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04
10월8일[연중 제27주간 회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f-UJDXf0FU
[작은형제회 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소중했지만 니네베 사람들 역시 소중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예언자들 가운데 참으로 솔직하고 인간적인, 그래서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한 예언자가 있었으니, 바로 요나입니다. 보통 다른 예언자들은 비록 주님의 명령이 두렵고 떨렸지만, 거부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때로 너무 부담스러워 주님께 따지기도 하고, 울부짖기도 했지만, 대체로 마지막에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주님께서 전하라고 하는 말씀,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는 예언의 말씀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주님을 뒤로 하고 도망쳐버렸습니다. 부담스런 주님과 엮이지 않으려고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타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에 대한 거부의 결과는 혹독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 사흘간이나 머무는 특별한 체험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참 하느님께서도 참 재미있으십니다. 거부에 대한 벌로 육체적 질병을 겪게 한다든지,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게 하셔도 될 텐데, 요나를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물고기가 사람 뱃속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사람이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아마도 커다란 고래 뱃속이었겠지만. 고래뱃속 깊은 곳, 캄캄한 곳에서 사흘을 버티는 동안 요나의 인생은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됩니다. 절박한 상황 앞에 놓인 요나는 간절히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는 존재론적인 심오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사흘간의 죽음체험을 통해 요나는 온전한 주님의 참 예언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또한 요나는 참회와 동시에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주님께 바칩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바다 속 깊은 곳에 저를 던지시니 큰 물이 저를 에워싸고 당신의 그 모든 파도와 물결이 제 위로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를 구렁에서 저를 건져 올리셨습니다.”(요나서 2장 3~7절)
드디어 요나는 일말의 두려움 없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백성들 앞으로 다가섭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때로 거침없이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요나로부터 전해진 신탁의 말씀에 니네베 주민들은 임금에서부터 시작해, 모든 대신들과 백성들이 참회를 하게 됩니다. 단식과 금육을 실시하면서 크게 가슴을 쳤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크게 회심하는 표시로 사람들만 자루 옷을 걸치고 단식을 하면 될 텐데 아무런 죄도 없는 소나 양, 낙타나 염소에게까지 자루 옷을 입혔으며 단식에 동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강제로 이상한 옷을 입히고 밥도 주지 않으니 동물들이 꽤나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 의지가 강력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신 주님의 마음이 드디어 눈 녹듯이 녹아내렸습니다. 단단히 징벌하려던 주님께서는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한편 편협된 요나의 구원관에 비해 주님께서는 구원의 보편성을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른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서 3장 11절)
우리 주님은 크고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주님께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소중했지만 니네베 사람들 역시 소중했습니다. 그들 역시 당신께서 손수 창조하신 사랑스런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_bxlwXWGfno
++++++++++++++++++
<묵상기도 잘하는 방법: 마르타는 소리기도, 마리아는 묵상기도>
오늘 복음에 마르타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어떻게 봉사할까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서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이 두 자매의 상태가 바로 걱정을 하는 사람과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가끔 우리는 걱정하면서도 생각한다고 착각합니다. 생각은 내 밖에서 들어오는 좋은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이고 걱정은 자아와의 대화입니다. 생각은 곧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윌리스 캐리어(Carrier)는 미국 유명 에어컨 회사, ‘캐리어’의 설립자입니다. 그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수백만 달러가 드는 일을 수주받게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들어가야 했는데 아직 그 회사는 그 기술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캐리어는 수천만 달러의 손해를 보게 되었고 회사에서도 퇴사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몇 날 며칠 엄청나게 걱정합니다. 막연한 걱정이 그를 집어삼켜 잠도 잘 수 없었고 먹고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걱정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걱정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도대체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게 뭘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분석해 보았습니다. 현실을 분석해 본 것입니다. 종이 위에 이 실패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써보았습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직업을 잃을 수도 있어. 길거리에 나 앉겠지.’ 최악의 상황을 쓰다 보니 긍정적인 생각도 올라왔습니다. ‘물론 회사는 2,000만 달러의 손해를 보았지만 좋은 실험을 한 거야.’ ‘근데…. 어떻게 하겠어…. 현실을 받아들이자.’
이때 바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걱정이 생각인 줄 알았는데, 걱정은 자신을 사로잡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을 하게 되니 구체적인 방안이 떠올랐고 그 결과 2,000만 달러 손해를 단지 2만 달러 손해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걱정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좋은 생각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생각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J.K. 롤링은 1990년 맨체스터에서 런던까지 연착된 기차 여행을 하는 동안 해리포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녀는 기차를 타는 동안 마법 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년의 아이디어가 “완벽히 형성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이혼하고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살길이 막막하였습니다. 그런데 연착된 기차가 무엇입니까? 느리더라도 언젠가는 이 자리를 떠나 다른 곳에 저절로 다다르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기차는 자신의 인생도 그럴 수 있다는 차분한 마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녀에게 말씀하시는 지혜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욕조에 들어가자 물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알아차렸고, 왕의 왕관이 얼마나 많은 물을 대체했는지 측정함으로써 왕의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판단하는 방법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는 "유레카!"를 외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시라쿠사의 거리를 달렸습니다.
왕의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지 알아내지 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욕조에 들어가 한가하게 목욕하는 게 정상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내 힘으로 하려는 마음을 포기했을 때 마음에 평화가 오고 깨달음이 옵니다. 걱정은 그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담장과 같습니다.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 ‘예스터데이’(Yesterday)의 멜로디가 꿈에서 떠올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완벽히 형성된 곡조로 잠에서 깨어났고 처음에는 그것이 너무 완벽해 보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표절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이란 무엇입니까? 세상 걱정을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걱정이 많으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잠을 자고 나면 새로운 영감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좋은 생각은 내 노력에서 오지 않고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제임스 와트는 증기 엔진의 기존 설계에서 얼마나 많은 증기가 낭비되는지 알아차린 후 증기 엔진을 개선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실패에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공원을 거닐다가 별도의 콘덴서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는데, 이는 증기 기관의 효율을 획기적으로 향상하게 하였고 산업 혁명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공원을 걸으며 평화를 찾는 것도 얼마나 좋을까요?
뉴턴은 연구할 때가 아닌 사과를 바라볼 때 중력의 법칙을 깨닫게 됩니다. 나에게서 좋은 게 나온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좋은 생각은 내 힘으로 무언가 생각하려 할 때 달아납니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듣는 마음을 가집시다. 이것이 마르타로부터 마리아로의 전환이고 기도의 꼭 필요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 교구는 3년 동안 교구 시노드를 준비하였습니다. 지난 9월 14일 ‘십자가 현양 축일’에 대의원 회의가 있었고, 저는 부제님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그날 교구장님과 함께하는 미사가 있었고, 그동안의 준비 과정과 결의안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시노드는 ‘건강검진’과 비슷합니다. 건강검진은 여러 분야를 점검합니다. 질문을 통해서 생활 습관을 파악합니다. 운동은 얼마나 하는지, 음주와 흡연은 하는지, 우울증은 없는지, 잠은 충분히 자는지 질문을 통해서 확인합니다. 채혈을 통해서 몸의 영양상태를 살펴봅니다. 소변검사를 통해서 영양분의 순환이 잘 되는지 살펴봅니다. 내시경을 통해서 위와 장의 상태를 살펴봅니다. 혈압을 측정합니다. 고혈압이라면 원인을 찾아봅니다. 시력과 청력을 확인합니다.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건강검진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몸에 이상이 있다면 그것을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몸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좋은 생활 습관을 지니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건강검진을 통해서 우리 몸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듯이, 시노드를 통해서 교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는 겁니다. 시노드는 교구의 건강 상태를 점검합니다. 첫째는 ‘경청’입니다. 교우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제와 수도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는 겁니다. 교우들이 영적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는 겁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민과 갈망이 무엇인지 듣는 겁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에게 두통약을 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둘째는 ‘진단’입니다. 교회의 재정은 문제가 없는지 살펴봅니다. 교우들의 신앙생활의 지표인 성사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세례, 견진, 고백, 병자, 성체, 혼인, 신품 성사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성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만과 위선이 문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 보다는 세상의 것들을 먼저 찾으려는 제자들의 욕망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처방’입니다. 처방에는 고통이 따르고, 인내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처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60년 전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창문’을 여는 처방을 하였습니다. 사목헌장, 계시헌장, 교회헌장, 전례헌장을 통해서 시대의 징표에 맞도록 교회의 창문을 열었습니다. 달라스 교구도 ‘결의문’을 통해서 교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처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시급한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필요한 곳에 예산을 책정하고, 집행해야 합니다. 2000년이 지났지만, 예수님의 처방은 여전히 강력한 효과가 있습니다. 교회에 어려움이 있다면 예수님의 처방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헌신과 희생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처방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처방입니다.
12월 4일일 교구 시노드는 폐막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교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복음의 기쁨이 넘쳐나는 교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걱정하기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교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교구 시노드와 동행하려고 합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깊은 애정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며, 몹시 분주하였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이것은 무엇을 하였다는 것인가? 주님의 발치에서 시장한 마리아는 바로 이 샘에서 정의의 곳간에서 먹고 마시고 있다. 자기가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그분의 진리를 먹고 있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에서 보듯이 덕은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니다. 한쪽에는 분주한 섬김이 있고, 다른 쪽에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분주하게 일하는 것보다 우선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하신다.
시중드는 일로 바빠서 거룩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마르타가 열심히 시중을 들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좋은 몫을 택한 마리아가 인정을 받은 것이다. 복음에서 보면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뜨겁게 사랑했다. 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부터 시중들 준비를 했고,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주님께서 오셨을 때도 먼저 달려 나가 그분을 맞이하였다. 마르타는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시중드는 매우 거룩한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영적 가르침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마르타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육신을 시중드는 일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리아의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모습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을 읽을 때 자신이 마리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마르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상에 사시는 동안은 당신께 음식을 마련하여 드릴 사람들이 필요하셨습니다. 천국에는 마르타가 할 일이 없으리라고 말하지만, 현세의 삶에는 어제 복음에 나왔던 강도를 만난 사람처럼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언제나 있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을 돕기 전에 먼저 나의 일상생활을 해결하는 것부터 적지 않은 근심거리입니다.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부러워하고만 있을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쩌면 마르타의 일도 좋은 몫입니다. 전에 어떤 곳에서 방 이름을 정하는데 제가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마르타의 집’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을 집에 모실 수 있었던 것은 매우 큰 특전이 아니었을까요?
마르타는 스스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고는, 이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잊은 듯합니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바쁘다 하여도, 예수님께서 드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그를 예수님과 긴밀히 결합하여 줍니다. 내가 지금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잊지 않는다면, 우리 집을 찾아 주시는 주님을 위하여 애쓰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수고는 좋은 몫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수고로 천국에 이르게 될 때, 그때는 세상의 무수한 마르타들도 수고를 멈추고 “빼앗기지 않을”(루카 10,42) 몫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사람, 예수님께 음식을 만들어 드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 말씀을 잘 듣고 실행하는 것이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1)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르타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마르타만 바라보다가, 또는 마르타가 한 일만 바라보다가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려고 오신 분, 목자이신 분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먹입니다. 양들이 목자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ㄴ-38) <목자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는 양들이, 즉 ‘말씀’이든지 ‘성체’든지 간에,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는 사람들이 ‘착한 양들’이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고, 주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2)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고, 예수님께 드릴 음식을 준비하려고 애쓴 일은 훌륭한 일입니다. 마르타는 순수하게, 아무런 사심 없이, 예수님을 좀 더 잘 섬기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분명히 그랬는데, 나중에는 ‘일’만 생각하느라고 예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라는 말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분주하였다.’ 라는 말은, 마르타의 마음속에 ‘일’만 있고 예수님은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는 말도, 마음속에 ‘일’만 있고 예수님은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마리아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 말은, 도와주지 않는 동생과 모든 것을 ‘보고만 계시는’ 주님을 함께 비난하는 말입니다. <마르타는 자기가 모셔 들이고 잘 접대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바로 그 주님을 비난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3)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라는 말씀에서, ‘많은 일’은 ‘너무 많은 음식’을 뜻할 수도 있고, ‘물질적인 일’이나 ‘다른 사람들의 일’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라는 말씀에서, ‘필요한 것’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가리키고, 이 말은 예수님, 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뜻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당신이 주시는 것을 잘 받는 것이 곧 당신을 잘 섬기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라는 말씀은, 마리아는 주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 영원한 것, 가장 고귀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단하고 너도 여기 와서 내 말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하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도 아니고, 먼저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4) 주님께 무엇인가를 잘 바쳐야만 주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2사무 7,2)
다윗은 성전을 지어서 바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가 성전을 짓는 것을 막으셨습니다.(2사무 7,4-17)
하느님께서 바라신 것은 성전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충실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나중에 솔로몬이 짓게 되는데, 솔로몬은 성전 봉헌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1열왕 8,27)
하느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서 지었다는 것이 솔로몬의 기도입니다.(1열왕 8,28-30) 주님께 무엇인가를 잘 바치는 것이 주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들은 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주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1열왕 9,4-9)
=====================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자매 가운데 누가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보이십니까?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가 칭송을 받지만, 사실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 가는 중심인물은 그녀의 언니 마르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마르타가 겪는 마음의 동요와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여기서 ‘분주함’이란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움직인다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뿐만 아니라, 마음이 흩어지고 어지러운 상태도 포함합니다.
사실 마르타도 예수님 말씀을 듣고 싶어서 그분을 집에 초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귀한 손님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해야만 하였고, 마르타가 그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 발치에 앉아 속 편하게 말씀을 듣고 있는 철없는 동생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언니 입장에서 화가 날 법도 합니다. 참다못한 마르타는 동생이 자신을 거들게 해 주십사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언니가 동생에게 직접 하는 것이 옳습니다. 집에 온 손님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큰 결례이지요. 그러나 마음이 복잡해진 마르타는 그런 요청이 실례가 되는지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 초대되신 예수님께서 사소한 집안싸움의 중재자로 전락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하느님 말씀을 듣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질투심에 사로잡힌 인간의 전형을 비추기도 합니다. 마르타는 그분 말씀이 듣고 싶어서 예수님을 집에 초대하였지만, 나중에 가서는 동생이 말씀을 들을 기회마저 박탈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도 그런 옹졸함이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누리지 못할 바에는 남도 누리지 못하길 바라는 질투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부산교구 표중관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 일이 아닌 하느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언니인 마르타는 예수님의 식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동생인 마리아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으니 조금은 화가 나서 예수님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여인, 마르타와 마리아는 활동가와 관상가의 모범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께 식사 대접은 당연하고 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손님으로 모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예수님 홀로 방 안에 계시고, 두 자매가 식사 준비에만 정신이 없다면 얼마나 예수님께서 쓸쓸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집에 오신 이유는 두 자매와 정담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장4절)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의미이며, 목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음과 마음, 혼과 혼이 통해야 살 수 있듯이,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소통이 없다면 무슨 의미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장4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시중드는 일을 나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의 몫을 빼앗으려고 하는 마르타에게 마리아의 몫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생전에 ‘살아있는 성녀’라는 칭송을 들었던 고 마더 데레사 수녀는 ‘관상에서 넘쳐 흘러나온 것이 활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기도하고 활동하였습니다.
그녀에겐 기도와 일이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활동하는 사제, 수도자, 평신도는 많은데 기도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호흡하는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없는 삶은 생기 없는 삶이며, 메마른 삶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잃어버린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곳은 생명력이 없는 곳이며, 삭막한 사막과 같은 곳입니다.
오늘날 냉담자가 많은 이유도 교회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도 활동에만 치우치고 기도의 삶이 부족한 때문이 아닐까요? ‘활동이 기도를 삼켜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칫 활동에만 열중하다보면 기도는 점점 하기 싫고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서 하느님은 잊어버린 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때로는 자신이 이룰 수없는 일까지도 설계하고 밀고 나가면서 한없이 쫓기게 되고, 설계한 것을 이루지 못해서 초조해하고 실망하고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 속엔 허무함과 공허함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 없는 나는 누구입니까? 기도가 없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것은 마치 노래를 잃은 카나리아 새와 흡사한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장4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 필요한 것은 하느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느님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속엔 기쁨과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넘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에 다시 한 번 귀기울여 봅시다.
‘마리아 너는 오직 하나 필요한 것, 하느님의 일이 아닌 하느님’ 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몫을 택했으니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결코 그 몫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아멘.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10,42)
경험적으로 소박하고 단출한 식단이지만 단품 식사가 마음 편합니다. 그래서 많은 반찬으로 가득 찬 뷔페 식사가 부담스럽고 불편합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음식을 먹을 때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난 다음 기분 좋은 포만감보다 불편한 더부룩함으로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을 겁니다. 과한 것보다 약간 모자란 게 낫다는 말도 있듯이 정성이 담긴 작은 음식이 많은 음식보다 더 만족감을 줄 수 있습니다. 영적 만족감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몇 년 동안 원외 거주할 땐, 아무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혼자 있으면서도 주어진 외부 활동 곧 병원 원목 신부로서의 제 소임에 충실하고, 운동도 열심히 할뿐더러 꾸준히 독서도 하면서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도 중요하지만 제게 꼭 필요한 영적 운동, 곧 기도 생활을 충실히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바쁜 일상에서, 분주한 활동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영혼을 고요하게 유지하느냐가 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하려면, 활동의 회전 바퀴 중심에 고정된 축이 굳건하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고정된 축이 있다면, 바퀴가 아무리 빨리 돌아도 그 축은 중심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축이 바퀴를 돌려주는 것입니다. 축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바퀴가 요동치거나 아예 움직이지 않아 모든 일이 뒤 틀려 멈추고 맙니다. 고정된 축에서 안정이 나오는데, 이는 바퀴가 축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고요함은 바로 바퀴가 축에 고정됨에서 나옵니다. 우리 시대만이 아니라 성서의 시대에도 이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우리네 삶의 문제를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를 통해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집 안에 살아가고 있는 두 자매에게서 드러나고 있는데, 한 사람은 고정된 축이고, 다른 자매는 그 축에 끼여 돌아가는 바퀴와 같습니다. 마리아는 고정된 축이고, 마르타는 돌아가는 바퀴입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한순간이지만, 잠시 고정된 축에서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긴 여정으로 인해 지치시고 피곤하셨기에 편히 쉬고 싶은 마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시장하셨을 겁니다. 오랜만에 자기 집을 방문하신 예수님이 마르타에게는 오직 음식 대접을 필요하는 손님으로만 보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당하신 거부와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겪어야 할 수난은 그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잠시라도 그 짊을 내려놓고 누군가가 자기 곁에 머물면서 관심과 이해의 시간과 자리가 필요했었나 봅니다. 예수님도 누군가 당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말해 보았지만, 앞으로 겪을 수난에 대해 예고할 때마다 다들 진저리를 내고 들으려는 마음이 없음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이런 주님에게 마르타는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10,40)라고 마리아에 대한 분노를 예수님께 쏟아 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10,41)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마르타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은 해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진정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음을 예수님은 에둘러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마르타에게는 회전하는 활동의 고정축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의 고요함을 잃고, 식사 준비가 음식을 먹는 사람보다 중요해질 때, 바퀴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요함을 되찾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영원히 가치 있는 한 가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단 한 가지 그것은 사람이며, “주님 발아래 앉아 있는 것”(10,39)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눈을 바라보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저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은 중심 단어는 “좋은 몫”(10,42)이란 표현입니다. 여기서 좋은 몫이란 곧 주님과의 교제, 친교입니다. 그러니까 마르타가 준비 중인 음식과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양분과의 대비해서, 식사의 가장 좋은 몫은 부엌에 있지 않고 마리아가 앉은 자리에서 베풀어지고 있는 말씀의 잔치에 무게가 더 쏠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친교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수많은 식단을 두루 갖춘 뷔페 식사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뷔페는 먹고 나면 부담스럽고 불편합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와 우리 모두에게 삶을 단순화해야 하고, 중요한 한 가지 일에 초점을 모으고 그 일에 열정을 쏟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고있는 그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섬기고 있는 주님에게서 우리의 시선이나 관심이 분산되어, 다른 일에 정신을 팔려서는 아니 됩니다. 갈라진 마음 없이 주님 곁에 머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을 갈라지게 하는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어떻게 온전함을 유지하고 생활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씨름해야 하는 물음과도 같습니다. 그 해답은 오늘 복음의 마리아처럼 하면 됩니다. 주님 발아래 앉는 쪽을 선택하면 됩니다. 거기가 바로 우리 모두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는 많은 일이 한 가지 일에 굴복하는 곳이며 자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많은 일을 주님 발아래 내려놓고 그분의 보살피심을 받아들이면서 그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때엔 예수님께서 받는 존재가 아니라 베푸시는 존재가 되실 것이며,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마태20,28)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온전히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느끼면서, 우리가 참석하고 있는 성당에서 우리 모습을 성찰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지 심리학자 힐렌 아인혼은 ‘경험의 함정’이라는 책에서 행복을 ‘행복의 사분면’으로 이야기합니다. 우선 행복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실현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불행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과 자기가 원치 않던 것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잘되면 행복하지만, 사업이 잘 안되면 불행합니다. 건강 검진을 해서 너무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오면 행복하지만, 암진단을 받으면 불행합니다.
세 개의 단면이 보입니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갖게 되었을 때, 불행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 원하지 않는 것을 갖게 되었을 때입니다. 행복 하나에 불행이 두 배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빠진 한 면이 있습니다. 바로 원치 않는 것을 갖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픈 가족이 없다거나, 교통사고가 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반반입니다. 원하는 것을 갖게 되는 것이 힘들지만, 원하지 않는 것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것을 갖지 않게 됨에 “다행이다”라고 말하면서, 행복한 ‘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의 이유는 갖는 것에만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갖지 못하는 것에도 행복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건 사고의 주인공이 되지 않는 것만 해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가십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님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가 행복할까요? 아니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을 분주하게 시중드는 마르타가 행복할까요? 둘 다 행복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기 행복을 간직하며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마르타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상태였지만, 그녀는 앞서 말씀드렸던 불행의 측면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만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가 초대했지만 마리아처럼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억울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마르타처럼 우리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행복의 이유보다 불행의 이유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장 좋은 몫인 행복의 이유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자기에게 다가와도 행복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비교에서 악이 나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의 몫을 행하고 또 그 몫에 기쁨과 감사함을 지닙니다.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알고 확신이 서 있다면 그 몫을 행하는 것에 배 아플 일 없고,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몫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고,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르타가 마음이 상했는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 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루카10,40).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마르타의 몫도, 마리아의 몫도 다 필요하고 좋은 몫입니다. 활동과 관상은 자기의 취향에 따라 더 크게 비중을 두었다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마르타의 태도, 편견이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꾸중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리아에게도 그녀가 필요한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마리아가 선택한 것은 좋은 몫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마리아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로마10,17) 말씀을 기초로 삼지 않은 행동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 깨닫게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해야 할 일을 하게 됩니다. 내 뜻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찾게 됩니다. 진정 하느님 앞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마르타는 다소 불평스러운 어조로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그럴 일이 아닙니다. 자기의 역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생색은 왜 냅니까? 왜 동생과 비교합니까? 열심히 일해 놓고 마음에는 화를 잔뜩 담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내 몫이었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스스로 주님을 위해 시중을 들었으면, 그 자체를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인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일에만 집착하면, 그 활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활동은 기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나온 활동이라야 참된 활동이 됩니다. 또한, 기도를 하면 할수록 활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활동이 없는 기도는 또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 안에서 좋은 몫을 택할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몫이라도 최선을 다했으면 그 자체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12,31)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뒤로 미루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친구를 따라 강남을 가지 말고, 자기 몫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남을 따라가다 보면 불평불만이 생기게 되고, 결국, 악에 지고 맙니다. 지금 하는 일이 좋은 몫이라면 마음껏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좋은 몫>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좋은 몫>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2)
임을
사랑하는데
좋은 몫
나쁜 몫이
어디 있으랴마는
네 몫에
마음 빼앗기면
내 몫은
같은 몫이라도
나쁜 몫이 될 테고
내 몫에
오롯하다면
내 몫은
같은 몫이라도
좋은 몫인 거지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지금, 마르타는 예수님의 몸을 섬기고 있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섬기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타가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섬김이 진정한 ‘주님 섬기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주님을 섬기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자신을 섬기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실상 주님을, 혹은 남을 섬긴다고 하면서, 막상은 자기 자기를 섬길 수가 있습니다. 마치 마르타처럼 말입니다.
사실은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상 주님 앞에 앉아서도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있거나 타인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그 어떤 섬김보다도 더 큰 섬김이 됩니다. 마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도록 허용해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곧 자신을 향한 주님의 섬김을 수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리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나는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말씀대로 해드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과 한 자리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일, 곧 섬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나의 종’이 되십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지금 자신보다 더 작아진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셈입니다. 곧 ‘종’인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꼭 한 가지, 그것은 자신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 주님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無爲而無不爲)의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일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관상하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아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주님!
이 한 가지로 하여, 가난을 기쁨으로 살겠습니다.
당신께 속한 자만이 진정 가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가지로 하여, 낮추어 섬기겠습니다.
속한 자만인 진정 낮아질 수 있고,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전부를 하는 이 신령스런 일이
바로 당신의 소유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실상 필요한 한 가지,
주님이신 당신을 주님 되게 하는 일, 바로 그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여야 할 때>
+ 찬미예수님얼마 전 명동에 책을 구입하러 갔다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수녀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저에게 평소 습작하신 그림을 보여주시며 당신의 일상을 전해주셨습니다. 사실 저 역시 신학생 시절 그림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전시회를 할 정도로 한때는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녀님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며 저도 모르게 “아, 나도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러자 수녀님께서 “신부님, 어떻게든 시간을 내면 그림 그릴 시간을 충분히 되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보라는 좋은 취지의 말씀이었는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못내 섭섭했습니다. 여러 가지 강의와 청탁 원고들과 본당의 일 등등으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는데, 그러한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섭섭한 감정이 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수녀님께는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돌아서서 서점을 나오는데, 제 마음이 참으로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 수녀님이 다 알 수도 없고 그걸 굳이 알리고 싶은 것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섭섭했던 제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사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인데, 그 자리를 저의 욕심이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반성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경험을 모두가 한 번쯤은 해보셨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각자 살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주지 못하는 누군가의 사소한 말에 짜증이 나거나 섭섭했던 경험. 우리가 흔히 겪게되는 경험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마르타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보다 적극적이고 행동을 통해 예수님께 자신의 신실함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성격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경청하고 이를 곰곰히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타의 내면에 갈등이 발생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을 방문하셨으므로 행동으로 자신의 열성을 드러내지만 마리아는 일을 돕지 않고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의 입장에서는 제법 마음이 혼란스럽고 마리아가 미워보일 법 합니다.
하지만 마르타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일상생활 안에서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중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를 모두 사랑하고 아끼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눈에 각자가 맡은 책무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면 모두가 한결 같이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리아에 비해 자신이 더욱 빛나 보이기를 바라고 있으니 예수님의 마음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또한 마르타가 간과하고 있는 두 번째는,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의중을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을 행하든 예수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듣고자 노력하는 일은 더 없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알려고 노력하기에 앞서 먼저 스스로를 내 보이고자 한다면 그 마음에 더 이상 예수님이 계실 자리는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목소리에 먼저 귀기울일 것을 권고하십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의 자세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성격은 저마다 다르고 행동과 실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뜻을 먼저 파악하며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경청하고 고민하는 일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지혜롭고 전능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일상생활 안에서 서로 다른 환경에 따라 제각각의 성격대로 예수님께 믿음을 드러내고 봉사합니다.
이 안에서 누군가는 분주하게 일을 하게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묵묵히 기도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도 합니다. 이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각자의 어려움과 태도, 마음가짐을 모두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핵심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먼저 귀를 기울이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 겸손히 의탁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진정한 사랑을 베풀고자 한다면, 상대방의 사정과 마음을 이해 할 필요가 있고, 그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비록 가끔은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자신에게 베풀고 계실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믿으며 그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지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사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성당 안에서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섭섭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성의와 열성이 주님의 뜻에 따라 잘 실천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나아가 주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 자신의 욕심만이 고집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다시금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 환호송은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영적 삶>
-경청, 회개, 환대, 관상-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 139,24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참된 영적 삶을 살 수 있나?
참으로 믿는 이들, 누구나의 관심사일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참된 영적 삶에 대한 깊은 가르침과 더불어 깨달음을 줍니다. 네가지 측면에서 나눕니다.
첫째, 경청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귀기울여 듣는 경청(傾聽)이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敬聽)입니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물론 성 베네딕도 및 모든 영성가들이 우선적으로 꼽는바 경청입니다. 베네딕도 규칙도 맨 처음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되며, 예언자들 역시 무수히 들어라 외칩니다.
대화나 상담의 기본도 경청이요 기도의 기본도 경청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 역시 경청해주길 바랍니다. 경청을 잘 하기 위한 침묵이요 경청에서 겸손도 순명도 뒤따릅니다. 침묵과 경청에서 참말도, 지혜도 나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삶의 지혜가 됩니다.
“조급하고 허망한 말을 피해야 마음이 고요해진다. 엄정한 말과 평안한 마음이 어우러질 때 덕은 완성된다.”<다산>
“대개 겉과 속을 함께 닦아야 그 덕이 외롭지 않으니, 한쪽으로 치우친 말을 해서는 안된다.”<다산>
이런 말은 깊은 침묵과 경청에서 나옵니다. 바로 경청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이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우선 주님의 발치에 앉아 침묵중에 그분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새삼 침묵과 경청의 훈련을 통한 습관화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너무나 침묵과 경청이 실종된 경박한 세속화된 삶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회개입니다.
경청과 동시에 일어나는 은총의 회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자기를 아는 겸손의 지혜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한두번의 경청이 아니듯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여정의 회개입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입니다.
오늘 예수님 발치에 앉아 경청하는 마리아는 분명 동시에 내면에서는 회개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반면 일에 몰두하면서 마리아의 모습에 불평하며 도움을 청하는 마르타에 대한 주님의 충언이 마르타는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과도한 활동을 절제하고 주님 말씀에 귀기울이는 경청의 관상을 우선하라는 회개의 가르침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늘 제1독서 갈라티아서는 바오로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경위를 소상히 설명합니다. 진솔하고 겸손한 고백을 통해 사도의 회개의 여정을 듣는 듯 합니다. 예전 바오로가 아니라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의 종으로, 교회의 사람으로 거듭 난 바오로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환대입니다.
손님 환대는 기본적 영성이자 예의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정주영성과 함께 가는 환대영성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환대의 집, 수도자는 환대의 사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환대의 기쁨, 환대의 사랑, 환대의 치유, 환대의 축복입니다. 서비스업의 첫째 요소도 친절한 환대입니다. 환대가 아닌 냉대(冷待)라면 그 상처는 얼마나 크고 오래가겠는지요.
오늘 마리아의 예수님 환대는 옳았습니다. 제 좋을 대로의 환대의 사랑이 아닌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에 따른 마리아의 경청의 사랑,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마르타 역시 제 좋을 대로 정성 가득한 음식준비를 통해 주님께 대한 환대의 사랑을 표현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바, 환대는 아니였습니다.
환대에도 분별의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내 중심의 환대가 아닌 주님 중심의, 상대방 중심의 환대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의 불찰은 주님 환대의 우선 순위를 잊은 것입니다. 미사구조도 이런 주님 환대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말씀전례에 이어 성찬전례로 말씀을 경청하는 환대가 우선합니다.
넷째, 관상입니다.
관상과 활동은 함께갑니다. 우열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요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경청의 관상이 우선입니다. 경청의 관상에서 삶의 중심과 질서가 자리잡히고 지혜로운 눈밝은 활동생활이 가능합니다. 경청의 관상없는 활동이라면 무질서하고 방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경청의 관상의 부재로 맹목적 눈 먼 활동에 지친 어리석은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의 관상, 사랑의 활동입니다. 관상이나 활동의 본질은 사랑이요, 대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관계로 봐야 합니다.
바로 오늘 마르타의 좋은 취지의 음식 손님 접대의 문제점도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경청의 환대가, 경청의 관상이 우선임을 잊고 활동에 몰두함은 지혜가 아닙니다. 밖으로는 마르타의 활동이, 안으로는 마리아의 관상이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 관상에서 샘솟는 활동이어야 바람직한 영적 삶입니다. 예수님만큼 섬김의 활동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밤마다 관상가가 되어 외딴곳에서 관상의 기도로 아버지와 일치의 충전시간을 가졌습니다. 낮에는 활동가, 밤에는 관상가로 사셨지만 분리된 분이 아니라 통합된 온전한 분이었습니다.
잘 듣기 위해, 잘 분별하기 위해, 잘 기도하기 위해 일단 멈춤의 관상이, 침묵중 경청의 관상이 절대적입니다. 우리 삶에서 최고의 활동 형태가 하느님과 일치의 관상입니다. 참으로 이상적 영적 삶은 예수님처럼 “활동안에서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참된 영적 삶을 위한 네 요소가 경청, 회개, 환대, 관상이요 이 또한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영성훈련과 습관화가 절실합니다. 바로 이 넷의 요소를 통합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참 영성가로 살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여라.”(루카 11,28).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열심히 하는 것이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이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오늘 제 나눔의 주제입니다.
우리의 칠죄종 가운데 하나가 나태입니다. 나태가 죄의 뿌리가 되는 일곱 가지 중요 죄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며 쉬운 말로 하면 게으름이 일곱 가지 중요 죄 중에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게으름과 반대라고 할 수 있는 열심임은 덕(德)일 것입니다. 그런데 열심이라는 것이 반드시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잘못 가면 아니 감만 못하고 게으름만도 못합니다.
이것은 남 얘기가 아니고 제가 처절히 성찰한 바입니다. 여러 차례 얘기한 것 같은데 제가 환갑 되던 해가 마침 사제 서품도 삼십 주년이어서 진지하게 살아온 삶을 성찰하게 되었지요.
성찰해보니 저는 60년과 30년을 참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리 잘 산 것은 아니었다는 성찰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열심히 열심히 잘못 산 것이었지요.
오늘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오늘 복음의 마르타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젊었을 때 열심히 교회를 박해하였고, 그리함이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그리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잘못하고 잘못 사는지!
오늘 복음의 마르타도 열심히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모신 것이 잘못은 아니고, 시중을 열심히 든 것도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열심히 시중든 것이 사랑이 되지 못하고 일이 되었으며, 너무 많은 일로 분주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우리가 자주 이런 잘못을 범합니다.
시작은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느새 일로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빠지고 일만 남은 것입니다.
주님은 빠지고 객만 남은 것입니다.
열심히 하다가 다 이리된 것입니다.
열심히 달리다가 이렇게 된 겁니다.
우리 인생이 종종 이러하다!
우리 신앙생활도 종종 이러하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좋은 몫을 선택하자!>
오늘 복음(루카10,38-42)은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정 방문을 하십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십니다. 이때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이 오셨으니 큰 대접을 해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분주한 마르타가 얼마나 바빴으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10,40)
그러자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좋은 몫을 선택하자!'
마리아는 언니 마르타가 선택한 몫보다 더 좋은 몫을 선택했습니다. 마리아가 선택한 몫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몫입니다.
요즘은 본당 신부님의 가정 방문을 신자들이 부담스러워 합니다. 병자 영성체를 위한 가정 방문도 부담스러워 합니다.
왜, 그럴까? 아마도 마르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신부님이 방문하면 분주하게 청소도 해야 하고, 음식도 준비해야 하는 부담 때문이지 않을까?
본당 신부님들은 마리아가 선택한 몫, 곧 미사에 자주 참여하여 말씀을 듣고, 사제의 손을 통해서 축성된 예수님의 몸을 함께 나누어 모시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을 선택합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루카 10, 41)
홀로 너무
많은 염려와
걱정을 하며
우리들은
살아갑니다.
왜 그렇게만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걱정을
떼어내야
머무름이라는
믿음이 됩니다.
걱정의
분주함이
아니라
머무름의 온기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염려와 걱정
하나 없는
삶을
주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염려와 걱정을
주님께
맡기는 삶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주님을
불편한 염려의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도록 하는
사랑의 자리에
우리가
모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분주함으로
상대방과
더 이상
다투지 않습니다.
온갖 걱정으로
주님께 머무를
시간조차 없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걱정을
내려놓고
맡겨야
우리 생활에서
살아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좋은 몫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몫이란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좋은 몫을
선택하는
좋으신 오늘
되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