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구약의 가르침을
더욱 적극적으로 실천할 것을 당부하시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복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랑’이요,
그것을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낸 가르침이 바로 ‘원수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에게 큰 상처와 피해를 준 사람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데,
어떻게 그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의 상처도 육신의 상처와 비슷합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온전히 치유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육신이 큰 병에 걸려서 완전히 낫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완전히 낫지 못한 채 생각만 해도 계속 쓰라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은
원수에게 받은 상처가 낫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결심하고 하느님께 바쳐야 할 종교적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셨지만 손에는 못자국이,
허리에는 창에 찔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그에 대한 미움이 없어야 가능하다고들 합니다.
또한 원수에게 받은 상처가 완전히 나아야
비로소 그를 사랑할 수 있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랑을 감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감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있고, 의지를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엄연히 다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의지적인 결단을 내리라는 그분의 명령입니다.
“재작년에 남편이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비록 남편과 이혼한 사이였지만 살 날이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다시 그녀가 병구완에 나섰다.
처음에 남편은 자기의 병을 인정하지 못하여 난폭하게 굴었지만,
묵묵히 자신의 병상을 지키는 부인에게 끝내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숨을 거두었다.
그 눈물 하나로 그녀는 결혼 생활 40년 동안 받았던
억울함과 고통의 큰 바윗덩이가 가슴에서 쑥 빠져 나간 것 같았다고 했다.”
황영애 교수의 『화학에서 인생을 배우다』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이혼한 남편의 임종을 지켜 준 이 글의 주인공은
이 책을 쓴 저자의 집에서 가사를 도와주는 분입니다.
그분은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만 졸업하였으며,
지금의 남편과 혼인하면서 평생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시집 식구들을 거두어들여 돌보아야 했던 것은 물론이고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7년 동안을
대소변을 받아 내며 병 수발을 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남편은 남편대로 제대로 하는 일 없이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아내를 괴롭혔습니다.
결국 그분은 자녀들 때문에 이혼을 하고 온갖 궂은일을 다하며
훌륭하게 키워서 일류 대학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이혼한 남편의 임종을 지키며 한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맞이한 남편도, 그분도 모두 구원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억울한 사연들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만난 억울한 일들을 그저 ‘억울함’으로 안고 살면
그것은 억울한 채로 남아서 ‘슬픈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적극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키면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되고 축복이 됩니다.
우리 삶에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착한 하느님 마음만을 담고 살아야 합니다.
다른 계산을 하면 금방 우리는 억울해집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6)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지만
원수는
우리에게 가시를 내미네.
원수가 내미는
가시에 찔리면서도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는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
진실로
그분의 사랑을 아는 자만이
용서라는
믿음의 열매를 얻게 된다네.
- 김혜선 안젤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