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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묵상글 (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 - 훈육과 책망을 기회로 삼는 사람.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4:55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7:03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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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05 04:46
- 훈육과 책망을 기회로 삼는 사람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은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 훈육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히브리서는 ‘내 아들아’로 시작합니다.
이 말이 너무도 따듯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를 모르는 저는,
그리고 아버지 훈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저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아’라는 말을 들어보고 훈육을 받아보는 것이 원이었지요.
저는 그랬는데 모두 그런 것이 아닌가 봅니다.
며칠 전 형제들과 대화하다가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폭력 아버지라도 아버지가 있는 것이 좋은가,
그런 아버지라면 없는 것이 차라리 나을까.
그런 아버지라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 대체적인 생각이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훈육이 아니라 폭력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아니라 원수라고 하는 것이 낫겠지요?
내 인생을 망가뜨리고 근원으로부터 무너뜨리는 존재이니 말입니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이 훈육의 좋은 경험이 없고,
그래서 훈육받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고 고맙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받은 훈육의 좋은 경험이 있을지라도
그리고 나쁜 경험이 없을지라도 훈육은 본래 기꺼운 것이 아니고,
그래서 하느님의 훈육일지라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잘하고 잘 사는 아들에게는 부모가 칭찬하고 격려하지
책망하거나 훈육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머리가 이미 굵어 훈육받을 위치에 있다고 생각지 않고,
훈육을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겸손하지 않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훈육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훈육을 기꺼이 받아들일 정도로 겸손한 사람은
인간적으로도 성인(成人)이고 신앙적으로도 성인(聖人)일 것입니다.
성인(成人)은 훈육이나 책망을 자기 성숙(成熟)의 기회로 삼고,
성인(聖人)은 훈육이나 책망을 자기 성화(聖化)의 기회로 삼으며,
인간의 훈육이나 질책도 하느님의 훈육과 질책으로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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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2.05 06:03
“어제 우리 아들이 제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제 남편은 제가 너무 예뻐서 걱정된대요. 누가 훔쳐 갈까 봐요.”
“아빠가 저에게 믿는다고 했어요. 감동이었어요.”
여러분 가정은 이런 말이 빈번하게 나올 수 있는 곳인가요? 아니면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곳인가요? 사랑한다는 말, 믿는다는 말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까울수록 이런 말이 자주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를 헤아리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가까우니까 나를 잘 이해해 줄 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에게 상처 되는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듣게 되면 어떨 것 같습니까? 예의 없다는 말, 무식하다는 말, 상식에 벗어난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서로 머리카락 잡고 싸울지도 모르겠네요.
상대방이 상처받는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자기 마음대로 하면 속은 시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어떨까요? 여과 없이 하는 말이 화살처럼 직선의 말이 되어 나가게 됩니다. 상대의 마음속을 헤집어서 상처를 입고 계속 아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약간의 사랑만 있어도 쉽게 감동합니다. 그런데 쉽게 아파하는 것도 우리입니다. 그래서 말에 조금 더 신경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말에 과연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 점만 기억한다면 예쁘고 감동적인 말을 하는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직업과 그 가족을 모두 잘 알고 있음도 말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비난과 책망을 하는 고향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명망과 권위를 가진 예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을 보고도 못마땅해하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믿지 않으니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항상 사랑을 담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어지면 당연히 믿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 예수님은 함께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마음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사랑을 담으려는 노력이 먼저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주님을 초대할 수 있고, 주님과 함께하면서 사랑이 충만한 믿음의 관계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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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세상은 고통받는 이들로 넘쳐나지만, 고통을 극복하는 이들 또한 세상에 가득하다(헬렌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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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마르 6,2)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그들은 왜,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하면서,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실상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무지’,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그분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고집할 뿐입니다. 곧 자신들의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자기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문이 아니라 할지라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오히려 ‘자신이 알지 못한 낯선 앎’에 개방되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것은 모르는 것에 대한 믿음이요 받아들임입니다. 그러니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고, ‘완고함’은 불신의 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하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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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
사랑하면 보입니다. 선한 것이 보이고, 부족한 허물을 채워줄 방법이 보입니다. 미워하면 보입니다. 꼬투리 잡을 허물이 보입니다. 문제만이 보입니다. 편견과 불신이 있으면 볼 것을 보지 못합니다.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모든 것 안에서 선한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문제는 많이 지적합니다. 그러나 해결할 방법을 찾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능력을 얻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기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 판단력과 방향 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 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의 직업이 대수롭지 않은 목수라는 것,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자랐다는 것, 즉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는 것,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자기들보다 별로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에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 마음이 비딱하면 밖으로 나오는 것도 비딱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고향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시기 질투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하고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잘못된 선입관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은총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어진 결과물에 매이지 않고 은총을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고집불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이것이 걸어야 할 걸음이다.', '이것이 길이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점을 쳐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했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바꾸지 않는 것, 내 마음대로, 닫힌 내 마음으로 내가 들은 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고집은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죄! '아버지, 어떤 것이 길입니까?' 성령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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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콜로라도엘 다녀왔습니다.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신부님과 인연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지난 1월 12일에 제가 덴버를 찾았습니다. 마침 1월 14일은 신부님의 서품 23년이 되는 날이어서 더 뜻깊었습니다. 신부님은 덴버의 좋은 곳을 안내 해 주었습니다. 온천엘 다녀왔고, 신들의 정원(Garden of the gods)에 다녀왔습니다. 온천은 그 자체로도 좋았지만, 왕복 6시간 동안 신부님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신부님은 ‘콜로라도’의 뜻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콜로라도의 뜻은 스페인 말로 ‘색이 붉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콜로라도의 바위는 붉은색이 많았습니다. 신들의 정원의 이름의 유래도 들었습니다. 그 지역을 발견한 사람이 처음에는 ‘맥주의 정원(Beer Garden)’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사람의 이름이 주피터와 주노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그곳의 이름을 ‘신들의 정원(Garden of the gods)’로 정했다고 합니다. 이름이 참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콜로라도는 물이 좋아서 맥주가 맛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맥주의 정원이라고 했다면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술’이 생각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들의 정원이라고 했기에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세례명을 생각합니다. 형들과 동생은 생일에 맞추어서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큰형은 9월에 맞추어서 미카엘, 작은형은 12월에 맞추어서 사도 요한, 동생은 10월에 맞추어서 프란체스카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5월인데 가브리엘로 정했습니다. 5월이면, 마티아로 해도 좋았을 텐데 부모님은 가브리엘로 정하였습니다. 저는 왜 그렇게 정하였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저의 세례명 가브리엘이 좋습니다. 가브리엘이 천사라서 좋았고,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해서 좋았습니다. 가브리엘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면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어서 좋았습니다. 사제가 되어서 말씀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뜻을 전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저의 세례명과 제가 하는 직무가 비슷해서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나약하기에 물속에 빠지기도 했고,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처럼 베드로는 굳건한 반석이 되었습니다.
서울대교구 부제, 사제 서품식이 있습니다. 멀리 있지만 새 부제와 새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34년 사제 생활을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이끌어 주셨고, 교우분들은 저를 이해해 주셨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하고 싶었고, 사제라면 당연히 해야 할 직무를 새 사제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의 아픈 곳을 정확히 진단해야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시대의 징표는 사색, 독서, 경청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꾸준한 독서가 필요합니다. 사제는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교회의 서적, 가르침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은 강론을 통해서 선포되기에 강론 준비를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우리와 함께하셨고, 말씀이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사제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여유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기도는 꾸준히 해야 합니다. 기도는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사제는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셨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행동하는 사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많은 기적을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우분들이 마음을 열어도 시대의 징표를 모르는 사제가 있다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제가 있다면, 기도에 게으른 사제가 있다면, 행동하지 않는 사제가 있다면 복음의 꽃은 피기 어려울 것입니다. 새 자세들이 가는 새로운 임지에서 복음의 꽃이 활짝 피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서 성령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만나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제와 교우가 만나서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꽃피고, 희망이 열매 맺으면 좋겠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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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놀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무엇에 놀라셨다고 했지요? 복음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불공평하십니다. 주님은 저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만을 위해 세상을 창조 하셨고, 저만을 위해 오늘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공식은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베드로 형제님만을 사랑하시고 바오로 형제님만을 사랑하십니다. 데레사 자매님만을 사랑하시고 마리아 자매님만을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사랑에 목숨 걸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는 놀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믿음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풍랑 속에서 믿음을 잃어버린 제자들처럼 우리도 세상의 풍파 속에서 믿음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앞길이 깜깜하고 곧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오면 쉽게 미신에 빠져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점도 보고 다른 종교의 신에게 소원을 비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주소가 어디인지 말입니다. 어디까지 와 있는지 말입니다. 어제 잠자리에 들어 오늘 아침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신 주님께 저 또한 많은 것을 봉헌하려 노력합니다. 봉헌 한다는 말은 물적인 것만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 또한 봉헌의 일부입니다. 마음속에서 믿음이 솟아오르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봉헌하게 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앙의 모범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입니다. 온전히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봉헌하는 신앙 말입니다. 주님도 하느님을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십원짜리 탑
어느날 운전을 하며 공단 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런 회사도 있구나….
아는 이름의 회사들에 신기해하며 차에서 잠깐 내려
그 근처를 잠깐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회사 마당에이르렀습니다.
마당 한 구석에는 십원짜리 동전이 들어있는 탑이 서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한 직원이 서 있었던 것 같고요.
그 직원분은 탑을 보며 무엇을 바라고 있었을까요?
무슨 마음을 그 탑 위에 올렸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음을 모았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러니까요.
이곳에 오셔서 십자가 앞에 서 계신 분들도 같은 기도를 올린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 마음은 같습니다.
사랑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는 마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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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의 치유
"회개의 수행이 답이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시편103,1)
인간에게 근본적인 마음의 병은 무지입니다. 무지의 치유에는 평생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지로부터 벗어나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참나의 발견과 더불어 점점 자유로운 삶이겠습니다. 새삼 자기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평생 회개의 수행이 필수입니다.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모두 회개를 통한 참나의 수행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책은 얼마나 읽었는가보다, 어떻게 읽었는지가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는 독서는 씹기만 할 뿐 삼키지 못함과 같다.”<다산>
“마음은 생각한다. 생각하면 얻지만, 생각이 없으면 얻지 못한다.”<대학>
‘생각한다’함은 자기를 성찰하는 회개와 직결됩니다. 시류에 휩쓸려 ‘생각없이’, ‘영혼없이’ 자기를 잃고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생각없이 말할 수 있지만 생각없이 글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글쓰기를 추천하는 이유입니다.
얼마전 각별한 두편의 기사를 잊지 못합니다. 하나는 장욱진(1918-1990) 서양화가이며, 또 하나는 배우계 두 거장인 80대 노장의 영원한 현역 박근형과 손숙에 관한 기사입니다. 어느 분야든 치열하게 사는 이들은 말그대로 무지에서 많이 자유로워진 구도자이자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 속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양주로 가세요. 어린 아이 그림 같지만, 세상을 관조하게 만드는 화가 장욱진, 그의 미술관에 가보세요. 피카소는 “라파엘처럼 그리는 데는 4년이면 족했지만, 어린 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조각가 최종태의 장욱진에 대한 평도 참 예리하고 적확합니다.
“칼날같은 예리함과 조금도 용서될 수 없는 준엄함이 있지만 겉으로는 아이들도 그릴 수 있다 할만큼 평이한 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최소한의 획으로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작가다. 그러니 단순해 보이는 그의 획은 오랜 시간이 만들어 낸 결과물로 결코 단순하지 않다.”
연극가 손숙이 같은 80대 거장의 노배우 박근형에 대한 평입니다.
“작품을 너무 열심히 하더라. 무대에서 박 선생님 눈빛만 봐도 설레고 짠하다. 그런 배우 만나기 쉽지 않다.”
박근형 자신의 고백입니다.
“세월이 얼마 안남았다. 그래서 저는 마음이 너무 급하다. 보여주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다. 매순간 치열하게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실제 연습에 들어가면 대본을 2-3백번 읽는다.”
영원한 현역의 두 노배우는 모두 요즘 연기를 하는게 가장 행복하고 유일한 삶의 낙이라고 고백합니다. 박근형은
“젊었을 때는 욕망과 욕구를 위해 달리니까 정신 없던 시절인데, 나이 먹어서는 남들이 나를 불러주는 것 잊지 않고 나를 배려해주는 것을 나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말했고, 손숙 여기 공감하며,
“그러려면 잘 늙고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은 진짜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살다가 깨끗하게 가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전합니다.
참된 회개와 자기를 아는 겸손은 함께 갑니다. 한평생 치열한 삶을 살았던 대가들의 공통점도 자기를 아는 겸손일 것입니다. 참되 구도와 수행의 열매가 무지에서 자유로워진 겸손입니다. 오늘은 성녀 아가카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산 햇수와 관계없이 참삶의 좌표가 되고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성인들입니다.
교회전승에 따르면 성녀 아가타는 시칠리아 섬의 카타니아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할 결심을 하고 스스로 정결서원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어로 ‘선(善)’ 또는 ‘좋음’을 뜻하는 아가토스에서 유래한 이름만큼이나 착하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미모에 반한 그 지방 총독 퀸티아누스가 그녀에게 청혼합니다. 당시는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한창일 무렵입니다. 성녀 아가타는 끝까지 거절하자 총독은 온갖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으나 성녀는 어떤 고통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은 순교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성녀 아가타를 공경하는 신심은 일찍부터 시칠리아 섬 전역으로 퍼졌고 성녀는 시칠리아 섬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성녀 축일에는 빵을 축복하는 관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성녀는 처녀, 양치는 여자, 종만드는 사람, 유리제조공, 광부, 알프스 동반 안내자, 유방 관련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 간호사들의 수호성인도 되고 불과 날씨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얼마나 후대에 사랑을 받으며 회개의 표징이 됐던 사랑스런 성녀 아가타인지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여전히 아마도 인류가 지속되는 한 계속될 마음의 병이 바로 무지일 것입니다. 불가의 탐진치(貪瞋癡;욕심,성냄,어리석음), 삼독(三毒)도 무지의 병에서 기인합니다. 바로 무지의 병, 치유에는 회개뿐이 약이 없습니다. 예수님 고향 나자렛 사람들 역시 무지하기론 예외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지만 곧 편견과 섭인견, 고정관념의 무지에 사로잡힙니다. 질투심과 더불어 예수님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바로 인간 무지의 보편적 현상을 대하는 듯 합니다. 예수님의 결론 말씀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바로 이런 보편적 깨달음이 현실적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고, 이들의 믿지 않음에 놀라셨다 합니다. 처음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던 고향사람들과 이들의 불신에 놀라는 예수님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좌절하기 보다는, 인간의 보편적 현실인 무지의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와 겸손의 계기로 삼아 더욱 분발하셨을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와 더불어 주님께서 주시는 훈육입니다. 이 모든 유혹의 시련을 훈육의 계기, 배움의 계기로 삼아 회개의 훈련에 충실함으로 영혼의 근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좋은 덕목의 선택-훈련-습관의 도식입니다. 히브리서의 충고가 참으로 적절합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만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니 맥풀린 손과 힘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가장 확실한 처방은 끊임없는 회개와 겸손의 훈련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평생 전사답게 영원한 영적 훈련병으로, 참으로 거룩한 평화의 전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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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알아갑니다>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
내 밖에 당신이 있습니다
내 밖의 당신은
내 안의 당신을
고스란히 품고 있되
늘 한없이 너머 있습니다
내 안의 당신은
내 밖의 당신을
늘 아주 조금밖에는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당신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내 밖의 당신은
마치 당신이 아닌 듯
내게 낯설게 다가옵니다
모르는 내 밖의 당신은
당신이 아니요
아는 내 안의 당신만이
오로지 당신이라며
당신 담은 나를 닫으면
내 밖의 당신을
오롯이 담아야만
비로소 있을 수 있는
내 안의 당신마저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있습니다
내가 없어도
당신이 있습니다
내 밖에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이 있습니다
내 밖에 당신이 있습니다
내가 있으니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이 있습니다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이 있는 내 안에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밖의 당신을 모십니다
나는 당신을
늘 그렇게 조금씩
몰랐었지만 알아갑니다
나는 당신이 아니기에
당신을 송두리째 알 수 없지만
나는 당신이 아님에도
당신을 늘 그렇게 알아갑니다
마침내 내가 당신이 되면
참으로 당신을 알 수 있으리니
열린 마음으로 느린 걸음으로나마
당신을 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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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마르 6,5)
하느님의 힘과 우리 믿음의 구별
쇠와 자석, 기름과 불처럼 서로 끌어당기는 본성적인 힘이 자연에 존재하듯, 믿음도 하느님의 힘에 이끌립니다. 그런 까닭에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마태 17,20)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서도 작용하는 하느님의 빼어난 힘을 드러내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총은 당신을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더 힘차게 작용한다는 사실도 그들은 부인하지 않았습니디. 그래서 마태오는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말하지 않고,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 3 ,58)라고만 한 것 같습니다. 마르코도 “그곳에서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라고만 하지 않고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신다”(마르 6,5)는 사실도 아울러 밝힙니다. 그분의 힘은 그들의 불신조차 이겨 내셨다는 뜻입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하지만 이렇게 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금욕적인 수련 방법, 참회의 방법, 외적인 수련 방법으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기적인 자아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버리는 법을 익힘으로써만 무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무로 들어갈 수 있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어느 정도 닮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사람이 하느님처럼 되고자 한다면, 버림으로써만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버림으로써 무와 접촉할 수 있다. 하느님 이외의 어떠한 것도 버림 속에 담길 수 없다. 그만큼 버림은 무와 가깝다. 카푸토는 이렇게 말한다: “버림이 겨냥하는 것은 무다. 엑카르트가 말한 대로 ‘버림은 순수한 무를 목표로 삼는다.’” 버림이야말로 덕을 뒷받침하는 덕, 순수함을 뒷받침하는 순수함이다. ‘버림은 모든 덕 가운데 가장 뛰어난 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을 정화하고. 양심을 깨끗하게 씻어 주고, 마음을 불태우고, 영을 깨우고, 소망에 생기를 주고, 하느님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지와 앎과 소유를 철저히 버림으로써 하느님을 안으로 모셔 들일 수 있다. “모든 피조물을 여의면 하느님으로 충만해지고. 피조물로 가득 차면 하느님이 없어진다.” 버리는 법을 익힌 사람은 살면서 어떠한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 그에게는 삶 자체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다. 다만 이유 없이 사는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든 진리를 위해서든 하느님을 위해서든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살아야 한다.(327)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1절: “아비뇽 유배”와 서구 대이교
서구 대이교:
이교는 그레고리오 11세(1370∼1378)의 사망 후 일어났다. 그레고리오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1380)와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로마에서 +1373)의 쓰라린 예언적인 위협으로 감동되고 또한 교황령에서 지배적이었던 혼란한 상태를 계기로 1377년에 로마로 귀환하였다. 그는 실망하여 1378년에 다시 로마를 떠나려 하였으나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교황 선거법에 따라 콘클라베가 7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영도(永都)에서 실시되었다.
16명의 추기경 중 11명이 프랑스인이었으므로, 추기경들이 다시 프랑스인 교황을 선출할 것을 로마인들이 두려워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그틀은 바티칸에 있는 교황 선거인들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선거 전날 무장한 무리들이 콘클라베 장소에 침입하여 심한 협박으로 로마인이 선출되도록 요구하였다. 선거 당일에도 이러한 광경이 되풀이되었다. 추기경들에게는 그들이 콘클라베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려면 그들의 요구에 따라야 할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1378년 4월 8일에 로마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탈리아인을, 즉 바리의 대주교를 교황으로 선출하였고, 그는 자신을 우르바노 6세로 불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도망치듯 로마를 떠나버렸다.
추기경들은 우르바노의 대관식올 위하여 4월 18일 확실히 로마로 돌아왔고, 또한 교황에게 충성의 선서를 하였다. 그러나 3개월 후 11명의 프랑스인과 오직 한 사람뿐인 스페인 사람인 - 그는 루나의 베드로로서 후에 아비용 교황 베네닥토 13세(1394∼1417)가 되었다 - 우르바노 6세의 궁전을 다시 떠나, 그 선거가 강요된 것이고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그들은 1378년 9월 20일 폰디에서 프랑스인을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는데, 그는 자신을 클레멘스 7세 (1378∼1394)로 명명하고 아비뇽에 자신의 거처룰 정하였다. 세 명의 이탈리아인 추기경들도 - 그 사이 네번째 추기경은 사망하였다 - 우르바노와 관계를 끊고 클레멘스 편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교회는 이제 두 명의 교황을 가지게 되었다.(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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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예수님께서는 왜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셔야만 하셨는가를 진지하게 묵상해 봅시다.
강만연 [fisherpeter] 250205. 02:40 ㅣNo.179828
제가 일반 지인인 신자분들에게 자주 언급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말씀이 없고 다 중요한 말씀이긴 하지만 그래도 좀 더 잘 와 닿고 공감이 잘 되는 말씀이 있다면 제가 가장 첫째로 꼽는 말씀이 나오는 복음 대목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를 한번 묵상해보며 우리 자신을 들여다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제대로 정직하게 가슴에 손을 올리고 성찰을 하게 된다면 뜨끔할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수요일 복음만 놓고 봤을 때 예수님의 감정변화와 고향 사람들의 감정변화부터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먼저 놀라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도 이유이지만 그 동기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준 가르침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가장 주가 된 게 아마 성경의 내용일 것입니다. 또 성경의 내용을 가르치시려고 하시다 보니 그 당시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아주 질적으로 떨어지는 수준이기 때문에 누구나 알기 쉽게 그들이 사는 주변 환경과 같은 것을 가지고 비유를 통해서 설명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한 지식도 지식이지만 그런 비유는 이 상황에서는 그들이 보기엔 그저 단순한 자연현상이거나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단순하게 보이지만 그게 그 비유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아주 적절한 예시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 눈엔 솔직히 평가를 하자면 대단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그들 자신의 입으로 자인하고 있습니다. 바로 “저런 지혜는 어디서 받았을까?” 하는 대목입니다. 인정은 하긴 하지만 그들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봤을 때 오늘날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야기한다면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 신학대를 나오고 해서 신학적인 내용과 성경을 말한다면 당연히 그 설명에 따르는 말의 권위를 인정해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봤을 때 뭐 제대로 학교도 나오지 않고 단순히 목수라는 기능공으로 성장을 했기 때문에 어디 집을 지을 때 기둥은 어떤 재료와 또 나무를 깎을 때 대패질은 벽면에 세우는 나무와 기둥을 지지하는 나무는 각각 달리 대패질을 해야 한다는 둥 그와 같은 전문적인 노하우 같은 것만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셨다면 과연 그 사람들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표현과 같은 감정적인 표현을 드러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목공 기술에 대해 찬사를 보냈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준 이유가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아실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성장배경을 이미 봐왔고 또한 형제간의 관계까지도 알 정도이면 예수님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고 있는데 그들이 봤을 때는 그나마 그냥 보통의 일반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지식 정도의 수준이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인정을 백번 양보해 할 수 있겠는데 그들이 봤을 땐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런 놀라운 지식이 나오며 다른 복음에서는 말씀에 권위까지 묻어난다고 하니 세상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많이 알고 계신 지식 때문에 아니꼽다는 그런 기분이 들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틀린 설명을 한다면 부정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들이 반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말씀을 하시니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3절 끝에를 보면 마르코복음사가는 이런 사실을 그들의 내면심리를 잘 묘사했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기술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그와 같은 상황에서 말로 표현을 하셨는지 안 하셨는지는 복음의 내용만 가지고 판단했을 때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들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니 예언자는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던 것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전적으로 같은 내용은 아니지만 현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적이 있었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잠시 판사로 재직하셨다가 얼마 안 하시고 변호사로 전향을 하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시기 전이나 후나 여전히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게 바로 ‘학벌’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면 ‘가방끈 콤플렉스’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고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노 전 대통령께서 서울법대를 나왔다고 한다면 무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평검사들과의 대화를 하는 프로에서 어떤 검사는 완전 노골적으로 이 문제를 간접적으로 언급을 해 망신을 주려는 의도까지 있다는 게 방송을 통해서도 알져진 사실입니다. 바로 그당시 검사와 같은 게 2000년 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로 고향 사람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근데 그 검사는 사법고시 패스해 법조인이 되고 또 노무현 대통령보다는 더 좋은 학벌로 사법고시를 패스했는지는 모르지만 물론 그 조건은 낫다고 해도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보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와 같은 발언을 한다는 게 더 창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패스할 때 뽑는 인원하고 노 대통령이 사법고시 패스할 때 뽑은 수에서도 이미 상대적으로도 노 대통령의 실력이 월등함을 알 수 있고 또한 이 사실 외에도 그들은 이미 법대를 나와 법을 전공한 사람의 입장에서 시험에 응시를 한 것이고 노 대통령께서는 순수히 그것도 독학으로 공부를 해서 그와 같은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한다면 그냥 단순히 합격했다는 그 사실 하나로 동등한 레벨로 인정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이미 출발조건에서부터 균등한 기회의 조건으로 경쟁한 것이 아니였기 때문에 더더욱 노 대통령님을 자기들보다도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게 보통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생각일 겁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상대적으로 남의 다른 조건을 빌미로 해서 남의 우월한 점을 깎아내려 상대적으로 낮게 된 자신의 위치를 높이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했던 것입니다. 솔직히 표현하면 인간적으로 비루하고 졸렬한 모습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단순히 그때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이와 같은 대접을 받으셨다는 그런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마치 역사를 배울 때 단순히 그 역사적인 사실이 일어났다는 그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사실이 역사적으로 가지는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런 것을 통해서 바로 우리의 신앙에 접목을 시켜 묵상하고 거기서 중요한 교훈을 배우고 또 우리 내면을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건 우리도 그 당시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의 모습을 실제 눈에 보이는 능력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그들 내면에 있는 보이지 않은 열등감이나 또한 예수님과 비교했을 때 가지게 되는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듯이 우리도 한 신앙 공동체에서 그와 같은 모습이 우리 내면에는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지 묵상을 하며 그와 같은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냉정하게 성찰해 그런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지 못하게끔 자신의 신앙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신앙 공동체에도 해악을 끼칠 수 있는 독버섯과 같은 걸 과감히 없애려고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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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제 십자가 지고 유혹 물리친 삶을 /
박윤식 [big-llight] 250204. 18:16 ㅣNo.179822
교회 전승에 따르면 성녀 아가타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신심이 깊었기에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과 동정을 지키겠다는 정결 서원을 하고는 청혼을 다 거절했다. 그런데 착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미모에 반한 그 지방 집정관이 청혼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는 데키우스 황제(249~251년)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한창일 때였다. 청혼을 거절당한 그는 아가타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박해를 이용해 그녀를 소유하려는 계략을 세워 체포하였다. 그러나 성녀는 주님께 모두 맡기는 기도를 바치며 그를 끝내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믿음과 의지를 꺾기 위해 그녀를 사창가로 보내기도 했지만 그 어떤 유혹도 그녀의 굳은 믿음과 몸을 해치지는 못했다. 아가타는 다시 심문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아, 이에 격분한 집정관은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성녀는 당당하게 “내 몸을 이렇게 고문하고도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당신은 여인인 어머니의 젖을 빨지 않았던가요? 당신이 내 육체는 도려낼지라도 내 영혼을 도려낼 수 없을 것이오.” 하고 말했다. 그는 그녀를 감옥에 가두고는 어떠한 치료약이나 음식도 제공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감옥에서 아가타는 환시 중에 하느님께서 보낸 베드로 성인을 보았고, 그는 천사와 함께 나타나 그녀의 상처를 완전히 치료했다. 이에 그녀가 나은 것을 본 집정관은 결국 그녀가 죽을 때까지 석탄불에다 구워 죽였다고 한다. 성녀는 “주님, 저의 창조주시여, 당신은 제가 어릴 때부터 저를 언제나 보호해 주셨나이다. 당신은 세상의 사랑으로부터 저를 택하시고 고통을 견딜 인내를 주셨습니다. 제 영혼 받으소서.” 라는 마지막 기도를 바친 뒤 숨을 거두었다.
아가타가 순교한 뒤에 그녀를 성인으로 공경하는 관습이 확산하여 시칠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전승은 2월 5일에 그녀가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아가타를 기억하는 7명의 성녀 중 한 명으로 수록해 공경 받게 하였다. 성녀는 출생지이자 순교지인 시칠리아섬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아가타는 그리스어로 ‘선(善)’ 또는 ‘좋음’을 뜻하는 ‘아가토스’(Agathos)에서 유래한 이름만큼이나 착하고 아름다워, 성녀는 양치는 여자, 종 만드는 이, 알프스 등반 안내자, 간호사들의 수호자, 불과 날씨의 수호인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이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그분께서 저마다 안기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가르침인 겸손과 순명의 삶을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아가타 성녀도 순결과 동정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을 따랐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서는 일찍이 박해와 싸워 이긴 복된 아가타의 삶을 오늘을 사는 우리도 본받자. 하느님께서는 성인들 가운데 복된 아가타에게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함께 씌워 주셨다. 우리도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을 지내면서, 유혹을 이겨 내고 천상 영광에 이르게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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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놀라다’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한 놀라움은 그 놀라움의 이유가 되시는 분에 대한 찬미로 이어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뒤틀린 감정을 가집니다.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은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경험과 스스로 안다고 믿는 생각의 틀입니다.
삼십여 년 동안 한동네에서 살아온 사람을 겉으로만 아는 얄팍한 이해의 한계로, 또 목수는, 마리아의 아들은, 야고보와 유다의 형제는 그렇게 훌륭한 가르침과 기적의 능력을 지닐 수 없다고 믿는 편견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자주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일상 안에서 비범하고 초자연적인 것, 곧 은총을 주십니다.
아픔이 낫기를 바라는 사람의 믿음은 치유자의 능력을 활발히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마르 6,5)라는 말은, 치유가 일방적으로나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쌍방의 상호 작용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앓는 사람을 ‘모두’ 고쳐 주신 예수님의 보편적 능력이 고향에서는 “몇몇 병자”(6,5)에게 한정됩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라는 말씀과 달리 그들에게는 믿지 않는 대로 되었습니다.
익숙한 것을 하느님 안에서 새롭게 보는 능력,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대상을 지금 이 순간 보이는 대로 새롭게 바라보는 능력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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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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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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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 4)
이 아침
울려퍼지는
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날씨가
매우 춥습니다.
이 매서운
추위에
떠시며
힘들어하는
가난한
이웃들을
기억합니다.
고향의 의미도
바뀌게 됩니다.
매순간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하느님이십니다.
인정받고
환영받는
고향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내야 할
고향입니다.
새로운 삶의
탄생은
환영받는
안일함과
인정받는
자기만족이
아닌
자기를 돌아보는
성찰로 정신의
탄생이 됩니다.
새로운 고향이며
새로운 정신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마음으로부터의
성장이 중요합니다.
매 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시시각각
일어나는
마음을
영원한
고향이신
하느님께
바칩니다.
진정한 복음은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 길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보답입니다.
소유할 수 있는
고향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고향이 되어야
합니다.
환영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내려놓으니
사람이 되고
복음이 됩니다.
복음이 바라는
삶의 자세는
자기반성이며
하느님을 향한
확신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아픔이
약이 됩니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소중한 복음이
우리의 삶에서도
시작되었습니다.
소중한 복음은
너도 나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정신을 치유하는
복음이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가장 귀한
복음이
제 삶의 자리를
울립니다.
가야할 길을
가는
예언자의
뒷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복음의
새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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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제가 당신 불멸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소서!
오늘 축일은 맞이하시는 아가타 동정 순교자는 체칠리아, 루치아, 아녜스 성녀와 더불어 로마 교회의 네 동정 순교자로 널리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아가타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시절, 이탈리아의 최남단 시칠리아 섬 카타니아 지방 명망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다방면에 출중했던 그녀는 당시 총독의 눈에 띄게 됩니다.
아가타에게 완전히 빠져 제 정신을 못 차리게 된 총독은 그녀가 싫다는 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청혼을 거듭합니다.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청혼을 거부하자 심기가 완전히 불편해진 총독은 그녀가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알고 법정으로 넘깁니다.
재판정에서 아가타는 갖은 잔혹한 형벌을 다 받지만 꿋꿋하게 견뎌냅니다.
한 차례 끔찍한 고문을 잘 견뎌낸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다시 옥으로 돌아갈 때마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만면에 희색을 띤 채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으며, 고문으로 인한 처절한 고통을 기도로써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통을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다음날 다시 재판정으로 끌려 나온 아가타의 태도는 더욱 의연했었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형리들은 빨갛게 달군 쇠로 그녀의 가슴을 도려냈지만 그 끔찍한 고통 중에서도 그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정결에 대한 사랑으로 이와 같은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제 구세주 하느님, 이 고통을 잘 참아 이기도록 도와주소서.”
다시 감방으로 돌아온 다음 날 베드로 사도가 치료 약을 가지고 나타나자 아가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님! 저는 세상의 약으로 제 육신을 고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아가타의 의연한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총독은 날카로운 유리 파편과 불타고 있는 석탄 위에 아가타를 뒹굴게 했다고 합니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 숨을 거두어가던 그녀는 이윽고 마지막 순간이 오자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착한 스승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제가 박해자의 고통을 이기게 하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주님, 제가 당신 불멸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소서.”
오직 주님과 온전히 일치해 있었던 아가타였기에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고통에도 좌지우지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두려운 것 오직 한 가지는 주님과 멀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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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1-6: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는데 다섯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2-3절).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사이에 목수로 통했다. 그리고 한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누구의 아들인지도 알고 있다. 관례에 따르면 “요셉의 아들”(마태 13,55 참조)이어야 하는데 “마리아의 아들”(3절)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수님은 당신 고향인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신다. 예수께서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척한 예언자들과 당신을 비교하시면서(4절) 당신 자신도 결국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5절) 나자렛에서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6절 참조). 치유되기 위해서는 환자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치유하는 분에게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기적이란 신앙이 있거나 적어도 믿으려고 하는 자세가 되어있을 때,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였다. 신앙이라는 배경이 없으면 기적이란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의 혜택도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고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나, 내적인데 볼 줄도 모르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외적인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멋대로 판단하는 것이 문제이다. 외모로만 판단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잘못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다. 좀 더 이웃의 장점을, 내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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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를 안다.”라는 말은 “너를 무시해.”라는 뜻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방식은 ‘안다’라는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유년기와 가족 등을 다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안다고 말할 때 이미 모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하고 그 고을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다라는 말은 “더는 믿고 희망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는 것을 믿고 희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면 그 누군가를 창조했다는 뜻입니다.
스마트폰을 아는 것은 다른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 스마트폰을 만든 당사자뿐입니다.
스마트폰끼리 서로 상대를 안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개와 고양이가 서로 상대를 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을 보는 인간으로선 얼마나 웃길까요?
우리는 결코 남을 안다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 교만이 그 사람을 가두고 그 사람과의 더 친밀관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전에 말씀드린 예화지만 이 내용과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기에 한 번 더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락 토마스(Rock Thomas)는 캐나다 농촌에 살던 촌뜨기 꼬맹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 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사실, 이 정체성은 자신이 규정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토마스의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돈만 가져다 쓰는 아이를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14살 때 놀자고 말하는 토마스를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느냐며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이후 토마스가 노동으로 돈을 벌어 열일곱 살이 되니 독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성공의 척도는 돈이었고 돈을 버는 이유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도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는 입원비도, 세금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모아놓은 돈으로 병원비와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는 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런 돈을 줄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 토마스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에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혼자 야근을 하던 중 지배인이 그를 보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정말 성실한 친구네. 이렇게 열심히 일해주어서 고맙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배인은 약간 당황하면서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자네 좋아하는 사람 있는가?”
“예? 아, 예. 한 명 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요.”
“그렇군, 혹시 존경하는 이유가 있나?”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래? 그렇다면 임무를 주겠네.
오늘부터 길을 걷거나, 일하거나, 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라는 말을 500번 반복하게.”
정말 500번이냐고 놀라며 되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인간의 뇌는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끝없이 반복해서 상기시킨다면 자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되고픈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를 길들인다는 거야.”
한 번도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습니다.
가슴이 북받쳐 눈물이 났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는 지역 최고의 부동산 중개인이자 비즈니스맨이 되었습니다.
목표를 이룬 지금은 ‘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을 쉼 없이 반복하며 또 한 번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출처: ‘당신의 인생을 180도 뒤집는 방법’, 체인지 그라운드, 유튜브]
락 토마스에게 “난 널 알아.”라고 말하는 아버지와, “넌 뭐든지 될 수 있어.”라고 말하던
직장 상사 중 누가 토마스를 진정으로 안 사람일까요?
토마스를 안다고 규정하지 않은 직장 상사입니다.
안다고 할 때 모르는 것이고, 모른다고 할 때 아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우주에 관한 책을 본 기억이 납니다.
아주 어렸을 때라 광활한 우주의 흑백 사진만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우주의 끝이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답은 “모르겠다.”였습니다.
우주도 하나의 물체인데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한 사람이 우주보다 더 신비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주도 모르는데 한 인간을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안다고 할 때 그 사람에 대한 더 이상의 믿음이나 희망, 더 나아가 사랑이 커질 수 없습니다.
믿음과 희망, 사랑은 그 사람을 마치 새장에서 밖으로 새를 풀어놓는 것처럼 내가 그 사람을 규정하지 않을 때 훨훨 날아가 더 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에 백종원 씨하면 떠오르는 것이 ‘설탕’이었고, 음식이 맵고 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선입관이 있는 사람들은 골목 식당에서 그의 레시피와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다시 손님이 떨어지고 장사가 안되며 그 탓을 백종원 씨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백종원 씨는 남이 자신을 안다고 할 때 거기에 갇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규정하는 사람만 피해를 봅니다.
절대 내가 인간을 안다고 규정하여 그 인간을 안 하느님까지 안다고 규정하는 교만의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다 하느님까지도 내가 만들어낸 한계에 가둬버릴 수 있습니다.
또 남이 나를 안다고 말할 때 그 말에 갇히지 맙시다.
“당신이 나를 만들었습니까?”라고 반문하십시오.
나를 아시는 분은 나를 만드신 하느님뿐입니다.
나를 안다고 나를 규정하는 사람을 벗어나야 하늘 높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존재입니다.
사람을 모른다고 할 때 그 사람을 만든 하느님도 모르게 됩니다.
그래야 그분을 믿고 희망할 수 있게 되며 그래야 사랑이 증가합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그는 자신도 자리에 멈춰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남도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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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평범하든 특별하든,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1-6).”
1) 나자렛 사람들이 한 말은,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메시아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목수’ 라는 직업과 가난한 집안이라는 것 때문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집안을 그 전부터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이 ‘지혜의 말씀’이라는 것을, 즉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들었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보긴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은총과 ‘기적’은, 평범한 사람을 통해서는
오지 않는다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은, 그들이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기적’을 ‘기적’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알아듣고 알아본다고 해서 꼭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잘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자처하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거부하는가?”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신 것은 존경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는데, 구원받기를 거부하면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존경’이라는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말씀’의 은총과 ‘기적’을 ‘무시’했음을 암시합니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라는 말은,
“기적을 일으킬 기회가 없었다.” 라는 뜻입니다.
몇몇 병자 외에는 청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즉 사람들이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치유의 은총을 주시려고 해도 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라는 말은,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2)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한 말에 연결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메시아께서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말은, 메시아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신비스러운 존재라는 고정관념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라는 말은,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라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는 예수에게는 신비감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내가 나자렛의 목수라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지만, 그것은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라는 말씀은,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모르고 있다.”, 즉 “너희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모르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참된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고 믿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3) 메시아는 신비스럽게 오시는 존재라는 생각도, 반대로 평범한 사람으로 오신다는 생각도, 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모두 다 잘못된 고정관념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마음대로 판단할 수 없고, 마음대로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집안의 아기로 태어나셨지만, 끝까지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모습만 유지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도 보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모습도 보았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특별하고 신비스러운 모습이든지 평범한 모습이든지 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믿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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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6,1-6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습니다. 한 쪽 손을 아무리 세게 휘둘려봐야 반대쪽 손이 그에 응해서 마주쳐주지 않으면 박수 소리는 나지 않지요. 주님께서 우리 삶에 일으키시는 기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이유가 단순히 당신의 권능과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면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 없겠지만, 그분의 기적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표징이기에 우리의 응답이 필수적인 요소인 겁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여러가지 방식들을 통해 주고 또 받으며 성숙되고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속 나자렛 마을 사람들에게서는 그럴 의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여러가지 기적과 표징들로 구원으로 이끄는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고 나서, 설레임 반 기쁨 반으로 고향마을을 방문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당신 생애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던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구원받는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거라 생각하셨겠지요.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내미신 손에 자기들 손을 마주대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단편적인 정보들만을 가지고 그분에 대해 다 안다고 착각하고는,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겁니다. 게다가 같은 동네에 살던 ‘별 볼 일 없던’ 젊은이가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갖게 된 것을 질투하기에 이르지요.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았다면 구원받을 기회를 얻었을텐데, 시기 질투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아 오히려 죄 지을 이유를 만들어버린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사로잡히면 상대방이 지닌 진면목을 알아보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건 주님을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지요. 내가 주님과 그분 뜻을 안다고 여기는 교만이 그분에 대한 오해를 만들고, ‘주님이라면 이래야한다’고 그분께 강요하는 아집과 독선이 내 마음 속에 왜곡된 ‘하느님 상’, 즉 ‘우상’을 만들게 됩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는 건 신앙생활이 아니라 ‘우상숭배’가 되어버리지요. 내가 만든 우상의 하느님을 믿느라 정작 참 하느님을 외면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우상에서 벗어나 주님의 참된 모습을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께로 나아감으로써 그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이지, 하느님을 나의 비좁은 생각 안으로 억지로 밀어넣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주님의 모습과 뜻이 내가 알던 모습과, 기대하던 바와 다르더라도 기꺼이 내 안에 받아들이고 따라야 합니다. 의사의 능력에 환자의 신뢰가 더해져야 치료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주님의 능력에 나의 믿음과 순명이 더해져야 내 삶에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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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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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내하는 거룩한 인생 순례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업적을 보고 매우 놀라면서도 의문을 제기하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고향사람들과 친척들은 장인으로 통했던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기 어려웠음을 말해주지만 결국 그들은 불신 때문에 걸려 넘어졌다(6,3). 거져 굴러들어온 복덩어리를 발로 걷어 차버린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이 무디고 믿음이 없는 그들을 보시고 ‘놀라셨다’(6,6). 그러나 그들을 꾸짖거나 그런 그들의 모습에 대하여 분노하시지 않고 사랑으로 견뎌내시며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6,6) 예수님께서는 인내로써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거룩한 순례의 모범을 통해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고자 하신다.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12,14) 인내는 거룩함의 속성이요 순례자의 중요한 삶의 태도이다. 인내(ὑπομονἠ)는 성서적으로 하나의 종말론적인 태도로서 견고히 섬, 기대나 기다림을 뜻한다. 인내는 하느님을 향해 고대하고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2테살 3,5).
이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균형을 이루는 그리스도께 대한 한결같은 고대를 뜻한다. 묵시록에서도 인내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 고난과 박해를 참는 것으로 본다. 또한 인내란 세상을 향하여 굳건히 견디는 것을 뜻한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인내는 믿음과 소망에서 나오며, 악하고 불의한 현시대에서의 견딤을 나타낸다(로마 12,2; 1코린 3,7).
인내는 선행을 만들어 내며(로마 2,7), 시련을 통해 믿음이 강해지고 온전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내는 참고 견디어내며 기다리는 능력이다. 그것은 일상에서의 지루함과 단조로움을 참는 능력이다. 인내하는 사람은 감정에 따라 반사적으로 행동하거나 즉각적인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람이다. 그는 항상 마음속에 하느님 뜻에 맞는 목적을 간직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처리해나가는 사람이다. 인내의 열매는 일이 잘 될 때보다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맺어진다.
인내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끊임없는 배반 앞에서도 사랑으로 기다리고 받아주는 하느님의 마음이다. 인내란 내 사고의 틀에 다른 사람을 끼워 맞추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인내란 일부가 아닌 약점과 결점까지도 포함한 전부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내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이상의 것이다. 곧 그리스도처럼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면서,그 무엇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여 대신 속죄할 마음까지 갖는 것이다. 인내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춰 살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인내란 '하느님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신앙인은 모든 판단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며 그 어떤 불편 가운데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누구 앞에서든,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 어떠한 아픔 중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를 외치며 살아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거룩함이요, 순례자의 태도이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사람들과 친척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으시고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6,6)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인생길도 예수님처럼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하더라도 침묵 중에 인내하며 걷는 나자렛에서 갈릴래아를 향한 사랑의 순례임을 잊지 않도록 하자. 오늘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굳게 믿으며 매순간을 기적으로 체험하는 순례의 길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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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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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지켜내는 삶
<2025.2.5> 아침을 여는 묵상 (수 23:1~16절)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지켜내는 삶❞
❚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지속적으로 누리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까워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 실천해야 하는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심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1~5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변의 모든 적들을 물리치게 하시고 ‘...쉬게...’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하여 대적을 물리치고 가나안의 모든 지경이 확보되어 각 지파의 기업 분배가 완료된 상태의 안식입니다(1절). 자신의 마지막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노년기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을 주신 지 오랜 후에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2절).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가나안 땅에서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지를 상기시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편이 되어 주셔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다는 말로 압축합니다(3절). 또한 요단 강에서부터 해가 지는 쪽인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아직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정복한 모든 나라를 제비뽑기 방식을 통해 기업으로 분배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합니다(4절). 아울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아직 정복하지 못한 원주민들을 쫓아내고서 이미 약속하신 대로 장차 그들의 땅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을 확신시킵니다(5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에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하신 약속을 잊지 않고 성취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언제나 의지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언제나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던 하나님이 지금은 우리와 동행하며 싸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이 축복은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살아갈 때에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가볍게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싸우신 하나님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지켜내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고 가까이 해야 합니다(6~10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다 지켜 행할 것이고,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6절). 또한 아직 남아 있는 원주민들과 사귀지 말 것이고,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을 부르거나 맹세하지 말 것이고,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7절)고 지시합니다. 이제까지 크고 강한 나라들을 그들 앞에서 몰아내심으로써 그들을 당할 사람이 없게 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 그들도 지금까지 해 온 대로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하라고 명합니다(8~9절). 그럴 때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싸우시므로 한 사람이 원수 천 명을 쫓게 될 것입니다(10절).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고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는 삶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까이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굳게 붙잡아 그분과 연결되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즉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처럼 떨어지지 말고 붙어 있으라는 의미입니다(요 15:4~5). 이처럼 하나님과 말씀을 지켜 순종하고,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삶은 혼자서 천 명을 내쫓는 것과 같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이 한 장은 얇아서 쉽게 찢어질 수 있으나, 그 종이가 철판에 붙어 있으면 전혀 찢어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 개개인은 연약하지만 주님과 함께할 때 강한 힘을 발휘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월은 흐르고 상황이 바뀌어도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조심하고 경계를 해야 합니다(11~16절).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을 향하여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11절)고 명령합니다. 즉 온 마음과 영혼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여 그와 함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방 민족의 유혹에 빠지면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해 주시지 않을 것이며, 결국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12~13절). 그리고 여호수아는 자신이 온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갈 것임을 밝히면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모든 선한 말씀’이 이제껏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 이루어졌음을 상기시킵니다(14절). 그러면서 여호와께 불순종하고 그의 뜻을 거역한다면 불길한 저주의 말씀이 틀림없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그들이 멸절하기까지 벌을 받을 것(15절)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사실을 잊지 않도록 여호수아는 신신당부했습니다(16절).
우리의 인생에 큰 어려움이 없을 때, 절박한 기도 제목이 없을 때 우리는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력 없이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도록 우리는 말씀을 통해 스스로를 잘 살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지 않은지를 늘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게 되면 유혹에 쉽게 흔들려 시험을 이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보다 가까이하고 의존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을 늘 염두해 두고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단호하게 끊어 내어 버려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골라서 듣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신앙이며, 견고한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과 저주에 대한 말씀 모두를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말씀만 기억하고 저주와 경고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건강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조심하고 경계하여 가까이해야 할 대상과 멀리해야 할 대상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지켜내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전하고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므로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23:1~1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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