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여행] 전설의 춤꾼 남원의 명무 조갑녀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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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살풀이춤 조갑녀의 명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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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안숙선 관에서 나와 바로 옆에있는 주갑녀 명무관으로 향한다. 살풀이춤의 대가 조갑녀!.
남원이 낳은 명무 조갑녀 살풀이 춤을 아는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생각보다는 많으리라 생각은 되
지만 그러나 자세하게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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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녀의 살풀이 춤은 한국을 대표하는 춤으로 남원 승무 등의 수준 높은 춤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유랑자는 조명무에 대해서 언론이나 TV등을 통해서 몇 번은 보았던 것 같다. 지금은 아쉽게도 고인
이 되어 버렸지만 당시에는 그냥 다분히 수건없이 춤을추는 여성으로만 간주했던 것 같아 많은 아쉬
움이 남는다. 이게 다~ 유랑자의 무식함의 일부 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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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남원 시민들중 남원권번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그것또한 궁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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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등한시 하고 지나처 버렸던 과거의 일들을 생각 하면서 유랑자는 관심있는 것처럼 행동으로
옮겨본다. 조 명무님은 본시 민 살풀이 춤으로 유명한 분인데, 민 살풀이춤’이란 1980년대 명무전에
서 수건을 들지 않은 명인들의 살풀이춤을 보고 무늬없는‘민’자를 붙여 부르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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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명무의 살풀이춤은 무대 중앙에 돗자리를 하나 깔고 그 공간 위에서 예도와 법도를 지키며 추는
춤으로 어슷하게 딛고 선 비정비팔(非丁非八)로 즉 활을 쏠 때 발을 벌리는 자세로, ‘丁’ 자도 ‘八’ 자도
아닌 모양으로 벌려 서는 자세를 말한다, 발디딤은 정지된 듯 무겁게 절제된 몸짓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이를테면 고고(孤高)하고도 고상(高尙)한 양반춤으로도 불리운다. 본시 한량춤 에서의 양반춤
이라는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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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풀이 춤의 명인 조갑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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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한량(閑良) 춤이란 남사당패의 다른 말인 무동패가 추었던 것인데. 1910년 전후 남사당패가 흩
어지면서 넓은 잔디밭이나 마당을 이용해 추었다. 한량·별감·승려·기생 등으로 분장하고 양반사회를
풍자하며 한바탕 노는 놀이극 같은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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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정갈한 조선조 양반계 호걸들의 모습을 춤으로 재현한 것이다. 갓, 망건, 도포 차림에 손
에는 장죽 과 합죽선을 든 의젓한 차림이 더 없이 깨끗하며, 춤사위는 꾸밈이 없고 담백하여 마치 조
선 백자와 같이 청초한 맛을 풍긴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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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소매를 걷어 붙이고 고담준론(高談峻論)에 열을 올리며 천하를 눈 아래로 보는 의기가 넘치고
진퇴와 선회에 절도가 엄연하고 섬세한 선율 하나까지도 절제와 고귀함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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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춤은 춤의 절도가 분명하고 점잖으며 양반의 풍모를 잘 나타내는 춤이다. 독무 또는 군무로도 적
당하며, 다양한 표현성과 동적인 사위가 충만한 품격을 갖춘 대표적인 남성 춤으로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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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고 조갑녀 명인은 1923년 남원시 금동에서 다섯 자매중 맏따로 태어났다. 부친은 기생조합인
남원 권번(券番)의 선생으로 유명했다. 또한 고모인 조기화도 남원권번의 제일가는 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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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조갑녀 명무는 예기의 DNA 를 이어받은 셈이다. 거기에다가 1929년 경 궁중에서 춤을 췄던 이장
선 명인으로부터 ‘승무'와 ‘검무’를 전수 받았으니. 끼에다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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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나이든 예기들의 입에서 입으로 떠돌던 임금님앞에서 춤을 추었던 이장선(1862-1939) 춤의 마
지막뿌리가 조갑녀 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갑녀류의 대표춤인 살풀이는 우리춤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했다고 평가받아 2016년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전승보존가치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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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조갑녀는 우리시대 가장 깊이 숨은 전설의 명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몸속에 춤이 들어 있다"
던 조갑녀 명무는 제1회 춘향제 때 9살의 예기(藝妓)로 춤을 춘 이후 타고난 춤꾼이라는 소리를 들으
며 남원에 신동 명무가 났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매년 화무, 승무, 살풀이를 추면서 역시
‘춤 하면 조갑녀’라는 말을 들으며 전설적인 인물로 대중에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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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열아홉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을 돌보기 위해 전북에서 세번째 가는 부자 정종식(한성물
산(주)사장)의 부인으로, 12명의 어머니로 돌아갔다. 그동안 가족들에게 행여 춤이 누가 될까봐, 춤
을 그만 둔 뒤로는 머리와 가슴으로 춤을 추었다던 그녀. 이걸 숨기고 사느라 지독한 두통에 시달렸다
던 조명무. 는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안타까운 춤의 열정과 환희를 어떻게 참아 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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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헤일 수 없는 수 많은 날들을 조 명무는 춤을 추고 싶어서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이렇게
일상의 여염집 여인으로 돌아간 후 수십년간 활동을 접고 자신을 숨기고 살던 그녀는 1935년 승사교
완공식과 1971년 광한루 완월정 낙상식 공연 등에 출연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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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1985년 정범태의 『한국의 명무』에서 존재확인을 한 이후 간헐적으로 활동을 하며 그녀의 춤
을 대중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국립민속국악원 <명무 조갑녀 춤>, <춤, 조갑녀>, 서울 페스티벌 <천
년만세>, 국립국악원 <춤>, <장사익 소리판> 등에서 공연은 그녀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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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조갑녀류 승무는 다른 승무 와 조금은 다르게 종교적이거나 심오한 진리도 내재하고 있지만
타령장단과 흥겨운 서사구조의 구성이 특징적 요소를 지녔다. 재미있는것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춤
이 된다."던, 그녀, '춤 하면 조갑녀'라 했다던 남원 사람들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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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민 살풀이춤은 살풀이 춤이지만 수건 없이 한다하여 민 살풀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서 보듯, 흔
히 말하는 손춤의 대표적인 춤이다. 게다가 그 동작이나 공간 활용이 적어 보는이들도 긴장감 속에서
춤에 집중하여 긴 호흡을 갖게 하는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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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 저러한 이유로 흔히 이춤을 할머니춤이라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동작이 적은 데다가 내공이
있은 연유에 할 수 있는 춤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도 그럴것이 대중은 가장 잘 추었던 조갑녀의
춤을 말년에 보았기에 그리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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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살풀이춤의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였다고 평가를 받았고 ‘춤 하면 조갑녀’라고 불리던 고 조갑녀
명인은 2015년 93세로 운명을 달리한다. 현재 ‘조갑녀 살풀이 명무관’에는 고 조갑녀 명인이 생전에
사용한 유품과 공연사진, 영상, 관련 도서, 보도자료 등 330여점의 기증품과 수집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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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 와서는 그녀의 딸인 정명희 교수가 이끄는 조갑녀 전통춤보존회는 지지난해부터 남원시와
함께 조갑녀 명무의 우리 춤을 보존·계승하고 저변확대를 위해 기획공연 및 공개전수 등 국내 곳곳에
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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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 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세계무대에도 나섰다. 프랑스와 일본의 공연 요청으로 20
19년 5월부터 세계무대에서 전설의 춤꾼 조갑녀 춤을 선보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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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조 명무는 비록 고인이 되었지만 그녀의 DNA를 다시 이어받은 그녀의 딸이 그 뒤를 잇고 있으
니 그녀의 명성 즉 전설의 명무 조갑녀는 오래도록 국민들의 기억속에 또한 남원의 자랑으로 남고도
이어 갈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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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무관 마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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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b2345/9toB/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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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광한북로 20
(지번)전북 남원시 쌍교동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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