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루소(1844-1910_
프랑스 화가로서 세관원 루소라고도 불린다.
프랑스 북부의 작은 고을에서 양철공을 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다닐 때는 음악으로 상을 탄 일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 아주 평범한 아이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활약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5년간의 군생활을 청산하고 제대를 하여 집달리의 서기로 어머니를 도우면서 살았다. 24세 때 10년 년하의 크레망스와 결혼을 하였다. 처갓집에서 세관의 말단 관리로 추전하여 25년간을 말단 서기로 생활하였다.
49세 때에 그림을 그리겠다면서 세관에서 자진하여 퇴직을 하였다. 한 달에 50프랑으로 생활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어서 음악, 그림 아르바이트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10년 년하의 크레망스와 사이에 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5명은 어릴 때 죽어므로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고, 가정 생활에 불행이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크레망스도 34세의 나이로 1888년을 죽자 루소는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 10년간을 크레망스를 그리워하면서 홀애비로 살았다. 55세 때 조세핀과 재혼하였으나 결혼 4년 만에 조세핀만저 죽자 다시 홀애비가 되었다.
만년에는 55세의 한 여인에게 열렬하게 사랑을 고백하였으나 냉정하게 거절하였다. 비오는 날을 그 여인을 만나러 갔으나 보기좋게 거절을 당하고는 비를 흠뻑 맞으면 돌아왔다. 그날 밤에 감기에 걸려서 그길로 이 세상을 떠나갔다고 한다. 66세 때였다.
1886년에 그림 2점이 살롱 드 레푸세 에 전시되었다. 이때 화가들 중에는 피사로가 처음으로 루소의 그림에 좋은 평을 해주었다. 이 해에 시냐크 등의 소개로 독립미술가 협회에 들어가서 죽을 때까지 살롱 데 인데팡당전에 출품했다. 1905년부터는 상롱 도 톤느 전에도 참가했다.
1890년대에는 쇠라, 피사로, 고갱, 르동, 등과 교류했다. 고향 리발 출신의 알프레드 자리를 만났다. 자리의 소개로 레미 드 구로몽과도 친하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전환기를 넘어설 때도 그가 추구한 나이브 아트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1891년에 그가 그린 정글 그림이 처음으로 젊은 화가 펠릭스 발로통의 긍정적인 평을 받았다.
루소의 그림에는 어린이 그림처럼 유치하다. 그러나 환상이 넘쳐난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인간미도 티없이 맑고, 깨끗하였다고 한다. 그의 성격 탓에 주변에는 문인, 화가들의 친구가 많았다. 상징파 문인들이 발간하는 잡지에 삽화를 맡으면서 그의 이름이 화단에 조금씩 알려졌다.
죽기 2년 전에 피카소가 그의 그림을 5프랑에 사서 자기의 방에 걸어놓고 친구들을 모아서 루소에게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 (세탁선에서, 세탁선에 화가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때가 루소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하였다.
오늘에 와서 그의 그림을 평하기를 환상이 넘치면서 기하학적인 단순한 구조로 그리므로 입체파의 선구적인 그림이라고 한다.
그의 그림은 전위적인 화가들과 선구적인 예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아마추어 출신의 화가가 지금까지 그려진 그림과는 전혀 다른 낯선 형태의 그림을 알아주느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욱이 화상들은 루소를 경멸하고 조롱하였다고 한다.
그가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그림을 그렸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루소의 회화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그 시대의 시대 감각과 과녁을 맞춘 위대한 환상의 화산이고, 그의 발언은 고향을 찾는 실향민들의 전설적인 외침이며, 그의 표현 양식은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처럼 이미지의 밀림이다.”
루소의 그림을 처음 대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느낌은 ‘아마추어 같다’라고 한다.
그림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이 꼼꼼하게 화면을 메꾸어 나가면서 그려 놓은 그림같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라보고 있으면 아마추어처럼 서투르고, 소박함에서 오히려 기품과 신비로운 영적 세계가 흐른다고 한다. 만년에 그린 그림들에는 환상의 세계로 이끄는 감동이 넘쳐난다고 한다.
19세기를 마감하고 20세기로 넘어가는 시대를 산 루소는 시대의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 서양의 가치관이 뒤바뀌면서 소용돌이 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덕택에 그의 이름이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고전적인 그림만 판을 치던 시대에 살았더라면 루소의 이름이 과연 살아남았을까? 치졸하고, 어린이스럽고, 독창적인 양식을 일부러 창출하기 위해서 그린 것은 아니지만 회화사에서 루소의 양식은 전에도, 이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사실주의적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현실의 물상과는 전혀 같지 않다. 아프리카의 열대림(이 그림은 루소의 대표적인 환상이 표출된다고 한다.) 그림을 식물 전문가에게 보여주었더니 아프리카에는 이런 식물은 없다고 하였다.
루소처럼 아마추어 화가들이 그린 일군의 그림을 ‘소박파’ 그림이라고 한다.
아마추어 출신 화가 중에는 고호도 있고, 고갱도 있다. 이들이 20세기 미술의 문을 연 선구자였음을 생각하면----. 루소도 아마추어로 남으려 하지 않고 프로로 진출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은 외롭고, 가난하게 쓸쓸한 생을 마감하였다.
죽고 나서야 그의 꿈은 이루어졌지만
<* 나이브 아트 = 소박파 미술>
앙리 루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이브 아트를 알아야 한다. 전통적인 기법과 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미술가들이 제작한 작품을 말한다. 처음에는 냉대를 받았으나 서투르고, 소박한 특징이 오히려 장점으로 부각되었다. 나이브 아트 화가들은 자기끼리도 교류를 않았고, 전통 화가들과도 격리되어서 혼자서 고독하게 그림을 그렸다. 이러므로 나이브 아트라고 하여 공통적인 특징은 거의 없다. 그림의 매체도 다양했고, 그리는 방식도 다양했다. 르네상스 때 확립한 전통적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심리적인 원근법을 사용했다. 인체의 비례라든지, 사람과 사람의 비례 관계 등을 화가의 심리적인 관심에 따라서 멋대로 그렸다.
대표적인 화가 앙리 루소를 보면 고전적인 특성으로, 즉 그들 자신은 대체로 인식하지 못했던 작품 속의 특성 때문에 칭송 받는다. 굳이 공통된 특성을 지적한다면 어리이나 정신병자의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회화적 구성력을 갖춘 것이다.
루소의 그림은 나이브 아트 특유의 극도로 섬세한 묘사, 솔직한 시각과 신선한 발상 등이 돋보인다. 루소는 대표적인 나이브 화가로 20세기의 뛰어난 화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루소의 그림은 다양한 주제를 특징으로 한다. 초상화, 일상의 생활, 파리와 피라 근교의 풍경, 군대와 운동 경기, 이국적인 풍경, 알레고리(우의적 이야기)적, 상징적인 장면과 꽃으로 분류할 수 있다.
1907년에는 자신의 어머니를 위하여 ‘the snake charmer'를 그렸다.
루소가 시대의 총아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906-14년에, 파리 전위 미술계에서 나이브 아트를 열렬히 찬미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파리의 아방가르드 작가와 들로네, 불라맹코,피카소 주변의 미술가들이 나이브 아트의 찬미가였다.
그가 죽고 난 후에 앙데팡당 전에서는 그의 회고전을 준비했다. 그의 나이브 아트는 계속하여 인기를 누렸다. 1910년에는 뉴욕에서도 기획전을 열어 주었다.
그는 66세가 되는 1910년에 패혈증으로 죽었다. 병원 기록에는 알콜 중독이라는 기록도 있었ㄷ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