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의 전쟁
21. 소월
이모가 일찍 오라고 해서 바로 집으로 갔다. 왜 갑자기?
“이리 앉아봐.”-이모
이모 앞에 앉았다.
“이제는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어? 엄마가 인천으로 올라왔대. 엄마랑 같이 살아.”-이모
왜? 쓸데없이?
“왜?”-소월
“언제까지 여기 있을래? 엄마가 왔으니 엄마랑 살아야지. 엄마도 그렇게 하겠대. 이번 주 토요일 날 이사할 거라니까 너도 그날 집으로 가.”-이모
이건 뭐 일방적인 통보네.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아?”-소월
“네 의견이 왜 필요해?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거지.”-이모
“날 키우기 싫어서가 아니고?”-소월
맨날 사고만 치니까 뒷수습하기도 싫고 돈 많이 드니까 싫어지고 귀찮아졌겠지.
“솔직히 이정도 키워줬으면 된 거 아닌가? 고마워 해야 할 판에.”-이모
천덕꾸러기 취급했으면서 고맙기는 개뿔.
“그렇게 알아.”-이모
이건 뭐 진짜 나가라는 거네. 씨. 발. 나는 휴대폰과 지갑만 들고 집을 나왔다. 효령이네로 향했다.
“왔어?”-효령
휴대폰과 지갑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효령이의 담배를 피웠다.
“엄마가 인천 왔대. 토요일에 이사 온다고 나보고 그날 그쪽으로 가라네?”-소월
“귀찮으니 꺼지라는 심보네. 웃겨.”-효령
“내 말이, 씨발. 뒷수습하기도 싫고, 대학 등록금도 3배로 드니까 싫은 거지. 친딸도 아닌데. 하, 웃겨. 뭐라는 줄 알아? 이정도 키워줬으면 고마워해야 한다고 하더라?”-소월
“고맙긴 개뿔이나.”-효령
효령이도 내 옆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오늘은 여기에나 있다가 가야겠다. 아, 완전 좇 같네.”-소월
“여기 있으라고. 몇 번이나 말하냐, 내가?”-효령
“가끔 오잖아.”-소월
집보다는 솔직히 효령이네가 편하긴 하다. 진짜 여기 있을까?
“진짜 여기 있을까?”-소월
“거기 뭐 하러 가. 완전히 너네 집도 아니면서.”-효령
“토요일에 짐 싸 들고 여기로 오지 뭐.”-소월
“그렇게 해. 이 참에 잘됐네.”-효령
우리는 간단한 안주거리를 시켜서 술을 마셨다.
“씨발. 진짜 좆 같네. 누구는 이사장 아들, 검사 아들에 금수저 물고 태어나고 누구는 엄마 아빠 이혼해서 버림 받아 친척 집에 얹혀 살고, 씨발. 그럴 거면 왜 결혼 했냐?”-소월
열 받아서 소리쳤다.
“우리 다 마찬가지야.”-효령
“그러니까! 농클 애들은 온갖 진상에 쓰레기여도 징계 안 받고 우리는 맨날 처벌 받고.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소월
“…….”-효령
“신주영 개년. 지는 흙수저인 척 하는데 그년도 사실 금수저다? 엄마는 치과의사, 아빠는 외과 의사. 참…….”-소월
더 재수없다. 의리 있는 척, 정의로운 척 하는데 역겹다. 사실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다. 그리고 걔한테 찍히면 오히려 더 괴롭다. 당해본 애들은 그년 욕 엄청 했다. 더 잔인하다고.
하긴, 나도 몇 번 봤는데 그렇더라. 의리 있는 척 도와주고 뒤에서는 엄청 욕하고. 알고 보면 제일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생각할수록 열 받는다.
“그딴 것들 신경 꺼버리면 그만이야.”-효령
별로 신경은 안 쓰지만 눈에 보이니까 재수없잖아.
“내가 말한 건 생각해 봤어? 아직도 보류야?”-효령
생각 안 했는데. 타로 점 보고 나서 신경 쓰였었는데 좆 같은 일이 많이 생겨서 잠깐 잊어버렸다.
“응, 아직.”-소월
“대체 언제까지?”-효령
“그게 그렇게 쉬워? 친구에서 애인이 된다는 건 신중 해야하는 거라고.”-소월
“니가 언제부터 신중했다고 그래.”-효령
이 자식.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어. 나도 신중하면 안 되냐고.
“그런 건 신중하기로 했어.”-소월
효령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술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네 눈에는 해울이 밖에 안 보이지? 나 같은 건 보이지도 않지?”-효령
왜 이래, 진짜. 나도 힘들다고.
“해울이가 그렇게도 좋아?”-효령
“뭐래.”-소월
“왜 나는 안 되냐고, 왜!”-효령
효령이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소월아…….”-효령
효령이가 눈이 풀린 채 나를 보았다. 흐리멍텅 했다.
“나도 좀… 봐줘… 사랑해…….”-효령
효령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혼자서 술을 마셨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굴 선택 해야 하지? 상처주기 싫은데… 해울이도 효령이도……. 도대체 답을 모르겠다. 누가 내게 알려주면 안 될까?
솔직하게 말하면 해울이를 좋아하는데 효령이가 신경 쓰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는 거지 효령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고민 따위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르겠다. 어떤 것이 올바른 선택인 건지.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좋은 건지, 둘 다 포기하는 게 차라리 더 나은 건지…….
*
야자 하기 싫었다. 농구를 해야 하지만 농구도 하기 싫었다. 애들에게 말도 안 하고 혼자 학교를 나갔다. 집에도 가기 싫었다. 무심코 걸었고, 문득 정신을 차리니 별카페였다.
블루베리 라떼를 시켜놓고 창가에 앉았다. 멍했다. 생각은 정리도 안 되고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내 뒤를 톡톡 쳤다. 신주영 엄마였다. 어색했다.
“혼자서 뭐해?”?주영엄마
“그냥…….”-소월
저번에 내가 조금 싸가지 없게 대했는데도 먼저 다가와 주시고. 어른은 어른이네.
“자기야,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주영엄마
아줌마는 내 앞에 앉았다. 다른 자리 많은데. 그러나 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젠 언니가 아닌 걸. 한 아이(는 아니지만)의 엄마인데……. 언니였으면 차갑게 대했을지도 모른다.
사장 아줌마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지고 오셨다.
“주영 엄마야, 승현 엄마 기다렸다가 같이 갈래?”-사장 아줌마
“아냐, 나 세미나 준비 해야 돼.”-주영엄마
“그 놈의 세미나는 툭 하면 하니?”-사장
“자기네 아저씨가 프로젝트 준비하는 거랑 같은 맥락이라고.”-주영엄마
“피곤하잖아.”-사장
“재밌어. 좋아서 하는 일인데.”-주영엄마
“오늘 안 가, 그래서?”-사장
“오늘은 자기네들끼리 가. 봐서 갈게.”-주영엄마
“승현 엄마 왔다네. 시간 봐서 와.”-사장
사장 아줌마는 퇴근을 하셨다. 신주영 아줌마가 노트북을 꺼내 코드를 뽑았다. 일할 거면 다른 데서 하지. 신경 쓰이게.
“신소월양, 고민 거리 있으신가요?”-주영엄마
고민거리? 내가 고민거리가 있어 보이나?
“그런 거 없는데요.”-소월
“그럼 따 당하는 거?”-주영엄마
진짜로 따 당했으면 좋겠나 보지?
“아닌데요.”-소월
“나. 고. 민. 있. 음. 이라고 얼굴에 씌여 있는데.”-주영엄마
아줌마는 시선을 노트북과 나를 왔다 갔다 했다.
“내가 들어줄게, 말해봐.”-주영엄마
내가 왜? 언니였으면 말했겠지만 그게 아니라서… 역시 아줌마라는 건 걸림돌이 되나 보다.
“그런 거 없다구요.”-소월
“고민이라는 건 남에게 이야기함으로써 해결되는 건데. 소월이 또래의 고민이라면 성적, 진로, 친구, 가족, 아니면 연애?”-주영엄마
연애? 아줌마가 윙크를 했다. 하긴……. 다 똑같으려나? 인간의 모든 고민이겠지? 거기에다 10대 20대라면 공통적이겠고, 3,40대라면 취업, 직장, 건강 등이 포함될 것이고.
‘연애’라는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소월이 눈빛 흔들렸다.”-주영엄마
아줌마가 모니터와 나를 오가며 보는데 옆에도 눈이 달렸나 보다. 내 눈빛이 흔들린 걸 어찌 알까? 아줌마의 시선을 피했다. 어딜 봐서 애 엄마야. 그냥 좀 나이 많은 언니 같은데…….
“끝까지 말 안 할거야?”-주영엄마
말 하기 싫다는데 왜 자꾸 강요하는 거지?
“아줌마가 오지랖이 넓어서 아는 사람이면 다 참견하게 되고 궁금하게 되네~”-주영엄마
담배 피우고 싶다.
“아줌마랑 농구하러 갈래?”-주영엄마
아줌마가 짐을 챙겨 들고 나를 끌고 카페를 나갔다. 집에 들러 농구공만 들고 나왔다. 공원에 가서 몸을 풀고 마주섰다.
“소월이에게 먼저 공격권을 줄게.”-주영엄마
아줌마가 내게 공을 내밀었고, 이내 방어 자세를 취하셨다. 나는 드리블을 했다. 아줌마를 제끼고 골대 앞에 서서 골인…….
탁.
아줌마가 공을 쳐내셨다.
“내 차례지?”-주영엄마
이번엔 아줌마의 공격.
탕. 탕. 탕.
농구공 튕기는 소리만 들렸다. 아줌마가 씨익 웃으시더니 팔을 뻗었다. 페이크……?
휘익-----
페이드 어웨이로 슛을 하는 아줌마. 3점. 신주영이 페이드 어웨이를 잘하는 게 다 이유가 있었다.
그 후로도 아줌마는 내 공을 모두 받아 치셨다. 빠른 속공(코트가 크지 않아 속공을 하기엔 무리가 좀 있지만서도)으로 공격하시기도 했다.
빠른 공격에 속도를 맞출 수가 없었다. 이런 상대는 처음이다.
어쩐지 저번보다 더 힘든 것 같다. 농구하면서 지쳤던 적이 별로 없었는데 오늘은 그 별로 없었던 일의 숫자가 늘었다. 헉헉거려야 했다.
“벌써 지치면 곤란한데.”-주영엄마
아줌마는 이제 막 시작하신 것 같다. 더 활기차고 생기가 넘쳤다. 숨 한번 안 내쉬셨다.
“다시 내 차례지?”-주영엄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격하셨다. 페이크로 나를 속이고는 덩크. 저 골대에서 저 키로 덩크라니… 점프력도 상당하시네.
헉헉---
“소월이 차례야.”-주영엄마
힘이 딸려 왔다. 팔이 후들거렸다. 슛을 쏘는데 링에 맞고 튕겨나갔다. 아줌마가 리바운드로 잡아내셨다. 힘들지도 않으신가 보다. 힘들어……. 한번도 힘들다는 생각 해본 적 없었는데……
다리가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는 계속 숨을 몰아 쉬었다.
“소월이는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야?”-주영엄마
행복했던 순간? 갑자기 그건 왜?
“아줌마는 왜 소월이가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까?”-주영엄마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울어본 적 없는데. 남을 울린 적은 많아도. 그런데… 그 말에 정말 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진짜 눈물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