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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이사야 9:1-7
오늘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 이 땅에 오시기 730년 전에 예언한 성탄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참으로 존귀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너무 잘 만드셨다보니 하나님께서 감탄하신 존재였습니다. 이랬던 인간이 마귀의 유혹으로 죄짓은 후부터 수치스럽고 추한 존재로 전락되었습니다. 자식이 잘못되면 부모의 마음이 아픈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존귀했던 인간이 마귀의 포로가 되고 죄의 포로가 되어 끌려 다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이를 도와주시고자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친히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인간의 죄와 죽음과 마귀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이것을 오늘 말씀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어떻게 존귀하게 될 수 있다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아기로 이 땅에 오심으로 수치스러움이 해결되고 비참함이 없어지고 존귀하게 영화롭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 통하여 이 땅에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가운데도 임하심으로 존귀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큰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우리가 존귀하게(영화롭게) 됩니다.(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1절에서 이사야는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 더 이상 흑암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옛적에는 우리 인생들이 죄로 인해 마귀에게 잡혀서 멸시를 당하였지만, 이후에는 우리가 존귀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갈릴리 북방의 변방 지역입니다. 이곳은 앗수르에 망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전쟁포로가 되어 앗수르 전역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왕하15:29).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맞아죽고, 굶어죽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앗수르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오면서 혼혈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같은 동족들로부터도 ‘이방의 갈릴리’라 불리며 멸시를 당해야 했습니다. 왜 그들은 이런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되었을까요? 1b에는 여호와께서 멸시를 당하게 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he humbled the land’ 로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겸손케 하셨다. 즉 낮추셨다’ 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뽑으시고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신 목적은 이스라엘백성을 세워서 온 세계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자 하심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명의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지는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책망하는 선지자들을 미워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그들을 멸시받게 하시고 고통받게 하심으로 낮추셨습니다. 그래야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은 멸시받게 하시고 고통받게 하심으로 낮추십니다. 그리고 난 뒤 다시 존귀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생들을 존귀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큰 빛을 비추십니다. 2절을 보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여기서 <흑암에 행하던 백성,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란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포로가 되어 죄와 사망 권세 아래 고통하며 영원히 심판 받게 될 우리 인생들을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흑암에 행하고 있습니다. 흑암에 행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1) 이는 마귀에게 속아서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인생의 의미와 방향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저 태어났으므로 되는대로 살면서 두려움과 불안에 떱니다.
2) 또한 아무런 희망 없이 산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 부딪혀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이런 그들의 입에서는 못살겠다고 하고 땅이 꺼지는 한숨이 나옵니다. 3) 또한 흑암 속에 행한다는 것은 각종 죄를 지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밝고 건강한 인생을 살지 못하고 어두운데서 남몰래 온갖 더러운 죄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흑암에 행하는 사람들은 얼굴이 어둡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에게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빛은 태양과 같은 큰 빛입니다. 그래서 이 빛은 각 사람에게 영원토록 비추는 참 빛이요 죄와 사망 권세를 물리치고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빛입니다. 절망하고 있는 자에게 희망을 주는 소망의 빛입니다. 어떤 어둠, 어떤 문제도 해결하는 구원의 빛입니다. 이 빛이 비추일 때 사람들은 살아납니다. 12년동안 피를 쏟으며 희망 없이 살던 혈루증여인, 어두운 밤거리를 헤매며 음란죄를 짓다가 잡혀온 여인, 인생의 의미와 방향을 모른 채 한밤중에 어두운 얼굴을 하고 찾아온 니고데모, 참된 예배의 대상을 찾지 못한 체 타는 영혼의 목마름 속에 죽어가던 사마리아 여인!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큰 빛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밝고 건강한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큰 빛 되신 예수님을 흑암 중에 있던 우리들에게 비추어주셔서 밝고 건강한 새 인생이 되도록 영화롭게 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멍에를 꺾고 창성케 하심으로 우리를 존귀하게(영화롭게) 하십니다. 3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침략과 유린 속에서 오그라들고 그 백성들은 슬픔과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해서 번영(창성)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 백성들은 즐거움이 충만합니다. 그 즐거움은 추수하는 즐거움,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과 같습니다. 추수하는 즐거움은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열매를 보는데서 오는 즐거움입니다.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승리한데서 오는 즐거움입니다. 왜 이런 즐거움이 가능합니까? 4절을 보면.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멍에란 소나 말의 목에 걸어서 주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게 하는 농기구입니다. 그러므로 무겁게 멍에를 메었다는 것은 포로가 되어 노예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노예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 열매는 다 주인의 손에 돌아갑니다. 그러다 그 멍에가 너무 무거워 잠시 쉬고자 하면 그들의 어깨에는 채찍이 가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를 꺾으시고 우리들을 자유하게 하십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어깨를 근본적으로 짓누르던 죄와 사단의 멍에를 십자가와 부활로 꺾으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 자유로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복된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창1:28) 이러한 인생에는 열매 맺는 즐거움이 있고 승리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5절은 말합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전쟁 후 군인들의 신과 겉옷에 얼마나 피가 많이 묻어 있겠습니까? 그것이 완전히 태워지게 됩니다. 이는 그 땅에 전쟁이 그치고 참 평화가 임할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의 멍에를 꺾고 자유를 주셔서 열매와 승리의 즐거움이 있는 인생으로 번영(창성)하게 하시므로 우리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고통과 멸시를 받으며 흑암 속에 행하던 우리나라도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 속에 수많은 외세로부터 침략과 유린을 당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 땅의 아버지와 어머니들, 누이들이 노예로, 정신대로 끌려가 치욕스런 삶을 살기도 하였습니다. 어찌나 가난했는지, ‘아침 드셨습니까? 식사하셨습니까?’ 이것이 인사가 된 땅이었습니다. 슬픔과 고통이 많았던 이 땅에는 유난히 무속신앙이 들끓었고, 절망과 한숨 속에 남자들은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습니다. 그래서, 점집과 술집이 곳곳에 널려 있고, 날마다 북치고 장구치며 굿하는 소리, 대낮부터 술에 취해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낮아 질데로 낮아진 이 나라에 선교사님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전한 예수님을 통하여 이 나라에 큰 빛을 비추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이 땅은 슬픔과 운명을 딛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정한수 떠놓고 천지신명께 빌던 그 정성으로, 새벽마다 교회에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몸 된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였습니다. 몇 시간을 걸어 부흥회에 참석하고,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십일조에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면 각자 힘에 지나도록 집을 팔고, 품을 팔아 헌신하였습니다. 밖으로는 잠들어 있는 이 민족을 깨우고자 전도를 하였고 학교를 세우고 독립 운동에도 앞장서며 이 땅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서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급기야 이 땅을 무겁게 짓누르던 죄와 사망의 권세, 절망과 흑암의 권세가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본 식민지의 멍에를 벗기시고, 6.25 전쟁을 통하여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그리고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영적인 강국으로 창성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조를 받던 이 나라를 세워서 전 세계에다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의 왕국으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축복도 잠시 지금 한국교회는 더 많은 물질과 향락에 빠져서 이 땅에서 잘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바쁘고, 즐겁고, 배부르자 가장 먼저 새벽기도소리가 교회마다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앞에 회개와 결단이 약해졌고 교인들도 교회에 대해 소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낮추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싫어하면 반드시 멸시를 당하게 하십니다. 현재도 한국교회는 안티세력들을 통해 많은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성도님들은 늘 말씀앞에 회개하고 겸손하게 순종하심으로 존귀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큰 빛으로 오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를 꺾으시는 것입니까?
6절을 보시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예수님은 이 땅에 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기는 보통 아기가 아니였습니다. 그는 한 아기로 오셨지만, 그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습니다. 정사란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것은 이 아기가 우주와 세상 만민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왕이 누구냐에 따라 우리는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월급을 많이 받아도, 직장 상사가 정신이 이상하면 불행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산해진미를 먹으며 살아도 아버지가 문제가 있으면 모든 가족이 괴롭습니다. 사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행복합니다. 내가 다스리고, 내 욕심과 감정이 다스리면 행복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우리의 가정을, 우리의 사회와 나라를 다스리길 원하십니다. 이사야는 이 한 아기로 나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이렇게 예언합니다. 4가지가 말하는데
1) 기묘한 모사입니다(6) 기묘한 모사란 ‘Wonderful Counselor’ 란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는 살면서 상담을 해 줄 분이 필요합니다. 모르는 게 많고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공은 했지만, 허무 속에 방황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야 허무가 해결된다고 상담해 주셨습니다. 사랑에 목말라 하는 사마리아 자매에게는 ‘내가 주는 물을 먹어야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상담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인격적으로 상담을 해주셨습니다. 때로는 이해해 주시며 위로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시고 도전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어떤 인생문제, 내면문제, 가정문제, 신앙문제도 정확히 도우시는 원더풀 카운셀러이십니다. 그분이 이렇게 정확히 카운슬링 하실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지으신 분으로 우리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도 다 세고 계시는 분이시고(마10:30) 그분은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십니다. 왜냐하면 한 아기로 오셔서 이 땅에 살면서 인간의 희노애락을 다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히4:15) 그래서 그분은 내 외로움과 아픔과 불안과 절망을 아십니다. 나를 만드신 그분이, 나의 눈물을 아시는 그분이 나를 도울 수 있으며 고치실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카운슬러에게 늘 물으시고 구하시길 축원합니다.
2)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Mighty God): 이 아기는 여러 아기들 중에 그저 한 아기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이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기로 오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만일 구름을 타고 천군천사와 함께 이 땅에 오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다가가기가 힘들었을까요? 그분은 구유에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아기로 하나님을 부담없이 만날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아기로 오셨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무거운 멍에와 무자비한 채찍과 막대기를 꺾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죄와 사단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들린 거라사 청년도 온전케 하시고 38년 된 고질병 환자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태풍도 잔잔케 하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이러한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놀라운 그분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3)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Everlasting Father): 그분은 다스리되 아버지로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능력과 사랑과 권위로 보호하시고 책임지십니다. 이 아버지께서 함께 해주시므로 우리는 늘 든든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놀라운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 나에게 이런 아버지가 계시는구나! 언제나 내 손 잡아주시고 영원히 함께하실 아버지가 계시는구나!’ 그 아버지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십니다. 말 그대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아버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온전한 지혜와 사랑과 능력으로 영원히 함께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그래서, 그분의 손을 잡으면 두렵지 않습니다. 세상이 두렵지 않고 사람들이 두렵지 않고,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강한 사람은 무릎 꿇고 ‘하나님 아버지’하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강하신 분이 그의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며 우리를 기르고 돌보시는 놀라운 그분의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4) 평강의 왕이십니다(Prince of Peace): 평강의 왕이란 평화로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사랑과 대화로, 긍휼과 용서로 사람들을 다스리십니다. 보통의 통치자는 무력을 많이 씁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모함하고 반대하는 자에게는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평강의 왕은 그렇지 않습니다. 검이 아니라 섬김으로, 주먹이 아니라 무릎으로 다스립니다.
그래서 이분의 다스림이 있는 곳에 전쟁과 복수가 그치고 화해와 용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평강의 왕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7절은 말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이 분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고통과 난리 속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평강의 왕께서 주시는 놀라운 평안으로서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강의 왕이 다스리는 이 나라는 무궁합니다. 그분의 나라는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합니다. 그분이 아기로 오시면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그분이 영광의 왕으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를 평화로 다스리시고,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시는 놀라운 그분의 이름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이런 놀라운 한 아기를 주시겠다는 이 예언의 말씀은 730년 후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빌어 한 아기로 탄생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흑암에 행하던 우리는 큰 빛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던 죄와 사망의 멍에와 채찍을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꺾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기묘한 모사요 전능한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인생문제를 해결하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우리를 돌보시며, 평강의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려주십니다. 만일 한 아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고통과 멸시를 받으며 흑암 속에 행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사람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눅2:10)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존귀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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