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 이야기 [2] ― 전광훈을 보며 ―
전광훈 목사: “하느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
어쩌다 저 사람이 저렇게 되었는가?
아니, 누가 저 사람을 저렇게까지 만들었는가?
톨스토이: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문화인류학이론은 크게 두 갈래이다. 한 갈래는 영국 인류학이다(민족학적/인류학적; 주로 영국파): 퍼거슨·스미스—프리차드—매인·루복·모건·타일러·프레이저—리버스—말리노브스키(B. Malinowski)·래드클리프-브라운.
또 한 갈래는 미국 인류학이다(지리학적/인류학적; 독오獨墺파·미국파): 훔볼트·존스—그림·봅—뮐러·바스티안—라쩰·그레브너—보아스—크로버·로위·스튜어드.
20세기 후반 인류지성사에 구조주의혁명을 일으킨 레비-스트로스 당시까지의 지배적 생각에 의하면, 종교와 주술은 진화에 있어서 서로 다른 단계이다: 종교는 문명적인 것, 주술은 원시적인 것.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기존의 견해를 전적으로 부정한다: “주술 없는 종교가 없는 것처럼, 종교적 흔적이 없는 주술은 없다. … 종교, 주술의 성격은 둘 다 종교적 측면과 주술적 측면 간의 구성비율에 의해서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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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상기 말리노브스키의 기능주의 문화이론을 떠올리게 된다. 폴란드에서 물리학과 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상기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The Golden Bough: A Study in Magic and Religion)>를 읽고 인류학에 매료되었다. 그는 영국에서 다시 인류학을 공부해 또 박사학위를 받는다.
학문적 배경이 과학주의인 그로서는, 어떤 한 사회의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미국 문화인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상기 보아스의 역사주의적 접근은 별 의미가 없었다. 당시 인류학이 연구대상으로 했던 문자가 없는 소위 미개사회에는 신뢰할 만한 역사적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확실한 자료를 토대로 거대한 이론을 만들어 내고 있는 데도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볼 때 당시 무문자사회에 관한 역사는 추측에 의한 역사(conjectural history)에 불과하고, 역사에 의거한 방법이란 추측적 인과관계에 기반해서 추론적으로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자신의 표현으로 “문화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절실했다. 방법이 무엇인가? 그는 현지에 가서 생활하며 직접 보고 듣는 참여관찰(participant observation)을 주장한다. 이후 참여관찰은 문화인류학, 나아가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필수적 방법론이 된다.
트로브리안드(Trobriand) 언어를 습득한 말리노브스키는 수 년에 걸쳐 트로브리안드 제도 ― 뉴기니 동부의 작은 산호초 섬들 ― 의 문화, 특히 쿨라(Kula)를 참여관찰해서 기록한 <서태평양의 원양항해자(Argonauts of the Western Pacific: An Account of Native Enterprise and Adventure in the Archiperagoes of Melanesian New Guinea)>를 통해 기능주의를 주창했다.
쿨라는 트로브리안드 제도, 라프란 제도, 와리 섬을 연결하는 약 300킬로미터의 삼각형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공적公的이며 규칙적인 교역체계이다. 주 교역품은 소우바라는 붉은 색 조개로 만든 머리장식, 무와리라는 흰색 조개로 만든 팔찌이다. 그것은 일상에서 실용성이나 경제적 가치가 거의 없고 흥정이라는 것도 없다. 전자는 삼각형 지역을 시계방향으로, 후자는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며 교역이 이루어진다. 모스(M. Mauss)의 <선물>로부터 영감을 얻은 말리노브스키가 볼 때 그것은 상품이 아니라 선물이었고, 그것을 교역하는 것은 상행위가 아니라 어떤 기능을 가진 교환행위였다.
무슨 기능인가? 말리노브스키의 참여관찰에 의하면, 쿨라의 모든 과정에는 각 과정마다 여러가지 주문呪文, 복잡한 관습, 규칙이 있다. 주문의 힘에 의한 주술이 그들의 심성을 지배하는 심리학적 기능을 해서 공동체의 모든 활동에 의미, 절차, 질서를 부여한다. 주술과 의례는 공동작업을 위한 조직과 협조를 이끌어낸다. 주술에 의한 마술적 믿음이 그들의 협동을 확실하게 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 협동은 개명된 사익私益이라는 형태(a form of enlightened self-interest)의 협동이다. 개명된 사익이란, 사익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호응화應和(mutual accommodation)라는 심리적 상호성 원리에 기반한 사익이라는 것이다. 주술과 의례가 개개인으로부터 상호응화적 협동을 이끌어냄으로써 쿨라는 상기 삼각형 지역 내에 있는 수천 명 사람을 둘씩 결합시키고, 이를 토대로 전체적 공동관계를 맺도록 하는 사회통합 기능을 한다. 쿨라에 대한 말리노브스키의 이러한 기능주의적 관점은 당시 서구인의 생각, 즉 야만인(savage)의 이상한 교역이라는 통념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다.
소위 문명인의 종교 기독교에서 기도와 의례의 기능은 이와 다른가? 기독교의 모든 행사에는 과정 과정에 기도가 있다. 기도의 힘에 의해 강림하는 성령이 기독교인의 심성을 지배하는 기능을 해서 그 행사의 모든 활동에 의미, 절차, 질서를 부여하며 공동작업을 위한 협조와 조직을 이끌어 낸다. 성령과 의례가 개개인의 상호응화적 협동을 확실하게 하는 기능을 해서 행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전체적 연대의식을 심어 정신적 통합을 이루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이것을 그들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신비한 ― 그들이 소위 야만인을 향해 하는 말로 하면 마술적인 ― 기도의 힘, 성령의 힘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그 신비한 힘으로써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그 신비한 힘 앞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기독교의 집회는 아무리 이상한 집회라도 열기가 식을 줄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전광훈이라는 목사는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공언하면서 자신의 카리스마를 과시해 정치가들을 그야말로 가지고 놀고 있다.
어떤 정치가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다소곳한 자세로 그에게 교언영색으로 아부를 떤다.
심지여 그를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구국의 선지자”라고 받드는 정치가도 있다.
기세 등등해 진 전광훈은, 한쪽 팔의 양복소매를 걷어 부치고, 자신이 직접 자기 이름을 대면서 “정치인은 전광훈 목사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슬프게도 그러한 전광훈, 그러한 정치가를 두둔하면서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 많이 있다.
더욱 슬픈 것은 학수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대다수라는 사실이다.
마르크시즘이 종교를 되도록 멀리하고자 하는 이유를 되새겨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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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과연 누가 누구를 보고 야만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레비-스트로스는 “야만인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야만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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