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곳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마르1,40-45)
A leper came to him
and kneeling down
begged him and said, “If you wish, you can make me
clean.” Moved
with pity, he stretched out his hand, touched the leper, and said to
him, “I do will
it. Be made clean.”
The leprosy left him
immediately,
and he was made
clean.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성체성사의 은혜로 초대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와 함께 피와 살을 나누셨고, 죽음의 종살이에서 우리
영혼을 해방시키셨다는 설득은 장엄한 선포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 주신다. 이렇게 병고에 시달리고 악령에 포박당한 이들의 영혼과 육신을 해방시키시는 일 또한 장엄한 선포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될 때까지 그
일을 지속하실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기적의
성격은 자연 질서의 초월, 병자의 치유, 악령의 추방, 이 세 가지이다. 일그러진 삶의 모습을 본디의 창조 상태로 회복시키는 인간화의 작업이다.
마르코 복음과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인 하느님 나라의 운동이 악령의 추방보다 우선해 있음을 강조한다. 열두 제자의 선발 목적은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어 세상에 보내려는 것이고, 파견하실 때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신다. 루카 복음은 마귀를 내쫓는 구마를 치유보다 더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악령은 하느님 나라 건설의 방해물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해 왔다.’(마태
11,12 참조)고 말씀하셨다. 비인간적 현상들은 악령이 활개 치는 상태다. 우리는 개성과
자유, 성취욕으로 말미암아 도덕과 공동체의 윤리를 버린 지가 너무 오래다. 많은 경우 악령의 속삭임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악령이 자신을
포박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악령과 마귀는 내 몸과 마음에 둥지를 틀고 산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지역의 중심적인 종교 고장인데 어찌 그렇게도 마귀가 많았을까? 과학 시대의 오늘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추방 일정이 너무
바쁘시다. 예수님께서는 악령에게 단호하셨다. ‘말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다’(마르 1,34 참조). 진리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뜻일 게다. 소비문화의 시장 관리는 늘 기품 있고 아름다운 삶에 필수적임을 앞세운다. 악령의 입을 다물게 하는 좋은 방법가운데 하나는
거실의 텔레비전을 없애는 것이다. 거짓된 것을 듣고 보지 않으면 참된 것이 들리고 보이게 된다.
올바른 침묵 -장유진-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냐고 누군가 물으면 나는 당연히 “예스.”라고 답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야유를 보내곤 한다. 하지만 그런 말끝에 내가 하는 말은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뒷말을 덧붙인다. 가톨릭은 윤회사상을 믿는 것도 아니고, 말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말에 인심 좀 쓰라고 하면서 한바탕 웃는다.
즐겁게 잘 지내던 남편과 근래에 사소한 일로 싸웠다. 우리 부부의 싸움 자세는 침묵이다. 위대한 침묵, 사랑의 침묵 이런 거창하고 좋은 침묵도 많은데 우리 부부는 상대를 무시하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요즘 워낙 경제도 어렵고 귀하게 자란 세대라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다투는 경우가 많다. 우리 부부도 양보할 것은 하지만 대립되는 부분은 침묵으로 타협점을 찾아가는 나쁜 습관이 있다. 먼저 말하면 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계속 버틴다.
부부는 부족한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키워가는 것인데,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는 승부욕과 자존심 싸움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다. 내가 잘났다고 내가 더 편하겠다고 그러는 것이다.
10년 전을 생각해 보면 우리 부부는 많이 성장했다. 아이를 키우고 어른들을 대하면서 쌓인 성숙함은 아마 연애 때의 사랑과는 다를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원한 침묵은 입으로 하는 침묵이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했던 침묵은 마음의 고요,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가 아니었을까. 우리 부부도 맞잡은 손 위에 그분께서 잡아주시는 그 손을 기억해 올바른 침묵을 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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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