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난 北 “장마당 양곡판매 금지”… 체제수호 위한 통제카드
北장마당의 정치학… 평양 쌀값 2년새 63% 뛰어
양곡판매소서만 구입 허용… 생산량 ‘허풍방지법’ 제정도
“고난의 행군 겪어본 주민들 암거래-제2 장마당 만들것”
北, 통제 효과-민심 딜레마… 당분간 주민 옥죄기 정책
《북한의 풀뿌리 시장경제 장마당이 위기다. 3년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국경 봉쇄로 시장 자체가 직격탄을 맞은 데다 지난해 말부터 북한 당국이 장마당에서의 양곡 판매를 금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1990년대 대규모 기근이 발생한 ‘고난의 행군’ 당시 식량 부족으로 배급이 끊기자 북한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밀수입 식량을 사고팔며 자생했다. 그렇게 몸집을 키워온 장마당은 심각한 식량난 속 또다시 위기 상황을 맞았다.》
○ 곡물 생산·유통 통제 강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상무회의는 지난해 12월 8일 농장법 등 곡물 생산 및 유통과 관련한 법령을 개정했다. 앞서 9월 25일 노동당 정치국 회의에서 곡물 수매와 양곡 유통 비리 척결 방안을 논의한 지 약 두 달 만에 법령까지 개정한 것이다. 당국이 곡물 생산 및 유통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다. 지난해 9월 국가정보원은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북한에서 쌀 생산량과 관련해 수확량에 대한 허위 보고가 많아 이를 근절하기 위해 ‘허풍방지법’을 제정했다”고 밝혔다.
이후 북한은 장마당 대신 당국이 운영하는 양곡판매소에서만 식량을 구매할 수 있도록 통제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지난해 12월 20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발간한 ‘한반도 정세 2022년 평가 및 2023년 전망’에서 “일부 지역에서는 장마당에서 식량 매대를 없앴다”면서 “직장에 다니는 일부 주민은 직장에 등록한 가족 수만큼 일종의 ‘식량공급카드’를 받아 양곡판매소에서 식량을 구매하도록 하고 있다”고 전했다. 양곡판매소에선 국가가 정한 한도 내에서 시장 가격보다 좀 더 저렴하게 판매하되, 초과분에 대해선 시장 가격으로 판다고도 했다.
북한 지도부의 의도는 명확해 보인다. 농민들에게 식량을 자율적으로 처분할 수 있도록 준 권한을 축소해 국가 장악력을 높이고, 식량을 더 거둬들이겠다는 의지다. 한마디로 생산부터 유통까지 느슨해진 양곡 관리의 고삐를 바짝 조이겠다는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5년 포전(구획을 나눠 놓은 경작지) 담당책임제를 실시하면서 농민들에게 국가가 정한 몫을 달성하면 초과분은 개인이 자율적으로 팔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비료 수입도 변변치 않고 관개시설과 농자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주민들은 할당량을 채우기도 버거웠다. 이 때문에 추수가 끝날 무렵 산이나 땅속에 곡식을 숨기거나 따로 보관했던 쌀을 장마당에 비싼 값으로 팔았고, 자연스레 사재기나 매점매석 등 시장 왜곡이 빚어졌다.
코로나19로 식량난이 가중되자 북한 당국은 지난해 11월 3만 t 규모의 쌀을 중국에서 들여왔다. 국경 봉쇄 후 최대 수입량이었지만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엔 턱 없이 모자랐다. 북한 전문매체 데일리NK가 격주로 조사하는 물가동향에 따르면 2021년 1월 초 kg당 3500원이던 평양 쌀값은 지난해 7월 하순 6280원으로 고점을 찍었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12월 25일에는 5700원 선에 거래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2년 만에 62.8%나 뛰어오른 것. 평양과 신의주, 혜산 등 3개 도시는 지난해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모두 쌀값이 6000원을 넘어섰는데 3개 도시가 모두 쌀 가격이 6000원대를 넘어선 것은 2017년 이후 처음이다.
○ 김정은 ‘장마당 딜레마’ 봉착
장마당 양곡판매금지 조치 등이 실효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포전 담당제 덕분에 농업 생산성이 그나마 올라갔는데 식량이 부족해지자 반대로 국가 통제력을 강화해야 하는 딜레마적 상황에 봉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양곡판매소에 들어오는 식량은 질도 낮고 지속적으로 판매도 안 된다”면서 “장마당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키면 결국 식량 공급체계에 혼란이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뛰는 당국 위에는 나는 주민들이 있다. 장마당에서 시장을 경험하고 자본주의 근육을 키운 주민들이 순순히 양곡판매소로 향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양 교수는 “장마당을 폐쇄하고 쌀 매대를 없앤다고 상인들이 가만 앉아 굶어 죽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집에서 은밀히 사고팔고, 단속하러 나온 당국자에겐 약간의 뇌물을 쥐여주는 식으로 시장의 음성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관측했다. 고난의 행군을 거듭 경험하며 국가가 식량 부족과 생계난을 책임져 주지 않음을 이미 학습한 주민들이 제2, 제3의 장마당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또 북한 당국 역시 이러한 조치의 한계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미 2000년대 초 당국이 시중 식량을 모두 장악해 식량공급소에서 곡식을 시장가격보다 싸게 주는 양곡전매제를 도입했지만 식량 가격이 오른 전례도 있다. 이번 조치도 당국이 모두 사들이는 국가 수매까진 가지 않고, 위기 상황에서 일단 통제력부터 강화하겠단 신호만 시장에 주는 데 의의를 둘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 北, 체제 이완에 노심초사
지난해 11월 통일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 당국이 승인한 북한 전역의 공식 장마당만 414곳에 달한다. 2016년과 비교하면 시장 수(411개)는 큰 차이가 없지만 그동안 신규, 폐쇄, 이전, 확장 및 축소 등 시장 변동은 119건으로 활발한 편이었다. 시장 1곳당 인구는 6년 전보다 평균 4138명씩 증가했다. 가장 많은 인구를 관할하는 평양의 경우 시장 1곳당 11만5090명의 생활을 책임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북한 추계 인구의 약 4.7%인 114만4068명이 장마당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지도부 입장에서 장마당은 딜레마다. 장마당을 활성화하면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이 해소되지만, 또 완전히 시장의 문을 열면 노동당의 경제 독점권이 사라지기 때문. 2009년 화폐개혁이나 현재의 양곡판매금지 조치 등은 당국의 통제권이 지나치게 약화될 때 장마당에 가하는 충격요법이다. 다만 반시장적인 정책이 길어지거나 강도가 세지면 환율과 물가가 치솟는 부작용이 더욱 커질 수 있다. 민심 이반 역시 북한 당국 입장에선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국경을 봉쇄하면서 극심해진 경제난을 시장 통제로 해결하려다 당국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북한은 체제 수호를 위한 고육지책으로 장마당 통제에 나섰다. 올해 양곡판매금지 조치로 시작된 중앙 통제력 강화가 다른 분야로 확산될지도 관심사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장마당은 단순히 경제적 교류의 장일 뿐 아니라 남한 소식이나 물건 등이 오고 가는 정보 유통의 장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최근 먹고살기가 팍팍해 민심이 안 좋은 상황인 만큼 김 위원장은 당분간 장마당 통제를 더욱 강화해 자본주의의 ‘나쁜 물’을 빼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나리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