
※김만옥;제1지대장
“1951년 3월의 무장대 조직은 사령관 허영삼(남로당 제주도 당책 겸임, 안덕 출신), 유격대 부대책 김태길(가명 문호철), 작전 참모 유모씨(이름 미상, 대구 출신), 훈련관 모씨(성명 미상) 등과 제11지대(김영찬, 14명으로 3개조), 제50지대(고인수, 가명은 소형삼, 18명으로 3개조), 제1지대(김만옥, 14명으로 3개조), 제7지대(문도공, 14명으로 3개조) 등 총 64명으로 지휘부와 4개지대로 편성되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43쪽 -
26)4·3 때 동료경관 납치한 경관 장두백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1집 131쪽
“제주읍 도두리 장두백(21)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②’ 40쪽, ‘4‧3진상조사보고서’ 173쪽
“함덕지서에서는 이날 무장대에 의한 직접적인 습격은 없었고 다만 장모 순경 등 경찰관 2명이 집에서 나간 뒤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던졌다. 이에 대해서는 무장대에 의해 납치됐다는 설과 경찰관 스스로 ‘입산’했다는 2가지 설이 있다. 많은 증언자들은 후자 쪽에 비중을 두어 이야기 하였다. 그날 행방을 감춘 경찰관 가운데 장 순경의 겨우 나중에 산쪽에 가담해서 활약하는 모습을 봤다는 증언도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장 순경이 동료 경찰관을 설득시켜 같이 산으로 올라갔거나, 혹은 동료를 납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함덕지서에는 이날 무장대에 의한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지만 경찰관 2명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관해서는 무장대와 연계된 경찰관 1명이 다른 경찰관 1명을 납치해 무장대 합류했다는 설이 있는데, 무장대 측 자료에도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함덕지서-
아부대 약 40명이 99식 총 2정으로 포위 습격. 먼저 서내(署內) 1명 프락치에게 연락하여 탈출케 한 후 그 소개로 개집을 습격하여 개 1명을 포로했든바 그 처가 지서로 달려가면석 고함을 지름으로 인하여 사전 발각되어 퇴각.
귀도(歸途)에 대청원(大靑員) 3명을 포로로 하고(아지트에 귀환한 후 개전시킨 후 석방) 뒤이어 서청(西靑) 숙사를 습격, 서청 5명을 포로한 후 포로 경관 1명과 서청 5명 중 4명을 총살하고 서청에 취사해 주든 1명은 송당리민이었음으로 개전시킨 후 인민군(人民軍) 취사번(炊事番)으로 채용”
-‘한라산은 알고 있다’ 62~63쪽, ‘제주도의 4월3일은? 1집’ 358~359쪽
“4‧ 3 기간 동안 측후소에 다니는 3살 위 큰 형 강경택이 무사했고 9촌숙인 강응지(28)만이 정월 명절 부근 폭도 습격 이튿날, 도두국교 박원일 교장 등 10여 명이 토벌대에 의해 총살될 때 희생됐다. 다만 작은 처남 장두백(21)이 함덕지서 경찰관으로 있다가 선흘리 지경에서 죽었다. 이 장두백이 4‧ 3 당일 폭도들이 함덕지서 습격 때 입산한 장 순경이다.”
-2013. 4. 10. 강경하(27년생, 제주시 도두리) 증언
27) 폭도로 있다, 인민군과 해주경찰서장된 현만호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1집 155~156쪽
“제주읍 노형리 현만호(20) 행방불명; 2013. 5. 28. 강원배(37년생,
제주시 노형동) 증언
“ 48년 11월 29일 광령 일대에서 토벌하러 갔던 군인들이 노형국교 쪽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불을 질렀다. 당초 노형은 소개 대상지역에서 제외돼 불을 질러 소개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노형을 지나는 길은 토벌대의 차량이 지나지 못하도록 땅을 파고 돌을 굴려 차량통행을 막아 폭도의 소굴임을 내보였기에 군인들은 소개토록 불을 지른 것이다. 이때 굴묵이(느티나무)로 집이 지어져 마루는 얼굴이 거울처럼 내비칠 정도의 6칸 집이 불탔다. 불탄 집에서는 사흘간이나 연기가 피어올랐다. 비극은 강원배의 할아버지가 불을 끄려다 군인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떴다. 강원배는 4‧3 희생자로 신고하지 않았다. 희생자에 폭도들이 있는 한 신고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노형 월랑은 양상집과 현만호가 좌파의 핵심 인물이다. 양상집은 수배령을 피해 육지로 나갔고 한 짓이 두려워 고향에도 오지 못하고 이호에서 살다 죽었다. 현만호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았으나 감형이 된 듯, 6‧25 때 인민군과 함께 하다 해주경찰서장까지 했다는 것이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입에서 전해졌다. 현만호를 포함 노형 출신 12명이 북한에 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만호;1949. 6. 28.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90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