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봄은 속도전이다. 봄날은 순식간에 몰아닥치고 또 한 발 물러나는가 싶더니 또 다른 빛깔의 꽃들로 달려든다.
3월 중순이 지나자 매화꽃들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우리 집 앞마당의 토종매화 세 그루는 이미 다 지고, 마당 앞 동네 어르신의 매실밭은 꽃비를 뿌리고 있다. 섬진강 매화꽃들의 절정에 맞춰 상춘객들의 차가 밀리고 바로 윗마을인 매화마을은 인산인해였다. 우리 집, 우리들의 집인 ‘예술곳간 몽유(夢遊)’에도 주말이면 많은 벗들이 찾아왔다.
밤새 원고 마감하느라 늦잠을 자고 나니 서울의 오민석 시인이 슬그머니 다녀갔다.
형님께 제대로 차 한 잔 못 드려 너무 아쉬웠다. 시베리아 횡단과 유럽 일주를 꿈꾸고 있는 박정호씨 팀도 트럭캠프를 몰고 합류하고, 대전의 벗 설산 김영기와 지리산행복학교(지행교) 이상주 선생 등 학생들이 찾아왔다. 하동 금남면의 ‘회천사’ 이철수 미술반 반장도 낚시로 숭어, 볼락을 잡아왔다. 서울의 왕언니 최정희 누님과 김의현, 김명지 시인도 합류했다. 1박2일 지행교 문예창작반 수업이 있는 날이어서 저녁에는 방과 마당이 가득 찼다. 전국에서 온 벗들과 더불어 공부는 짧게, 봄밤의 꽃잔치는 오래 오래 무르익어갔다.
봄의 속도전… 순식간에 닥치고 꽃이 피고 져
매화꽃들이 지고 나자 며칠 동안 심하게 왼팔 통증을 느꼈다. 모터사이클 타기도 어렵고, 카메라를 들기도 힘들고, 깊이 잠들지도 못했다. 오십견인지, 어깨결림인지 왼팔을 높이 치켜들기가 너무 힘들었다. 진통제를 먹어가며 스트레칭을 좀 했더니 사흘 만에 통증의 큰 파도 하나가 지나갔다. 아프지도 않고 어찌 봄이 오고, 통증도 없이 어찌 꽃이 지겠는가. 떨어진 꽃잎 위로 자주 봄비가 내렸다.
서해 맹골수도에서는 3년 만에 세월호가 떠올랐다. 뉴스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잠들지 못하는 봄밤이 이어지고, 아이들의 눈빛처럼 밤하늘에 별빛들이 초롱초롱했다. 늦은 밤마실을 나갔다. 이미 오래전부터 봐두었던 목련꽃을 찾아갔다. 3년 전부터 찾아 헤매다 어렵게 만난 나무다. 마치 소복을 입은 듯 산기슭에 저 홀로 피어 있는 목련꽃 별그늘 아래 스며들었다.
그리하여 질 때도 꽃잎을 하나씩 떨구지 않고 미련 없이 온몸 통째로 지는 꽃이다. 세월호는 돌아오고 마침내 갈 때는 가야 하는 망국(亡國)의 여인도 있다. 아주 오래전에 쓴 졸시 ‘목련’을 떠올렸다.
흰 붓을 들어
북녘 하늘에 조사를 쓴다
백치처럼
우는 듯이 웃는 듯이
아직 젊은 미망인
하염없이 북망산천 바라보다
어디로 갔을까
꽃샘추위 삼우제라 날궂이를 하시나
열녀문 아래
하르르 소복일랑 벗어두고
그러고 보니 편지를 쓰지 않은 지 참 오래됐다. 이메일은 밀린 원고나 해결하는 형식이 되고 잘 쓰지도 않는 핸드폰은 이따금 간단명료한 문자 메시지들뿐이다. 키보드 자판기가 아니라 손글씨로 편지를 쓰고픈 봄날이다. 쓰다 지우고, 구겨버리고 다시 쓰는.
벚꽃 질 무렵, 수양버들 연초록빛 물들어
‘꽃은 필 때도 좋지만 지는 꽃이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법이지요. 지지 않는 꽃은 이미 꽃이기를 포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박눈처럼 지는 벚꽃잎들은 모체인 나무와 허공과 땅의 경계를 한순간에 없애버리지요. 섬진강 물 위에 떠서 이리저리 밀리는 꽃잎들의 모습은 일순 이리 밀리면 이곳이 피안이고, 저리 밀리면 저곳이 피안이게 만들지요. 특히 축제가 끝나고 막 꽃들이 지기 시작한 화개동천의 쌍계사 십리 벚꽃길은 의식까지 몽롱하게 해주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봄날의 동화는 100년 된 고목에서 막 피어난 벚꽃입니다. 그것도 그냥 가지에서 피어난 꽃이 아니라 고목의 몸통을 곧바로 뚫고 나와 겨우 한 송이 혹은 두 송이를 피운 꽃.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 늙은 몸의 허리에서 겨우 2∼3cm의 싹을 내밀어 곧바로 꽃을 피우는, 대담하지만 너무나 연약한 꽃, 바로 이 아름다운 꽃 한 송이에 지리산과 섬진강의 모든 봄날이 압축파일처럼 저장돼 있다면 과장일까요.
수령 100년의 고목이 해마다 수천수만의 꽃을 피워 올리며 자신의 일생을 반추하겠지만, 실은 몸통에서 곧바로 피는 이 한 송이 꽃을 위해 고목은 그래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련, 내가 문득 그대를 알아보는 순간도 바로 이러한 꽃 한 송이를 볼 때, 다시 말하자면 노스님 같은 고목의 이 한 소식을 접할 때인지 알겠는지요. 무련, 그대가 내게 올 때도 그렇게 나의 옆구리를 뚫고 한순간에 오리라 믿습니다. 봄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쌍계사 십리 벚꽃길도 파장이 되고, 백운산 어치계곡의 수양벚꽃도 막바지 춤을 추고 있었다. 가끔은 꽃나무들도 봄바람에 춤을 추고픈 것이다. 봄바람 불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슬슬 리듬을 탄다. 지상으로 수백 개의 팔을 내린 수양벚나무를 따라 덩달아 나도 ‘슬로 슬로 퀵 슬로’ 바람의 결이 된다, 바람의 몸이 된다. 그렇다. 벚꽃이 필 때는 벗고 핀다. 벚꽃은 벗고 핀다. 겨우내 다 벗고, 가릴 것 없이 환하게 다 벗고 벚꽃이 피는 것이다.
봄비에 섬진강 벚꽃잎 다 떨어질 무렵이면 온 동네가 연초록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수양버들, 능수버들이 제일 선명하다. 꽃비가 내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젖은 머리 찰랑이며 물 위를 걸어가는 여인들, 한껏 물이 오른 능수버들이 연초록 머릿결을 휘날리며 손짓한다. 벚꽃이 진다고 파장이겠는가. 연초록 머릿결을 휘날리며 가자, 봄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며 능수버들 비친 물빛이 더 환해졌다.
비가 그치고 날이 저물자 잠시 구름이 벗겨졌다. 후다닥 일어나 바이크를 타고 달빛 교교하게 내리는 배밭으로 달려갔다. 산비탈을 걸어 오르니 배밭 위의 산돌배나무 한 그루가 연초록 잎새와 더불어 환하게 맞아주었다. 산 너머 반대편에는 별들도 마중을 나왔다. 누구라도 다 아는 이조년(1269-1343)의 시를 읊조렸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언제 되뇌어도 절창은 절창이다.
같은 봄을 지나면서도 시만 쓸 때와 사진을 찍을 때와 조금은 달라진 점이 있다. 10년 정도 사진에 집중하면서 같은 곳을 자주 가보게 되는 것이다. 갈 때마다 더 자세히 바라본다.
흐리고 비 내리는 낮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가본다. 아무도 찾지 않는 시간에 가서 쪼그려 앉는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연둣빛 눈을 감고, 오래 듣다가 바람의 귀를 닫아버리고, 안개 속에 킁킁거리다 코와 입을 막고, 온몸의 피부로 수만 가닥의 오색 실타래 숨을 쉰다.
시를 쓸 때는 잘 안 보이던 풍경의 깊이다. 같은 풍경이 다른 얼굴을 보여 주고, 수시로 다른 표정으로 말을 걸어온다. 흔한 풍경도 날마다 밤마다 다른 깊이와 넓이가 있다. 사람 또한 이와 같지 않으랴. 봄을 맞이하고 또 보내는 내 나름의 자세였다. 그러다보니 시를 쓰듯 사진을 찍고, 사진을 찍으며 시를 쓰게 된 것이다.
사랑의 기억이 죽음조차 두렵지 않게…
벚꽃이 질 무렵이면 구례 토지들녘이나 하동 평사리 무딤이들에는 ‘보랏빛 꽃구름’ 자운영(紫雲英) 꽃들이 만발했었다. 늦가을에 자운영 씨를 뿌렸다가 모내기 전에 갈아엎는 자연녹비 식물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너른 들판에 보랏빛 꽃구름이 연착륙했었다. 그런데 그 많던 자운영 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0여 년 전부터 자운영농법을 포기했는지, 이제는 논둑이나 밭둑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자운영 꽃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박완서 선생의 성장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떠올랐다. 박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1년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매화 필 무렵이면 섬진강을 찾아왔다. 민병일 시인이나 소설가 이경자, 김영현씨 등이 원로 소설가를 모시고 섬진강 탐매를 왔었다.
해질녘이면 소주도 두어 잔 정도 마시던 박 선생께서 느닷없이 “저도 담배 한 가치만 줘볼래요?” 하는 것이었다. 천생 소녀 같아 보이던 선생께서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척 끼우고는 참으로 맛나게 피우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26세의 외아들과 남편을 먼저 앞세운 한 여인의 비애가 깊이 묻어나왔다.
“차라리 남편의 죽음은 견딜 만하더라구요. 아들을 앞세우고 너무 절망에 빠져 신을 부정했지요. 비행기를 타고 요단강까지 가보았지요. 그런데 요단강을 직접 보고는 너무나 실망했어요. 차라리 안 보고 그냥 죽는 게 더 나을 텐데….”
혼잣말인 듯 낮은 목소리의 선생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저는 먼저 좀 쉴 게요. 천천히 재미있게 드세요” 하고는 젊은 후배들에게 술자리를 넘기고 홀로 숙소로 들어가시곤 했다. 2011년 1월 22일, 섬진강 매화가 막 피기 시작할 무렵에 선생님은 그예 먼길을 떠나시고 말았다. 선생님의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잊히지 않는다.
‘내 힘으로 이룩한 업적이나 소유는 저세상에 가져갈 수 없지만 사랑의 기억만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아진다.’
봄을 배웅하면서 ‘사랑의 기억’이 죽음조차 두렵지 않게 한다는 말이 가슴을 친다.
‘사랑의 기억’을 꽃빛으로 보여 준다면 어떤 꽃일까. 분명 연분홍 계열의 봄꽃일 것이다. 굳이 한 꽃을 보여 준다면 나는 단연코 ‘남바람꽃’이라 말할 것이다. 꽃 한 송이 송이 모두에 연분홍 물감으로 수채화처럼 붓 터치를 한 듯한 남바람꽃, 그 연분홍 무늬는 단 하나도 같은 게 없다. 한때 남방바람꽃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남바람꽃으로 개명된 희귀 야생화다.
고 박만규 박사가 77년 전에 전남 구례에서 처음 발견한 꽃이다. 일본의 남바람꽃이 아니라 ‘조선산 남바람꽃’이었다. 나는 이 야생화의 정명은 ‘조선남바람꽃’이라 생각한다. 5년 전 벚꽃 질 무렵에 우연히 이 꽃을 만났다. 그러니까 72년 만에 최초 자생지인 구례에서 발견한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조선남바람꽃은 피어났다.
어느새 세월호 3주기를 맞고, 때를 맞춰 대통령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세월호 아이들에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선택의 날이 다가왔다. 조선남바람꽃들이 지고 나면 진도 바닷가에는 그 어여쁜 보랏빛 자란(紫蘭)이 피어날 것이다.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이원규
아직은 저혈압의 풀잎들
고로쇠나무도 자주 관절이 쑤신다
별자리들도 밤새 뒤척이며 마른기침을 하고
길바닥에 얼굴 처박은 호박돌도
소쩍소쩍 소쩍새처럼 캄캄하게 딸국질을 한다
오백삼십 리 유장한 섬진강도 흐르다
굽이굽이 몸서리를 치고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지리산 주목
밤의 고사목도 으라차차 달빛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서러워 서럽다고 파르르 떨지 말아라
외로워 외롭다고 너무 오래 짓무르지는 말아라
섬이 섬인 것은 끝끝내 섬이기 때문
여수 백야리 등대도 잠들지 못해 등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