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에 대한 역설(Paradox of Motion)
췌장암& 우울증
인간의 영원불멸성
아킬레우스와 거북
기원전 495년경 고대 그리스 엘레아의 제논은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철학자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이자 애인이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람이다. 불생불멸의 유일한 실재를 인정하였다. '운동 불가능론'을 주장하였다. '만물은 흐른다'는 이론을 반대하기 위해 만들어 낸 역설이 바로 그 유명한 "아킬레우스와 거북"이다. 피타고라스의 정수론을 반박하고 있다.
위대한 전사, 발 빠른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경주 이야기이다. 토끼를 이긴 거북은 자신만만하게 아킬레우스가 100m를 가는 동안 10m를 간다. 거북이가 아킬레우스보다 100m 앞에 있으면, 그 상태에서 아킬레우스가 거북을 따라잡기 위해 100m 앞으로 가면 동시에 거북은 10m를 나아간다. 그러면 거북과 아킬레우스는 10m만큼 떨어져 있는데, 이때 아킬레우스가 다시 10m를 더 나아가면 거북은 1m를 이동하여 거북이 다시 1m만큼을 앞서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킬레우스가 다시 1m를 가면 거북은 0.1m 더 나아간다. 따라서 아킬레우스는 아주 미세한 거리만큼을 항상 뒤처져 거북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만물은 언제나 정지해 있다'는 건데 다른 사람들이 주위를 가리키면서 "보시오. 이렇게 움직이고 있지 않소!"라고 말하면 "착각이오. 눈의 착각이오."라고 대답했다. 모든 것은 착각이다. 내가 이 자리에 왔다감도 착각이요. 그대가 이 글을 읽음도 착각이다. 모든 것은 망상일 뿐이다.
시대는 언제나 우울함과 싸워서 이기지 못했다. 영원히 앞서있는 거북을 따라잡지 못하는 아킬레우스처럼 다른 모든 질병을 점령한다 하더라도 우울증만큼은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우울증을 "영원불사"의 존재로 만들어 가고 있다.
칭기즈칸의 꼭꼭 숨겨진 무덤을 아이들의 숨바꼭질처럼 찾아내는 탐지기가 발명되는 미래가 어느 날 온다고 해도 우리의 우울증은 우리를 앞서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천하의 미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의 얼굴이 정확하게 복원되어서 시대적으로 추녀 판명이 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킬링 필드의 해골에 물을 부어 말을 걸어 신분을 밝혀 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내일의 내일의 내일은 어쩌면 지금의 현실을 유치하다고 웃으며 말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인간이 췌장암으로 죽을 수 있는지를? 감기라는 게 왜 걸리는지를? 잇몸에 이빨(인간도 동물이라 일부러 이빨이라고 함 , 행여 누군가가 사람은 이예요!라고 반박할세라)을 심는 임플란트가 얼마나 원시적인 치료인지를? 주사한방이면 잇몸에서 상어처럼 새로운 이가 돋아나며 해저깊이 수학행을 가고 캡슐 속으로 들어가 원하는 시간만큼의 타이머를 세팅하고 잠자리에 들고 불면이나 수면장애라는 단어를 어려운 시험을 위해 외워야 하는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우울증은 우리를 따돌리고 앞서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문화인류학 속에서 사라진 단어인 원시인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언급하며, 그들은 췌장암 말기나 AIDS, 인류역사상 살아남은 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광견병에 대해 비웃으며 말할 수도 있으리라!
장기를 왜 이식했을까? 맞춤 디자인하면 될 것을 이라고 조롱할 수도 있다. 우리 스스로가 디자인한 몸에 감탄을 하면서도 항상 부족함을 한탄하고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언제나 그랬다. 가진 게 많을수록 부족함도 늘어났다. 독수리의 시력을 비웃으며 하늘을 나는 날개옷을 입고 마당에 주차해 둔 고생대 석탄기 열대 삼림에 살던 "메가네우"라는 거대 잠자리 모양의 개인용 헬기를 타고 치과에 앞니 주사를 맞으러 가면서도 불치병인 우울증에 대해 서슴없이 말할 것이다.
종이배 같은 접이식 배를 타고 허드슨 강을 건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달이나 화성을 이웃집처럼 드나들면서 동굴 속의 그들을 생각하는 우리 시대의 왜곡된 초상화만큼이나 이 시대를 바라보며 웃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인류는 애완용 거북의 200년 생일을 같이 축하해 주고 장례를 극진하게 치러주거나 그린란드 상어를 집으로 데리고 와 수족관에 키우면서 500년 전에 입양했던 추억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고래들이 인간의 험담을 나누는 것을 해석하며 내가 인간임을 자부심을 느끼면서 우울해할 것이다.
노인이란 단어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성숙함에 머무를 것이다. 영원히 20대를 원하는 사람도 건장한 30대, 성숙한 40대 , 흔들리지 않는 50대, 마음이 평온해지는 60대, 누군가는 영원히 늙어감이 좋아서 잘 익어가는 술처럼 숙성된 치즈처럼 다양한 삶의 변화를 겪고 다시 원하는 청춘으로 돌아가거나 아님 100세 를 넘어 이 백세 삼백세 경험을 원하는 이도 적정선에서 천국을 엿보고자 스스로 낙원으로 가는 특급행 안락사를 신청하는 자들도 늘어날 수 있다. 인간의 변덕이나 호기심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한다.
모임에서 웃으며 어떻게 인간이 운전하는 차를 감히 탈 수 있는지를 언급하며 고대 인간들의 용감함을 위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이라는 물건을 어디에 써야 하는 건지 매뉴얼을 보고 고민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수많은 기기의 발달과 의학의 발견에도 인간의 삶은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 낭만희극은 내 마음대로의 해석에만 달려있다. 비극과 파멸의 주제는 영원한 인간의 이야기 속에 녹아있으며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또한 영원한 숙제일지도 모른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퇴화를 계속해 갈 것이다. 우린 영원히 쾌락, 오로지 쾌락만을 이야기하며 달달한 음료와 간식을 마음껏 먹으며 이미 멸종해 버린 원시병인 당뇨에 대해 비웃으며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단 하나, 끝을 모르고 달리는 쾌락의 마지막은 오로지 우울증뿐이니, 그때 그 순간에도 우리는 유일하게 웃음을 얻기 위해 모든 생각을 지우는 그 순간이 올지라도 인간이 마지막으로 정복하지 못하는 병은 오로지 하나, 아킬레우스가 거북을 이기지 못하듯 "우울증"은 느려도 우리를 앞서서 가는 초하루 밤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