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1 : 한일합방 전후의 교회 상황
최석우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장 · 신부)
제 300년대를 향하여 가고 있는 한국 교회. 믿음의 씨앗이 뿌려져 그 열매를 맺고 있는 현실 속에는 우리의 무관심으로 묻혀져 있는 교회사가 많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근세사를 돌아보며, 우리 신앙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합니다. <편집자 주>
한일합방 당시의 교회 상황
1905년에 시작된 일제의 보호정책은 1910년 8월 29일 소위 한일합방 조약이 공포됨으로써 결국 합방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이로써 이후 한국 교회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더욱 무거워지게 되었다. 과연 어떠한 십자가들이 닥쳐올 것인가? 그것을 말하기 전에 우선 합방 당시의 교회 상황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당시 한국의 인구는 약 1천 5백만, 그중 천주교 신자가 7만 3천 5백 17명이었다. 거기에 예비자가 5천 1백 1명, 그리고 1년간 영세한 어른의 수는 5천 6백 38명이었다.
교구는 아직 조선교구 하나밖에 없었고, 따라서 주교도 한 분뿐이었다. 신부는 프랑스인이 46명, 한국인이 15명, 신학생은 41명, 본당은 54개, 공소는 1천 24개, 성당은 소성당 격의 경당(經堂)까지 합쳐서 69개였다. 수도회는 남녀 수도회가 각각 하나, 즉 살트르 성 바오로 여자 수도회와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남자 수도회, 수도자 수는 수녀가 59명(프랑스인 10, 한국인 49), 수사는 6명(독일인)이었다.
교육 사업으로는 남학교가 1백 14개(학생은 2천 5백 73명), 여학교가 10개(4백 75명), 자선 사업으로는 서울과 제물포에 고아원과 무료 진료소가 각각 하나씩 있었고, 서울시는 또 양로원 하나가 있었다. 출판 사업으로는 인쇄소 외에 “경향신문”이란 주간지를 간행하고 있었다.
당시 50여 개의 본당은 합경도와 평안도가 좀 낙후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제주도와 나라 밖인 간도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서울 2 문안 종현, 문밖 약현
경기도 8 제물포, 행주, 송도, 하우고개, 갓등이, 미리내, 양평, 안성
충남 5 공세리, 합덕, 결성, 홍산, 공주
충북 2 장호원, 옥천
강원도 5 용소막, 원주, 풍수원, 이천의 2개
황해도 6 황주, 봉산, 재령, 매화동, 장연, 청계동
평남 2 평양, 진남포
평북 1 영유
함남 2 원산, 내평
간도 2 용정, 삼헌봉
경북 4 대구, 영천, 김천, 가실
경남 3 부산, 마산포, 소촌
전북 6 전주, 나바위, 되재, 진안, 수류, 신성리
전남 2 목포, 나주
제주도 2 제주, 홍노
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
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물론 합방을 전후해서 일층 억압적이고 노골적이 되었으나 그것은 이미 1905년의 보호 정책 이래 시작된 것이었다. 벌써 이 해에 교회는 친일 단체들로부터 괴롭힘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일진회(一進會)는 일본 세력을 업고 당시 개종 운동이 활발했던 전남의 지도(智島), 완도 등 도서 지방의 공소 건물들을 파괴하고, 교인을 구타하는 등의 폭행을 자행하였다.
또한 그들은 마치 한국민 자신이 합방을 원하고 있는 것처럼 매국적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는 “경향신문”을 통해 그러한 발언을 취소하고, 자진 해산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일본인들에게는 그들 본래의 약속대로 한국의 개화(開化)에만 전념하도록 경고하였다.
1907년 이른바 광무 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이 제정 · 공포되었다. 그것은 물론 교회의 “경향신문”과 함께 민족 언론의 탄압을 의도한 것이었다. 다행히 “경향신문”은 당시 사장이 프랑스 신부였으므로 폐간만은 면할 수
있었다. 이듬해 1908년에는 소위 사립학교령이 제정 · 공포되었는데, 그것은 특히 교회에서 경영하는 사립학교에 제재를 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모든 교회 학교는 새로 설립인가를 받아야 하였는데, 그 수속이 얼마나 까다로왔던지 당시 조선교구장인 뮈뗄(Mutel, 閔德孝)은 학부(學部)를 찾아가 항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의사의 저격 사건과 교회 반응
이렇게 지속되어 오던 일제의 탄압은 1909년 10월 26일 독설한 천주교인인 안중근(토마)의 하르빈에서의 의거를 계기로 하여 아주 노골적이 되었다. 안중근이 이토(伊藤博文)를 암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교회측은 일제가 그것을 구실로 하여 교회를 타도하려 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토의 살해범이 천주교인이라는 신문 보도마저 극구 부인하였다. 그러나 범인인 안중근이 열심한 천주교인일 뿐더러 의거 자체가 그의 신앙의 소신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또한 그가 프랑스 선교사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까지 확실해지자 교회 당국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였고, 마침내는 “경향신문”을 통해 안중근의 행위가 아무리 애국적이고 헌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살인은 역시 살인일 수밖에 없다는 모호한 태도를 표명하였다.
선교사들은 처음에 이토를 한국의 은인으로까지 생각했었으므로 그의 죽음에 오히려 동정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합방이 공포된 다음날 이토의 묘지 앞에서 거행된 합방을 알리는 의식을 보고는 그들도 합방이 애당초 이토의 계획이었음을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다.
빌렘 신부가 여순 감옥으로 안중근을 방문할 것을 결심하고 교구장에게 그 허락을 구하게 되자 교회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졌다. 뮈뗄 주교는 정치화될 것을 우려하여 빌렘 신부의 여순 방문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렘 신부는 여순 방문을 강행하였고, 이에 대해 뮈뗄 주교는 빌렘 신부에게 2개월 간의 성무 집행 금지령을 내렸다.
한편 안중근은 여순 감옥에서 날마다 기도를 바치며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조국의 원수를 죽인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사형일이 임박하자 그는 그의 어머니와 아내, 빌렘 신부와 뮈뗄 주교 등에게 보내는 7통의 옥중 서한을 작성하여 동생들에게 전하였고, 특히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장남 분도를 장차 신부로 키워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빌렘 신부로부터 고해와 영성체를 하고, 만반의 준비를 끝낸 그는 1910년 3월 25일, 2분간의 조용한 기도를 올리고 사형대에 올라 그의 영혼을 천주께 바쳤다.
합방을 위한 일제의 선교사 설득
이토의 암살 사건을 전하면서 영국의 한 가톨릭 신문은 그때까지 사람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전해주었다. 즉 이토가 아직 통감으로 있을 때 그는 한국의 선교사들이 한국 신자들에게 친로배일(親露排日) 정신을 고취시키고 있음을 확신하고, 그들을 다른 선교사들로 교체해 줄 것을 교황청에 건의하였으며, 교황청의 태도가 여의치 않자 직접 로마로 가서 교황을 알현하고 선교사 교체의 필요성을 설명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거론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어쨌든 교회는 1910년 9월 8일 외부(外部)로부터 아주 이상한 공문 한 장을 받았다. 사연인즉 조선망국사(朝蘇亡國史) 편찬 여부에 관한 조치였는데, 즉 뮈뗄 주교와 드망즈 등 서울의 여러 신부들이 조선망국사의 편찬을 계획하고, 이를 위해 전국에 서한을 보내고, 한국의 정치인과 애국자에 관한 자료 수집을 의뢰하였으며 불어판 10만 부, 한문판 3만 부, 국문판 1만 부, 모두 14만 부를 인쇄할 예정이고, 특히 그 책에서는 민영환의 자결과 안중근의 의거 사실이 그들의 사진과 함께 감동있게 서술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 사실 여부를 물어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 뮈뗄 주교는 그것은 항간의 낭설을 쉽게 믿은 때문일 것이고, 사실인즉 최근 병인 순교자들의 증언을 수립하고자 전국의 본당과 공소에 보낸 서한이 아마 그러한 낭설을 믿게 한 발단이 되었을 것이라는 내용의 답신을 외부대신에게 보냈다. 실제로 뮈뗄 주교는 7월 28일자로 병인 순교자들의 증언 수집에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전국의 본당과 공소에 발송했었다.
한일합방을 예정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내의 선교사들을 무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으로 판단한 일제는 합방 수개월 전부터 그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하였고, 그 일환으로 뮈뗄 주교를 위시하여 천주교와 개신교의 지도급 인물들을 자주 호화판 연회에 초대하여 그 자리에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고 혼동되어서는 안되며, 그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종교 문제이고 따라서 선교사들을 최대로 우대하겠다는 등의 온갖 감언이설로 그들의 환심을 사려 하였다.
또한 친일계 언론을 통해 선교사들이 시국을 정시(正視)하고, 일본인의 감정을 상하지 말게 하고 또 한국인의 행동과 저술 활동을 감시하고 억제해야 한다는 등의 기사도 서슴지 않았다. 합방이 임박해지면서 언론에 대한 검열과 통제는 더욱 심해졌고, 합방 계획이 사전에 누설될까 두려워 모든 신문, 심지어 친일계 신문까지도 정간시켰다. 그 결과 “경향신문”도 폐간당하게 되었다. “경향신문”에 대한 검열은 4월 25일 “금수 갈은 헌병”이란 기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는 폐간이냐 아니면 종교지냐의 양자택일의 강요를 당하기에 이르렀고, 부득이 교회는 후자를 택하기로 하고, 12월 30일자를 마지막으로 자진 폐간하였다.
한일합방에 대한 교회의 반응
한일합방의 반응은 의외로 교회에도 빠르게 나타났는데 무엇보다도 영세자수가 해마다 줄어들었고 따라서 신자수도 증가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성인 영세자가(1911년 대구교구가 분할 독립된 후의 서울교구에 국한) 1912년에 2천 6백 7명이던 것이 1913년에는 2천 3백 87명, 1914년에는 2천 3백 39명으로 해마다 감소되는 현상을 나타냈다. 또 신자수도 1912년 5만 2천 1백 9명, 1913년 5만 3천 6백 18명, 1914년 5만 5천 6백 2명 등 그다지 증가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해마다 최소한 2천여 명의 새로운 영세자가 탄생하였고 또한 해마다 사망자보다 출생자가 많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신자수는 훨씬 더 증가되어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거의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종 운동의 약회는 물론 첫째로 합방으로 인한 일본의 정치적 영향 때문이었다. 합방 이후 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미래 앞에서 갈피를 못 잡고 종교 문제를 뒤로 미뤘다.
다음은 일본인의 경제적 침략과 물가고 등으로 인해 한국민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고 더욱 가난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 여념이 없었고, 종교 문제를 보다 나은 미래로 미룸으로써 외교인에게는 종교적 무관심이 현저해지고, 신자들에게는 전교할 열의가 식어지고 또 냉담자도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한국민들에게 일본인의 침학(侵虐)을 피하는 동시에 생계를 개척하는 데 있어서 이주나 이민만큼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고, 그래서 전국 도처에서 이민이 대유행이 되었다. 북간도로의 이민이 제일 많았고, 다음으로는 서간도, 하와이, 멕시코 등이었다.
합방 직후 북간도로 간 이민은 무려 10만 명, 그중 교우만도 예비자 7백 명을 포합하여 3천 5백 명이나 되었다.
북간도로 간 이민 교우들은 그곳에 선교사가 있기 때문에 신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서간도 갈은 곳에는 선교사가 없기 때문에 냉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가능한 한 교우들의 신앙 생활을 위해 이민을 막아보려 하였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설상가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