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05
10월9일[연중 제27주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인천교구 오세찬 스테파노(서운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복음 선포에 매진했던 바오로 사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바오로 사도의 회개 이후의 삶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요즘 미사 중 봉독되고 있는 갈라티아서는 아주 좋은 참고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서를 집필할 당시 갈라티아 지방에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유랑 선교사들이 찾아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새 신자들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너무 강하게 요청하다 보니, 갈등과 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선조들에게 상투를 자르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비슷한 경우일 것입니다. 당시 어떤 대쪽같은 양반은 상투를 자르기 전 내 목부터 자르라고 외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갈라티아 공동체 사람들은 코린토 교회 못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윤리 도덕적 타락, 우상 숭배나 미신 행위 등 과거의 악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강조하며, 복음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기 위해 갈라티아서를 집필한 것입니다. 이 서한을 통해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꼐서 자신에게 큰 사명을 하나 주셨는데, 그것은 이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할례 문제로 하도 시끄럽다 보니, 바오로 사도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지며, 유다인이 아닌 이민족 사람들에게는 할례가 의무가 아닙니다.”
갈라티아서를 통해 우리는 초대 이방인들을 위한 최고 목자로서 자리매김하기까지 바오로 사도가 겪었던 숱한 고초와 갈등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회심 이전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젊고 똑똑한 청년 유다인 바오로에게 걸었던 기대가 상당했습니다. 유다교 미래를 이끌 든든한 인재로 일찌감치 낙점했었겠죠.
그런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낙마를 하고, 실명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교로 극적인 회개를 하게 되는데, 그로 인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실망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당사자 바오로는? 특별한 방법으로 주님의 사도가 된 것에 감지덕지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다인들로부터는 이미 배신자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적극적이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가?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장 앞장 서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구속시키는데 선수였던 그가 하루 아침에 그리스도교인이 되니, 의아한 시선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혹시 저게 일부러 저러는 것 아닐까?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섬멸하기 위한 이중 작전을 쓰고 있는 것을 아닐까?’
그런 결코 만만치 않은 양측 분위기를 감지한 바오로 사도였기에, 더 백방으로, 더 헌신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민폐를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그렇게 십년 이상 이런 저런 박해와 오해 속에 자신이 만나고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던 바오로 사도는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리스도교 공동체 지도자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간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해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교계 지도자들에게 공인을 받습니다.
사정이 좋든 나쁘든, 주변 분위기가 내게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온몸으로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복음 선포에 매진했던 바오로 사도의 사목적 열정과 믿음에 큰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j3vNhMIZ4M
++++++++++++++++++
<세일즈 하듯 기도하라>
한 수도자가 산에 올랐다가 그만 길을 잃었는데, 사람이 살지 않을 듯한 깊은 산중에서 다행히 인가를 찾아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주인이 하는 기도를 듣고, 수도승은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졌습니다.
“신이시여, 어제도 저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등이 가렵거나 허리가 아프시진 않은가요. 그럼 제가 등도 긁어드리고 허리도 만져드릴 수 있을 텐데. 혼자 하기는 힘든 일이잖아요. 혹은 발을 씻겨드리면 참 좋을 테고요….”
수도승은 그만 더 참지 못하고 기도를 멈추게 했습니다. “이봐요, 잠깐. 날 살려준 건 감사하지만, 하느님께서 등이 가렵거나 허리가 아프다고요? 대체 어떻게 그런 무례한 언사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기도서를 주며 기도하는 자세와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이튿날 수도승은 그 집을 떠나왔습니다. 다행히 길을 찾아든 수도승이 산을 거의 내려온 찰나,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대는 이제, 내게서 가장 가까운 이마저도 멀어지게 만들었구나!”
기도는 하느님께 무언가 청하고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주님께서 주시려던 은총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기도는 마치 세일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넥타이를 사려고 넥타이 판매대로 갔는데 점원이 와서는 “무얼 찾으세요?”라고 물으면 어떨까요? 당연히 넥타이에 관심이 있으니 그리로 오지 않았겠습니까? 벌써 그 사람은 ‘이 가게는 손님에겐 관심이 없구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여러 넥타이를 들었다 놓았는데 파란색 넥타이를 가장 오래 집고 있었다면 뭐라 해야 할까요? “파란색의 다른 상품들을 제가 찾아볼까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노란색 넥타이를 손에 감으며 예쁘죠?”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파란색을 원해요.”라고 할 때 “우리는 그런 재고가 없고, 요즘 누가 파란색 넥타이를 합니까? 그건 유행이 지났어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상품을 사러 온 사람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냥 나가려고 할 때 관심도 없는데 쓸데없이 멜빵을 보여주며 “이건 관심 없으세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그 가게는 절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손님은 가게 점원이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바로 판매로 돈을 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주장하면 사려고 하는 사람은 기분이 나쁩니다. 사려는 사람도 무언가 얻는 게 있어야 합니다. 바로 영광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이 아버지라 불리고 당신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당신 나라가 임하고 당신 뜻이 이루어지며 당신이 매일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고 당신 때문에 이웃을 용서할 수 있으며 당신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얼마 전에는 반려견을 계속 데려오며 병이 낫게 안수해 달라고 청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안수하고 있는데 개에게 또 안수하려니 좀 그랬습니다. 물론 반려견에 너무 의지하고 있기에 강아지가 나으면 좋은 일이라 몇 번은 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매일 그러는 건 좀 그래서 이제 마지막이라고 했더니, “개가 나으면 50만 원 드리려고 했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개에게 안수하여 돈 버는 사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어떻게 은총을 얻어낼 수 있을까요? 주님의 기도를 의미를 음미하며 정성껏 바치면 우리의 자세가 주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게 되어서 많은 은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미국 시카코에서 태어난 ‘워너 솔맨’(Warner Sallman: 1892–1968)은 미국이 자랑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유명한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담긴 그의 그림책은 1940년도에 500만 부 이상이 인쇄되었고,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있었는데 1917년 결혼하고 얼마 안 된 젊은 나이에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당신은 임파선 결핵입니다.”라고 진단하고 “당신은 길어야 석 달 살 것입니다.”라고 통지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솔맨의 마음은 절망적으로 되었습니다. 유명한 가수였던 그의 아내는 그때 임신 중이었으므로, 솔맨은 아내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괴로웠습니다. 그가 몹시 괴로워하며 매일같이 절망에 빠져 신음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그를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여보! 3개월밖에 못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 주셨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얼맙니까? 천금 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봅시다. 3개월이나 되는 기간을 살게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솔맨은 아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더 이상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지 않고, 아내의 말대로 남은 3개월 동안 오직 감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아주 작은 일부터 감사를 시작하면서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는데 그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개월이 지났는데도 몸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이 더 건강해져서 병원에 가서 다시 진단해 보았더니, 임파선 결핵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입니다.
기도는 무언가를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청하는데 나의 것만을 청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의 청을 들어주면 그분이 무엇이 좋은 건지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청을 들어주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청을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강요하듯 물건을 파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전문 세일즈맨처럼 그 물건을 사면 손님에게 무엇이 좋은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장사가 저절로 잘 될 것입니다. 은총도 그렇게 끊임없이 받을 수 있게 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서를 읽지 않았던 분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도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거인이었고, 싸움을 잘했습니다. 다윗은 소년이었고, 내세울 무기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골리앗을 보고 겁에 질렸습니다. 소년 다윗은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이를 통해서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성서를 읽은 사람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다윗과 골리앗의 뒷이야기는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8형제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의 형 3명은 블레셋과의 싸움을 위해서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다윗에게 형들에게 줄 음식을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형들에게 줄 빵과 치즈를 들고 블레셋과 싸우는 현장으로 갔습니다. 만일 다윗이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고, 빵과 치즈를 가져가라는 심부름을 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전설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룻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시지 않고, 고향으로 갔었다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정성껏 모셨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룻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가문을 정해 주셨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때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지 않았다면 ‘십자가의 길’ 기도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으로 예수님께서는 3번 넘어지시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단 한 번 우연히 길을 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을 기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 신학교에는 서울 대교구, 대전교구, 인천교구, 수원교구, 춘천교구, 원주교구 신학생들이 같이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가 신학교에 온 형들도 있었고, 저처럼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에 온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신 것처럼 질그릇 같던 우리들을 하느님께서는 사제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가 신학교에 온 형들은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친구들도 이제 5년 정도 후면 은퇴할 시기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까지도 불러주셔서 사제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나의 능력보다 과분한 일이 주어졌다면 하느님의 이끄심을 청하며 겸손하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나의 능력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주어졌다면 그 또한 감사하면서 기쁘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도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만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만 바라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고 남을, 양식을 쌓아 두려 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죄지을 기회를 애써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도 않으면서.”
오늘 하루 ‘주님의 기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 가르침대로 살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1-4: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2절)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과 같게 하신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분께 맞갖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 우리의 간청을 받아주실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2절),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과 뜻 안에서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 기도는 그분의 이름이 영예롭고 거룩한 것임을 알고 고백하는 마음과 믿음이 자신에게 생기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이 기도가 생명의 근원이며 축복의 원천이다. 구원받아 높이 들어 올려지는 데 더 좋은 기도는 없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절) 아버지의 나라는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마태 25,34)이다. 이것이 우리의 청원이다. 그 나라는 만일 우리가 왼쪽에 서게 되면 우리는 그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우리도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3절)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빵만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또한, 영적인 양식으로 단 하루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양식을 청하는 것은 그분 안에 살고 그분과 하나 되기를 청하는 것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4절) 우리는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빌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든지 용서해야 한다. 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마지막으로 유혹자에게 끌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즉 죄만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고,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셨는데, 우리는 지금도 기도하는 법을 묻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기도를 아직 다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진심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친밀함이 있어야 하고, 또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이를 형제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려면, 먼저 내 안에서부터 그 나라를 가로막는 모든 요소를 없애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보다 내가 바라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은, 때로 우리에게 작은 겟세마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1,2)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그 나라가 오도록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할 때에도 아버지의 나라를 바란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바란다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저에게”가 아니라) “저희에게”(11,3) 양식을 주시기를 청한다면 오늘 양식이 없는 이에게 양식을 마련하여 주어야 하고. 우리에게 하루하루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 아버지이심을 믿고 내일을 맡겨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기를 바란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11,4)를 용서하여야 합니다. 우리 형제의 죄는 하느님께만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용서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자신이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싸워야 합니다. 날마다 바치다 보니 쉽게 느껴지는 이 기도는 아직도 배워야 할 기도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도는 ‘말’이 아니라 ‘마음’과 ‘삶’으로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1-4)
1)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기도’이고,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우리가 실행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위한 일’은, 사실은 ‘우리를(나를) 위한 일’입니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나 자신이 구원받으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인데, 그것은 나를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일’이 됩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말에서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은, ‘기도하는 방법’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기도의 예문’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하는 방법에 관한 지침”이기도 하고, “기도문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2) ‘기도’는 ‘주님의 뜻’을 ‘내 뜻’에 맞추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추는 일입니다. 주시지 않을 것을 달라고 떼쓰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뒤의 11절-12절에,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뜻에 따라 풀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생선을 주려고 하는데 아들이 생선은 싫다고 하면서 뱀을 달라고 하면, 어느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서 뱀을 주겠느냐?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걀을 주려고 하는데, 아들이 달걀은 싫다고 하면서 전갈을 달라고 하면, 어느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서 전갈을 주겠느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으로 보여도 실제로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빈말’, 또 ‘생떼’를 부리는 ‘고집’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나에게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청하는데, 그것이 정말로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할 일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묻는 ‘기도’입니다. 무엇을 청해야 할지 모르니까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말장난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3) ‘주님의 기도’에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가 들어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난한 서민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힘들어 하고, 고민하는 것을 업신여기거나 ‘폄하’하면 안 됩니다. 아직도 ‘일용할’ 양식 자체가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부귀영화를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오늘’ 생존하기 위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주님의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내일의 양식’까지 청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입술로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기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세속에서의 출세와 성공을 바라고 있다면, 또 남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 기도’이고, ‘빈말’입니다.
4) ‘용서’의 경우,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해서, 용서를 하고 싶어도 용서가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원인과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사람을 너무 미워해서 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용서를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경우에, ‘주님의 기도’는 ‘용서할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니까 주님께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용서할 마음이 아예 없는 경우에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거짓 기도’를 바치는 것이고, 그런 경우에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수록 죄만 자꾸 늘어나게 됩니다.
5) ‘기도’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신앙인이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기도를 잘해야 합니다. 말을 잘한다고 기도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또 오래 바친다고 기도를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양’이 아니라 ‘정성’입니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바치는 것이고, ‘삶’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기도를 정말 잘하는데,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또 ‘삶’이 신앙인답지 않다면, 그것은 다음 경고 말씀에 해당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내 삶이 곧 기도다.”라고 자기 마음대로 우기면서,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백 퍼센트 위선자입니다.>
=====================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월요일부터 우리는 제1독서에서 갈라티아서를 읽고 있습니다. 이 서간의 서두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고정된 양식(1코린 1,4-9 참조)을 생략한 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꽤 조급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1,6).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갈라티아 지역에 공동체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한 이는 바오로였지만 그와 다른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 곧 할례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신자들에게 혼란을 주었던 듯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예수님의 직제자가 아닌 바오로의 사도직에 의문을 제기하였던 모양입니다. 그의 권위가 열두 사도에 미치지 못한다거나 또는 그들에게 종속된다고 여기며 바오로를 폄하한 것입니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야말로 바오로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갈라 2,16 참조) 바오로는 이 복음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1,11)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2), 곧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자 먼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여 변론합니다.(1─2장 참조)
바로 어제와 오늘의 독서 말씀이지요.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회심 때 하느님께 직접 사도직을 받고 이를 한참 수행한 다음에야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을 만났다고 전합니다. 이는 자신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느님께 직접 받은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도직의 정당성은 바오로가 전한 복음의 진실성과도 바로 연결됩니다.
월등히 좋은 ‘새것’이 왔음에도 여전히 ‘옛것’에 미련을 두며 그 새로움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에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익숙한 것에만 머무르며 편히 살려는 신앙인이 아니라, 깨어 기도하며 늘 새롭게 자신을 성화하는 신앙인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
[부산교구 윤명기 요한칸시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른바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이 기도의 본질적인 내용에 관심을 집중해 보도록 합시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시작함으로써 하느님의 부성(父性)의 표지 아래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기도에 의해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이 당신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아빠, 아버지'라는 아람어식 표현 그대로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인 것입니다. '아빠'라고 하는 이 표현은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다른 여러 표현들과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가장 원초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우리는 서로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셨고 우리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신성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으로서는 우리의 형제가 되셔서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양자, 양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하느님이시며 우리의 하느님이신 분을 같은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는 단순히 절대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 즉 부자(父子) 관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좋은 부모는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자녀가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이 자녀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러합니다. 그것은 자유롭게 주어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로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깊이 사랑하십니다. 자녀들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부모는 자녀를 위해 온갖 희생과 수고를 기꺼이 아끼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인간의 부모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만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처럼 좋으신 아버지께 바치는 자녀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즉 어린아이의 태도로서 아버지를 완전히 신뢰하고 의탁하고 순종하며 사랑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우리에게 주시면서 이것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고자하는 진실된 의미를 가지고 기도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를 바치도록 해야겠습니다.
또한 이 기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내용은 예수께서 무엇보다도 먼저 성부께 바쳐드려야 할 두 가지 기도내용에 관해 가르쳐주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즉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가 임하심, 그리고 영신적,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면서 땅의 필요, 즉 물질적 필요도 구해야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구하지 않은 채 땅의 필요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땅의 필요, 즉 물질적 필요도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와 영적 사정을 위해 기도하고 은총을 청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내용과 그 지향들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혹시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물질적 필요만을 간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꾸준히 바쳐야 할 기도의 지향들을 생각해 봅시다. 교회를 위해서, 우리 본당공동체를 위해서,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해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 성직자와 수도자를 위해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젊은 이들을 위해서, 연옥영혼들을 위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등등 세상은 우리의 기도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는 사람들의 죄로 인해 너무 마음이 상하신 하느님을 위로해 드리고 그 죄들을 보속하는 것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죄를 범했을 때는 정의의 차원에서 반드시 배상(보속)을 필요로 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만 많고 보속하는 이가 적기 때문에 많은 불행들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1917년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3명의 어린이들에게 지옥을 보여주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
우리는 좀 더 시야를 넓혀 우리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또 물질적 필요만을 간구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또 영신적 사정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헤아릴 길 없는 사랑에 진정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그리고 사랑이신 분이 사랑 받지 못하고 계시는 이 시대에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기도와 보속의 군대를 이룹시다. 아버지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그분을 위해 결심하며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매일 꼭 기억하도록 합시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11,1)
흔히 루카 복음은 기도의 교과서라고도 불립니다. 루카 복음에 드러난 많은 단락에서, 예수님은 밤이 되면 홀로 외딴 곳에서 홀로 늘 아버지께 기도하셨으며, 이를 바탕으로 낮 동안 여러 고을을 다니시며 하느님의 뜻을 말씀으로 행동으로 표현하고 표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삶의 이중적 운동은 바로 기도와 사랑이었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끊임없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가 하느님 사랑의 들숨이었다면, 이웃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날숨과 같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예수님의 존재와 삶 자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11,1)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늘 기도하신 스승의 모습에서 그들 또한 기도의 필요성을 느꼈고 또한 예전의 스승이었던 요한에게서 기도의 중요성을 들었기에,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11,1)라고 청합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참된 기도를 배울 수 있도록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그 어떤 사람’이 참으로 고맙게 생각됩니다. 그렇게 느끼시지 않나요. 좋은 질문, 필요한 질문을 던진 ‘그 어떤 사람’의 간절한 요구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 아빠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 올바른 기도를 배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하라, 고 말씀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영광과 찬미의 기도를 바치라기보다, 오히려 역경과 시련에 직면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점이 특이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44), “그 일(재난)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마르 13,18),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루 22,40) 그 까닭인즉 그런 때야말로 우리는 자기 자녀들을 악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으신, 하늘에 계신 자비로운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식해야 하는 순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7~11) 이는 곧 예수님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기도하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악의 권세를 극복할 수 없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결코 아무것도 악한 결과를 낳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관해 가르치고자 한 핵심은 바로 우리가 빌 수 있고 또 빌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을 청하는 것이며, 이 영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라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알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우리가 빌 수 있고 또 빌어야 하는 것은 필경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밖에 다른 기도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기도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유일한 기도이며 최종적인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비록 짧지만, 짧은 만큼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기에,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결국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갈망에 대한 응답이며.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입니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11,1)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으로부터 한 15년 전 일 것입니다. 수학능력 평가를 마친 본당의 고3 수험생들을 데리고 강화도로 1박2일 여행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험을 보느라 수고한 아이들에게 쉼의 시간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낮에는 강화도의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펜션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아이들이 알아서 할 일을 분담했습니다. 야채 씻고 다듬는 조, 고기 굽는 조, 밥을 하는 조 등으로 나눴습니다. 그런데 밥하는 조가 걱정되었습니다. ‘밥을 해 본 적이 있을까?’라는 걱정입니다. 아이들이 밥 조의 아이들은 못 하는 것이 없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전기밥솥인데 못하겠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기를 함께 구워 먹다가 ‘뻥’하는 큰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기밥솥의 뚜껑이 날아갔습니다. 밥을 할 줄 몰랐던 아이들은 사람이 많다고 쌀을 밥솥 맨 위까지 가득 넣은 것입니다. 주방에는 여기저기로 튄 밥알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할 것이라고 말한 아이에게 “밥 잘할 거라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저 친구들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또 잘 놀아요.”
다 잘하는 친구였습니다. 뭐든 다 잘하니까 밥도 잘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경험이 없다면 잘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언젠가 시간이 여유로워지면 그때는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가능할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진정한 경험 없이 잘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여러 예언자나 율법 교사처럼 예수님에게서 멋진 기도 방법을 배우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특별하고 화려한 기도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도 바치고 있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단순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기도는 특별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지요. 대화를 나누는데, 특별한 장소에서만 할까요? 또 특별한 시간에만 할까요? 바쁘고 여유가 없을 때는 대화하지 않나요?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 계속적인 만남의 경험이 축적되지 않는다면, 주님과의 좋은 관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 생활의 반석은 주님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너무 자주, 흔하게 바치는 기도이기에 고루하고 낡은 기도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완전한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미사여구와 성경 말씀을 덧붙여 길게 늘어놓아야 기도를 잘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그저 입으로 외우는 것으로 만족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가장 완전한 기도이면서도 깊이 있는 기도이니,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서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 기도 생활의 반석"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아버지'에게서 받는데 성령의 은총 없이는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시며 '아버지'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나 도전의 순간에 언급하셨는데,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고 느끼지 않거나 그분의 자녀라고 여기지 않아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믿음이 없거나 어휘의 나열’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 시선을 느끼게 해 줍니다. 아버지께 향하는 기도의 말은 미신에서 하는 주문처럼 소용없는 말들이 아닙니다. 나를 당신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주신 분에게 향하는 목소리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깨닫고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는 아버지가 계심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기도는 모두를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잊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친밀한 아버지로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라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하고, 후반부는 우리 서로 간의 용서와 화해를 청하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땅이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비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를 위하고, 챙겨주게 될 때 주님의 기도는 완성됩니다. 그때 하늘 아버지를 당당하게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자신이 아버지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고,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 이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사실 “참된 기도는 하느님을 친숙하게 대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지, 앵무새처럼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대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과 사랑이 통하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깊은 기도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그대에게, 그대 나에게>
루카 11,1-4 (주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나 그대에게, 그대 나에게>
나
그대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니
우리에게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납니다
나
그대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심어주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심어주니
우리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뼛속깊이 스밉니다
나
그대에게
하느님의 밥이
되어주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의 밥이
되어주니
우리에게
하느님의 밥이
날마다 소복합니다
나
그대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베풀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베푸니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더없이 가득합니다
나
그대에게
하느님이 되어주고
그대
나에게
하느님이 되어주니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늘 계십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그렇습니다.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문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들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비록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이 기도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선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합니다. 곧 성자의 반열에 들게 하고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고귀한 기도인지요? 사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
<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성자의 반열로 들어 올리시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셨습니다.
이제는 제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제가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를 이루소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생명의 빵이신 아드님을 양식으로 삼아 당신 안에서 영원히 살고,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소서.
다름 아닌 용서를 통하여 그러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 되게 하시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뭇 나라 백성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온 세상 사람들아, 주님을 찬미하라.”(시편117,1)
‘주님의 기도’는 기도중의 기도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오늘은 5대 국경일중 하나인 한글날입니다. 한글날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중 하나였던 세종대왕이 1446년 훈민정음의 편찬을 널리 선포한 날을 기념하여 한글 및 그 창제 원리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널리 알리고 한글 사랑 의식을 높이기 위한 국경일로 올해 588돌이 됩니다.
한글 역시 하느님께서 한민족을 사랑하여 세종대왕을 통해 한민족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이라 믿습니다. 한글날 노래 가사가 밝고 깊고 힘차고 아름답고 풍부하여 공부하는 마음으로 3절까지 노래를 들으며 적어 봅니다. 혹시 공휴일인 한글날 오늘 시간되면 들으며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1.“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이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
한글은 우리자랑 문화의 터전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2.“볼수록 아름다운 스물넉자는
그 속에 모든 이치 갖추어 있고
누구나 쉬 배우며 쓰기 편하니
세계의 글자중에 으뜸이도다
한글은 우리자랑 민주의 근본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3.“한 겨레 한맘으로 한데 뭉치어
힘차게 일어나는 건설의 일꾼
바른 길 환한 길로 달려나가자
희망이 앞에 있다 한글나라에
한글은 우리 자랑 생활의 무기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한글날 노래 작사자는 5대 국경일중 유일하게 위당 정인보 선생이 아닌,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지키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인 외솔 최현배 선생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 수도원의 정 영훈 아브라함 수사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은총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선물에 대한 당연한 응답은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참 좋은 선물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아마도 우리 믿는 이들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기도는 원래 우리가 바치는 마태복음의 기도보다 짧지만 핵심은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도의 필수 전제 조건은 어제 복음의 마리아와 같은 침묵의 경청의 자세입니다. 하늘보며 기도하라고 눈들면 어디나 하늘이요 기도하라고 직립인간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바로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모토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입니다. 기도는 말씀과 함께 영혼의 호흡呼吸이며 식食이며 약藥입니다. 살기 위하여, 영혼이 살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수도자만이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기도로서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나날이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인간은 인간의 정의입니다. 저는 만세칠창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만세칠창으로 하루를 마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만세칠창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가 삶의 꼴을 형성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일 것이며,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은 당신을 닮은 얼굴인지 검사할 것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사랑의 기도로 주님이신 당신을 닮은 얼굴인지 검사할 것입니다. 정말 사랑을 다해,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기도한다면 화장이나 성형은 필요없을 것입니다. 각자 고유의 내적 아름다움과 향기를 선물하는 기도의 은총이요 몸으로 그대로 표현되는 내적 아름다움과 향기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기도가, 기도의 근본이자 기초가 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루카복음은 기도의 복음이라 할 정도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 어떤 제자의 요청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대로 예수님 기도의 노하우로 사람됨의 기본이 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가난하고 겸손하고 단순한 삶의 요약같은 기도로 우리 역시 참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필수적 기도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해야, 주님의 기도를 통해 꼴잡혀져야 정체성 또렷한 주님을 닮은 참사람의 참나가 되며 이것은 죽을 때까지 평생과정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하느님은 추상적인 분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아버지라 부르며 친근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모두를 아버지께 맡겨 버리는 것은 무책임한 일입니다. 우리 역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도록,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면서 최대한 협조로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한가정, 한식구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확인하는 진리입니다. 아버지 중심의 삶이 형성되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서로는 형제가 됩니다. 수도생활을 하다보면 혈연보다 때로 깊게 느껴지는 하느님 가족으로서의 인연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 하느님을 중심에 모신 형제자매들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이런 진리를 환히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참석한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티토, 그리고 야고보 케파 베드로, 요한 사도는 물론 모든 사도들은 주님 안에서 서로 형제가 되고 아버지의 자녀들이 됨으로 하느님의 한 가정임을 보여주니 그대로 교회의 모습이요 주님의 기도가 실현된 모습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와 바오로의 역할 분담이 분명히 확인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 하느님은 공동체 일치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니 일치의 중심이며 삶의 의미이자 방향이요 궁극의 목표인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공부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공부하여 알수록 참나를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평생사랑, 평생공부의 대상이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돈맛, 세상맛에 중독되지 않고 참된 영적 삶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맛들이는 평생 기도와 말씀 공부가 필수입니다. 참으로 기도맛, 말씀맛, 하느님 맛이 날로 증대되면서 세상맛을 극복해 무욕의 초연한 자유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기본적 구체적 청원입니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루하루 날마다 일용한 양식을 청하는, 잘못한 모든 이를 용서를 청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청하는 기도입니다. 땅에서의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 청원입니다.
그러나 청원만으로는 무책임하며 부족합니다. 이 또한 우리의 전폭적 협조와 응답이 필수입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잘못한 이들에 대한 용서에, 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진인사대천명’,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모두가 하느님께 최선의 노력으로 응답하고 협조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으로 실현되는 주님의 기도요, 또 이 미사은총이 우리의 이런 실천의 각오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시편117,2)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앞에? 사람들 앞에?>
오늘 갈라티아서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복음 선포에 있어서 역할 분담하게 된 과정을 전하면서 그것은 자기들이 역할 분담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위임해 주신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베드로가 할례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나는 할례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모범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초대교회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발전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앞부분에서는 이렇게 아름답고 위대한 모범을 전하면서 뒷부분에서는 그 반대의 모습도 있었음을 바오로는 전합니다.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왔을 때 베드로가 “할례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라고 전합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봅니다. 하느님 앞에 있음과 사람들 앞에 있음.
하느님 앞에 있을 때는 당당할 수 있었는데 사람들 앞에 있게 되자 눈치 보고 비위 맞추려 하고 심지어 두려워합니다.
당연합니다. 하느님 앞에 있으면 하느님만 보기에 눈치나 비위 맞추기는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으면 사람들 눈치 보지 않을 수 없고 비위 맞추지 않을 수 없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 앞에 있으면 첫째 눈치를 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눈치는 있어야지만 눈치를 봐서는 안 됩니다.
눈치가 있다는 것은 너의 필요를 읽는 눈이 내게 있는 것이며 일종의 사랑이랄까 감각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눈치를 본다는 것은 상대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며 결코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두려움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눈치 보는 것은 비위 맞추기보다는 소극적인 것입니다. 비위 맞추기는 눈치 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입맛에 맞추는 대응을 하는 것이며 그러다가 아첨도 아부도 아양도 하게 됩니다.
그제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갈라티아 신자들을 나무라며 이렇게 심한 말을 하지요.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오늘 바오로가 비난하는 베드로는 더 초라한 모습을 보입니다.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나타나자 두려워 이방인들과의 만남을 피합니다. 이것은 지난주일 독서의 기도에서 그레고리오 교황의 사목 지침을 떠올립니다.
여기서 교황은 “목자는 침묵을 지킴으로써 분별력 있는 자가 되어야 하고, 말해 줌으로써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지침을 주면서 “목자가 바른말 하기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자기 침묵으로써 원수에게서 도망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고 일갈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 교회의 반석이요 으뜸 사도인 베드로가 우리와 비슷하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며 바오로 사도에게 지적을 따끔하게 받는 겁니다.
주님은 안 보고 풍랑을 보다가 두려움 때문에 물에 빠졌던 사도 베드로가 다시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음으로 두려움에 빠진 겁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러하니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더욱 주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의식하지 않으면!
정신 차리지 않으면!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11,2ㄴ)
<이렇게 기도하자!>
오늘 복음(루카11,1-4)은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고 있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ㄷ)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그것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대화'입니다. 하느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할 때는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기도할 때는 먼저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하느님의 것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 다음으로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18,3)
"어린이처럼 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늘 복음 안에서 보면, "어린이처럼 기도 하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어린이의 대화는 순수하고 솔직합니다. 가식이 없고 거짓이 없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가지고 대화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대화방법, 기도방법입니다.
기도(하느님과 대화)할 때 먼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청해봅시다! 그리고 하느님과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담은 솔직한 대화(기도)를 해 봅시다!
'나는 하루에 얼마나 하느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하고, 어린이처럼 대화하는가?'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루카 11, 1)
기도 하시고
기도를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모두는
기도가 필요한
기도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기도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필요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라는
영적 토대 위에
집을 지으십니다.
우리의 삶과
기도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신비 안으로 우리는
들어갑니다.
기도를 통해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 나라를
만나게됩니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하느님을 알게됩니다.
기도 없는 사랑
기도 없는 용서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는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의 길또한
기도의 길임을
배웁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